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 강호 유일의 세가(世家). (8) >
선풍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졌고, 그 자리를 분노가 대신했다. 소중한 자의 유품이라면 당연한 반응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실행한 까닭은 하나였다.
이훤에게 저들은 끝이 아닌 과정에 불과했다.
제왕전 내의 가주를 끌어내는 것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제룡검존 남궁천운.
절명곡의 생존자인 그를 끌어내야 끝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걸 위해서는 사마외도나 할 법한 짓거리를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추한 얼굴로 울지 마라. 어차피 곧 만나게 될 거야!”
이훤의 조롱에 선풍은 이성을 버렸다.
잃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분노에 몸을 맡긴 것이다.
이미 절대지경에 발을 들였으니 내외의 조화를 이뤘다. 그러니 내력은 마르지 않을 것이고, 육신은 한창 때의 청년보다 활력이 넘치지 않겠는가. 그러니 분노가 담긴 공세는 더더욱 거대한 파괴력을 지닐 터였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나 이훤에게 있어서 아주 작은 차이는 승패를 결정지을 수 있는 최고의 조건이었다. 그 차이를 만들어낸 이상 패배는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온갖 저주를 퍼부으며 달려드는 이를 보며 생각했다.
‘글렀네.’
속내와 달리 입꼬리를 올렸다.
본래 품(品)자 형으로 검진을 펼칠 때 가장 중요한 자리는 대상과 마주하는 위치였다. 하여 처음 저들이 자세를 잡았을 때 이훤의 앞에는 노교가 자리했다.
그가 가장 강했으니 당연한 배치였다.
한데 선풍이 노발대발하여 달려드는 순간 검진의 형태가 바뀌었다. 선풍을 앞에 두고, 노교가 선풍의 자리로 이동했다. 탁탑령의 표정만 보아도 예상과 달리 시작된 싸움에 대한 불편함이 여실히 느껴졌다.
“집중하게. 과정이 복잡해도 끝에 이르면 더없이 단순해지는 법일세.”
노교의 나직한 한 마디에 탁탑령이 평정을 되찾았다.
그 말이 옳다.
세 사람이 합공을 하면 가주조차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니 지금은 눈앞의 적에 집중하여 연습했던 대로 몰아붙이면 될 터였다.
하나 노교조차 알지 못했던 것이 있다.
이훤이 부순 유품은 선풍에게 생각보다 더 중요했고, 선풍은 노교만큼 수양이 깊지 않았다. 그리고 그 차이는 과정을 복잡하게 만드는 정도가 아니라 결과를 바꿀 정도였다. 이미 사람이 비집고 들어갈 만큼 크고, 넓었다.
솨아아아아아!
이훤을 중심으로 휘몰아친 와류가 아래서부터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마치 피를 대지에서 뽑아 올리는 것처럼 기괴한 광경이다.
노교는 그것을 보는 순간 미간을 좁혔다.
‘저런 기운은······.’
이훤은 히죽 웃으며 허공에서 내리꽂히는 선풍을 향해 뛰어올랐다. 그리고 좌권을 아래에서부터 끌어올리듯 올려쳤다. 그 순간 전신을 휘감고 있던 와류가 좌권에 맺히며 소용돌이치듯 발출됐다.
콰콰콰쾅!
권강이 지나간 허공에서 폭발이 일어날 정도였다.
절대지경의 고수가 전력으로 내지른 일격.
이 정도면 단전의 내공을 사용했을 때 삼 갑자 이상의 위력이었으리라.
하여 노교는 검진을 포기하고 몸을 날렸다.
이형환위에 버금가는 신묘한 보법을 펼치는 순간 선풍의 등에 달라붙었다. 그리고 좌수를 선풍의 등에 후려치듯 붙인 후 내력을 쏟아 붓기 시작했다.
“회평풍운에 선행참사라!”
평지풍파에 휘말려도 눈앞의 거미줄을 치우는 것이 먼저라는 충고였다.
선풍의 분노는 여전했다.
다만 노교의 충고를 새겨들을 정신은 남아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검극으로 권강 주변을 헤집으며 반탄력을 상쇄시키려 했다.
터터터터터터터터텅!
확실히 이성을 잃었어도 절세의 고수는 달랐다.
게다가 노교의 도움까지 받으니 항아리만하던 권강이 나무토막처럼 깎였다. 기의 흐름에 관하여 폭발이 아니라 강기를 약화시키는 광경에 뒤늦게 달려온 무인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칠공께서 나서셨는데······.”
“두 분께서 겨우 막는 정도라니!”
제왕전 주변을 지키는 호위들이 뒤늦게 몰려들었고, 그 숫자가 기십에 이르렀으나 한 걸음도 다가설 수 없었다. 검강과 권강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과정에 휘말렸다가는 시신조차 남기지 못하고 찢겨나갈 터였다.
하나 탁탑령은 예외다.
그가 선풍의 검이 현란하게 움직이며 권강과 대치하는 순간 움직였다. 자신에 대한 자부심만은 최강이라 할 수 있으니 당연히 뒤가 아니라 개입이다.
“애송이가!”
남궁세가 내에서도 광운십칠비라는 명칭은 알려지지 않았다. 하나 빈객들이 오가면서 서로를 칭하는 명칭까지 숨기는 건 불가능했다. 하여 호위들도 칠공과 사절, 오기가 누구인지는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다.
다만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을 뿐이다.
한데 가주의 직속 빈객 중에서도 가장 강하다는 칠공 중 두 명이 애송이와 백중세를 이뤘다. 칠공이 두 명이나 모여서 막는다는 신음이 흘러나오는 건 당연했다.
탁탑령은 그것이 싫었다.
남궁세가에 의탁했으나, 명성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그는 일인지하만인지상이나 다름없는 칠공에 대한 자부심이 엄청났다.
“기고만장하지 마라!”
탁탑령의 패검이 낙뢰처럼 권강과 검강 사이를 찍었다.
쩡-
굉음도 폭발도 없이 머릿속에 어떤 파동이 울렸다.
대자연의 기를 집약하여 만들어낸 강기들이 완전히 뒤섞인 게다.
“크헉!”
“우웩!”
무형지기나 다름없는 파동이 퍼져나가는 순간 절정의 무인들이 칠공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초절정에 근접했다고 해도 귀를 부여잡거나, 헛구역질을 하며 나뒹굴었다. 전자는 오장육부와 단전이 조각조각 났을 것이고, 후자는 뇌가 통째로 울렸을 터였다.
반면 이 사태의 원흉인 네 사람은 멀쩡했다.
다만 표정이 달랐다.
노교는 웃음기를 지웠다.
탁탑령의 얼굴에는 수십 마리의 지렁이가 사는 것처럼 힘줄이 꿈틀거렸다.
선풍의 눈은 한순간 초점을 잃었다.
‘이러고도 백중세라니?’
‘도대체 몇 갑자의 내공을 지녔기에!’
‘정녕 인간의 몸뚱이인가?’
칠공에 속한 세 노인은 노골적으로 이훤과의 싸움을 내력 싸움으로 몰아갔다. 남궁세가의 정보망을 통해 이훤의 신위가 천변만화(千變萬化)하고, 기괴망측(奇怪罔測)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순수하게 내력 싸움으로 간다면 필승이라 자부했다.
그 때 경악할 만한 일이 이어졌다.
“놀랐어?”
이훤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말을 거는 것이 아닌가. 내공의 본질을 정기신이라 하여 혈도와 혈맥에 따라 운용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그렇게라도 붙잡아놓지 않으면 내공이 외부로 흩어지기 때문이다.
대저 내공이란 자연지기를 심법 고유의 방식으로 빨아들여 체내에 쌓아놓은 것을 의미했다. 그렇기에 운기조식을 할 때 눈을 감고, 입을 닫는 것이다. 한데 상대는 전력을 쏟아 부은 대치 상황에서도 말을 걸었다.
그것은 둘 중 하나를 의미했다.
첫 째는 입을 열어도 될 만큼 여력이 있다는 뜻이다.
둘 째는 육신을 대자연으로 삼아 무한한 공력의 운용이 가능하다는 의미가 아닌가.
하나 이훤은 둘 다였다.
천공혈륜겁을 익힌 이상 혈륜은 숨을 쉴 때마다 저절로 성장했다. 심신을 극한까지 단련시켜 자연지기처럼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그렇다고 해서 도가의 궁극적인 목표인 등선과는 조금도 상관이 없다. 바람은 미풍이 되어 땀을 식혀줄 수도 있고, 태풍이 되어 세상을 뒤집을 수도 있지 않던가.
천공혈륜겁은 후자였다.
태풍, 지진, 홍수.
그저 사람의 편의 상 재해(災害)라 이름 붙였을 뿐 대자연의 또 다른 모습인 게다.
그렇게 이훤의 자유로운 오른손이 주먹의 형태를 취했다.
우권에도 핏빛 기운이 뭉쳐들었다.
어차피 몸뚱이 안에서 만들어지는 기운이 아니라 외부에서 끌려 들어온 자연지기가 혈륜이 되어 발출되는 것이다. 그러니 왼 주먹에 뭉친 혈륜만큼의 기운이 오른 주먹에 맺혔다.
“너!”
최전선에서 대치하고 있던 선풍이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눈을 부릅떴다. 하나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한 마디의 여파는 헤아릴 수 없는 폐해를 불러일으켰다.
쿨럭!
선풍이 검붉은 피를 한 움큼이나 토했다.
동시에 이훤의 우권이 네 명의 기운이 뒤섞인 공간을 후려쳤다.
쩡!
첫 번째 충격파와 달랐다.
당시는 백중세를 이뤘기에 동심원을 그리며 사방으로 퍼졌다. 하나 저울의 균형이 무너진 이상 파장은 전방으로 폭사됐다.
콰콰콰콰콰콰콰쾅!
한 박자 늦게 굉음이 일었다.
한 박자 더 늦게 공간이 일그러졌다.
한 박자 더 늦게 세상이 변했다.
한순간 묵빛으로 물들더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미풍이 불어왔다. 하나 오직 세 사람만이 조금 전과 완전히 다른 상태로 가벼운 바람을 맞이해야 했다.
“크흐흑!”
탁탑령은 피를 토하며 튕겨나갔다. 애병인 패검은 산산조각 나서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노교는 초췌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어느새 파장의 여파를 벗어났다. 다만 지금까지와 달리 노한 기색이 역력했다.
인자한 할아버지에서 불구대천의 원수로 변한 게다.
선풍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절대지경에 발을 들인 고수답게 몸뚱이만은 남겼다.
“끄으으.”
다만 검을 쥐고 있던 팔이 가루가 됐고, 파장에 쓸려나간 오른쪽 어깨와 가슴, 옆구리가 뻥 뚫린 채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입을 뻐끔거리는 순간 내장조각과 핏물이 뒤섞인 채 흩뿌려졌다. 그리고 선풍이 시신이 뒤로 넘어가는 순간 시야에 제왕전의 현판이 들어왔다.
저벅저벅!
이훤은 제왕전을 향해 곧장 나아가며 입맛을 다셨다.
‘아! 술 생각나네.’
생각해보면 회귀 이후 이처럼 전력을 쏟아낸 건 처음이었다. 비록 일합에 결정이 났으나, 저들의 합공은 구파오가 중 어디라고 해도 쉬이 막지 못했으리라.
그렇기에 상쾌했다.
한데 가볍게 내딛은 발걸음을 막는 자들이 있었다.
차가운 분노를 내비치는 노교와 창백한 안색의 탁탑령이다.
“너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구나.”
“어떤 죄도 씻을 수 없어. 죄는 죄야. 살인도 살인이고, 훔친 술도 술이다. 개 같은 교리로 포장하려고 하지 마. 나는 한 번도 나 자신을 부정한 적이 없다.”
이훤은 노교의 앞에 서서 물었다.
“당신도 그런가?”
노교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이훤은 입꼬리를 올렸다.
“그럴 리가 없지. 청운의 꿈을 안고 나선 강호였잖아. 남궁세가의 개가 될 미래 따위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았겠지.”
노교의 광대와 턱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이를 갈면서도 할 말이 없기에 몸서리를 치는 것이리라.
이훤은 제왕전 앞에 서서 외쳤다.
“언제까지 간만 보고 있을 텐가?”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일진광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텅! 텅! 텅! 텅!
공터 주변에 가득하던 횃불이 어둠에 휘감기듯 순차적으로 꺼졌다. 그리고 제왕전의 문이 하나씩 저절로 열리기 시작했다.
네 개의 문이 열린 후 제왕전의 심처가 나타났다.
오직 두 개의 호롱불을 바람이 불 때마 일렁였다.
그 중앙에 검이 꽂혀 있었다.
“처음이다.”
검이 말을 한다.
“내 시간을 이각이나 앞당겼구나.”
이훤은 눈을 깜빡였다.
한 호흡에 혈륜이 혈맥을 달궜고, 그제야 검이 사라지고 사람의 형상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는 검이 아니라 사람의 형상을 한 검이라고 해야 할 터였다.
검천(劍天) 남궁혁.
천하십대고수에서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단다.
검을 쥔 모두의 목표였고, 우상이었으며, 기둥이었다.
그가 눈을 뜨는 순간 벽광(碧光)이 일렁였다.
벽력창 악재를 보았을 때에나 느꼈던 뇌기(雷氣)가 남궁세가의 가주를 통해 전해지고 있었다.
하나 이훤은 그를 보는 순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동류다.’
그에게 술에 대한 욕망이 천하제일이듯 상대는 검에 대한 욕망이 가득했다. 이훤이 술을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듯 상대도 검에 대한 것이라면 그러할 터였다.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욕심쟁이.
그래서 이훤은 웃었다.
‘저런 자가 제룡검존에게 신마의 심득을 얻었다면 결코 남과 나누지 않으리라!’
남궁혁은 입이 귀에 걸릴 만큼 함박웃음을 흘렸다.
“웃는구나. 내 시간을 앞당긴 보람이 있구나.”
마치 자신의 시간만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듯했다. 무위는 모르겠지만, 자긍심만은 천하에 손꼽힐 터였다.
그런 그가 자부심을 담아 한 마디를 내뱉었다.
“세가에 온 것을 환영한다.”
마치 제왕전만이 세가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거기에 더하여 강호 유일이라는 표현까지 생략한 듯했다.
이훤은 오만한 남궁혁의 환영 인사에 히죽 웃었다.
그리고 발로 땅을 슬쩍 파헤쳤다.
소매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고, 매실의 씨앗을 심었다.
흙을 덮은 후 주변에 원을 그렸다.
이훤은 원 안에 들어간 후 자긍심의 최강자답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나 역시 화산에 온 것을 환영한다.”
< 64, 강호 유일의 세가(世家). (8)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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