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마신-172화 (172/226)

< 66, 최고의 한 쌍. (2) >

이훤이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검후가 두 사람을 보더니 혀를 찼기 때문이다.

“멍청이가 둘로 늘었군. 겨우 오십 년 밖에 흐르지 않았거늘 벌써 잊은 겐가?”

청하와 악마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움에 인지하지 못했지만, 잠시 후 자신의 상황을 인지한 게다.

- 내가 그랬으니 상대도 그럴 수 있다.

그 결과 청하의 전신에서 푸르스름한 기운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악마를 중심으로 한 푸르스름한 기운 역시 뒤지지 않은 채 허공에서 부딪쳤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의 기운은 기본적으로 뇌기를 띄고 있었다.

“흥! 몸만 어려진 게 아니라 단전도 쪼그라들었나 보군.”

“있는 게 사라진 네 놈만 할까!”

“이 아이를 모욕하면 살아서 제왕전을 나갈 수 없을 것이다!”

“닥쳐라! 오십 년 전 네 놈에게 받은 모욕으로 인해 아직도 꿈자리가 사납다!”

콰쾅!

악마의 창은 신병이기라도 되는 것처럼 수백 개로 분화했다. 그리고 마치 유성우(流星雨)가 떨어지듯 청하의 전신에 꽂혀들었다.

“장관이로군.”

남궁혁의 두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그도 그럴 것이 내공을 외부로 흩뿌리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악마처럼 거대한 기운을 조율하여 청하, 한 명에게만 집중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무인이 단전에 쌓은 내공 자체가 본래 자연지기를 빌려온 것이고, 그것은 언제나 왔던 곳으로 돌아가려 하기 때문이다.

“저 정도는 제왕전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잖아.”

이훤의 투덜거림에 탈마는 눈을 끔뻑이다가 슬쩍 뒷걸음질 쳐 문 밖으로 나갔다.

“적당히 해! 이 미친놈들아.”

검후의 일갈에 그녀를 자극했던 것일까.

청하의 두 눈에서 뇌기가 일렁이더니 악마의 기운을 하나씩 깨부수기 시작했다.

터터터터터터터터터텅!

이 또한 장관이라 할 수 있었다.

거대한 기운이 수백 번이나 부딪쳤음에도 탁자조차 밀려나지 않았다. 마치 가상의 공간에서 싸우듯 두 사람은 쉴 새 없이 싸웠다. 절대지경을 지나 초월경으로 향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하나 장난으로 시작된 싸움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공방이 이어질수록 외부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이훤을 비롯한 방관자들은 간간히 내력을 끌어내 파편을 받아쳤다.

“신마의 진짜 목적을 알려주지!”

이훤이 참다못해 외치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두 사람이 내력을 갈무리했다.

“그게 뭔데?”

남궁혁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가주라는 무게를 내려놓은 남궁혁은 그야말로 검에 미친 자가 분명했다. 검천이라는 별호가 무색할 만큼 경박한 모습을 보라.

이훤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알게 뭐야.”

“뭐라고?”

남궁혁이 인상을 썼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청하와 악마도 멈춰야 함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저 밀린 채 끝내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니 이훤의 말에 흔쾌히 내력을 거뒀으리라.

“견원지간이 따로 없군.”

검후는 혀를 찼다.

이번만은 청하나 악마도 시선을 피할 뿐이다.

“당시 이 몸은 차기 검후로 지목되어 신마를 추적하던 중 보타암으로 돌아갔지. 당시 내 별호가 뭐였는지 아느냐?”

사실 궁금하지 않았다.

신마의 심득을 해석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지친 하루였다. 남궁혁도 마찬가지였으리라. 하나 탈마가 물색없이 헤실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였나요?”

“천중화려였단다.”

천중화려(天中華麗)라는 믿기 힘든 별호에 청하와 악마를 번갈아봤다. 두 사람이 반박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고금제일의 미녀에게나 붙을 법한 별호가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역시 세월에는 장사, 아니 미녀가 없구나.’

검후는 옛 추억에 젖은 듯 침음을 흘렸다.

“흐음, 그 때 참 인기가 많았지. 구파오가의 후기지수 중 내게 꽃을 보내지 않은 이가 없었단다. 하나 내가 간택한 건 조달수였지.”

간택이란다.

검후의 광오한 한 마디에 청하와 악마는 또 반박하지 않았다. 하나 이훤이 마주했던 망아취자라면 결코 먼저 검후에게 달려들지 않았으리라. 뭔가 했더라도 후기지수들이 분열하지 않게 수를 썼을 터였다.

‘아! 그러고 보면 스승님에게도 악재가 살아 있음을 알려드렸어도 되는 거잖아.’

이렇게 서로 보기만 해도 알아차릴 줄 어찌 알았으랴.

그 사이에도 검후의 말이 계속됐다.

“그 때의 남궁천운은 사람의 뒷배와 외관을 중시했어. 악재는 그것을 경멸했지. 그도 그럴 것이 엄청 못 생겼었거든. 그래서 술에 취하면 늘 중얼거리곤 했지. 다음에 다시 태어나면 천하제일의 미남으로 태어나 남궁천운을 비웃어줄 거라고 말이야.”

남궁혁은 대 놓고 하품을 했고, 탈마는 소매에서 전표를 꺼내 헤아렸다. 그러던 중 청천벽력과도 같은 한 마디가 검후에게서 튀어나왔다.

“그러니 지금이라면 둘이 혼인해도 되지 않을까?”

이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말을 하고 싶으셨던 겁니까?”

검후는 박장대소를 했고, 청하와 악마는 똥 씹은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것만 봐도 어린 시절 두 사람이 검후를 연모했던 건 사실로 여겨졌다.

“흥!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청하가 먼저 항복을 선언했다.

남궁혁은 수하를 불러 노괴들의 잠자리를 준비했고, 홀로 남은 이훤은 생각에 잠겼다.

‘남은 건 소천기 제갈삭과 무쇄검 축융노도인가.’

천룡전을 때려잡기 위해 열심히 뛰다보니 어느새 절명곡의 생존자 중 대부분과 인연을 맺었다. 아직까지는 정상인 두 명과 비정상인 두 명이다.

그러다보니 남은 두 사람에 대한 의문이 증폭됐다.

“소천기와 무쇄검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청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쥐새끼와 대장부였지.”

오만함으로 인해 악재를 멸시했다는 그가 비웃는 자라면 한 번 더 살펴봐야 할 터였다. 반면 그가 인정한 사람이라면 보기보다 대단한 사람이 분명했다.

악재는 혀를 찼다.

“머리 좋은 놈과 입담이 좋은 놈.”

정석적인 설명이리라.

반면 검후는 회한에 젖어 한 숨을 흘렸다.

“버드나무와 대나무 같은 녀석들이었어. 하지만 둘 다 꺾였지.”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남궁세가의 가주인 남궁혁이 기다렸다는 듯이 끼어들었다. 아무래도 천하정세를 논하는데 방관만 하던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제갈세가는 본래 지자를 대우했고, 그로 인해 천하재사라는 자들이 몰려들어 문전성시를 이뤘네. 하나 오십 년 전부터 제갈세가는 외인을 들이지 않았어. 또한 자격이 되지 않는다면 방계와 직계를 가리지 않고 내쫓았지. 마치 소수의 선택받은 이들을 위한 세가가 되어버렸다네.”

이훤은 침음을 흘렸다.

절명곡의 생존자 중 세가 출신은 세 명이다.

한데 공교롭게도 세 명으로 인해 세가가 변했다.

산동악가는 빈객까지 끌어안고, 신마의 심득을 전하여 세가의 세를 불렸다. 남궁세가는 전대가주와 당대 가주만 심득을 독차지 한 채 세가 자체를 버리다시피 했다. 한데 제갈세가는 공유는 했지만, 세가의 세를 오히려 줄였단다.

“어떤 모략을 획책하는지는 그들의 알려주지 않는다면 누구도 알 수 없겠지.”

불현 듯 화산연맹의 발족식이 뇌리를 스쳤다.

당시 제갈세가에서 보낸 사절은 풍천목이라는 자로 무림맹 군사부 서열 이 위까지 오른 명숙이었다. 당연히 제갈 씨가 올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아서 수뇌부가 당황했다는 이야기가 있지 않았던가.

‘후우, 마지막으로 갈수록 쉽지가 않겠군.’

한데 진짜 난관은 따로 있었다.

“형산파의 멸문이야 이미 알고 있을 테지. 그리고 무쇄검 축융노도는 지난 오십 년 간 단 한 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네. 심지어 형산파가 멸문하는 날에도 말이지.”

행방불명(行方不明).

이훤은 입맛을 다시며 아쉬움을 달랬다.

하나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어쩌면 천문진인이 남긴 천관심결의 영향일 수도 있다.

‘어딘가에 살아 있겠지. 분명!’

이훤은 탈마에게 눈짓을 한 후 자리를 떴다.

그는 새롭게 마련된 처소에 들어선 후 생각에 잠겼다.

‘천룡전. 천룡전. 병신 같은 천룡전.’

이제야 천룡전이 이십 년 후에도 천하에 군림하지 못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절명곡의 생존자들이 죄다 살아 있으니 미혼술 하나만 가지고는 암중에서 용을 쓰는 것이 전부였으리라. 하물며 청하가 호언장담을 하지 않았던가. 그녀는 가솔들에게 제대로 된 심득을 전하지는 않았으나, 무형검을 세가 전체에 흩뿌렸으니 천룡전의 잔당은 누구 한 명 들어서지 못할 것이라 했다. 천룡전의 감각사도 들어오지 못하니 가솔이나 빈객 중에서도 세뇌당하는 이가 있을 리 없다. 어쩌면 이곳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강림혼요술로부터 자유로운 지역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훤은 코웃음을 쳤다.

하나 병신 같다고 해서 용서할 대상은 아니지 않은가.

‘쯧, 다른 놈은 몰라도 천룡과 소마. 둘은 반드시 찢어  죽인다!’

“형님, 표정 왜 그래요?”

“천룡전 생각 하고 있었어.”

“아! 그 개새끼들. 생각보다 약해서 강아지한테도 당할 것 같이 귀찮기만 한 새끼들. 그러고 보니 약간 날파리 같지 않아요? 찾기는 힘든데 막상 찾기만 하면 쉽게 박멸할 수 있잖아요.”

이훤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탈마의 느긋함에 전염이 되기라도 한 것일까.

녀석이 건네는 술의 영향일까.

지난 열흘 동안 마신 술보다 지금의 술 한 잔의 향이 훨씬 더 깊고, 풍부했다.

“도연명이 논하기를······.”

탈마는 이훤이 시를 읊는 순간 눈과 귀를 닫았다.

그리고 조금 전 보았던 청하를 떠올렸다.

‘악마는 더럽게 잘생겼고, 청하는 엄청 예쁘지. 그러니 나도 홍천기공을 대성하면 잘생겨지는 게 아닐까?’

*

“그래서 신마의 심득으로 환생이라도 했다는 건가?”

“대꾸할 가치가 없네.”

악마의 물음에 청하는 아예 돌아앉았다.

“아! 환생 같은 기적이 너 처럼 성질 더러운 놈에게 일어날 리 없지. 그럼 빙의인가? 무당의 천관이 있었다면 잡귀 따위는 부적 한 방에 날려버렸을 텐데.”

“네가 예전보다 강해진 건 알겠다. 하지만 비리비리한 놈이 강해진 것과 강한 자가 더 강해진 것의 차이를 알기나 하냐? 듣자 하니 몸에 진법을 그려 넣었다고?”

“몸을 건드린 것도 아니고, 진법을 그린 것도 아니다!”

“아직도 하찮은 육신에 매달려 있는 걸 보면 우리 여섯 명 중에서 네 놈이 가장 허약할 게다!”

“내 창으로 꼬치를 만들어줄까?”

“쯧쯧, 네 턱 밑에 무형검이 붙어 있는 것도 모르냐? 이대로 목젖을 찔러 줄까?”

“이 새끼가! 당장 치우지 못해! 계집애라고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뻥이다. 얼굴만 잘생겨지면 무엇 하냐? 겁쟁이 같은 놈!”

검후가 짜증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너희들은 뭐라도 얻었잖아. 내가 수십 년 동안 강호를 떠돌며 협행을 하는 동안 제 욕심이나 차린 것들이······.”

남궁혁은 먼 산을 쳐다봤다.

아버지 앞이라 연초를 태울 수도 없으니 심검을 얻고 고금제일인이 되는 망상이라도 하는 듯했다.

이훤과 탈마는 술을 주고받았다.

천하제일세가라는 말처럼 남궁세가의 창고에는 듣도 보도 못한 술이 가득했다.

“만나면 악담을 한참동안 쏟아내야 하니 일단 마시자.”

“네. 전마가 돈 마련하면 찾아온다고 하더군요. 아무래도 악마를 보러 오는 것 같지만요. 그리고 색마 놈은 무슨 결심을 했는지 하오문을 가지고 돌아오겠답니다.”

이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개방도가 왜 하오문을 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개방이 넘어오겠어요. 하오문에 가서 도박이라도 하려나 보죠.”

“뭐가 됐든 가지고만 오면 도움이 되기는 하겠다.”

그러던 중 노괴들의 심력 소모가 끝난 듯 악다구니가 잦아들었다.

“자! 그럼 무형검에 대해서 논의해 보죠.”

이훤이 박수를 치며 외치자, 노인들은 인솔자를 따르는 아이들처럼 모여 앉았다. 어차피 무림맹에서 개최하는 무림대회의까지의 시간은 충분했다.

천공혈륜겁을 제외한 신마의 심득 중 네 가지가 모인 자리였다. 거기에 불문을 대표하는 검후의 오의가 더해지면서 무형검의 묘리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하하!”

이훤이 웃는 순간 청하와 악마가 표정을 굳혔다.

어떠한 징조도 없이 청하의 소매가 잘려나갔고, 악마의 창두가 쇠에 얻어맞은 것처럼 진동했다.

“무형검인가?”

청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더듬거렸다.

이훤은 그녀와 악마를 번갈아봤다.

‘두 사람이 완벽하게 안과 밖을 양분했을 줄이야.’

그야말로 최고의 한 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였다.

< 66, 최고의 한 쌍.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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