< 72, 자라나는 새싹은. >
72, 자라나는 새싹은.
검후는 충분히 존경받아 마땅했다.
그녀가 구한 사람과 지킨 사람에게 은자 한 냥씩만 받았어도 이미 만금의 거부가 되었을 터였다. 하나 그녀는 오직 꺾이지 않는 신념으로 무장한 채 외롭게 종횡강호했다. 그렇기에 불자이면서도 주산군도의 주인이 되었고, 여중제일인인 검후로 이름을 떨쳤다.
그래서 살짝 고리타분했다.
“나만 그런 거 아니었지?”
“불정은 출가하기 전부터 부담스러운 존재였어.”
“그것 보라고. 우리처럼 제 욕심만 차리는 자들에게는 엄마 같이 느껴졌다니까.”
“아! 그렇군. 이 찜찜함과 이상하게도 거절하지 못하는 관계는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었어!”
“일단 옥주를 빼고 나오니까 분위기가 다르잖아!”
“크큭, 이제야 허리띠를 풀고 놀 수 있겠군.”
청하와 악마는 검후를 안주로 삼아 화기애애한 대화를 이어갔다.
본래 두 사람은 견원지간(犬猿之間)이다.
날 때부터 최고였고, 오만함이라는 옷을 걸쳤던 남궁천운.
남궁세가를 넘어서기 위해 평생 악에 바쳤던 악재.
신마가 아니었다면 평생 마주할 일이 없었으리라.
그저 서로를 경원시하면서 살았겠지.
하나 신마의 심득은 두 사람의 격차를 없애다시피 했고, 대등한 관계가 된 후에는 서로를 향해 여지없이 이빨을 드러냈다. 그런 두 사람이 검후를 대할 때에는 한 쌍의 원앙처럼 잘 어울렸다.
‘애초에 정파보다 이쪽이 더 어울리는 자들이었던 거지.’
이훤은 양팔을 휘적거리며 저자를 지났다.
창천평에서 혈사가 마무리되었다고 해도 고작 열흘 전의 이야기였다. 하나 시전을 오가는 이들에게서는 두려움이나 좌절을 찾기 어려웠다. 남궁세가의 현판이 건재한 이상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지녔다는 의미였다.
‘역시 남궁세가는 좋은 곳이야.’
이훤은 대낮부터 술에 취한 이들이 오가는 저자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전쟁이 났다고 주루나 객잔이 문이라도 닫는다면 그것만큼 큰 손실도 없지 않은가.
최소한 취마를 자처하는 이훤 같은 이에게는 그러했다.
“대형, 방금 전의 주루는 꽤 괜찮았던 것 같은데? 어디 봐둔 곳이라도 있으쇼?”
악마는 기루를 힐끔거리며 물었다.
아무래도 어려진 것도 모자라 잘 생겨지기까지 했으니 회가 동했나 보다. 문제는 여인의 몸을 하고 있는 청하마저 기녀들을 힐끔거린다는 점이다.
“쯧! 안가는 게 아니라 못가는 거다. 너희들을 데리고 기루에 갔다가 무슨 소문이 날 줄 알고?”
“대형 말이 맞네. 다 네 탓이야.”
악마의 투덜거림에 청하가 핏대를 올렸다.
“뭐라는 거야? 생기다만 놈의 새끼가!”
“허허, 눈이 삐었나? 주변을 살펴봐라. 나만큼 생긴 사람이 어디 있기나 하느냐?”
“흥! 여자가 보는 사내의 기준은 다르단다. 꼬맹아!”
“이 새끼! 이제 저 편할 대로 성별을 바꾸네.”
이훤은 인상을 썼다.
미남과 미녀가 아옹다옹하고 있으니 오가는 이들의 시선은 더없이 부드러웠다. 하나 속에 들은 건 백 년 묵은 이무기들이 아니던가.
‘얽매이지 말자. 얽매이지 말자.’
괴마라면 응당 그래야겠지만, 이상하게도 거슬림이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이훤은 눈과 귀를 닫았다.
‘이쯤 되면 색마 녀석이 정상처럼 보이는군.’
그 사이 북적거리는 시전이 끝을 보였다.
그리고 버드나무가 줄지어 늘어진 호숫가에 우뚝 선 삼층 건물이 나타났다.
“형님! 여기요.”
탈마가 손을 흔들며 재촉했다.
“호오! 확실히 호반의 풍치가 장난 아니로구나.”
“근처에서 이곳이 가장 유명하답니다.”
“자리는 잡았고?”
이훤의 물음에 탈마는 전낭을 흔들었다.
“제일 좋은 삼층에서도 창가라고요. 미리 예약을 해놓은 자가 있다기에 힘자랑도 좀 했지요.”
역시 이 세상은 힘과 돈이다.
무력과 금력을 갖춘 자라면 황제 부럽지 않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바로 강호였다. 강자에게는 이야기 속의 천당이지만, 약자에게는 지옥이나 다름없는 세상이 아니던가.
“잘했다.”
탈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더니 좋다고 낄낄거린다.
“뭔가 제 일차 친목회같은 느낌인데요?”
도둑놈 주제에 친구 사귀는 건 또 엄청 좋아한다.
아무래도 천애고아였기에 정에 굶주린 듯했다.
“가자.”
이훤이 앞장을 섰다.
유정루(柳情樓)에 들어서는 순간 탄성이 절로 나왔다.
버드나무를 뽑은 후 땅을 다져서 만든 건물이 아니었다. 나무는 그대로 둔 채 사방에 벽을 세우고, 천장을 얹은 자연친화적인 건물이었기에 눈이 호강하는 듯했다.
“주루보다 무슨 고택 같구나.”
“이 지역 명소랍니다. 그리고······.”
탈마가 목소리를 낮췄다.
“유엽주가 또 끝내주지요.”
“호오! 그래?”
두 사람의 걸음이 빨라졌다.
점소이를 따라 삼층에 올랐고, 탁 트인 전경이 그들을 맞이했다. 잠시 후 열두 명이 앉아도 충분할 만큼 큰 탁자에 요리가 가득 놓였다.
“잔이 너무 특이하면서도 예쁘잖아.”
“버드나무 잎처럼 생겼잖아. 그럼 여기에 채워야 할 건 술이 아니라 이슬이겠군. 하하!”
이 자리를 주최한 탈마는 참석자들의 기분 좋은 감탄에 한껏 어깨를 펴고 으스댔다.
“마음껏 마셔. 오늘은 새 동생이 생긴 기념으로 내가 사지!”
탈마가 누구의 것인지 모를 전낭을 흔들자, 악마와 청하가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잠시 후 등장한 점소이를 보면서도 탄성을 흘렸다.
널따란 판자 위에 세 개의 항아리를 올려놓고 가져오는 모습은 기예나 다름 없었다. 탈마는 흔쾌히 은자 한 냥을 건넸고, 점소이는 정수리로 바닥을 쓸 것처럼 몇 번이나 인사를 한 후에야 돌아갔다.
“날씨도 좋고, 술도 좋고, 장소도 좋아.”
“그래, 기분 좋군. 오랜만에 편히 쉬는 것 같아.”
술이 몇 순배 도는 사이 담소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마음이 통하여 괴마가 되기로 했으나, 정작 서로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짧은 시간이지만, 의미 있는 시간이 이어졌다.
“그나저나 별호는 정했어?”
별호는 대부분 강호의 소문으로 결정되니 괴마의 이름은 별칭이라고 해도 무방하리라.
청하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쉬이 말을 꺼내지 못했다.
몇 번이나 채근당한 후에야 어색하게 한 마디를 흘렸다.
“묘마.”
묘(妙)란 보통 어린 여아에게 사용하는 명칭이 아닌가.
그렇기에 악마가 삿대질을 하며 폭소를 터트려도 할 말이 없을 터였다. 한데 악마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청하 때문에 청마라고 할 줄 알았는데. 발음하기 쉬워서 좋네. 외워두마.”
“그러고 보면 최근 흉악한 별칭이 많았는데 묘마라니 꽤 좋지 않아요?”
이훤이 탈마의 말을 받으며 쐐기를 박았다.
“하고 싶으면 하는 거야.”
그렇게 묘마(妙魔)는 어색하게 웃으며 술잔을 비웠다.
탈마가 묘마를 배려해 화제를 돌렸다.
“그럼 아직은 육대괴마로군요.”
“굳이 억지로 늘일 필요가 있나? 마음 맞는 사람이 생기면 어련히 늘거나, 줄겠지.”
이훤은 창 밖에 펼쳐진 호수의 전경을 바라봤다.
‘육대괴마라.’
회귀 전 육대괴마에서 검마와 한마, 그리고 소마가 빠졌다. 하나 지금의 육대괴마는 회귀 전의 그들보다 한층 더 괴마에 가까웠다.
‘이쪽이 더 좋은 걸?’
취마(醉魔) 이훤은 술꾼이다.
만환검제나 취선관주와 같은 수식어가 있지만,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취마 그 자체였다.
탈마(奪魔) 고천락은 도둑놈이다.
하나 이훤과는 이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고, 회귀를 알고 있을 만큼 입안의 혀 같은 녀석이다.
색마(色魔) 관자림은 거지였다.
개방의 후기지수로 순탄하게 살았다면 후개가 되었을 것이고, 운이 좋았다면 향후 방주의 자리도 꿈은 아니었다. 하나 이훤에게 반하여 파문을 각오한 채 개방을 뛰쳐나왔다. 노골적으로 충성과 애정을 보이는 녀석이지만, 미녀에게는 차가운 거지였다. 아마 해가 바뀌기 전에 하오문을 접수하여 돌아오리라. 그리고 있지도 않은 꼬리를 흔들며 정수리를 내밀게다.
전마(錢魔) 예영영은 의외의 존재였다.
돈 버는 재주가 특출하여 받아들였지만, 결속력을 따지자면 가장 약하지 않을까 싶다. 아무래도 청도대상단을 등에 업은 이상 괴마들이 정파와 반목할 때 거취를 결정하게 될 터였다.
악마(岳魔)는 반노환동을 했고, 묘마와 사이가 좋지 않다.
묘마(妙魔)는 환생과 빙의를 했고, 그녀 또한 악마와 사이가 좋지 않다.
“그런데 악(惡)도 아니고 악(岳)은 가문에 대한 미련을 너무 많이 남긴 거 아니야?”
“너도 남궁세가가 기울어봐라. 신경이 안 쓰일지.”
“남궁세가는 그럴 리 없지. 변두리에 있는 산동악가에게나 생기는 일이야.”
“이 년이! 아까 네 별칭이 좋다고 한 건 취소다. 늙은이가 꽃다운 처녀 흉내나 내고 말이야!”
“너는 건드리지 말아야 할 걸 건드렸어!”
저 정도였다.
탈마가 박수를 치며 시선을 끌었다.
“이번에 아흔일곱 번째야. 백 번째 싸움은 꼭 성대하게 치러 줄게. 기왕 싸울 거면 저쪽의 버드나무 아래서 싸워 볼래?”
이훤이 맞장구를 치며 웃었다.
“역시 풍치의 완성은 싸움 구경이지.”
하나 97번 째 대결은 무산됐다.
아래쪽이 소란스럽더니 누군가 계단을 올랐다.
“소협, 죄송합니다만 이미 손님이 계십니다.”
“아! 글쎄. 이야기만 해보겠다고 하지 않느냐?”
“그래도 그건 좀······.”
“허어! 유정루의 서쪽 창가가 그렇게 절경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더라. 그러니 내가 알아서 잘 부탁하겠다고 하지 않느냐?”
이훤은 헛웃음을 지었다.
“어디 좋다고 소문나면 이런 일은 끊이지 않는구나.”
“세상이 살기 좋잖아요. 그러니까 오냐오냐 키웠을 테고, 버릇만 나빠서 세상을 발아래 둔 것 같은 애새끼들이 쉬지 않고 쏟아져 나오는 거죠.”
탈마는 태생적으로 명문이나 부자, 고수와 같은 부류를 싫어했다.
“좋은 날이니 적당히 달래서 보내.”
이훤의 말에 탈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날에 방해받고 싶지 않은 건 누구나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한데 두 사람은 알지 못했다.
등 뒤에서 묘마와 악마가 주고받는 묘한 눈빛을 말이다.
*
청추림은 하남성에 위치한 장평문의 소문주였다.
장평문 자체는 무림에서 크게 이름을 떨치지 못했으나, 소림의 속가였기에 하남에서는 위세가 대단했다. 탈마의 예상처럼 어린 시절부터 부족한 것 없이 자라왔고, 하고 싶은 건 모두 하며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였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안휘성에 온 이상 유정루의 풍취는 꼭 한 번 구경해야 할 필수 과정이었다. 특히 연모의 정을 품고 있는 장약란과 자신이 수족처럼 부리는 후기지수들과 함께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애초에 유정루를 거론한 건 장 소저가 아닌가. 사내가 된 이상 내 여자가 될 이에게 이 정도 호사는 누리게 해줘야지!’
이런 마음으로 호기롭게 삼층에 올랐다.
내심 긴장했던 마음은 땡볕을 마주한 눈처럼 사르륵 녹아내렸다.
‘다행히 별 볼일 없는 자들이었군.’
불콰한 얼굴의 사내가 상석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하인으로 보이는 소년은 눈을 끔뻑이며 눈치를 봤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아 있는 남녀는 미색이 뛰어날 뿐 도드라지지 않았다.
‘이 정도면 장 소저에게 점수를 따는 건 식은 죽 먹기지.’
청추림은 앞으로 드리워진 장삼을 슬쩍 걷어 허리춤의 검을 내보인 후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명문의 예법에 따라 포권을 했다.
“소생은 하남의 장평문에서 온 청 가라고 합니다. 막역지우들과 먼 길을 왔다가 유정루의 명성에 감읍하여 허락도 없이 오르게 되었습니다.”
탈마는 듣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할지 짐작한 후였다.
그렇기에 돈 주머니를 흔들며 축객령을 내리려는 순간 한 사람이 앞을 막았다.
‘응?’
묘마가 슬쩍 상체를 기울여 탈마를 막더니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아하!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그래서요?”
“크흠! 해서 충분히 보상을 할 터이니 자리를 양보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청추림은 헛기침을 했다.
하나 이미 얼굴은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상태였다.
그가 마음에 두고 있던 장약란은 대뜸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고, 함께 온 이들은 묘마의 미색에 홀린 것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아! 어쩌나. 우리도 오래 전부터 예약을 해놓았는데 말이지. 그냥 양보할 수도 없고······.”
“소, 소저. 돈은 충분히 보상하겠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존칭을 쓴 청추림은 다시 한 번 얼굴을 붉혔다.
그 사이 묘마가 수저통을 슬쩍 건드리며 웃었다.
“우리 내기 할래요?”
< 72, 자라나는 새싹은.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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