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 자강두천(諮强頭闡). >
65, 자강두천(諮强頭闡).
남궁혁은 물끄러미 이훤을 응시했다.
평정을 가장하기 위해 박장대소를 하지도 않았고, 무시당했다며 화를 내지도 않았다. 자신의 말이 절대적으로 옳고, 상대는 트집을 잡는 것이라 생각할 뿐이다. 스스로가 진짜이거늘 굳이 다른 자의 언행에 휘둘릴 필요가 없다고 여겼으리라. 하여 소호(巢湖)처럼 고요한 눈동자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고, 입술을 살짝 움직여 한 마디를 내뱉었다.
“유치하군.”
감정의 고저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을 짓밟고 올라선 이의 여유였다.
그로 인해 이훤은 한 가지를 확인했다.
‘네 욕망의 근원은 결코 세가가 아니로구나.’
천하제일세가, 검중제일가.
이런 칭호는 발에 걸리는 돌처럼 귀찮아 할 자였다.
만약 그가 세가를 중시했다면 화산을 언급하여 도발하는 순간 감정을 드러냈으리라. 술에 관한 문제가 생겼을 때 이훤이 발끈하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검(劍)이로구나.
남궁혁은 신검합일의 경지를 항시 유지할 만큼 검에 대한 욕망이 대단했다.
이훤은 유치하다는 말을 되돌려줬다.
“욕심쟁이네.
남궁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낸 게다.
그도 서로가 동류(同類)임을 확인했으리라.
그 증거로 남궁혁의 입매가 서서히 휘어져 미소로 바뀌었다.
이것이 범인(凡人)과 그가 다른 점이다.
평범한 사람은 자신과 동류를 만나면 거울을 본 것처럼 꺼려하기 마련이다. 천재는 꺼려하지 않지만, 우열을 가리려고 할 터였다. 승리할 때 희열을 느끼고, 패배할 때 좌절하리라.
하나 무엇이 됐든 끝을 본 자는 달랐다.
궁극에 이르렀거늘 누구도 알아주지 않으니 허무하고, 고독함에 사무칠 뿐이다. 그렇기에 동류와 만난다면 모든 것을 내어주고서라도 칭송을 받으려 했다.
나이를 초월한 우정.
신분을 초월한 신뢰.
무위를 초월한 협심.
이 모든 것의 바탕에는 자신을 진실로 알아주는 상대에 대한 배려가 담겨 있었다.
그래서 남궁혁은 즐거움을 감추지 않았다.
이훤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가족과 수하가 죽었어도 상관없을 터였다. 수백 년간 이어온 세가의 명성이 퇴색되고, 역사가 담긴 건물이 무너졌어도 개의치 않았다.
그래서 웃는다.
“하하.”
남궁혁은 처음 웃는 사람처럼 어색한 소리를 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훤은 남궁혁의 웃음에 담긴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하여 어깨를 으쓱거린 후 예기치 못한 한 마디를 내뱉었다.
“술 있나?”
가주의 등장으로 인해 분노를 억눌러야 했던 노교와 탁탑령의 얼굴이 한 번 더 일그러졌다. 지금까지 이훤에게 죽은 자만 해도 기십이고, 부상자를 헤아리면 세 자리를 넘길 것이다. 그렇기에 남궁세가의 이름으로 무림맹을 압박하여 무림공적이라는 멍에까지 뒤집어씌울 요량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이훤은 앞으로의 삶이 결정될 기로에 섰으니 불안해하고, 두려워해야 마땅했다. 한데 잔칫집에 놀러온 사람처럼 느긋하게 술을 찾는 언사에 불쾌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가주라면 불경한 언행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나 가주는 느긋하게 한 마디를 흘렸다.
“청하야.”
호롱불 뒤에서 궁장을 입은 이십대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궁장이 바닥에 쓸릴 때마다 사부작거리는 소리마저 음란하게 여겨질 만큼 색정적인 자태였다.
“제일 좋은 술을 내오너라.”
청하(淸河)는 가볍게 고개만 까딱인 후 뒷걸음질 치며 자취를 감췄다. 잠시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일련의 과정 동안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궁장이 끌리는 소리가 아니었다면 귀신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저것도 칠공이겠군.’
이훤은 슬쩍 고개를 돌려 노교를 바라봤다.
노교와 탁탑령은 가주가 나타났을 때부터 석상이라도 된 것처럼 옴짝달싹 하지 못했다. 이훤은 노교를 향해 한쪽 눈썹을 찡긋거렸다. 노교의 흰 눈썹이 역팔자를 그렸지만, 가주의 시선이 닿자 황급히 표정을 바로했다. 이내 가주의 한 마디가 들려왔다.
“가서 검후를 불러와라. 이제 주책은 그만 부려도 된다고 하면 알아들을 것이야.”
이훤은 나지막이 탄성을 흘렸다.
남궁세가의 정보망과 은밀함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미 검후의 등장과 자신과의 관계까지 모두 알고 있는 듯하지 않은가.
“탁탑령은 가서 쉬게. 오늘은 밤이 아주 길 터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이미 구경꾼들은 가주가 등장하는 순간 썰물처럼 빠져나간 후였다. 그렇기에 탁탑령마저 자리를 뜨니 제왕전 앞은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이것 봐라?’
그 어떤 문파와 세가라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 수하들이 순순히 따르기란 쉽지 않았다. 최소한 의문을 제기하거나, 우려의 한 마디를 남길 터였다. 세가의 존폐에 그들의 운명도 걸려 있기 때문이다. 하나 남궁세가의 가솔들은 가주의 말이라면 강림혼요술에 걸린 것처럼 망설이지 않았다.
‘천룡 같은 새끼보다 훨씬 낫네.’
이훤은 피식 웃으며 제왕전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한데 그 순간 어디선가 푸른 비단이 너울거리며 날아들더니 바닥에 깔렸다.
촤라라라라라락!
하나 이훤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한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비단 위에 올라섰고, 걸음을 내딛었다.
“좋군. 아주 좋아.”
남궁혁은 이훤의 무방비한 자세에 말을 건넸다.
보면 볼수록 거울을 보는 것처럼 익숙했다.
이제야 수십 년 동안 반복했던 혼잣말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솨아아아-
그의 속내는 표정이 아니라 행동으로 드러났다.
양 손을 들어 이리저리 휘젓는 순간 주변의 사물이 저절로 움직였다. 어둠 속에서 탁자가 나타났고, 의자가 끌려왔으며 술잔이 허공에서 날아들었다. 손가락만 까딱거린 것으로 훌륭한 술자리가 탄생했다.
“술은 언제 오지?”
이훤은 남궁혁이 앉으라는 말을 하기 전에 냅다 엉덩이를 붙였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술을 요구했다. 두 사람은 서로 손을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웠다.
“좋은 것일수록 기다림이 긴 법이야.”
남궁혁이 이훤을 만나기 위해 오랜 시간을 보냈다는 의미였다. 두 사람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서로의 눈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기다림이 길었다고 해서 꼭 만족한다는 보장도 없지.”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다.
이훤은 신마의 심득을 얻기 위해 사마외도나 할 법한 짓을 했음에 사과하지 않았고, 남궁혁 또한 세가의 피해와 가솔들의 죽음을 거론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를 살필 뿐이다.
도움이 될지, 쓸 만한지, 어디까지 얘기해야 할지.
한데 이훤의 눈빛은 점차 남궁혁뿐 아니라 주변의 모든 것을 담기 시작했다. 이내 뿌옇게 흐려졌고, 자연스럽게 회귀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남궁세가에서······.’
기억을 오래 더듬을 것도 없다.
회귀 전 남궁세가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지금의 세력만 해도 이정도이거늘 향후 이십 년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을 리 없다. 무슨 일을 하던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는 뜻이 아닌가. 그래서 더 두렵고, 경계하는 존재가 남궁세가였다.
‘이름이 알려진 건 오직 창무검제 남궁채린 뿐.’
그리고 그나마 복우전이 정인의 복수를 하기 위해 월담을 했다가 시신으로 발견됐다는 정도가 알려졌을 뿐이다.
그 말인즉슨.
이훤의 시야가 맑아지며 다시금 남궁혁을 응시했다.
‘당신은 앞으로 이십 년이 지나도 성공하지 못한다는 뜻이지.’
이건 정말 중요한 정보였다.
남궁혁과 무슨 대화를 하더라도 귓등으로 흘리고, 무시하고, 반대하다보면 결말로 가는 지름길이 드러날 터였다. 물론 술을 얻어마셨다고 해서 공짜로 알려줄 생각은 전무했다.
‘역시 제값을 치르고 마시는 술보다 공짜 술이 좋고, 공짜 술보다 좋은 게 훔쳐 마시는 술이지.’
좋은 건 혼자 마셔야 좋은 법이다.
좋은 무공 또한 마찬가지였다.
“눈에 욕심이 그득하군.”
“당신 또한.”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웃었다.
하나 눈 한 번 깜빡거린 후 서로의 심장에 칼을 꽂아도 이상할 것이 없는 대치였다. 그리고 이미 보이지 않는 기세가 서로의 빈틈을 찾아 쉼 없이 출렁거리는 상태이기도 했다.
자박자박-
이훤의 오른쪽 눈매가 살짝 꿈틀댄다.
우측에서 다가오는 청하가 내는 소리였다.
술을 들고 오는 길이니 발소리가 달라진 건 어쩌면 당연했다. 한데 여전히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고, 발소리가 달라진 것만으로도 신경이 쓰였다.
‘뭐지? 이상하게 거슬리는데.’
이훤은 혀를 찼다.
자신이 잠깐 신경을 돌린 사이 남궁혁이 웃고 있었다. 마치 의미 없는 대결에서 패배한 듯한 씁쓸함이 밀려왔다. 하나 그것도 청하가 술을 내려놓는 순간 말끔하게 사라졌다. 그녀가 밀봉한 술을 따는 순간 흘러나온 주향이 원인이었다.
‘좋은 술.’
회귀 전의 기억을 더듬어 봐도 후각에 기억되지 않은 냄새였다.
쪼르륵-
청하가 남궁혁과 이훤의 잔을 채웠다.
이훤은 한 번 더 놀라야 했다.
그녀의 가슴골이 훤히 보일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한데 응당 느껴져야 할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냄새가 없어?’
보면 볼수록 희한한 여자였다.
심지어 겉으로 보이는 나이가 진짜인지도 의심스러웠다.
그 때 청하가 자세를 바로 하더니 예상 외로 입을 열었다.
“술은 유한하니 두 분께서는 술잔을 비우기 전에 서로에게 세 가지 정도의 질문을 하는 것이 어떨까요?”
뜻밖의 한 마디였다.
노교를 비롯한 이들은 가주에게 말조차 걸지 못했다.
한데 청하라는 여인은 대화는 물론이고, 조언까지 서슴지 않고 건네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면 밤이슬을 맞는 이들과 달리 청하는 제왕전 안에 들어와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잠시 부적절한 관계를 의심하기도 했으나, 적절한 때에 좋은 조언이었다.
“왜 기다리지 않았나?”
빈 잔이 채워지고, 다시 비워지기를 반복했다.
더 이상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나선 길이다.
이훤은 남궁혁의 물음에 솔직하게 대답했다.
“신마의 심득을 찾으러 왔지. 제룡검존은 절명곡에서 무엇을 봤지?”
청하는 술을 채웠다.
하나 남궁혁은 지금까지와 달리 술잔을 들지 않았다.
“너는 몇 개를 익혔느냐?”
남궁세가의 정보력이라면 이훤이 산동악가를 다녀온 후 강해졌음을 모르지 않을 터였다. 그렇기에 화산과 악가의 심득을 얻었다고 여겼으리라.
이훤은 미간을 좁혔다.
질문의 요지가 잘못되지 않았는가.
“질문은 질문으로 돌려주는 게 예의겠지. 내가 두 개를 익혔다고 알고 있잖아. 그런데 다시 묻는 이유가 뭘까? 아! 그것보다 중요한 게 있지. 두 가지를 익혔다고 생각했으면서도 나를 불러들였다는 거잖아. 자! 두 번째 질문을 하지. 그건 곧 제룡검존의 심득만으로도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여기는 건가?”
남궁혁은 미간을 좁혔다.
절명곡의 생존자들은 중진들 중 가장 약한 축에 속했다.
하나 저마다 명가의 핵심 제자였기에 장래가 촉망됐을 터였다. 그러니 머릿속에는 쓰지 못할 뿐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이든 말이다.
남궁혁은 제룡검존의 머릿속에 담긴 무리(武理)가 가장 넓고, 깊었을 것이라 확신했다. 다른 곳은 애초에 남궁세가와 비교할 수 없었고, 무당과 화산은 도가 문파로서 도가의 교리까지 익혔기 때문이다.
한데 가볍게 초대를 한 이훤에게서는 두 가지 이상이 느껴졌다. 두 사람은 탁자를 두고 마주앉았던 순간부터 보이지 않는 싸움을 시작했다. 이훤의 혈륜이 쉴 새 없이 휘몰아쳤고, 남궁혁의 뇌기가 사방에서 번뜩였다.
다만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남궁혁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이훤을 노려봤다.
혈륜과 뇌기는 백중세를 이뤘지만, 조금 전의 광경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노교와 탁탑령, 그리고 선풍의 합공을 홀로 감당하던 이훤은 마지막에 이르러 조롱을 하듯 비축했던 힘을 쏟아냈다.
‘설마 아직 여력이 있는 건 아니겠지?’
그 때 이훤이 술잔을 비웠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난 후 망설임 없이 등을 보였다.
“확실히 스승님 말이 맞아. 술은 분위기야. 술 맛 떨어져서 더 이상 못 있겠다.”
“돌아가도 좋다고 허락한 적은 없는데?”
이훤은 고개를 슬쩍 돌린 후 히죽 웃었다.
“올 때도 허락받고 온 건 아니잖아.”
“나가는 건 마음대로 되지 않을 게다.”
남궁혁의 서슬이 시퍼런 한 마디에 이훤은 어깨를 으쓱였다.
“과연 그럴까?”
대답 대신 거대한 검의 끝이 목을 겨누는 듯했다.
“내가 검이고, 검이 곧 나다. 내 검을 피할 수 있을 성 싶으냐?”
이훤은 꾸부정하던 허리를 펴고 말을 건넸다.
“그만 해라. 당신이 노교를 대했을 때 노교의 표정을 기억하는가? 그게 지금 당신의 표정 같아.”
그리고 이내 경악할 만한 한 마디를 흘렸다.
“너라는 검으로 가득해야 할 이 세상에 또 다른 검이 느껴진다. 아니 진짜 검이라고 해야겠군.”
남궁혁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흔들린다.
그 말인즉슨 이훤은 자신과 기세를 겨루던 중에도 외부로 기운을 흩뿌렸다는 말이 아닌가. 아니나다를까 이훤의 시선은 어느새 창 밖 구화산을 향했다.
“나는 제룡검존을 보러 가야겠다.”
이훤이 제왕전을 나서며 한 마디를 남겼다.
“세 번째 질문. 막을 테냐?”
남궁혁은 대답을 하지도, 추격을 명하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다.
한데 의외의 상대가 앞을 막아섰다.
“검제나 되는 사람이 거짓말은 하는 건 좋지 않아요.”
< 65, 자강두천(諮强頭闡).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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