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 인(人) 중 최강. >
69, 인(人) 중 최강.
이천 명이다.
적당한 주루의 일층에 앉는 자들이 보통 서른 명 남짓이고, 가구를 뺀 후 빼곡하게 채워 넣어도 칠십 명 정도가 들어갈 터였다. 한데 서른 배에 가까운 인원이 적당한 거리를 벌린 채 운집했다고 생각해 보라. 범인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것이고, 오금이 저려서 제대로 서 있기 힘들 것이다.
이천 명이란 그런 숫자였다.
무림맹에서 한 번에 내보낼 수 있는 무인들의 숫자라고 해봤자, 칠백 명을 넘지 못했다. 그 외에는 각 지부로 파견되어 소집령을 내려야 모을 수 있었다.
“그런 숫자란 말이야.”
홍의인의 표정은 괴상했다.
강림혼요술로 인해 웃는 얼굴이 유지됐지만, 당황과 좌절로 인해 속은 썩어문드러졌다.
그 때 이훤이 드러났다.
움직일 때마다 금빛 광채를 흩뿌리니 보기 싫어도 시선이 집중됐다. 지금껏 유격전을 하듯 주변을 쓸어버리던 자가 전방에 나서더니 대지를 후려쳤다. 그리고 그 순간 땅거죽이 뒤집히며 백여 구의 시신과 수십 명의 무인들이 튕겨나갔다.
그리고는 대뜸 이쪽을 향해 내달리는 것이 아닌가.
홍의인의 두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저런 미친!”
그리고 사객은 홍의인보다 먼저 반응했다.
“벽을 쌓아라.”
석가장의 무인들이 개떼처럼 달려갔다.
사객이 그들과 호흡한 세월만 무려 십 수 년에 이르렀다. 하나 석가장의 무인들을 보는 시선에는 어떠한 감정도 섞여 있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석가장은 청암산에 숨어 있던 애국의 천공인을 강탈하는 순간 역할을 다했다. 그리고 토사구팽이라는 말처럼 역할을 다했으면 폐기하는 것이 순리였다.
사백 명의 무인이 운집했다.
어차피 구릉으로 올라오는 길은 낮은 협곡을 지나야 했다.
하나 낮다고 해도 이 장 정도의 높이였다.
게다가 협곡의 위쪽에 병력을 배치하는 건 상식이 아니던가. 이미 궁술에 조예가 깊은 방파의 무인들이 즐비하게 늘어섰다. 이훤을 막을 수는 없더라도 발목을 잡는 정도는 할 수 있으리라.
“당신은 대업의 주재자입니다. 당신이 흔들리면 강림혼요술도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웃으세요. 석가장의 무인들로 여덟 겹의 벽을 쌓았으니 놈이 하늘을 날지 않는 한 갑자기 달려드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사객은 말끝을 흐린 후 한쪽을 바라봤다.
구릉의 반대편 기슭에는 사자림주와 수하들이 운기조식을 하는 것처럼 앉아 있었다.
홍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객의 무위는 침이 닳도록 듣지 않았던가.
한데 사자림주인 광무제의 무위는 그보다 더했다.
무공의 천재라고 불렸던 자였다.
그리고 천룡이 그를 논하길 신마의 심득이 없다는 가정 하에 천하제일이 될 유일한 존재라 하지 않았던가. 어쩌면 흑의인이 최초의 사도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광무제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홍의인은 입맛을 다셨다.
하나 미소를 되찾은 후였고, 사객에게 경고도 잊지 않았다.
“말조심하세요. 듣는 귀가 많잖아요.”
당신이 아니라 주군이라 부르라는 의미였다.
사객은 망설임 없이 무릎을 꿇고 말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주군.”
“좋아요. 어디 석가장의 솜씨를 한 번 볼까요?”
홍의인은 애써 전장이 아니라 구릉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전장을 바라보기에는 검후와 젊은 남녀가 만들어낸 광경이 너무나 흉악했다. 마치 호랑이가 양떼를 짓밟으며 창천평에서 날뛰는 듯하지 않은가.
‘이훤만 잡아도 남는 장사야.’
홍의인의 상인 출신답게 손익계산을 끝냈다.
그렇기에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
이훤은 적을 피하지 않았다.
한 번 피 맛을 보았으면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하게 짓밟아주는 것이 강호의 도리였다. 물론 상대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전제하의 일이지만 말이다.
“와라!”
그렇기에 비키라는 말은 필요치 않았다.
오히려 혈륜을 자제한 채 육신의 힘과 팔황무극의 예리함만으로 상대했다. 그래야 상대가 투기를 잃지 않고 호롱불을 본 부나방처럼 달려들지 않겠는가.
촤악!
횡으로 한 번 긋고, 사선으로 한 번 더 그었다.
그것만으로 스무 명에 달하는 무인들이 썰려나갔다. 강기나 검기가 아닌 검풍만으로도 적은 대응하지 못했다. 애초에 절정이었고, 기껏해야 초절정에 근접한 자들이다. 강호에서 떵떵거리기에 충분했고, 후자라면 적당한 지역을 꾀고 앉아서 으스댈 수도 있었으리라.
하나 세상이 변했다.
지금은 신마(神魔)의 시대였다.
그가 절명곡에서 사라지고, 유산을 물려받은 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깨어나는 시대가 바로 지금이다. 만매만전도 제대로 접해보지 못한 장강 이남의 무인들이라면 퇴물이나 마찬가지였다.
‘거기에 사마외도이기까지!’
이 얼마나 훌륭한 만찬이란 말인가.
이훤의 오랜만에 회귀 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질주했다.
지금 이 순간만은 취마가 만류검제가 아니라 미친 밤의 제왕이었다.
광야제(狂夜帝).
한 때 구파오가도 막지 못한 그를 이름도 궁금하지 않은 자들이 막아설 리 만무했다.
퍼퍼퍼퍼퍼퍼퍽!
어깨로 찍으면 삼 장을 튕겨나갔다.
상체가 움푹 파인 것으로 보아 뼈가 모조리 으스러졌으리라. 발에 걸리는 족족 걷어찼고, 눈에 보이는 족족 베어버렸다.
그러나 길은 열리지 않았다.
강림혼요술은 명령이 내려진 이상 생사를 불문했다.
“막아라!”
아예 병장기를 던지고 달려드는 놈도 보였다.
발이라도 잡아끌어서 저지하려는 듯했다.
가볍게 떨쳐내는 순간 상체와 하체가 찢긴 채 좌우로 튕겨나갔다.
“하아.”
이훤은 피와 시신이 만들어낸 냄새를 힘껏 빨아들이며 구릉에 발을 들였다. 유선형의 협곡을 확인하는 순간 여덟 겹으로 막아선 무인들이 나타났다.
‘진짜.’
하나 그는 구릉 정상에 선 채로 흑의를 펄럭이고 있는 먹잇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있구나.’
지금껏 이훤이 마주했던 천룡전의 무리는 대부분 흑의인과 관련이 있었다. 하여 이처럼 대규모로 모략을 꾸몄다면 반드시 지켜볼 것이라 여겼다. 그렇기에 잠영술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탈마를 먼저 내보낸 게다.
그리고 탈마는 훌륭하게 임무를 완수했다.
“기암진을 펼쳐라!”
석가장의 무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훤은 혀로 아랫입술을 핥은 후 혈륜을 끌어내려 했다.
한데 그 순간 망아취자의 충고가 뇌리를 스쳤다.
- 낙안봉에서 그를 업고 있던 자는 당시의 나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그렇다.
영초가 있으면 주변을 지키는 독물이 있는 법.
흑의인 곁에는 종복을 자처하는 자가 있을 터였다.
망아취자가 자신과 비견할 정도의 고수라면 최상의 조건에서 싸우고 싶었다. 하지만 팔층기암진(八層奇巖陣)을 상대로 시간을 끌었다가는 흑의인을 놓칠 수도 있는 노릇이 아닌가.
‘하하.’
이훤은 헛웃음을 지었다.
자신에는 영혼을 공유하는 것처럼 생각이 통하는 의제가 있지 않던가. 그는 협곡의 좌측에서 번쩍이는 신호를 놓치지 않았다.
“좋아! 믿고 간다!”
냅다 뛰었다.
“온다! 차력미기를 활용해라!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날벌레가 귓가에서 왱왱 거리는 것처럼 적들의 외침이 사방에 몰아쳤다. 하나 이훤은 구릉 정상의 흑의인만 노려보면서 몸을 띄웠다.
“활을 쏴라!”
전궁당(戰弓黨)은 본래 엽사들의 모임이었다.
장강 이남의 대수림에서 회족들과 맞서 싸우며 성장한 그들은 어느새 궁술로는 천하에 손꼽히는 방파로 이름을 떨쳤다. 팔목에 장착한 단궁으로 스물네 발을 연사할 수 있는 비격뢰(秘擊雷)가 있는 한 초절정의 고수라도 급살 맞은 새처럼 추락할 것이라 자부했다. 그러니 제아무리 이훤이 대단해도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다 땅에 내려설 것이라 여겼다.
하나 그들은 자신들의 비격뢰를 시험할 사이도 없이 난적을 마주해야 했다.
“큭!”
멀뚱히 서 있던 궁수의 가슴팍에서 피가 튀었다.
물이 가득 찬 항아리의 중앙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한 줄기로 솟구친 핏물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신음을 들려왔다.
쉭쉭쉭쉭쉭!
탈마는 남궁세가에서 얻어온 비침을 아낌없이 흩뿌렸다.
천하제일세가라 불리는 남궁세가의 무고에서 가져온 비침이 평범할 리 없다. 흑오철로 만들어 한 번 바람을 타면 십여 장까지 날아가는 기병이 아니던가.
“적이다! 전궁당을 보호해라!”
절벽 아래를 겨누던 비격뢰의 조준점이 흐트러졌다.
전궁당을 지키던 무인들이 분주히 날뛰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탈마의 움직임을 감춰줬다.
푹-
비침 하나가 심장을 세 치만 찌른 후 사라졌다.
탈마는 영문도 모른 채 절명한 무인의 손에서 검을 받아 쥐었다. 그리고 허공으로 뛰어오른 이훤의 발밑을 향해 집어던졌다.
“살수를 찾아라!”
“이훤을 죽여!”
명령이 혼선을 빗고, 조준점은 흐트러졌으니 한쪽 절벽은 무력화된 것이나 다름없다.
쉭쉭쉭쉭쉭쉭쉭쉭-
반대편 절벽에서 비격뢰를 쉴 새 없이 당겼다.
하나 양쪽 절벽에서 동시에 쐈을 때 화살이 맞물리며 그물의 형태를 취하지 않던가.
이훤은 화살비를 가볍게 피하며 재차 뛰어올랐다.
그 사이 어디선가 한 자루의 검이 다시 날아와 발밑을 받쳤다. 깃털 하나만으로도 원하는 만큼 뛸 수 있는 상태가 아니던가.
이훤의 미소가 짙어졌다.
‘진짜 대단한 새끼!’
조금 전 남궁세가에서 보았을 때와 또 다르다.
탈마는 매순간 진화했다.
게다가 이번 변화는 아무래도 무형검의 묘리를 설명하는 와중에 저절로 체득한 것처럼 보였다. 청하가 무형검을 흩뿌린다면 탈마는 자신을 무형검으로 삼아 움직이는 것이리라. 그렇게 됐으니 이훤조차 감각을 집중하지 않으면 탈마의 기척을 찾아낼 수 없었다.
천재라는 것이 있다면 분명 저 놈일 게다.
그런 대단한 동생이 던진 검을 박차고 몇 번을 뛰는 순간 팔층기암진은 등 뒤에 존재했다.
“오늘은 끝장을 보자!”
우두둑-
이훤이 양 어깨를 뒤로 젖히며 가슴을 힘껏 내밀었다.
그것만으로도 암천군림보가 최고조로 반응하며 혈륜과 함께 몸뚱이를 밀어냈다.
쾅!
단 한 번의 도약으로 구릉 정상에 있는 흑의인과 눈높이를 맞췄다.
흑의인은 누군가 뒤에서 잡아당긴 것처럼 밀려났다.
아닌 게 아니라 진짜 누가 당겼다.
‘독물인가?’
이훤의 예상대로 영초를 지키는 독물이 등장했다.
구릉의 반대편에서 솟아오른 빛줄기가 번뜩이는 순간 지척에 이르렀다. 팔황과 무극을 동시에 활성화시킨 후 예(乂)의 형태로 교차했다.
쩡-
한순간 욕지기가 일었다.
회귀 이후 마주한 공세 중 가장 강력했다.
그 대가로 이훤은 튕겨나가며 강제로 구릉에 내려섰다.
놀란 건 광무제도 마찬가지였다.
낙안봉에서 망아취자를 마주했을 때보다 더 놀라야 했다.
‘그 아이가 그렇게 가지려 하더니 대단하기는 하구나.’
손바닥이 저릿한 이 느낌이 얼마만이던가.
하나 그의 머릿속에는 언제나 승리라는 두 글자만이 남아 있었다. 아닌 말로 자식이 아니었다면 천룡전 따위는 그가 먼저 나서서 없애버렸으리라. 그만큼 자신에 대한 자부심과 신뢰는 천하제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였다.
그렇기에 오연한 눈빛으로 이훤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너를 가지고 싶다는 아이가 있다. 그러니 나와 함께 가야겠다.”
이훤의 입매가 비틀렸다.
일단 눈높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도 업어준다면 생각해보마!”
이훤의 신형이 가루처럼 흩어졌고, 광무제의 전면에는 금빛과 핏빛이 얼룩진 기운이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콰콰콰쾅!
구름의 정상 부근이 깎여나갔다.
광무제는 두어 걸음을 밀려난 채 이훤을 응시했다.
“너는 내 이름을 들을 자격이 있다.”
“지랄하시네.”
“나는 광무제다. 천하제일인이라고 불러도 좋다.”
이훤은 오만함의 끝을 달리는 사자림주 광무제의 외침에 기꺼이 호응했다.
“나는 광야제다! 이십 년 후에 유명해질 예정이니 미리미리 외워둬라!”
< 69, 인(人) 중 최강.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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