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 소마(笑魔). >
70, 소마(笑魔).
광무제에게는 수십 년 만에 호각을 이룬 자와의 싸움이었다. 경건함을 넘어 신성함까지 느껴졌고, 이 순간 이훤을 제외한 모든 것을 지웠다.
그리고 비록 적이지만, 상대도 그럴 것이라 여겼다.
“진심이냐?”
“응.”
“무인으로서 호승심도 없단 말이더냐? 네가 갈고 닦은 무위가 어느 정도인지 정상에서 부딪치고 싶지 않더냐?”
“별로 안 갈고 닦았는데.”
광무제의 노기 가득한 일갈이 터져 나왔다.
“전력으로 부딪쳐야 한다는 건 네 놈의 말이 아니더냐? 자신의 말조차 지키지 못하는 파락호였던가!”
이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입꼬리를 올렸다.
“알게 뭐야? 적하고 진심으로 대화할 리가 없잖아.”
광무제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생전 처음 당하는 치욕에 말을 잇지 못했다.
“저, 저!”
이훤은 저자의 파락호를 흉내 내듯 손가락을 꺾었다.
“자! 이 조합마저 버텨내면 네 말대로 인중 최강이라고 해주마. 하지만 실패하면 저승에서 여포와 겨뤄야 할 거다.”
“크흑! 쓰레기 같은 놈.”
검후가 그윽한 눈빛으로 광무제를 바라봤다.
“저 아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네. 저 아이는 언제나 최선을 다했지. 여력을 비축하고, 다음 기회를 노리는 성격이 아니야. 늘 전력으로 그 상황을 마주했고, 모조리 뚫고 나왔다네.”
광무제는 조소를 흘렸다.
“훗, 이 꼴을 보고도 편을 들고 싶은가? 검후의 명성도 결국 그 정도였군.”
“쯧쯧, 평생 남의 등을 밟고 다녀서 모르는 겐가. 이 상황에서 저 아이가 전력을 다해야 할 상대는 자네가 아니라 자네의 상관일세. 한낱 졸개를 상대로 전력을 다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악마는 속으로 탄성을 흘리며 전음을 보냈다.
[불정신니는 불자랍시고 늘 허허 웃는 줄만 알았는데 입담이 제법이야.]
그래도 검후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았나 보다.
청하는 악마의 전음에 미간을 좁혔다.
[옥주, 저 년이 어릴 때부터 성질머리가 얼마나 고약했는데. 신마의 추격대에서 빠진 것도 또래 여협들을 주야장천 괴롭혀서 사문으로 불려갔기 때문이라고.]
악마는 예기치 못한 대꾸에 속내를 입 밖으로 꺼냈다.
“진짜? 불정신니가 여협들을 그렇게 괴롭혔어?”
“이 미친 년놈들아! 계속 그렇게 헛소문을 퍼트릴래?”
검후는 사자후를 터트린 후 헛기침을 하며 광무제를 대했다.
“크흠! 어쨌든 자네는 저 아이가 가야할 길에 놓인 돌멩이에 불과하다네. 그저 다른 것보다 조금 큰 그런 돌멩이인 게지.”
하나 광무제는 더 이상 검후의 도발에 반응하지 않았다.
악마와 청하로 인해 기껏 잡은 분위기가 깨진 게다.
검후가 두 사람을 흘겨봤다.
광무제는 길게 숨을 뽑아냈다.
마치 사기를 토해내듯 길게 뿜어낸 숨결이 흩어지는 순간 기사가 일어났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눈동자가 검게 물들더니 무저갱처럼 빛을 삼켰다.
“하나가 넷으로 늘었을 뿐. 무엇이 달라지랴?”
천무검에 묵빛의 강기가 희미하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이훤은 청하와 악마에게 눈짓을 하며 외쳤다.
“자! 누가 최강인지 보여주라고!”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좌우로 찢기듯 사라졌고, 그 자리를 검후가 채웠다. 그녀가 검을 그대로 내리치는 순간 광무제가 그랬던 것처럼 거대한 검이 벼락처럼 꽂혔다.
쩡!
강기와 강기가 충돌하는 순간 무형검이 좌우로 흩어져 광무제의 겨드랑이를 조준했다. 그리고 악마는 미꾸라지처럼 검후를 스치듯 지나쳐 창을 일직선으로 내질렀다.
콰콰콰쾅!
청하의 탄성을 흘렸고, 악마는 미간을 좁혔다.
‘무형검을 없앴어?’
‘손바닥이 저릿하군.’
두 개의 무형검은 천무검의 검영을 뚫지 못했다.
그리고 검후의 검을 쳐낸 천무검의 검극이 절묘하게 창두와 맞물렸다. 그 사이 이훤이 허공에서 거꾸로 내리꽂히며 팔황과 무극을 꺼내들었다. 한데 팔황과 무극은 새끼를 꼬듯 서로 휘감기더니 창처럼 뾰족하게 변했다. 그것이 광무제의 정수를 겨누는 순간 허공에 묵강(墨罡)이 호선을 그리며 팔황과 무극을 튕겨버렸다. 말 그대로 거대한 붓으로 허공에 호선을 그린 듯했다. 손바닥 두 개를 펼쳐야 메워질 법한 넓이의 잔영이 서서히 흩어졌다.
“허, 돌멩이치고는 좀 큰데.”
악마가 손가락을 털며 말했다.
하나 속으로는 울화가 치밀 대로 치민 상태였다.
그가 완성한 십전진뇌공은 미리 몸에 새겨놓은 법보와 역법보를 토대로 위력을 발휘했다. 한데 그는 남궁세가와 일전을 할 각오로 법보와 역법보를 새겼다. 한 마디로 다수와의 싸움에 만전을 기한 상태가 아니던가. 그러니 오히려 고수와의 싸움에 힘을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한 마디로 천시와 지시, 그리고 인시가 모두 어긋난 상태였다.
‘이번 싸움만 끝나면 아예 옷처럼 준비를 해서 필요할 때마다 바꿔서 쓸 테다!’
그러려면 지금보다 두 배의 내공과 네 배 이상 단련된 육체, 그리고 여덟 배 이상 똑똑해져야 했다.
하나 악마는 반드시 달성하겠다는 결의를 담아 다시 한 번 창을 내질렀다.
쩡!
이번에는 큰 손해를 봤다.
검후와 청하가 호응하지 않았고, 이훤은 일견하기에도 제대로 된 공세를 연계하지 못했다.
“뭐하자는 거야?”
형이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았다.
이훤은 대답 대신 표정을 굳혔다.
악마는 황급히 검후와 눈빛을 교환했다.
[대형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아. 무슨 수를······.]
[연기하는 거다.]
검후의 전음에 악마는 눈을 끔뻑였다.
초월경에 맞먹는 고수를 앞에 두고 갑작스레 무슨 연기란 말인가.
[멍청아! 넋 놓지 말고 최선을 다해 싸워. 옥주의 말처럼 검제의 싸움은 오늘로 끝나지 않아. 하지만 우리 싸움은 오늘 끝낸다!]
악마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광무제의 미간에 새겨진 주름이 늘어났다.
무형검의 숫자를 늘린 탓에 곤욕을 치르는 게다.
게다가 검후 또한 첫 수와 달리 중검이 아니라 환검 위주의 초식을 펼치고 있었다. 명백하게 이훤을 위해 시간을 끄는 행위였다.
“후우.”
악마는 한 번의 심호흡으로 평정을 되찾았다.
아쉬운 점이 없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제일 잘 할 수 있는 걸 해야 했다. 그렇기에 검후를 대신하여 광무제의 눈앞에 섰다. 그 사이 검후가 몸을 빼냈고, 광무제의 빈틈을 노렸다. 광무제가 노기를 드러내며 검후를 쫓으려고 할 때마다 악마가 앞을 막았다.
“사방이 벽일 것이야. 아! 그런데 출구는 없다!”
악마는 창대로 광무제의 검을 튕겨낸 후 좌우에 창영을 흩뿌렸다. 그 사이 검후는 배후로 돌아갔고, 청하는 꼭두각시를 조종하듯 현란하게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확실히 마음만 이는 것보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가리켰을 때 운용이 편하다.’
청하는 아직 신마의 심득을 완전하게 체득한 상태가 아님을 인정하며 손가락을 놀렸다. 두 개에서 시작한 무형검은 어느덧 여덟 개가 되어 검후와 검과 함께 쇄도했다.
터터터터터터터터터텅!
광무제는 스스로 인 중 최강을 부르짖을 자격이 충분한 자였다. 검후의 검을 튕겨내는 것도 모자라 내기를 유형화하여 반탄강기를 운용했다. 무형검을 상쇄시키기보다 방향을 바꿔 악마에게 튕겨낸 것이다.
“아니! 씨발, 이게 되는 거냐고?”
악마는 창을 휘돌리며 헛웃음을 흘렸다.
신마의 심득만 익히면 천하가 손안에 있을 줄 알았다.
한데 이훤에게 밀린 것도 모자라 검후와 동수를 이루지 않았던가. 거기에 더하여 이제는 신마의 심득을 익힌 자들이 합공을 하는 것마저 막아내는 괴물이 등장했다.
‘형님의 말처럼 신마의 심득을 나눠 익힌 탓일까?’
광무제는 세 사람은 찰나간 밀어낸 후 벼락처럼 몸을 돌렸다. 허공에 붓질을 하는 것처럼 묵빛의 강기가 호선을 그리더니 그대로 이훤의 정수리를 쪼갰다.
“쯧.”
이훤은 팔황과 무극을 교차하여 천무검을 튕겼다.
하나 제대로 방어하지 못한 듯 한쪽 다리가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주절주절 떠든 것에 비해 지구력이 떨어지는구나. 무의 시작은 육신의 단련이고, 하반신의 굳건함이야말로 초석과 같다. 신마의 심득 따위에 현혹되어 그것을 도외시한 네가 나를 이길 수 있을 것 같더냐?”
광무제의 노호성과 함께 허공이 검게 물들었다.
검을 휘두를수록 묵빛의 강기가 공간을 물들였고, 이내 먹구름에서 벼락이 치듯 강기가 내리꽂혔다.
콰콰콰콰콰쾅!
악마가 인상을 쓴 채 강기를 또다시 튕겨냈다.
[뭘 하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하려면 빨리 하쇼.]
[지쳤어?]
[대형의 연기가 생각보다 별로요. 이러다 놈이 대충 싸우는 걸 알아차리겠소.]
이훤은 자신의 앞을 막아선 악마의 넓은 등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검후와 청하는 몰라도 악마는 칠대괴마의 한 사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동생 앞에서 못난 꼴을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나 오늘은 못나야 했다.
그는 흑의인을 찾기 위해 단전의 내공만으로 광무제를 상대하면서 혈륜을 흩뿌렸다.
‘진짜는 어디 있는 거냐?’
전력을 다할 상대는 광무제가 아니었다.
이훤에게 있어서 흑의인은 언제부터인가 안개 같은 존재였다. 분명 회귀 전 자신을 농락한 소마일 가능성이 농후했기에 몇 번이나 잡으려 했다. 하나 놈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모래처럼 자취를 감췄다. 그로 인해 대부분의 사도를 척살할 수 있었지만, 만족스러울 리 만무했다. 그렇기에 언제부터인가 천룡전과 부딪칠 때마다 탈마에게 흑의인의 행적을 맡겼다. 그리고 지금도 흑의인을 찾았기에 창천평을 뒤로 하고 달려온 길이 아니던가.
‘아예 없다면 모를까, 미끼를 가져다놨으니 진짜는 근처에 있어!’
구릉은 절반 이상 깎였기에 반대편에 있던 흑의인의 얼굴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하나 이훤은 이미 상대가 홍의인일 것이라 확신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훤은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처음에는 검후와 일행이 몰려왔을 때 몸을 빼려 했다. 하나 지금껏 그런 방식으로 움직였다가 몇 번이나 놈을 놓치지 않았던가. 해서 낚싯대를 늘어트리는 대신 그물을 던지기로 했다. 촘촘한 그물이라면 놈이 움직이는 순간 느껴질 터였다.
쇄애애애애액!
이훤이 진짜 흑의인을 찾기 위해 심력을 소모하던 중 광무제의 일격이 쇄도했다. 이건 악마라고 해도 대신 막아주기 힘들만큼 절묘하게 빈틈을 파고들었다.
쩡-
팔황과 무극이 교차하는 순간 천무검을 통해 광무제의 내력이 스며들었고, 한순간 양팔이 저릿할 만큼의 고통이 밀려왔다. 평소였다면 상대방에게 되돌려 주거나, 대지로 흘려보냈으리라.
하나 이번에는 혈륜과 함께 사방에 흩뿌렸다.
그로 인해 그물의 코가 조금은 넓어질지언정 크기 자체는 더 넓어지리라. 그리고 마치 장막처럼 구릉 전체에 드리워졌던 혈륜의 기운이 한순간 요동을 쳤다.
지잉-
십여 명의 감각사도를 상대하면서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기운이었다.
한데 제법 떨어진 위치였다.
그 말은 곧 놈이 다른 사도와 달리 무공을 익혔다는 증거이리라. 선인봉에서 의심했던 것이 오늘에서야 확실하게 드러난 셈이다.
[막아줘!]
이훤은 광무제의 검이 내리꽂히는 와중에 몸을 돌렸다.
청하의 양 손이 어지럽게 흩날리는 순간 무형검이 겹쳐졌고, 검후의 검강이 광무제의 앞길을 막듯 횡으로 파고들었다.
쩌정-
하나 광무제의 묵빛 탄강은 빛살처럼 일직선으로 뻗더니 이훤의 등으로 향했다. 한데 허공에서 푸르스름한 빛줄기가 번뜩이더니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악마의 전신에 뇌기가 일렁였고, 그가 창을 대지에 꽂아 넣는 순간 몸뚱이에 머물렀던 뇌기가 방사형으로 퍼져나갔다.
“이것이 십전진뇌공이다!”
콰콰콰콰쾅!
이훤은 폭발의 여파로 더 빠르게 내달렸고, 악마는 자리를 굳건하게 지켰다.
‘오늘은 안 놓친다!’
악마의 도움에 감사를 표할 여력도 없이 내달리는 중이다.
목표는 구릉 너머의 작은 촌락을 지난 후에야 마주할 수 있는 야산이었다. 능력만 된다면 창천성과 창천평을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요지였다.
쾅! 쾅! 쾅!
암천군림보를 극성으로 펼치는 순간 수십 장의 높이의 산 정상이 발아래 존재했다.
그리고 놈이 보였다.
이훤은 흑의인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안녕? 진짜 만나고 싶었다.”
< 70, 소마(笑魔).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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