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 인(人) 중 최강. (2) >
도발이었고, 도박이었다.
이훤은 광무제를 직접 마주하는 순간 망아취자의 충고가 옳았음을 인정했다. 회귀 이후의 강호행을 떠올려보면 대부분 천룡전과의 싸움이었다. 그들은 주로 새외의 세력이나 중원의 중소방파를 활용했다.
‘그런 건 거슬리는 정도지.’
새외의 세력이 아무리 악명을 떨쳐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새외의 세력이 정말 강했다면 중원의 주인은 이미 바뀌었을 터였다. 그리고 구파오가라고 해도 핵심이 되는 몇몇 고수를 제외하면 머릿수를 채우는 것이 불과했다.
‘하지만 저 자는······.’
광무제(廣武帝)는 달랐다.
지금껏 이훤이 진짜 고수라고 여겼던 난적들은 모두 신마의 심득과 관련됐다. 망아취자와 청하, 악마와 같은 경우였다. 오직 하나의 예외가 검후였지만, 그녀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협(俠).
정파의 근간이며 영웅의 필수 덕목이라지만, 협이란 근본적으로 타인을 위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그렇기에 어깨에 짊어진 것이 많았고, 발은 무거웠다.
그것이 검후의 한계였다.
그렇기에 이훤은 검후가 두렵지 않았다.
지금이야 할머니라며 친분을 다지고 있지만, 그 관계 또한 망아취자에 대한 경외심에서 비롯됐을 터였다.
그래서 이훤은 신마의 시대라고 확신했다.
한데 그 생각이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진짜 규격 외다.’
만약 신마가 없었다면 저 자가 최강이다.
광무제는 스스로 외쳤듯 천하제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였다. 스스로 일신의 무위를 갈고닦았기에 드러낼 수 있는 자부심이었다.
해서 그가 조금이라도 흔들리기를 원했다.
대저 절대지경을 가리켜 인외비경(人外秘境)이라 하는 까닭은 눈에 보이는 세상 너머를 엿봤기 때문이다. 그러니 광무제라면 이십 년 후를 거론하는 순간 흔들릴 것이라 여겼다. 세상의 모든 것을 알았기에 미래라는 불확실한 무언가에 관심을 가질 것이라 믿었다.
“광야제라. 네게 어울리는 별호구나.”
이훤은 호흡을 조절했다.
분위기가 좋지 않다.
아니나다를까 광무제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아랫사람을 대하듯 말을 건넸다.
“오늘부터 그리 해라. 내가 인정하마.”
실패다.
오히려 이훤이 울컥할 만큼 여유로운 목소리였다.
이쯤 되면 전력으로 부딪치는 것밖에 답이 없다.
그 때 예기치 못한 한 마디가 들려왔다.
“흔들리지 마라.”
어차피 혈륜을 끌어올리는 순간 평정은 자연스럽게 뒤따를 터였다. 한데 광무제가 이런 것까지 인지하고 있으니 경악을 금치 못했다.
순수하게 자신의 힘으로 성장한 자.
이훤은 웃었다.
이제 잡다한 수나 기책은 통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 역시 순수하게 상대를 인정하기로 했다.
“당신 정말 대단하군.”
한데 광무제는 이훤의 칭찬에 눈매가 가늘어졌다.
“역시 인간이길 포기한 것들 다운 말투로구나.”
칭찬을 더 싫어한다고?
‘하여간 고수란 것들이란······.’
이훤이 속으로 투덜거리는 사이 광무제는 무언가를 가늠하듯 손가락을 쥐락펴락 했다.
“너희들은 신마의 심득이면 모든 것이 된다고 여기지. 하나 일신의 강함은 그런 삿된 기술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신마라는 망령에 사로잡혀 사술을 쓰는 너희들은 부끄러워해야 한다.”
아예 신마와 관련된 모든 사람을 하찮게 여기는 듯한 말투였다. 그리고 목소리에는 신마에 대한 분노가 가득 담겨 있었다.
마치 불구대천의 원수를 대하듯 말이다.
‘연배가 다르다. 그런데 신마를 싫어하는 이유라면······.’
사적인 원한이 분명했다.
그리고 광무제가 나타났을 때가 뇌리를 스쳤다.
이훤을 원하는 아이가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이훤이 흑의인을 노렸을 때 광무제가 등장했다.
‘낙안봉에서는 아예 흑의인을 업고 다녔지.’
그제야 신마에 대한 분노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하나 뿐인 자식을 신마의 심득을 익힌 천룡에게 빼앗겼다면 화가 나는 게 당연했다.
“자식 간수도 못하는 주제에 누구를 사람이 아니래. 그럼 네 자식도 사람이 아니겠지. 흑의가 그러더냐? 나를 가지고 싶다고? 한데 스스로 나서기는커녕 수하들이나 보내놓더니 이제는 아빠한테 가서 떼라도 쓰던가? 아빠! 쟤 갖고 싶어. 줘. 줘. 줘!”
이훤이 아이의 흉내를 내며 조롱하는 순간 광무제의 전신에서 형용할 수 없는 기운이 폭발하듯 번져 나왔다.
“그 입 닥쳐라!”
광무제의 시선에는 사람의 혼백을 찢어발길 것 같은 기세가 담겨 있었다. 하나 이훤은 의형살인도 가능할 듯한 광무제의 눈빛을 가볍게 흘렸다.
“그러게 집안 단속이나 먼저 하지 그랬어.”
“살아만 있으면 될 터, 사지를 가루로 만든 후 끌고가야겠구나.”
됐다.
광무제의 기세는 처음 등장했을 때보다 강렬했지만, 위압감이 줄었다.
이훤은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손가락을 까딱였다.
“덕분에 푹 쉬었으니 삼 초를 양보해주마.”
“삼 초 안에 끝내주마!”
광무제는 걸음을 내딛었다.
별다른 기색 없이 걸어오지만, 땅이 움푹움푹 파였다. 심지어 발이 땅에 닿지도 않았음에 말이다. 그런 그가 지척에 이르러 검을 들었다.
묵빛의 검은 달빛마저 흡수할 만큼 새카맣다.
“좋은 검이네.”
“천무검은 지상 최강이다. 인세에 이보다 더 뛰어난 명검은 없을 것이다.”
“내려칠 거야?”
“그리 해주마.”
광무제는 검기조차 덧씌우지 않은 검을 들더니 일직선으로 내리쳤다.
쇄애애애애액!
한데 그 순간 이훤이 신형을 한껏 낮추더니 좌측으로 튀어나갔다. 동시에 팔황과 무극이 검으로 변하더니 서른 번이나 휘둘렀다.
채채채채채채채채챙!
광무제의 입매가 비틀렸다.
이훤의 기습에도 그는 자연스럽게 반응했다.
수십 번이나 쇄도한 검을 모조리 튕겨낸 후 짜증이 섞인 한 마디를 내뱉었다.
“더러운 놈. 이게 삼 초를 양보하는 것이더냐?”
“병신! 그걸 믿었냐? 내가 널 언제 봤다고 양보를 해!”
광무제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이제는 감정이 얼굴에 드러낼 만큼 동요했다.
“싸움은 모든 걸 거는 거다. 이기면 살고, 지면 죽어. 너처럼 고고하게 자존심이나 챙기면서 싸우는 법은 알지 못한다. 전력으로 부딪친 후 튕겨나가는 쪽이 죽는 거다!”
이훤은 혈륜을 최대한 끌어올렸다.
준비 동작 없이 전력을 끌어내는 순간 핏빛이 노을처럼 번졌고, 금빛은 일출처럼 퍼져나갔다.
그것은 이내 한 덩어리가 되어 광무제를 후려쳤다.
콰콰쾅
광무제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하나 그가 있던 땅 전체가 쓸려나갔고, 일진광풍과 함께 비산한 모래바람이 사자림의 무인들을 덮쳤다.
“허락한다!”
광무제의 비틀린 입매를 비집고 흘러나온 한 마디에 수십 명의 무인들이 모래바람을 뚫고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들은 광무제의 승리에 한 점의 의심도 없는 것처럼 지나쳤다. 구릉 아래로 쏟아져나가는 무인들의 검에서 일제히 강기가 폭발하듯 터져나왔다.
“자! 나를 흥분시키려 했다면 성공이다. 피가 식기 전에 어디 한 번 더 놀아보아라.”
“흥! 아직까지 내 앞에서 놀던 새끼 중에 두 발로 걷는 놈이 없어.”
이훤이 재차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광무제도 호응했다.
천무검의 색깔과 똑같은 묵빛의 강기가 그림자처럼 퍼졌다. 일견하기에는 마교의 주인인 천마라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을 만큼 강렬한 기운이었다.
쾅! 쾅! 쾅!
공격과 공격만 계속됐다.
두 사람은 한 걸음도 밀리지 않은 채 호각을 이뤘다.
오히려 애꿎은 구릉만 점점 깎여나갔고, 이내 입구였던 작은 협곡까지 무너질 것처럼 요동쳤다.
“제법이로구나.”
“넌 생각보다 별로야.”
간간히 대화를 주고받아도 될 만큼 무한한 내력의 흐름이 공간 전체를 휘저었다. 초절정의 고수라고 해도 쉬이 범접할 수 없는 둘 만의 공간이 만들어졌다.
“어디 계속 놀아 봐!”
이훤의 일갈을 시작으로 다시 한 번 내공이 외부로 표출됐다.
콰콰콰콰콰콰쾅!
광무제는 호언장담을 한 대로 대단한 무공을 선보였다.
심지어 이훤이 깨우친 무형검마저 피해냈다.
불가의 육신통에 준하는 이능을 선보이니 무형검으로 할 수 있는 건 주위를 분산시키는 것이 전부였다.
그 때 멀찍이서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나 말 자체는 흉악하기 그지없었다.
“넋 놓지 말고 막으세요! 놈의 동료가 오고 있습니다!”
흑의인의 외침에 절벽에 대기하던 석가장의 무인들과 사자림의 무인들이 창천평으로 달려나갔다.
이훤은 미간을 좁혔다.
‘느낌이 이상한데.’
분명 흑의인의 얼굴과 옷이었다.
목소리의 어투와 방식도 똑같았다.
한데 어딘가 모르게 흑의인에게서 느껴졌던 여유를 찾을 수 없었다.
‘누가 남았었더라?’
사색사도 중 남은 자를 헤아리던 중 광무제의 검이 거대하게 변한 채로 낙뢰처럼 내리꽂혔다.
콰콰콰쾅!
이훤이 호신강기를 펼쳐 검을 밀어낸 후 히죽 웃었다.
“어! 방금 살짝 진심 같았는데?”
“닥쳐라!”
광무제는 빈틈을 노렸다는 사실에 오히려 분노한 듯 더욱 거세게 몰아붙였다. 이훤은 그런 광무제의 공세를 막으며 가르치듯 말했다.
“정정당당하지 못한 걸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렇게 해서도 죽이지 못했음을 부끄러워해라!”
“닥치라고 했다!”
*
홍의인의 얼굴은 이제 웃는 것과 화내는 것이 동시에 표출된 것처럼 기괴하게 구겨졌다.
‘신마의 심득이 이렇게나 대단했던가?’
천룡전의 문제점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감각사도들은 신마의 심득을 갈망하지만, 정작 신마의 심득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저 천룡으로부터 부여된 욕망을 실천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을 뿐이다.
게다가 천룡의 심득은 무력보다 사술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지금껏 감각사도들은 숫자로 밀어붙이고, 모략으로 승부를 보려 했다. 하지만 실제로 마주한 신마의 심득은 모두 무력이었고, 압도적인 힘 앞에 모략과 머릿수는 한계에 부딪쳤다. 아쉽게도 그들은 서로 정보를 공유하지 않았고, 설령 뒤늦게 신마의 심득을 알게 되었더라도 살아남지 못했다.
그렇기에 홍의인의 심경은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천룡에 대한 의심과 부정은 불가능했기에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을 정도였다.
‘검후는 그렇다고 치자. 한데 저 남녀는 뭐란 말인가?’
그는 어느덧 창천평의 칠 할 이상을 지난 검후의 일행을 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광무제와 이훤의 싸움은 빛이 번쩍일 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확인하기 어려웠다.
한데 검후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가 일검을 떨칠 때마다 정명함이 유형화 된 듯 온갖 삿된 것을 잘라버렸다.
그렇기에 청하와 악마를 더 두려워했다.
청하가 손을 뻗을 때마다 마치 짜고 치는 도박처럼 수하들이 쓰러졌고, 악마는 마치 천장단애와 같았다. 신장이 와도 뚫을 수 없을 것처럼 굳건했다.
‘하지만 사자림이라면······.’
광무제가 키워냈고, 사객이 보증한 천무삼십육절(天武三十六絶)이라면 저들을 막을 수 있을 터였다.
아니 막아낼 것이다.
수십 명이 동시에 검강을 펼치는 광경에 눈이 호강하는 듯했다.
“사자림인가?”
검후는 대놓고 사자림의 무복을 걸친 천무삼십육절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그 만한 무위를 하늘에게 받았다면 응당 의기와 협행에 힘써야 하거늘 감히······.”
하나 그녀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전방을 지키던 악마와 좌우를 담당했던 청하가 허락도 없이 튀어나갔다. 철옹성 같은 방진이 무너졌으니 적들은 반색하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으리라.
애초에 각자가 인외비경에 닿았고, 이훤이 지칭한 초월경의 고수였다. 방진 따위는 그저 편의에 불과했고, 개개인이 움직일 때가 위력이 더하다는 것을 말이다.
“나도 끼고 싶다!”
청하는 손가락을 까딱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이미 절반이나 깎여나간 구릉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광무제와 이훤의 공방이 눈에 훤히 보였기에 앞을 막아선 사자림의 무인들이 귀찮기만 했다.
“크흑!”
멋들어지게 검강까지 뽑아올렸거늘 제대로 휘둘러보지도 못한 채 무인의 머리가 잘려나갔다. 악마라고 해서 청하와 다른 마음일 리가 없다. 저렇고 높은 곳에서 도드라지게 싸움을 한다면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기억할 터였다.
‘저기에 내가 있다면 산동악가의 위명은 천 년동안 이어질 것이야.’
그렇기에 극에 달한 속도로 극에 달한 변화를 일으킨 창이 방울뱀의 소리를 내는 순간 적들은 짚단처럼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크아악!”
검후는 눈을 서너 번 깜빡이는 사이 쓸려나간 무인들의 시신을 지나며 읊조렸다.
“내세에는 좋은 사람이 되어라.”
하나 그녀의 걸음 또한 악마와 청하에 뒤지지 않은 채 빠르게 나아갔다.
“적의 수괴가 거기 있으렷다!”
광무제는 미간을 좁혔다.
한창 이훤과 어우러지고 있는 상황에서 악마와 청하가 동시다발적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검후도 금세 어깨를 나란히 했다. 세 사람이 범인은 발을 들이는 순간 가루가 되어 흩어질 공간에 들어선 것이다.
“꺼져라! 놈과 내가 끝맺어야 할 싸움이다!”
호연지기가 가득한 일갈에 청하와 악마는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검후는 혀를 차며 물러서려 했다.
한데 물러선 건 그녀뿐이 아니었다.
이훤이 광무제의 검을 밀어낸 후 검후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이 놈! 어디 가느냐?”
광무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흑의인의 아비가 아닌 사자림주이자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가슴이 뛰는 싸움이 아니던가. 한순간 천룡전과 흑의인을 기억에서 지우고, 전력을 쏟아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마치 이런 싸움을 위해 지금까지 버텨온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런 마음을 똥통에 처박아 넣는 한 마디가 들려왔다.
“누가 일대 일로 붙는데?”
< 69, 인(人) 중 최강.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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