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마신-167화 (167/226)

< 64, 강호 유일의 세가(世家). (7) >

삼소주의 처소에서 멈춘 이유는 하나였다.

어깨 남짓 올 정도의 낮은 담장 너머에서 전해지는 기운이 너무나 강렬했다. 마치 이 정도의 무인이 대기하고 있으니 각오를 하고 넘어오라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봤자 청죽휘보다 약했다.

하나 그런 기운이 한두 개가 아니었고, 저들과 상대하려면 지금처럼 은밀하게 접근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흐음, 그래도 반절 정도는 줄었군.’

절반 이상이 만해각주의 명령을 받고 이동한 듯했다. 그 결과 서른여덟 개의 기운이 열여덟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달그락-

이훤은 삼소주의 술상에서 가져온 통을 들었다.

수십 개의 젓가락 중 열여덟 개만 꺼낸 후 내려놓았다.

‘하나, 둘······. 흐음, 여섯 정도일까?’

제아무리 이훤이 구궁벽력공을 깨우쳐 사물을 움직이는 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한계는 존재했다. 아닌 말로 보이지 않는 자를 공격할 수 없었고, 벽 뒤에 숨은 자를 제압할 수 없었다. 그나마 이훤의 기감에 걸린 여섯 명은 수풀 뒤에 있거나, 아예 몸을 드러낸 상태였다.

자신감의 발로겠지만, 자만의 말로를 보여줄 생각이다.

이훤은 자신의 어깨 높이나 될법한 작은 담장 위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동시에 젓가락을 흩뿌렸다.

쉭쉭쉭쉭쉭쉭쉭!

벽으로 날아간 것은 벽을 뚫었고, 나무를 향한 건 나무를 꿰뚫었다. 하나 적은 한 차례 방어막을 뚫으며 힘을 소진한 젓가락에 당하지 않았다.

“으윽!”

다행히 이훤이 목표로 삼았던 여섯 명 중 다섯 명이 외마디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하나 그 말은 곧 열세 명의 이목을 끌었다는 의미와 같았다.

“웬 놈이냐?”

더 이상 숨어서 들어가는 건 불가능했다.

“취선관주가 가주를 보러 왔다!”

장년인과 노인이 뒤섞인 무리에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취선관주는 술에 취해 산다더니 제대로 취했군.”

이훤은 대답 대신 담장 위에서 몸을 날렸다.

적도 동료가 쓰러진 이상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다고 여겼으리라.

열세 명 중 네 명이 한 덩어리가 되어 쇄도했다.

합격진을 익힌 자들이다.

그 뒤로 장창을 쥔 두 명이 뒤이었고, 반걸음 뒤쳐진 곳에서 구절곤과 채찍을 휘두르는 두 명이 함께 했다. 합격진의 빈곳을 통해 장병기의 이점을 살리려는 듯 보였다.

총 여덟 명.

이훤은 혀를 찼다.

그가 더욱 유명해져서 경외심을 품어야 했다면 열세 명은 싸우지 않고 물러났으리라. 그 정도가 아니더라도 최소한 가장 강한 자들이 먼저 나서야 했다.

하나 눈앞의 상황은 지겹도록 똑같았다.

“언제까지!”

이훤은 허공에서 양 팔을 펼쳤다.

팔황과 무극이 검처럼 뻗어나가는 순간 마치 날개를 편 것처럼 보였으리라. 그 사이로 붉은 기운과 금광이 뒤섞이니 한순간 이목이 집중됐다.

“내 앞에서 간을 볼 수 있을 것 같으냐?”

더 이상 잡배들과 드잡이 질을 할 여력이 없다.

그렇기에 첫 수부터 전력으로 탄강을 발출했다.

후검제는 시체가 되어 퇴장했고, 창무검제는 넋을 놓았던 위력이다. 그것을 가주전 앞도 아니고, 내원 어딘가를 지키는 호위들 따위가 막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마치 불길이 길게 늘어지는 것처럼 적금광(赤金光)의 강기가 번뜩였다. 그리고 일장이나 대지를 긁어버린 신장의 손짓에 세 명의 무인은 피떡이 되어 튕겨나갔다.

“장 형!”

죽은 놈과 친분이 있었나 보다.

하나 이훤은 짜증 섞인 표정으로 다음 상대를 찾았다.

“별호도! 이름도! 이야기하지 마라.”

팔황이 길게 늘어나며 상대의 가슴을 찔렀고, 무극을 휘감은 주먹이 안면을 후려쳤다. 두 명이 더 쓰러진 상태에서 이훤의 일갈이 터져 나왔다.

“너희들은 가치가 없다!”

모욕도 조롱도 서슴지 않고 내뱉었다.

지금 이훤은 자신의 강함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을 중시했다. 그가 섬광처럼 허공을 주유한 까닭에 애꿎게 달려 나간 여덟 명이 그제야 몸을 돌렸다.

“막아라!”

피하지 않는다고?

“죽여라!”

도망치지 않는다고?

이훤의 두 눈에서 적광이 뇌전처럼 퍼져나갔다.

살고 싶다면 살려줄 것이고, 죽고 싶다면 죽여줄 것이다.

남궁세가와의 관계는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만큼 더 강해지면 된다!’

남궁세가의 절반이 죽어도 복수 대신 화평을 선택할 만큼 강해진다면 되지 않겠는가.

소림이든, 무림맹이든 상관없다.

어차피 회귀 전의 소림과 무림맹이라면 자다가도 치가 떨렸다. 그러니 화산을 중앙에 두고, 온 강호를 평탄하게 만들어 버리면 되는 게다.

파팟!

잔영이 남아서 번쩍였다.

하나 그 사이로 이훤을 막으려던 자들이 어디든 부여잡았다. 뒤늦게 잔영이 흩어지고, 적금광이 사그라졌을 때 멈췄던 시간이 흐르는 것처럼 적들이 쓰러졌다.

“끄어어어.”

이훤은 쓰러진 열두 명을 뒤로 한 채 천천히 걸음을 내딛었다. 그 때 아름드리나무가 쪼개지며 벼락같은 일검이 내리꽂혔다.

남궁세가 내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기습이었다.

정파의 고수였다면 당했으리라.

남궁세가를 인정했기에 독이나 암습은 염두에 두지 않았을 터였다.

하나 이훤은 평범한 정파의 고수도 아니었고, 남궁세가를 인정하지도 않았다. 중경의 봉황회, 산서성의 개미굴, 섬서의 화청궁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화산을 제외한 모든 것이 평등하다!”

이훤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은 채 손을 들었다.

팔황을 휘감긴 손이 적의 검을 움켜쥐었고, 힘을 주는 순간 산산이 부서졌다. 그 사이 좌장을 내지르니 검의 파편은 고스란히 암기가 되어 상대의 전신에 꽂혀들었다.

푹푹푹푹푹푹!

“끄으, 너······.”

누군지도 모를 놈이 알아듣지 못할 유언 따위는 귓등으로 흘렸다.

이훤은 상대를 지나쳐 닫힌 문을 밀었다.

끼이이익-

그리고 그 너머에 마침내 불야성처럼 수백 개의 횃불과 등이 번쩍이는 전각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왕전(帝王殿).

추혼검제 단학이 알려준 가주의 처소였다.

보고 있자니 실소가 절로 나왔다.

“이야, 왕을 저렇게 대놓고 쓰는데도 멀쩡히 잘 살고 있네.”

본래 나라에서 금하는 직위나 글자는 쓰지 않는 법이다. 강호에서 암암리에 쓴다고 해도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할 뿐 기록을 남기지 않을 터였다. 한데 수백 년의 세월을 직격으로 맞은 현판에는 여전히 제왕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안휘성의 도지휘사사는 공무가 없다면 원단과 중추절마다 남궁세가를 찾아와 인사를 하지.”

담담한 어조의 대꾸였다.

바위에 앉아 있던 건장한 체구의 노인이 검에 의지하여 천천히 일어났다. 그러자 또 다른 노인이 산책을 하듯 부채를 살랑이며 등장했다.

“하나 지난 수십 년 간 공교롭게도 그 날마다 공무가 없다더구나.”

일부러 시간을 빼서 찾아온다는 의미였다.

이훤은 두 노인이 아니라 그 중앙의 텅 빈 곳을 바라봤다. 가장 오묘한 기운이 안개처럼 살랑이다가 좌우로 갈라졌다. 그 곳에는 고목처럼 앙상하게 마른 노인이 뾰족한 검에 의지한 채 서 있었다.

“그러니 너는 세상을 향해 칼을 겨눈 셈이란다.”

세 사람이 만들어낸 기운이 이리저리 얽히며 모든 것을 밀어냈다. 벌레 소리도, 풀이 흔들리는 소리도 모조리 사라졌다.

그 사이로 이훤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하하하!”

부채질을 하던 노인이 물었다.

“무엇이 우스운 게냐?”

이훤은 손가락으로 세 사람을 번갈아가며 가리켰다.

“그 대사를 치려고 수십 년 동안 여기서 기다렸을 것이 아닌가. 그 생각을 하니까 너무 우습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어처구니도 없네.”

“듣던 것보다 더 버릇이 없는 아이로구나.”

노인의 한탄에 이훤은 웃음을 지웠다.

“무공보다 버릇을 따지니 퇴물이라는 걸 자인하는 건가?”

“보면 볼수록 더 버릇이 없기도 하고.”

“혼자만 주둥이를 놀리는 것으로 보아 이것도 미리 상의가 된 건가?”

쿵!

건장한 체구의 노인이 검으로 땅을 내리쳤다.

“그만! 이곳은 가주께서 머무는 장소다. 우리는 이곳을 벗어날 생각이 없으니 물러난다면 잡지 않겠다.”

“너 같으면 가겠냐?”

이훤의 이죽거림에는 건장한 체구의 노인마저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때 고목처럼 마른 노인이 키득거렸다.

“크크크큭, 되었네. 되었어. 통성명이나 하고, 무공이나 겨뤄보세. 네 말처럼 우리는 오랫동안 아주 심심했단다. 그래서 사실 네가 돌아가지 않았으면 한단다. 그러니 나부터 하마. 나는 광운십칠비에서 칠공에 있는 노교라고 한다.”

노교는 다음 차례라는 듯 건장한 체구의 노인을 향해 턱짓을 했다. 노교가 수장인 듯 노인은 헛기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칠공의 탁탑령이다.”

“흐흐, 같은 칠공의 선풍이라네.”

노교(老敎), 탁탑령(卓塔靈), 선풍(旋風).

일견하기에도 본명이 아니라 별칭이 분명했다.

이훤은 혀를 차며 한 마디를 건넸다.

“취마다.”

노교는 가뭄에 갈라진 논두렁 같은 입술을 동그랗게 말았다.

“호오! 술 좋지. 자! 그럼 싸워보세.”

한데 세 사람이 동시에 움직였다.

이훤이라고 해도 잠시나마 의외의 상황임을 인정해야 했다. 칠공이라 불린 자들은 분명 사절에 속한 청죽휘보다 고수였다. 그리고 창룡당주인 남궁채황보다 훨씬 윗줄이었다. 어림잡아 무당쌍선보다 조금 더 강할 터였다.

그러니 세 사람 모두 절대지경의 고수인 셈이다.

한데 그런 이들이 품(品)자 형태로 합공을 취하려 하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즐거운가 보구나.”

이훤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좀 상대할 만 하네.”

“무인은 알아주는 이를 위해 죽는 법. 우리가 너를 알아보았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게다.”

“비석에 그렇게 새겨주지.”

노교가 탄성을 내뱉었다.

“아! 어디 저런 녀석이 또 없나? 데려다가 말동무나 하면 여생이 참으로 즐거울 텐데. 아이야. 너를 귀엽게 여겨 한 가지 충고를 하고 싶구나. 듣겠느냐?”

“당신 정도의 노괴라면 유언 정도는 들어줄 수 있지.”

이훤의 이죽거림에도 노교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명경지수와 같은 상태에서 오롯이 진심으로 이훤을 걱정하는 것처럼 말을 건넸다.

“오대세가라지.”

“유언이야? 밀어야?”

“하나 산동악가도 제갈세가도 교룡세가도 안다. 이 세상에 세가란 오직 남궁에게만 허락됐다는 것을 말이야. 강호 유일의 세가. 그것이 바로 남궁세가다.”

“뭐라는 거야?”

노교는 혀를 찼다.

“남궁세가의 힘은 비단 무력에서 나오지 않는다. 관부와 상계는 물론이고, 양민들의 삶과도 오랜 세월 밀접하게 관련되었지. 네가 오늘 벌인 일만 해도 강호의 지탄을 받기에 충분할 터. 하나 대상이 남궁세가였기에 너는 공적이 될 게다. 남궁세가의 비처에 난입하고, 가솔들을 죽였으니 빼도 박도 못하겠지. 그래서 하는 말이다. 우리와 실컷 싸운 후 진심으로 사과를 해라. 가주는 강자를 아끼시니 네가 우리와 함께 하겠다면 공과는 의미가 없어지리라.”

일견하기에도 진심이 담겨 있었다.

탁탑령과 선풍이 미간을 찡그렸음에도 노교는 개의치 않고, 은은한 눈빛으로 이훤을 응시했다.

그 대답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왔다.

퉤!

이훤은 걸쭉한 가래침을 뱉은 후 허리를 곧추세웠다.

“나를 아껴주는 건 한 사람으로 족하고, 내가 머물 곳은 하늘과 맞닿은 도관으로 충분하다. 그와 도관에서 술을 마신다면 신선과 선녀가 어찌 부러울까?”

탁탑령이 노호성을 내질렀다.

“놈! 노교의 배려마저 능욕하다니! 네놈은 곱게 죽지 못할 것이다!”

이훤은 입꼬리를 올렸다.

“아! 너처럼 말한 놈이 있었지. 그 새끼는 두 번 죽였지만, 너는 한 번만 죽여도 되겠다. 그치?”

“저열한 놈! 노교!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합니다!”

노교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을 했다.

일단 무릎을 꿇린 후 다시 얘기를 하려는 듯 보였다.

“클클, 가주가 삼경에 나오실 테니 이제 반 시진 남은 셈이야. 어디 느긋하게 놀아보세.”

선풍이 점잖을 떨며 다가섰다.

하나 이훤은 대지를 구르며 튕겨나가는 순간 선풍의 눈동자가 심하게 요동을 쳤다. 상대방의 기척이 사방에서 느껴졌고, 잔영은 그보다 많았다.

그리고 열을 채 헤아리기도 전 선풍은 부채를 빼앗겼고, 어쩔 수 없이 검을 뽑아야 했다.

“내 부채 내놔라.”

이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느긋하게 놀아보자며!”

“놈! 그것은 그녀의 마지막 유품이다. 네 놈이 함부로 건드릴 물건이 아니야!”

선풍의 외침에는 울분과 회한이 가득했다.

이훤의 손이 핏빛으로 물드는 순간 부채는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자! 아직도 놀고 싶니?”

< 64, 강호 유일의 세가(世家). (7) > 끝

ⓒ 김태현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