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마신-173화 (173/226)

< 67, 천룡전의 계획은 그럴싸했다. >

67, 천룡전의 계획은 그럴싸했다.

무형검(無形劍)을 익혔다.

하나 설명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니까 청하의 말처럼 나 자신을 지우다보니까 마치 방망이를 깎는 느낌으로요. 그렇게 다 지우고 상대방을 보니까 무형검이 됐어요.”

검후와 악마, 그리고 남궁혁은 가슴을 두드렸다.

“아! 그게 무슨 개소리야?”

“이 형, 우리를 놀리는 게요?”

“휴우, 아버님이랑 똑같은 소리를 하네.”

하나 청하는 탁자를 내리치며 빙긋 웃었다.

“그렇지? 다 지우고, 상대방을 보니까 거기 있었어!”

마치 다른 지역의 방언을 사용하는 것처럼 모두가 답답해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그 때 탈마가 눈을 끔뻑이다가 술잔과 술병을 놓았다.

“그러니까 술잔이 형님이고, 술병이 적이라 칩시다. 평소에는 이런 식으로 공격을 하겠죠?”

그는 술잔을 미는 순간 탁자 위를 미끄러지더니 술병과 부딪쳤다. 그리고 두 번 째는 술잔에 담겨 있던 술을 흘려 술병을 적시게 만들었다.

“그런데 무형검은 이 잔을 지워야 한다면서요? 그럼 문양도 모양도 사라지겠지요. 자! 이제 술잔이 없어졌어요.”

그리고는 잔에 담긴 술을 쏟아낸 후 치워버렸다.

“한데 다 지우고 남은 게 청하, 아니 남궁천운의 혼백이었다면 서요. 그럼 이쯤에 남궁천운의 혼백이 있다고 치지요.”

노괴들은 혀를 차며 마뜩찮은 기색을 드러냈다.

하나 탈마는 아랑곳 하지 않고, 젓가락을 꺼냈다.

그리고 술잔과 술병 사이에 놓았다.

“이게 혼백입니다. 아셨죠? 자! 다 지웠어요. 상대방을 봤어요. 무형검이 된데요. 그럼 이거 아닙니까?”

그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젓가락을 쥐었다. 그리고 젓가락으로 탁자에 흘린 술을 찍어서 술병 위로 떨어트렸다.

술 한 방울이 술병을 타고 흘렀다.

남궁혁이 노기를 드러냈다.

“뭐 하는 짓이야?”

하나 탈마의 말이 흘러나오는 순간 좌중에 개미 새끼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릴 만큼 조용해졌다.

“보세요. 탁자에는 아무 흔적도 남지 않고 술잔이 술병에 도달했네요. 설명이 부족한가?”

이번에는 젓가락으로 술을 찍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젓가락을 술병 위까지 이동시킨 후 내리꽂았고, 젓가락 자체가 술병에 꽂힌 채 흔들거렸다.

달그락-

“저는 무형지기가 뭔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무형검이란 신의 손짓 같은 거라고 치자고요. 그렇다면 인간이 볼 수 없을 만큼 높이 올라갔다가 내려오면 누가 올려 보냈는지 모르잖아요. 이 과정을 찰나의 순간 동안 만들어내면 그게 무형검 아닙니까?”

청하는 의자에 축 늘어진 채 탄성을 내뱉었다.

“허허.”

검후와 악마는 탁자 위의 잔흔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두 사람의 눈빛에서 서서히 초점이 사라졌다.

그리고 이내 혼탁한 기운이 맴돌며 각자의 세상에 빠져들었다.

“뭔데? 뭐냐고? 개소리였잖아?”

남궁혁만이 동조를 구하듯 중얼거리다가 청하의 손짓 한 방에 침묵했다. 소처럼 커다란 눈망울을 데굴데굴 굴리는 것이 여차하면 눈물이라도 흘릴 기세였다.

그리고 이훤은 탈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 동생이 이렇게 머리가 좋을 리 없는데? 어쩌면 차기 천하제일인은 네가 될지도 모르겠다.”

탈마는 이훤의 농에 입꼬리를 올렸다.

“형님하고 떨어져 지냈더니 술을 덜 마셔서 그런가. 머리가 좋아진 듯!

당분간 제왕전에서는 무형검이라는 화두가 사라지지 않으리라.

하나 이훤은 이미 다음 단계로 향했다.

그에게 있어서 무형검이란 구궁벽력공으로 사물을 움직이는 것의 연장선이 아니던가. 보이는 것을 움직이다가, 보이지 않는 것을 움직이는 것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번에도 천관심결이 활용된 듯했다.

‘십 성이 멀지 않았어.’

이훤은 천공혈륜겁의 다음 단계를 머릿속으로 그렸다.

아무래도 이제 천공(天恐)이라는 것을 맛보지 않을까 싶다.

*

남궁세가와 잠산의 거리는 백 리다.

강호인들에게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다.

하나 장강을 건너야 했기에 남궁세가는 잠산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잠산 아래 위치한 객잔은 황량하기만 했다.

상인과 표사는 물론이고, 양민들까지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구화산 방면으로 길을 잡았다. 그리고 서쪽으로 이동하려면 장강의 물줄기를 활용했다. 그러니 잠산은 특별한 것을 찾을 없는 벽촌으로 남겨졌다.

달그락-

객잔은 주인의 바람이 담겼는지 양풍(羊風)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하나 상서로운 바람 대신 피 냄새를 듬뿍 머금은 바람이 불었다.

흑의인은 규칙적으로 술잔을 매만졌다.

달그락-

결국 잔이 뒤집히며 술이 쏟아졌고, 싸구려 주향이 퍼져나갔다.

그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전방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꼭 닮은 두 명의 노인이 불편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이훤이 보았다면 종남파와 봉황회에서 만났던 사상사도라며 당장 머리를 쪼갰으리라.

“사군사도는 전멸했고, 사상도 둘 만 남았군요.”

“그 일에는 흑의의 지분도 상당하다고 들었소만?”

우측에 앉은 노인이 말을 건넸다.

흑의가 빙긋 웃자, 좌측에 앉은 이가 말을 덧붙였다.

“우리도 사지로 밀어 넣으려고 불렀소?”

분노를 관장하는 사상사도답게 흑의를 보는 시선이 칼날처럼 날카롭다.

하나 흑의는 대답 대신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히죽 웃으며 말했다.

“아무리 봐도 구분을 할 수 없군요. 이렇게 둘만 남았으니 이름을 바꿉시다. 음노와 양노, 어떻소?”

두 노인은 천룡이 하사한 명칭을 바꾸겠다는 말에도 화를 내는 대신 눈을 부릅떴다. 그들이 화를 내야 하는 것처럼 사색사도는 언제나 웃어야 했다. 따귀를 맞아도, 칼을 맞아도, 죽는 그 순간까지 웃어야 하는 종자였다.

한데 흑의인은 음노(陰老)와 양노(陽老)를 거론할 때 더없이 서늘한 눈빛을 발산했다.

“당신, 어떻게?”

“설마 최초의 사도이기 때문인가?”

두 노인의 말에 흑의인은 대꾸하는 대신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러자 다시 한 번 기사가 벌어졌다. 흑의인의 두 눈이 귀화처럼 일렁이는 것이 아닌가.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흑의인이 유부에서 끌어올린 듯한 귀곡성처럼 음산한 어투로 물었다.

“천룡께서 너희들을 내게 보냈다. 그건 생사여탈권을 주신 것임을 인정하느냐?”

우측의 노인은 전신을 부르르 떨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하오. 음노가 되겠소.”

“나 또한 양노가 되어 흑의의 명을 따르겠소.”

흑의인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좋군요. 처음부터 사도끼리 힘을 모아서 신마의 심득을 모았으면 어땠을까 싶네요. 절반 이상이 죽었지만, 이제라도 힘을 모아서 천룡께 도움이 되도록 합시다.”

음노와 양노는 대답 대신 고개를 조아렸다.

흑의인은 양 팔을 뻗어 음노와 양노의 손을 잡았다.

“아! 지금까지 일궈놓은 세력들은 모두 데리고 오셨겠지요?”

“강소성에서 불러들인 자들이 경성산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창천성과 반 시진 거리이니 흑의께서 원하신다면 언제든 발호할 것입니다.”

음노의 대답에 이어 양노가 질세라 대꾸했다.

“포양호에서 출발한 이들이 장강을 거슬러 오르고 있습니다. 안경에서 일차적으로 대기한 후 흑의의 명령이 있으면 황산으로 향할 겁니다.”

“좋군요. 사자림과 석가장의 무인들이 잠산에 있습니다. 때를 보아 함께 움직인다면 남궁세가라고 해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겁니다.”

이번에는 음노와 양노도 눈을 번뜩였다.

현재 남궁세가 안에는 여섯 개의 심득 중 세 가지가 모여 있지 않던가. 그리고 그들이 전해 듣기에 천룡은 강림혼요술에 이어 만매만전을 통해 두 번째 심득을 얻었고, 최근 세 번째를 얻었다 했다.

“만약 남궁세가에서 세 가지를 얻는다면······.”

“수십 년의 암행도 이제 끝이로구나!”

두 사람이 결의를 다지는 사이 흑의인은 반대편의 다루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반나절의 시간을 보냈다.

가장 먼저 그를 찾아온 건 사자림주였다. 그는 한때 자신의 아들이었던 흑의인을 보며 침음을 내뱉었다. 하나 흑의인은 오히려 아련한 사자림주의 시선을 즐겼다.

“물건은요?”

사자림주의 표정에서 감정이 사라졌고, 이내 무덤덤한 한 마디가 들려왔다.

“사객이 석가장의 무인들과 밤이 되기 전에 도착할 겁니다. 하북에서 이곳까지 수십 일에 걸친 여정이었으니 하루 정도는 쉬어야 할 겁니다.”

흑의인은 장강 너머에 펼쳐진 드넓은 창천평을 보며 빙긋 웃었다.

“어차피 시간이 흐를수록 남궁세가는 우리 쪽으로 돌아서고 있어요. 그러니 삼 일의 휴식을 주세요.

“그리하겠습니다.”

사자림주가 물러갔다.

그는 사자림에 속한 삼백 명의 고수를 모두 끌고 온 상태였다. 수백 년 간 삼비(三秘)에 속하여 명맥을 유지한 문파가 망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지만, 걸음걸이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삼 일 동안 잠산 주변은 외지인으로 붐볐다.

한데 놀랍게도 개방과 하오문은 물론이고, 남궁세가조차 의아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흑의인 앞에 똑같은 얼굴을 한 자가 등장했다. 흑의와 다른 것이 있다면 그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붉은 색이라는 점이다. 사색사도 중 흑의와 더불어 생존하고 있는 홍의인이었다.

“홍의.”

“흑의.”

“준비는 다 됐나요?”

홍의의 입매가 기괴하게 비틀렸다.

아무래도 똑같이 생긴 자를 앞에 두고도 웃어야 하는 상황이 어색한 듯했다.

“당신의 말처럼 남궁세가는 예전과 다르더군요. 모든 것이 내원의 특정 장소를 위해 돌아가고 있어요. 그렇기에 오히려 외부에 대한 관심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더군요.”

“좋아요. 때가 되었네요.”

흑의인은 홍의인이 입을 열기 전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이 일을 지휘해주세요. 모든 공은 그대의 것으로······.”

“불안하게 왜 이러시지요?”

“자신 없으면 물러나도 좋습니다. 물론 사자림과 석가장의 세력까지 건넬 생각이에요.”

홍의인의 미소가 짙게 번져나갔다.

흑의인의 세력은 감각사도 중에서도 손꼽힐 만큼 강했다. 거기에 음노와 양노가 더해졌고, 적을 끌어낼 미끼까지 확실한 상태였다.

“제가 이어받도록 하지요.”

흑의인은 고개를 끄덕인 후 말을 건넸다.

“대신 한 가지 사소한 부탁이 있어요.”

홍의인은 흑의인이 수작을 부리는 건 아닌지 의심했다. 하나 뒤이은 말에는 오히려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 옷을 입으세요. 이훤은 어찌된 일인지 저만 관계가 되면 이성을 잃는 횟수가 잦더군요.”

“그 정도야 얼마든지.”

흑의인은 여벌의 옷을 건넸고, 홍의인은 빠르게 갈아입었다.

“그럼 저는 이만.”

“보지 않을 건가요?”

홍의인의 의구심 섞인 물음에 흑의인은 손바닥을 보이며 말했다.

“이걸로 끝이 아니잖아요. 이제 무쇄검을 찾아야 하니 사신사도와 논의를 해볼까 해요.”

아예 안휘성 자체를 뜬단다.

홍의인으로서는 바라마지 않던 상황이었다.

“배웅은 하지 않도록 하지요. 미끼는?”

“오늘 밤 떠날 겁니다. 걱정 마세요. 제 말처럼 이훤이 남궁세가에 들어간 이후 틈이 생겼잖아요. 부디 성공해서 천룡께서 대업을 이루는데 한 축이 되기를 기원할게요.”

흑의인은 떠났고, 홍의인은 잠산 인근에 퍼져 있던 천룡전의 세력을 모조리 끌어 모았다. 그리고 그 날 밤 호리호리한 체구의 여인이 잠산을 벗어나 장강을 건넜다.

*

평온하고, 즐겁고, 만족스런 나날이었다.

술을 원하는 만큼 마시고, 지겨울 때까지 무리를 논했다.

남궁혁의 투정만 아니었다면 취선관만큼이나 즐거웠으리라.

“소가주인 남궁세룡이라고 합니다.”

사십 줄에 접어든 중년인이 이훤에게 허리를 깊이 숙였다. 웃어른으로 대하는 듯 정중한 자세였지만, 눈빛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남궁혁은 그 모습을 보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크하하! 내 아들이지만, 참 난 놈이야. 이 정도면 세가를 물려받아도 되지 않겠는가?”

마치 청하가 들으라는 듯 소리 높여 외쳤다.

하지만 청하는 시비의 역할을 자처했으니 모르쇠로 일관했고, 오히려 악마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쯧쯧, 저 나이에 삼화취정을 지나 고작 반박귀진에 이르렀으니 폐관부터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소가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나 검후는 무례한 악마의 언사에도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세룡이라고? 창천의 검을 물려받으려면 아직 갈 길이 멀어. 매일 같이 정진하면서 시야를 넓게 하라. 그리하면 곧 도착지가 보일 게야.”

소가주는 검후의 말까지 귓등으로 흘릴 수는 없었는지 어색한 미소를 그렸다.

“그리 하겠습니다.”

남궁혁은 소가주를 돌려보낸 후 푸념을 하듯 말했다.

“하아! 나는 언제까지 가주 자리를 지켜야 하는가.”

청하는 탁자를 닦던 걸레를 집어던졌다.

“내가 허락할 때까지는 네가 가주다! 최소한 선대가 일궈놓은 가업을 쇠퇴시키는 건 내가 용납하지 않아!”

아무래도 갑작스런 소가주의 등장으로 인해 걸레질을 해야 했던 것이 문제였나 보다. 청하는 뾰족한 목소리로 남궁혁을 질책하려다 이내 말을 아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이가 알 수 있었다.

소가주인 남궁세룡이 한 여인을 껴안 듯이 한 채로 달려왔다.

“갑자기 첩이라도 들이려는 건가?”

악마의 투덜거림에 탈마가 헤죽 웃었다.

“예쁘네요. 아! 그리고 아는 사람이군요.”

이훤의 두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백소!”

무당산에서 요양을 하고 있어야 할 백소가 어째서 남궁세가에 나타났단 말인가.

“무당파의 신표를 건네면서 지금 당장 취선관주를 만나야 한다고 했답니다. 중요한 일처럼 보여서 당장 데리고 왔습니다.”

이훤이 백소의 정체를 알려주자, 검후가 달려들었다.

그녀가 초췌한 백소의 등에 내력을 불어넣자, 파리하던 안색에 핏기가 돌았다.

“으으으으.”

“정신이 드느냐?”

백소는 낯선 이들로 인해 몸을 웅크렸다가 이훤을 보고는 황급히 양손을 맞잡으며 외쳤다.

“은공, 사부님이 살아 계세요!”

< 67, 천룡전의 계획은 그럴싸했다.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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