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마신-180화 (180/226)

< 71, 괴마들. >

71, 괴마들.

경천동지(驚天動地).

온 세상이 크게 놀랄 만큼의 무언가를 설명할 때 쓰이는 말이다. 한데 그것이 안휘성 창천평, 즉 남궁세가의 앞마당에서 일어났다. 비명은 먹구름처럼 하늘을 뒤덮었고,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핏물이 시신 사이를 헤집었다.

하나 있어야 할 시신 한 구가 보이지 않았다.

사객(士客).

최초의 감각사도인 흑의인이 아끼던 오좌 중 차석을 차지한 자였다. 십 수 년 간 석가장의 호위로 위장을 했고, 흑의인의 모략을 실행하기 위해 온갖 잡다한 일을 도맡았다.

그러나 그는 살아 있었다.

그뿐 아니라 창천평에서 수십 리나 떨어진 관제묘에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먼지는 세월의 흐름을 증명하듯 수북이 쌓였고, 관제묘의 주인을 자처하는 거미의 흔적이 사방에 가득했다. 하나 사객은 거미줄을 걷어내지도 않았고, 발자국을 남기지도 않았다.

누구보다 은밀하게 대기했다.

하나 상대방은 그럴 생각이 없었나 보다.

끼이익-

관제묘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짜증 섞인 한 마디가 들려왔다.

“쯧, 이게 다 뭐야? 꼭 이런 곳에서 봐야 하는 건가?”

청수한 인상의 중년인이 값비싼 화복을 걸친 채 들어섰다.

사객은 흑의인을 대할 때처럼 공손히 손을 모았다.

“사신사도의 주작께 인사드립니다.”

상대방은 흑의인과 몇 번이나 교류했던 주작(朱雀)이었고, 그는 사객의 인사를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호오! 자네 멀쩡하군. 이번에도 눈치 빠르게 화를 피한 겐가?”

주작의 조롱에도 사객의 표정은 여전했다.

오히려 담담한 어조로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건넸다.

“흑의인이 죽었고, 광무제는 도주했습니다.”

“크큭. 결국 그렇게 되었는가? 모든 것이 천룡의 예상대로 되고 있잖아.”

주작은 손을 휘젓는 순간 바닥의 쌓여 있던 먼지가 뭉쳐들더니 의자의 형태를 취하는 것이 아닌가. 그가 엉덩이를 붙이자, 사객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가감 없이 전했다.

“그래서 이게 남았다는 거지?”

주작은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관제묘를 살폈다.

그 순간 사방에서 귀화(鬼火)가 피어올랐다.

“애국이 만들었고, 흑의인이 취했던 것입니다.”

사객은 슬쩍 손을 들었다.

그러자 수십 개의 귀화가 하나둘 씩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이제 천공인은 당신의 것입니다.”

주작은 싱글벙글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이걸 남기고 떠났으니 흑의인도 결국 쓸모가 있기는 했군. 그 동안 속내를 숨기고 띄워주느라 배알이 뒤틀렸다네.”

최초의 사도이며, 대국을 총괄했던 흑의인에 대한 평가치고는 너무 박했다. 하나 사객으로서는 수십 년 동안 모셔온 주인이 아니던가. 그는 복잡한 문양이 양각된 술병과 잔을 꺼냈다.

“그는 자신의 역할을 다 했습니다.”

“좋아! 네 마음도 이해해주마.”

주작이 손을 뻗자, 술잔이 저절로 잡혔다.

사객이 술병의 마개를 뽑자, 술은 저절로 호선을 그리며 잔을 채웠다. 그는 술을 채운 잔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흑의인을 기리듯 말을 건넸다.

“쯧쯧, 최초의 사도란 그 자체로 미완성을 의미했다네. 결국 양산품보다는 나았겠지만, 완성품에 미치지 못하는 건 당연하지. 함께 하는 동안 자네의 똑똑함을 구경하는 재미가 나쁘지 않았다네. 한데 자네가 진정 감각사도는 결국 사신사도를 만들기 위한 시제품임을 몰랐을까?”

하나 죽은 사람은 말이 없고, 땅에 술잔 또한 비워지지 않았다.

“자네는 알았을 거야. 그러니까 다른 사도들을 장작으로 써먹으면서라도 생의 불꽃을 유지하려 했겠지. 하나 결국 모든 건 천룡의 뜻대로 흘러가는 법이라네. 비록 자네의 생은 다했으나, 살아 있을 때 가장 쓸모 있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으시게.”

주작이 눈을 감았다가 뜨는 순간 잔을 채우고 있던 술이 산산이 흩어졌다. 한순간 관제묘 안의 퀴퀴한 냄새에 주향이 섞였다가 서서히 자취를 감췄다.

“위령제를 치러주었으니 천공인에 대한 대가는 충분할 것이라 믿는다.”

사객은 고개를 조아렸다.

“주작께 남은 흑의인의 세력을 바치겠나이다.”

주작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광무제도?”

“필요하시다면 어떻게 해서든 꾀어내겠습니다.”

“좋아. 이제 대업도 막바지에 이르렀어. 자네는 천공인을 가지고 그곳에서 대기하게.”

사객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주작께서는?”

주작은 자신의 화려한 옷자락을 들며 입꼬리를 올렸다.

“일단은 위무대이니 위로를 해주러 가야겠지.”

*

창천평에서 벌어진 혈겁은 사마외도의 잔당들의 난입으로 알려졌다. 안휘성 내에서는 남궁세가의 입김이 곧 진실이었다. 그렇기에 날이 밝은 후 사태를 알게 된 호사가들은 연방 남궁세가의 대처를 칭송했다.

하나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남궁세가의 수족이자, 창천성의 방벽이라 할 수 있는 제검백가 중 대다수가 청하의 무형검과 검후의 칼에 맞아 제압당한 상태였다.

“죽은 게 백스물셋, 제압당한 게 칠백스물두 명이지.”

청하의 머릿속에는 심검으로 가득했지만, 오랜 세월 함께 했던 제검백가의 무인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여 악마마저 오늘은 그녀를 조롱하는 대신 빈 잔을 채워줄 뿐이다.

“회복될까?”

“취마의 말대로 만매만전을 열두 시진 내내 독경하라고 했어. 몇몇 꼬맹이들은 벌써부터 괴로워하면서 서서히 깨어나는 것처럼 보인다네.”

이훤이 입꼬리를 올렸다.

“이번 일을 통해 강림혼요술의 위력은 대상자의 친분과 매혹의 시기로 결정된다는 것이 확인됐어. 그 가짜 놈이 친분을 쌓았다가 한순간에 매혹시킨 것이니 정신을 차리는 것도 불가능한 건 아닐 거야.”

그는 한껏 으스대다가 의구심을 표했다.

“그런데 그 사이 창천성의 방비가 가능하겠어?

청하는 어깨를 으쓱였다.

“다시 쳐들어오면 방 빼야지. 위패와 비급만 챙기면 어디서든 재건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저만한 것들이 또다시 들고 일어난다면 이건 남궁세가의 문제가 아니라 강호의 문제겠지. 그 지경이 될 때까지 몰랐다면 그것도 죄야.”

악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닌 말로 무림맹은 정마대전이 아니라면 중재자나 참관인의 역할만 해왔잖아.”

검후는 침중한 표정으로 혀를 차며 읊조렸다.

“쯧, 모두가 같은 마음이면 좋으련만.”

“하지만 모두가 제 욕심만 차리는 건 고금을 통틀어 불변의 진리였지.”

창천평의 혈겁은 승리로 끝났다.

하나 적의 수괴도 아닌 하수인이 이천 명에 달하는 무인을 조종한다는 건 웃어넘길 일이 아니었다. 아닌 말로 강호 곳곳에 강림혼요술의 여파가 남아 있다면 이 세상은 이미 지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였다.

탈마가 술병의 주둥이를 흔들었다.

그 순간 병이 핑그르르 돌며 술을 쏟았고, 그것은 절묘하게 빈 잔을 가득 채웠다.

“그래도 승전연이잖아요. 이 정도로 막은 것만 해도 기적이라고요. 그러니 지금 이 순간만은 즐겨보죠!”

이들이 모인 곳은 남궁세가가 아니라 창천평 반대편에 위치한 주루였다. 불과 이십 리 밖에서는 수천 명이 죽거나 다쳤거늘 이곳은 평소와 다름없이 삶을 살아가는 이들로 가득했다. 어쩌면 고요한 제왕전이 아니라 시끌벅적한 주루에 모인 건 저들의 활력이 필요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청하도 털어내. 강림혼요술은 우습게 보여도 신마의 심득이야. 너와 아무리 가까웠다고 해도 의지만으로 이겨내기란 불가능했겠지.”

이훤의 말에 청하는 피식 웃었다.

“너한테서 정상적인 말을 들으니까 기분이 묘하네.”

“대형이 취했다는 증거가 아닐까?”

“그들을 위해 잔을 올리죠.”

청하와 악마도 눈썹까지 잔을 들어올렸다.

세 사람이 검후를 바라봤다.

어찌됐든 이 자리에서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건 그녀였기에 추도사를 읊조렸다.

“황하의 탁한 물살에도 물고기가 사네. 하나 탁류에 휩쓸려 죽어간 물고기는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네. 그럼에도 황하는 마르지 않으니 이 또한 세월 속에 묻히는 것과 다르지 않으리라.”

“강호는 늘 그랬죠.”

검후와 일행은 동시에 술잔을 비웠고, 그렇게 죽어간 이들은 강호의 역사가 되었다.

“이번 일로 느낀 게 많아. 심득을 완전하게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지. 그래서 은거 아닌 은거를 했는데······.”

청하는 손가락을 쥐락펴락 하며 말을 덧붙였다.

“실전만한 게 없네.”

이훤이 동조했다.

“그건 청하 말이 맞지. 애초에 신마의 심득은 제대로 된 사승관계로 전해진 게 아니잖아. 그가 강제로 주입했다고 보는 편이 옳아. 그러니 실제로 부딪치면서 해결하는 수밖에 없어. 나 또한 신마의 심득을 들었을 때보다 실전을 통해 체득하는 경우가 많았지.”

“그건 나도 그랬지. 대형의 충고대로 가솔들에게 구궁벽력공을 가르치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됐으니까. 십전진뇌공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야.”

검후 또한 이견이 없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유일하게 똥 씹은 표정을 하는 이가 있었다.

남궁혁은 술잔을 만지작거리다가 용기를 내서 질문을 했다.

“관주. 외형만 보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오. 하나 어찌되었든 이 분은 우리 아버지시오. 한데 말이 너무 짧으니 듣는 입장에서 상당히 불편하구려.”

주벽의 취객들을 염두에 둬서 아버지라는 말은 속삭이듯 했으나, 뜻은 충분히 전해졌다.

이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꾸했다.

“외모는 상관없어. 아니, 애초에 나는 나이 자체를 신경 쓰지 않아.”

탈마가 모호한 대답이라고 여긴 듯 첨언을 하듯 덧붙였다.

“형님은 스스로 취마라 하셨고, 나는 탈마라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악마와 전마가 있지요. 아! 그리고 지금은 따로 있지만, 색마도 있어요. 우리가 나이를 떠나 형님을 대형으로 여긴 건 단순히 무공의 고하 때문이 아닙니다. 형님은 우리를 칠대괴마라 칭했고, 그것은 예법에 구애받지 않기 때문이지요. 정사마의 구분과 예법, 의협을 통틀어 모든 것에 우선하는 내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고, 나를 위해 하는 겁니다.”

탈속(脫俗).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법제와 관념을 무시하겠다며 당당하게 외치는 한 마디였다.

남궁혁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건 당연했다.

“장황하게 떠들었지만, 결국 자기 마음대로라는 말이 아닌가? 하면 검후께는 존칭을 쓰고, 아버지께는 하대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설마 예법도 사람에 따라 달리하는 건가?”

이훤이 히죽 웃었다.

“그래, 그 말이 맞아. 나는 미친놈이 아니야. 상대가 예법에 따라 살아왔고, 그 사람이 존중할 가치가 있다면 기꺼이 예법을 따라주지. 하나 그게 아니라면 상대의 예법이나 도리를 내가 신경 쓸 이유가 없잖아?”

망아취자와 노군동주, 그리고 검후는 누가 봐도 일생을 신념에 따라 살아온 이들이다.

그렇기에 존중받아야 했고, 우러러봐야 했다.

이훤이 그들에게 경외심을 지니는 건 단순히 친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과 다름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내가 실수한 것이 맞아. 나는 청하가 나와 같다고 여겼어. 예법과 의협? 좋지. 좋은 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기에 나와 말이 통했을 것이라 넘겨짚은 거야. 그러니 이렇게 된 기회에 물어볼게.”

청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만히 있으면 숨 쉬는 것만으로 색기를 풀풀 날리는 자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 건 꽤 귀엽게 보였다.

“남궁천운. 당신은 나와 같습니까?”

이훤의 물음에 청하는 눈을 끔뻑이더니 대꾸했다.

“몇 개 남았어?”

“뭐가?”

“칠대괴마라며. 내 자리 있냐?”

청하의 물음에 남궁세가의 가주인 남궁혁과 주산군도의 군주인 검후가 눈을 부릅떴다.

이훤마저 화끈한 청하의 말에 헛웃음만 연발했다.

청하는 술잔을 깔끔하게 비웠다.

“없으면 오늘부터 팔대괴마라고 해.”

< 71, 괴마들. > 끝

ⓒ 김태현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