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 사상 최강의 조합. >
68, 사상 최강의 조합.
이훤은 눈을 가늘게 떴다.
무당파의 천문진인의 생사를 알려준 것이 백소였다.
한데 그런 그녀가 천문진인의 생존을 알리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선린수(仙鱗手) 천문자(天聞子).
절명곡의 생존자 중 한 명.
그리고 이훤이 평생 마주할 수 없다고 여겼던 존재였다.
백소가 호흡을 가다듬는 사이 천문진인에 대한 기억을 더듬었다. 대부분 종초홍이 알려준 정보였고, 최근에는 노괴들의 담소를 통해 엿들은 기억이다.
‘여섯 명이 다 좋은 사람이라는 확신만큼 무서운 것도 없겠지.’
본래 절명곡의 생존자들이 처음부터 친했던 건 아니었단다. 그저 신마가 유격전을 펼침으로 인해 수많은 명숙과 후기지수가 죽었다. 숫자가 줄어들다보니 자연스럽게 서로를 인지했고, 적당한 친분을 유지했단다.
그 중심에 천문진인이 있었다.
망아취자는 당시 사숙의 복수를 하기 위해 눈이 돌아간 상태였다. 벽력창 악재는 신마를 죽임으로서 산동악가의 이름값을 널리 알리고자 했다. 남궁천운은 당연하게도 구파오가의 으뜸인 남궁세가의 힘을 보여주려 했을 터였다. 소천기와 무쇄검은 딱히 도드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무쇄검은 본래 말수가 적었고, 소천기는 제갈세가 출신이니 따로 일을 도모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아닌 말로 추격대에는 제갈삭보다 똑똑하면서 권력까지 쥔 자들이 즐비했다. 당시 주눅이 들었던 제갈삭을 보듬어 준 것이 천문진인이었단다.
‘누가 봐도 좋은 사람. 그리고 천관심결을 남긴 것 또한 아무리 생각해도 개인적인 욕망을 위해서는 아니었어.’
한데 그런 그가 살아있다니 이상했다.
이훤이 파악한 천문진인이라면 적에게 잡혀서 치욕을 당하느니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자결할 사람이 아니던가. 무엇보다 천관심결을 대성했을 그가 죽음을 위장해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을 떠올리기 어려웠다.
“할머니.”
검후가 이훤의 눈짓을 받은 후 다독이듯 백소의 등을 쓸어내렸다. 그렇게 주입된 내력으로 인해 백소의 호흡이 안정됐고, 이내 혈색이 돌아왔다.
“본산에서 요양을 하던 중이었어요.”
이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풍천동에서 상처를 입었고, 절맥까지 치료했으니 요양이 필요했다.
“한데 어느 날 방 앞에 서찰이 놓여 있더라고요.”
천문진인의 필체였단다.
해서 백소는 의심 없이 곧장 풍천동으로 돌아갔다.
풍천동에서 협곡을 지나 약속된 장소에 도착하는 순간 천문진인이 보였으리라.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기억이었고,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밀실에 갇혀있었단다.
“사부님은 천룡전의 마수가 지척에 이른 것을 알아차리고, 죽음을 가장하셨어요. 하지만 제아무리 앞날을 예견한다고 해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으니 잡힐 수밖에 없었다고 하시더라고요.”
이훤이 미간을 좁혔다.
“천룡전에서 천문자를 납치했다고? 너도 그렇고?”
“네. 며칠 동안 밀실에 갇힌 채로 이동하다가 보니 천장으로 달빛이 들어오는 동굴에 이르게 되었어요. 그 때 사부님이 남궁세가가 근처에 있으니 떠나라고 하셨어요. 놀랍게도 사부님이 말씀하실 때 움직이니까 제 앞을 막는 자들이 아무도 없더라고요.”
“역시 천관심결! 천문진인께서 말씀하셨다면 그게 틀릴 리 없지.”
“네! 검후와 관주가 있으니 분명히 활로가 있을 것이라 하셨어요. 그리고 반드시 가주에게 전후 사정을 알려드린 후 제룡검존을 만나라 하셨어요. 비록 오만하지만, 호탕한 그분이라면 반드시 자신을 잊지 않았을 것이라 하셨지요.”
이훤은 탄성을 흘리며 은근슬쩍 되물었다.
“정말 그렇게 말했어? 다른 이야기는 없었고?”
백소는 환하게 웃다가 이내 수심 가득한 얼굴로 한 숨을 내쉬었다.
“네! 사부님께서는 관주가 제 절맥을 고쳐준 것도 아시더라고요. 한데 저는 이렇게 살아나왔지만, 사부님께서는 어떤 고초를 겪고 계실지 짐작도 할 수 없네요.”
이훤은 백소의 하얀 손을 맞잡고 입꼬리를 올렸다.
“괜찮으실 거야. 여기 이 분들이 겉으로는 이렇게 보여도 엄청 대단한 분들이거든.”
백소는 물기 가득한 눈으로 검후를 보며 말했다.
“네, 검후가 계시니 안심이 되어요. 적은 수백 명이고, 더 몰려온다고 했어요. 비록 위급한 상황이지만, 부디 사부님을 구해주세요.”
검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천문은 내게도 남이 아니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에 안타까웠거늘! 살아 있다면 당연히 구해야지.”
남궁혁이 맞장구를 치며 호언장담을 했다.
“남궁세가도 힘을 보태야지요!”
이훤은 그 사이 탈마에게 눈짓을 보냈고, 그가 자연스럽게 백소를 일으켰다.
“일단 계획을 짜야 하니 백 소저는 잠깐 쉬어요. 나 알죠? 예전에 무당산에서 잠깐 봤지요?”
탈마의 현란한 화술에 백소는 어영부영 그를 따라 제룡전을 나섰다.
“걱정마라. 네 사부는 반드시 구해줄 테니!”
“소저. 푹 쉬시오.”
백소는 떠나는 와중에도 몇 번이나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나 그녀가 떠난 후 제룡전의 문이 닫히자, 분위기가 급변했다.
“흥! 함정이군.”
청하의 말에 악마가 맞장구를 쳤다.
“이렇게 허술한 함정도 참 오랜만이네.”
검후의 두 눈이 번뜩였다.
“버러지 같은 것들이 죽은 천문을 관에서 끄집어내다니. 용납할 수 없구나.”
이훤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저한테 죽은 감각사도만 해도 벌써 절반이 넘어가요. 이제는 급할 때도 됐지요. 듣자하니 사도 몇 명이 뭉친 것 같군요.”
남궁혁은 눈을 끔뻑였다.
“천문진인은 그럼 살아 있는 게 아닙니까?”
“······.”
청하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을 아끼는 사이 악마가 히죽 웃었다.
“신마의 심득을 익힌다고 해서 머리까지 좋아지는 건 아닌 듯하군.”
“닥쳐! 부족한 점이 많지만, 그래도 내 아들이다.”
검후가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궁혁에게 설명을 해줬다.
“천관심결은 감각의 확장을 넘어 천기를 보는 단계에 이름을 의미한다. 해서 예상과 예측의 경지를 지나 예지하게 되고, 예언에 이른다고 하더라. 아니! 나보다 심득을 먼저 익혔으면서 왜 아는 게 없어?”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그럼 어떻게 된 겁니까?”
“만약 천문진인이 진짜 살아 있고, 천룡전의 마수를 빠져나갈 수 없기에 죽었다고 치자. 그럴 수는 있지. 하나 백소의 말에 의하면 그가 남궁세가에서 도움을 청하라 한 건 나와 이훤 뿐이다.”
남궁혁은 자신의 주먹으로 손바닥을 내려쳤다.
“아! 그가 진짜였다면 이곳에 누가 있는지 알고 있었어야 겠군요.”
그렇다.
이훤이 백소에게 몇 번이나 되물은 까닭은 믿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만약 이 모든 것을 함정이라고 가정했을 때 백소가 전달한 정보는 이미 알려진 것들이 아니던가.
‘이 새끼들이 점점 귀엽게 놀라고 하네.’
저들은 악재가 반노환동하여 악마가 되었음을 알지 못했다. 그저 세간에는 악재의 제자라고 알려졌을 뿐이다. 또한 제룡검존을 거론한 것도 그렇다. 턱을 괴고 앉아서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청하의 어디서 호탕함을 느낄 수 있단 말인가.
‘관건은 따로 있지.’
청하가 말을 흘리듯 한 마디를 내뱉었다.
“하지만 놈들이 천문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는 건 사실이야. 최소한 지금은 몰라도 예전의 우리를 잘 파악하고 있는 셈이지.”
악마도 고개를 끄덕였다.
“백소에게서 강림혼요술이 느껴지지는 않아. 그렇다는 건 어찌됐든 그녀가 천문진인을 봤다는 뜻이야. 대형, 천룡전에서 외형을 바꿀 수 있는 자들이 있소?”
청하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대형이라니. 부끄럽지도 않니?”
“너는 걸레질이나 계속 해라. 시비 주제에 어디 어른들이 말씀하시는데 끼어들어!”
“이 놈이!”
이훤은 예순일곱 번째 대결을 펼치려는 두 명을 만류한 후 말했다.
“본적은 없죠. 하나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네요. 무엇보다 감각사도 중 락(樂)을 관장하는 사신사도는 저조차 만난 적이 없으니까요.”
남궁혁은 근래에 본 적이 없는 굳은 표정으로 지었다.
“흐음! 그럼 세가 내에 경계를 강화하고, 안휘성 전체에 제자들을 뿌려야겠군요. 그리고 무림맹에 이 사실을 알리려면······.”
그는 말끝을 흐렸다.
이훤과 노괴들이 그를 바라보며 혀를 차고 있었다.
“뭐하자는 거냐?”
남궁혁은 영문 모를 표정을 지은 채 대꾸했다.
“저들은 실패했음을 알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적극적으로 공세를 취하지 않겠습니까? 준비를 해야죠.”
“뭐가 실패했는데?”
“함정.”
악마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함정이라서 더 재밌는 게 아닌가?”
청하의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잖아.”
검후가 근엄한 표정으로 검배를 매만졌다.
“평소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사마외도가 백주대낮에 모습을 드러냈으니 이때를 노려 박멸하는 것이 마땅하다.”
남궁혁은 헛웃음을 지었다.
“허, 그래서 함정인 걸 알면서도 뛰어들겠다고요?”
이훤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래서 안 갈 거예요?”
남궁혁은 노괴들의 눈치를 보더니 억지웃음을 지었다.
“크하하! 당연히 가야지!”
“넌 빠져.”
청하의 한 마디에 남궁혁은 미간을 좁혔다.
“아니, 제가 왜 빠집니까? 여기는 남궁세가잖아요. 그러니 제가 세가를 지키기 위해 당연히 참전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남궁세가는 핑계에 불과했고, 그저 완성하지 못한 무형검을 실전으로 익히려는 것이 본심이리라.
하나 청하는 단호했다.
“백소라는 아이도 그렇고, 제왕전 뒤편의 건물만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조상의 위패와 세가의 비급만 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가문을 일으키는데 어려움이 없을 터.”
“무슨 뜻인지는 알지요. 한데 왜 제가 그걸 합니까?”
악마는 혀를 찼다.
“너 말고 누가 하는데?”
남궁혁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 소가주를 소개했다가 대차게 거절당하지 않았던가.
“칠공과 직계를 제왕전으로 부르겠습니다.”
청하는 빙긋 웃으며 남궁혁의 어깨를 두드렸다.
“잘 생각했다. 일문의 주인이라면 응당 멀리 봐야 할 터, 네가 자랑스럽구나.”
아무리 봐도 엄마가 떼쓰는 아이를 다독이는 듯한 광경이다.
이훤은 허공을 향해 외쳤다.
“탈마야!”
“예, 형님.”
녀석은 언제 지붕 위에 올라갔는지 다람쥐처럼 기둥을 타고 내려왔다.
“잠산이면 서쪽에서 오겠네. 혹시 그 새끼가 있는지 한 번 살펴봐라.”
수천 명이 모였다는 적진이다.
하지만 탈마는 마치 옆집에 쌀을 빌리러 가는 사람처럼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훤은 탈마를 떠나보내고, 한 걸음 물러섰다.
“가실까요?”
“호기롭게 나서더니 왜 뒤에 서려고 하느냐?”
“이런 일은 어른이 앞장을 서야지요.”
상대는 여자가 된 제룡검존을 알지 못하고, 잘생긴 청년이 되어버린 악재를 보지 못했다. 그러니 검후가 선두에 선다면 모든 이목이 집중되리라.
“쯧, 노인네를 공경하지는 못할망정······.”
하나 검후는 검을 늘어트린 채 산책이라도 하듯 걸음을 내딛었다.
이훤과 악마가 좌우에 섰고, 청하는 자연스럽게 후미를 맡았다. 고작 네 명에 불과했지만, 내원과 외원이 경계로 나아가는 모습이 마치 개선장군처럼 보였다.
끼이이이익-
창천성의 정문이 열리며 창천평의 전경이 드러났다.
본래 수십 개의 초소와 목책이 즐비하고, 그 사이를 지키는 무인들로 가득해야 했다. 하나 수십 개의 횃불만 일렁일 뿐 무인들이 보이지 않았다.
“함정은 잠산이 아니라 여기에 있었군.”
“아무래도 남궁세가 밖으로 끌어내는 게 목적이었나 봐.”
이훤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말을 건넸다.
“적이 옵니다.”
“알아. 저렇게 많이 다가오는데 모를 리가 있나.”
검후의 말에 이훤은 입꼬리를 올렸다.
“뒤에서 오는데요?”
창천성의 담장 위로 하나둘 씩 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이 걸친 무복의 가슴팍에는 너나 할 것 없이 은빛 검이 새겨져 있었다.
“제검백가? 방금 전까지 멀쩡하던 놈들이 단체로 눈 돌아간 이유가 뭐냐?”
악마의 조롱에 청하는 진심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 밥은 잘 먹였는데.”
“흥! 집안 꼴 잘 돌아가네.”
“너네 집만 하랴? 팽가 따위한테 쓸릴 뻔 했다며?”
그 사이 창천성의 담장 위는 물론이고, 정문을 통해 수백 명이 쏟아져 나왔다. 어느새 등 뒤로 적이 가득했다. 그리고 이내 어둠을 헤치고 더 많은 숫자의 적이 살기등등하게 나타났다.
이훤은 입술을 동그랗게 말더니 나직이 한 마디를 건넸다.
“호오! 가능?”
청하와 악마는 검과 창을 뽑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68, 사상 최강의 조합.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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