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 괴마들. (2) >
이훤은 주먹으로 손바닥을 내려쳤다.
“아!”
대오각성을 한 듯한 표정이다.
청하는 스스로 남궁세가에 얽매였다고 반성했지만, 실제로 얽매여 있던 건 자신이 아닌가.
육대괴마란 회귀 전의 인연일 뿐이다.
하나 회귀 이후 모든 것이 변했다.
소마는 가짜였고, 한마는 백소로 살아가게 될 것이며, 검마는 종적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이훤의 곁에는 탈마와 색마뿐 아니라 전마와 악마가 함께 하고 있지 않던가.
“그래, 함께 할 사람이 있다면 숫자로 제한할 필요가 없지! 그 또한 예법과 상식에 얽매이는 행위가 아니던가?”
청하는 배시시 웃었다.
“대형을 깨우칠 정도라면 팔대괴마의 이인자는 내가 되어야겠군.”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그리고 왜 네가 대형이라 부르는 건데?”
“팔대괴마잖아! 아니, 그 전에 너희들 몇 명이냐?”
탈마는 술을 홀짝이며 말했다.
“지금은 여섯 명이죠. 아! 그리고 서열은 나이순이나 무공순이 아니라 가입 순서에요.”
악마는 청하에게 발끈했다가 탈마를 보며 인상을 썼다.
“그런 것에 얽매이지 말자며?”
“얽매일지 말지를 고민하는 것도 얽매이는 거예요. 그냥 순리를 따르세요.”
탈마의 되도 않는 한 마디에 의외로 악마는 무슨 깨달음이라도 얻었는지 눈을 깜빡이더니 생각에 잠겼다.
이훤은 그 모습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진짜 천재.’
남궁혁은 진이 빠진 표정으로 축 늘어졌다.
“아버······.”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지만, 청하의 눈 흘김에 말꼬리를 흐려야 했다.
청하는 빈 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을 이었다.
“후우, 내가 어쩌다 청하의 몸에 들어왔는지, 과연 심검의 경지가 존재하기는 하는지, 그리고 내가 도달할 수 있을지······. 아는 게 없다. 다만 지난 수십 년간의 내 삶을 돌이켜 봤을 때 나는 감히 정파의 무인이었다고 말 할 자격이 없어. 그러니 이렇게 된 이상 더 철저하게, 더 노골적으로 살련다.”
아무래도 ‘마음대로’라는 말이 빠진 듯했다.
이훤은 히죽 웃었다.
“동료는 많을수록 좋지.”
청하는 내공을 운용하지 않고 술을 마신 듯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눈을 흘겼다.
“대신 이름은 내가 지을 거야.”
“기꺼이.”
검후는 침음을 내뱉었다.
“과연 그것으로 족한가?”
“옥주야, 부럽냐?”
청하의 농담에 검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럽지. 어찌 부럽지 않겠느냐? 평화로운 세상이었다면 사마외도라며, 공적이라며 몰릴 수도 있을 것이야. 하나 환난의 세상이 도래했으니 스스로 뜻한 바에 움직인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부럽구나.”
부러우면 너도 하라는 말이 농담처럼 나올 수도 있는 상황이다.
하나 상대가 검후였기에 누구도 함부로 장난을 치지 못했다. 그녀는 희생과 배려로 점철된 삶을 살아오며 수많은 사람을 구하고, 지켰다. 그 부분에 대해서라면 누구라도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가 없으리라. 어쩌면 이들이 이처럼 제멋대로 살 수 있는 것도 누군가 중심을 잡고 세상을 지켜가기 때문 일수도 있을 터였다.
하여 오직 청하만이 말을 건넸다.
“달수가 있잖아.”
“그래, 야심한 밤에 등 긁어줄 노인네라도 있는 것이 어디더냐?”
검후가 얼굴을 붉힌 채 폭소를 터트렸다.
청하는 어깨를 으쓱이며 술잔을 비웠다.
“그래, 있는 게 어디냐.”
탈마가 불현 듯 히죽 웃더니 말했다.
“소개시켜 줄까요?”
“갑자기 무슨 소리야?”
“색마가 꽤 잘생겼어요. 한데 그 놈은 여자한테 관심이 없더라고요. 하지만 청하는 겉만 여자일 뿐 속은 남자니까 관심이 생길수도 있지 않을까요?”
“쿠헉!”
탈마가 술을 뿜었다.
“이 얼마나 불쾌하고 끔찍한 개소리란 말인가!”
“오호호호호! 탈마야. 네 팔을 뽑아서 엉덩이에 꽂아줄까?”
청하의 협박에 탈마는 하얗게 질린 채 도리질을 쳤다.
“으으, 다음 괴마는 적당히 미친 사람으로 뽑아야겠네요.”
“그만 뽑아! 지금도 많아. 이름 외우기도 힘들겠다.”
“무슨 소리! 있는 힘껏 만들어야지.”
괴마들은 십대괴마나 천강삼십육괴마라는 얼토당토않은 별호를 주고받으며 동료애를 다졌다.
하나 오직 남궁혁만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한 숨을 내쉬었다.
“후우, 수백 년을 이어온 가문이거늘······. 헌신짝처럼 버리시면 어쩌라는 건지?”
악마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어쩌긴! 네가 알아서 잘 굴려봐야지.”
“흥! 산동악가가 잘 굴러가는지 한 번 지켜보죠.”
“뭐라고?”
“뭐요? 제가 못할 말을 한 것도 아니지요. 저 남궁세가의 가주입니다!”
“허! 이 놈 보게. 내가 만만하냐?”
“제가 언제 만만하다고 했습니까. 한데 여기 계신 분들 중에서 따지자면 뭐······.”
남궁혁에게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모두 불편했다.
탈마조차 무형검의 단초를 얻었기에 쉬이 대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러다 보니 그나마 교류가 없던 악마에게 속내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하나 악마 또한 친분 없는 남궁세가의 가주 따위를 신경 쓸 리 없지 않은가.
“남궁세가의 가주면 돌아가. 애초에 가주 주제에 네가 왜 여기 와서 앉아 있는 거냐?”
남궁혁은 어깨를 펴고 당당하려 했으나, 목소리가 기어들어가는 것만은 막지 못했다.
“저도 이번 혈겁에 참전 했습니다.”
“웃기시네. 제검백가가 외부로 쏟아져 나오는 바람에 수하들하고 제왕전 앞에서 별이나 헤아렸다던데?”
실제로 제왕전 앞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하나 남궁혁은 비슷한 것이라도 했는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끝까지 방심하지 않고 서 있는 것도 꽤 힘든 일입니다.”
“힘들기는 개뿔! 알았으니까 적당히 마셨으면 돌아가라. 이러다가 누가 네 얼굴을 알아보기라도 하면 귀찮아져.”
소규모 상인과 표사들이 애용하는 주루였다.
그러니 남궁혁이 관도를 활보해도 알아보는 이가 있을 리 만무했다.
“쳇! 그러지 않아도 가려고 했습니다. 내일 아침에는 무림맹에서 위무대가 옵니다. 제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보고 놀라지나 마세요!”
*
무림맹의 행렬은 대략 이백여 명에 이르렀다.
위무대(慰務隊) 자체가 위로를 위해 한시적으로 조직된 무리였다. 그렇기에 의원들이 대부분이었고, 그 외에는 약재와 비품을 운송하는 무인들이었다. 하나 위무대의 수뇌부만 살펴봐도 무림맹에서 이번 일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유추하기에 충분했다.
“역시 남궁세가는 대단하군.”
호사가들은 창천평을 지나 창천성으로 향하는 행렬의 면면을 보며 탄성을 내뱉었다.
“선두에서 백마를 탄 노인이 위무대주인가?”
“등에 맨 쌍천극을 보고도 모르겠나? 저분은 장로원에 속한 천극봉호 왕 노사일세.”
천극봉호(天戟封豪) 왕철평은 장로원에서도 수위에 꼽히는 명숙이다. 평소 바깥출입이 잦지 않은 그를 대주로 임명한 까닭은 오래 전 남궁세가주와 동문수학을 했기 때문이다.
결국 정파를 대표하는 무림맹에서 혈겁을 미연에 방비하지 못한 잘못을 학연으로 무마하려는 의도였다.
“하나 위무대의 실질적인 수장은 총순찰이라고 들었네만. 그 분은 어디에 있는 건가?”
“저기 바로 뒤에 보이잖아.”
무림맹의 총순찰은 십삼 지부를 관장하는 살림꾼을 의미했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시간을 맹 외부에서 보내지만, 서열은 사 위에 이르렀다. 하나 강호에 널리 알려진 위명과 달리 총순찰의 외모는 평범했다.
“별로 눈에 띄지 않는군. 오히려 화려한 의복 밖에 보이지 않아. 클클, 뒷돈을 좋아하나?”
“조용히 하게. 평범해보여도 총순찰은 총순찰이야. 게다가 총순찰의 집안은 무림맹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태가장이라고.”
태가장(太家莊)은 하북의 석가장처럼 세가를 이루지는 않았으나 이백 년 간 절대고수를 배출해낸 명가로 유명했다. 태가의 장주가 마음을 바꿔먹으면 오대세가는 물론이고, 남궁세가와 자웅을 겨룰 수 있다는 말까지 회자될 정도였다.
“허, 고위급 중의 고위급이군.”
“진짜 중의 진짜라는 뜻이지.”
호가사들은 해가 진 후에 자연스럽게 만들어질 술자리에서의 자랑거리를 늘리기 위해 한참 동안 떠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천극봉호 왕철평은 속도를 조금 늦춰 총순찰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불과 며칠 전에 혈겁을 겪고도 사람들의 표정이 밝군요. 이것이 남궁세가의 위명이겠지요.”
총순찰은 자신에 대한 험담을 귓등으로 흘리다가 빙긋 웃었다.
“남궁세가가 버텨줘야 남직예 일대가 평안해집니다. 그래도 수천 명을 막아냈다니 참으로 장하군요. 조금 빨리 움직이도록 하지요. 겉보기와 달리 속으로는 상한 곳이 많을 겁니다. 위무대를 맡았으니 제 역할을 다하려면 당분간 아주 바쁠 거예요.”
“역시 총순찰의 혜안은 넓고도, 깊구려. 그리 하겠소이다.”
왕철평은 외원에서 파견 나온 두 명의 당주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느릿하게 나아가던 행렬이 빠르게 창천평을 지났다. 그리고 저 멀리 창천성 앞에 붉은 주단을 깔아 놓고, 백여 개의 차양을 펼쳐놓은 장소가 보였다.
“가주!”
왕철평은 무림맹의 장로였지만, 흔쾌히 손을 모았다.
남궁혁 또한 왕철평에게 손을 모은 후 감사를 표했다.
“먼 길을 오느라 수고하셨네. 이렇게 된 이상 도움은 감사히 받도록 하지.”
왕철평은 남궁혁의 표정을 살피며 침음을 흘렸다.
‘가주는 본래 호방하여 교분 맺는 것을 즐기는데 총순찰을 보고도 별 감흥을 보이지 않는구나. 듣던 것보다 남궁세가의 피해가 큰 것 같아. 나도 잠을 줄여서라도 도와야겠군.’
남궁혁은 왕철평이 친우에 대한 결의를 다지는 사이에도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빌어먹을! 아무도 안 왔어!’
분명 위무대가 올 것이라고 고지하지 않았던가.
한데 이훤과 검후는 물론이고, 탈마와 악마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다. 심지어 청하는 술병이 났다며 제왕전에서 오수(午睡)를 즐기고 있는 상태였다.
“가주를 뵙습니다. 검후와 검제가 이곳에 머물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데 나오지 않으신 것 같군요.”
총순찰의 물음에 남궁혁은 인상을 썼다.
“그!”
새끼나 개종자, 또는 사마외도의 후예와 같은 표현을 썼다가는 뒤처리가 문제였다. 남궁혁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가 어정쩡하게 수습을 해야 했다.
“들은 싸움의 여파로 인해 휴식을 취하고 있다네.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볼 수 있을 테니 걱정 마시게나.”
행여 연회 때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가 수포로 돌아갈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 삶의 지혜였다.
총순찰은 환하게 웃으며 손을 모았다.
“고대하고 있습니다.”
“일단 짐을 풀고, 잠깐이라도 휴식을 취하시게. 정오가 다 되었으니 배는 채워야 하지 않겠는가.”
“남궁세가주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남궁혁의 말에 총순찰은 항상 맞장구를 치거나, 감사를 표했다.
‘그렇지.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인데 말이야!’
한데 미소는 오래가지 않았다.
쪽문이나 다름없는 성의 서문을 통해 빠져나가는 일련의 무리를 보았기 때문이다.
‘저, 저!’
선두에 서서 노닥거리는 건 이훤과 탈마였고, 그 뒤에서 서로 삿대질을 하는 건 청하와 악마였다.
군중의 시선은 가주와 위무대에 쏠려 있었기에 누구도 그들을 눈치 채지 못했다.
‘여기로 와야지! 어디에 가는 거야?’
그 때 수십 장의 거리를 격하고, 이훤의 전음이 들렸다.
[해장 술 한 잔 하고 올 테니까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표정 짓지 마라.]
남궁혁은 하고싶은 말이 참 많았다.
하나 그는 수십 장을 격하고 전음을 보낼 재주가 없었다.
[해지기 전에는 돌아올게. 아! 그리고 연회도 성대하게 개최할 거라며? 내 자리에는 술 많이, 안주 많이!]
욕하고 싶고, 때리고 싶고, 저주하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다. 하나 눈앞의 천극봉호와 총순찰을 뒤로 하고 쫓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총순찰이 잠시 남궁혁의 시선을 좇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저들의 면모가 범상치 않아 보이는군요. 아시는 분들입니까?”
남궁혁은 어색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허허, 그럴 리가. 오늘 밤 성대하게 열릴 연회를 준비하는 자들일세. 아! 그리고 연회에서 총순찰이 만나고 싶어하던 이들을 모두 볼 수 있을 게야.”
총순찰의 눈동자가 묘하게 반짝였다.
“참 잘 됐습니다. 한 시라도 빨리 만나고 싶군요.”
< 71, 괴마들.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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