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마신-165화 (165/226)

< 64, 강호 유일의 세가(世家). (5) >

이훤은 실망을 감추지 않았다.

무형지기는 그 자체로도 대단했다.

내공은 펼치는 무공과 익힌 심법에 따라 운용하는 방식이 달랐다. 혈도와 혈맥을 따라 정해진 순서에 의하여 내력을 다루는 게다. 그러니 일련의 과정을 없앤 것처럼 빠르게 기파를 발출한다는 건 대단한 경지였다.

초절정의 고수도 쉽지 않았다.

하나 신마의 심득이라면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이훤이 지금껏 경험했던 신마의 심득은 인세의 무공을 뛰어넘었다. 한 가지만 익혀도 고금을 통틀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특별함을 자랑했다. 그러니 무형지기를 보고도 고작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 것이다.

이훤은 혀를 차며 말했다.

“이해할 수가 없네.”

반면 청죽휘는 무형지기가 무위로 돌아간 것만으로도 충격을 받았다. 절대지경의 고수나 할 법한 신위였거늘 이훤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듯 모든 걸 파악했다.

“이게 전부여도 실망스럽고, 네 재능이 부족해서 실력이 그 정도라고 해도 실망스러워. 그러니까 왜 왔냐?”

“놈! 화산의 인연을 생각하여······.”

그 순간 이훤의 신형이 산산이 부서지며 자취를 감췄다.

“배덕자 주제에 화산을 거론한다는 건 나와 싸우자는 얘기렷다!”

지척에 이르는 순간 팔황과 무극으로 휘감긴 주먹이 소나기처럼 내리꽂혔다. 청죽휘에 대한 기대가 사라졌기에 구성의 천공혈륜겁을 아낌없이 퍼부었다.

터터터터터터터텅!

청죽휘는 쌍장을 흩뿌려 이훤이 만들어낸 권영을 모조리 튕겨냈다. 하나 이마에는 땀이 맺혔고, 뒷걸음질까지 치는 중이다.

‘이건 정말 곤란하다.’

이훤의 공세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강력해졌다.

이제는 아예 몸 전체로 충격이 전해지고 있었다.

하나 청죽휘는 승패가 아니라 다른 것을 중시했다.

‘이러다 점혈이 저절로 풀렸다가는 심의형이 발동될 수도 있어.’

그것만은 용납할 수 없었다.

설령 자신의 명성이 바닥에 떨어지고, 배덕자라고 놀림을 들어도 좋았다. 하나 남궁세가가 그에게 전해준 심의형만은 절대 공개할 수 없었다.

가주의 허락이 있기 전에는 불가였다.

“크흑!”

청죽휘는 벽을 치며 막아내다가 한순간 공세로 전환했다.

마치 동귀어진을 할 것처럼 쌍장을 전방으로 밀어낸 것이다. 일견하기에도 변수 없이 정공법으로 승부를 보려한 셈이다.

언뜻 보기에는 비장의 한 수를 선보이는 듯했다.

하나 이훤은 청죽휘의 공세에 실린 의도가 훤히 보였다.

‘이 새끼가 일부러 지려는 건가?’

그렇지 않다면 생사결을 겨루는 상황도 아니거늘 이처럼 무의미한 공세를 펼칠 리 없지 않은가. 한 마디로 빨리 져서 이 상황을 끝내겠다는 의미였다.

“씨발!”

이훤의 두 눈이 역팔자로 치솟았다.

그는 양손으로 나눴던 천공혈륜겁을 한 손에 집중했다. 그리고 분노와 짜증을 섞어 내질렀다. 그 순간 굉음이 울렸고, 청죽휘의 왼손이 반대로 꺾였다. 손목과 팔목이 조각났고, 팔꿈치를 통해 뼈가 튀어나왔다.

“크아아악!”

이훤은 비명과 함께 뒷걸음질 치는 청죽휘를 응시했다. 하나 청죽휘는 고통 속에서도 이훤의 불덩이 같은 눈동자를 피하지 않았다. 장법을 펼치는 자가 팔을 잃고, 한참 어린 후학에게 패배했음에도 후련한 표정이다. 그러나 이훤이 씹어뱉듯이 내뱉은 한 마디에는 고개를 떨궈야 했다.

“너는 화산은 물론이고, 무인도 입에 담지 마라.”

수치심이 온 몸을 휘감는다.

그렇기에 더더욱 스스로를 세뇌하듯 읊조렸다.

‘심의형을 지켰다. 후우, 후우, 지켰어.’

이훤은 혀를 차며 돌아섰다.

저런 자가 한때 화산에 몸을 담았다는 사실조차 짜증이 날 정도였다.

“단 형.”

단학은 어느새 선배에서 형으로 신분이 격하됐지만, 타고난 눈치를 활용하여 잽싸게 술병을 건넸다.

벌컥벌컥!

이훤은 빈 병을 청죽휘에게 집어던졌다.

쨍그랑!

“가주가 뭘 하는지 몰라도 시간을 끌어야 하나 보지. 좋아. 잠자코 있어주마! 대신 내 눈앞에서 당장 꺼져라. 이 버러지 같은 작자야!”

*

이훤은 침음을 흘렸다.

회귀 전부터 술자리라면 빠지지 않았고, 싸움이라면 마다하지 않았다. 하나 그 때에는 술을 마시면 즐겁기만 했고, 싸움에는 이유가 있었다. 최소한 마지막 남은 술 한 잔을 마셔야 한다는 하찮은 이유라도 있었단 말이다.

한데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술은 풍족했기에 아쉽지 않았고, 싸움은 점점 의미를 잃었다. 그 동안 화산을 위해, 그리고 회귀한 자신을 위해, 복수를 위해 싸워왔을 뿐이다. 한데 청죽휘와 싸우는 동안 혐오감에 휩싸였다. 아무리 하찮은 이유라도 자신을 위한 것이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남궁 씨도 아닌 자가 세가를 위해 모든 걸 버리려는 모양새가 꼴사나웠다.

마치 천룡전과 같지 않던가.

“더 강해져야겠어.”

“갑자기?”

단학이 눈치를 보며 물었다.

이훤의 표정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하나 눈동자를 통해 흘러나오는 빛이 이채를 흘렸다.

“나만 보면 실금할 정도로 강해지면 개나 소나 달려들어서 싸울 필요가 없겠지.”

“그게 뜻대로 된다면 강호의 싸움이 어찌 있겠소?”

단학은 이훤이 홧김에 내뱉는 말인지 안 듯 헛웃음을 지었다.

‘된다.’

신마의 모든 절학을 모으면 가능할 터였다.

이훤은 확신했다.

신마는 자신의 최후조차 스스로 결정했음을 말이다.

그가 떠나기를 원하지 않았다면 군림은 물론이고, 천하를 지배하는 것도 가능했으리라. 그러니 신마의 모든 절학을 모으는 것이 우선시되어야 했다.

그걸 위해서라면 반각의 시간도 아까웠다.

“단 형.”

“술은 그쪽에 있소.”

“남궁세가의 가주가 머무는 장소가 어느 쪽이오?”

단학의 눈매가 심하게 요동쳤다.

“갑자기 가주의 처소는 왜요?”

이훤은 술잔을 들며 빙긋 웃었다.

“기다리기 지루하니 그 쪽을 보며 삼 배를 올릴까 하고요. 그래도 화산에서 왔는데 기본적인 예의는 갖춰야 하지 않을까요?”

단학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아! 난 또 뭐라고. 비밀이라고 할 것도 없소. 창천성은 북으로 구화산을 두고, 남으로 황산을 바라본다오. 해서 저쪽의 구화산 방향에 가주의 처소가 있소.”

이훤은 눈을 가늘게 떴다.

“아하! 그렇군. 그러면 풍수지리 상 저 뾰족한 봉우리와 선을 맞춰서 건물이 존재하겠군요.”

“그, 그건 그렇겠지.”

분위기가 요상했다.

단학은 이훤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주향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술이라면 환장한다고 스스로 말하던 자가 주독을 빼내고 있지 않은가.

“하하, 검제. 왜 이러시오. 아직 술이 많이 남았잖소.”

“잠시 산책 좀 하고 오리다.”

“산책이 아닌 것 같은데······.”

이훤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맞아. 기다리기 싫어졌어.”

단학의 두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고, 이내 더듬거리며 한 마디를 내뱉었다.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거요?”

“맞아.”

“당신 미쳤어. 여기가 어딘 줄 아시오? 남궁세가요. 남궁세가라고! 무림맹주라고 해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없어요.”

무림맹주가 실제로 남궁세가에 왔는지는 모르겠다.

하나 한 가지만 대답할 수 있었다.

“아까 청죽휘에게 한 말 들었잖소.”

단학은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한 마디를 흘렸다.

“내 강호.”

“맞아. 내가 있는 곳이 강호요.”

이훤은 술잔을 내려놓고 말을 이었다.

“당신이 막겠다고 나서도 이해해. 그건 당신의 강호니까.”

하나 단학은 아예 털썩 주저앉은 채 눈을 끔뻑였다.

“당신의 강호는 얼마나 거대하기에 남궁세가를 발 아래로 두는 것인가?”

이훤은 발끝으로 자신의 주변에 원을 만들었다.

“내가 있는 곳. 그 뿐이야. 그러니 강호에 다툼이 끊이지 않는 거지. 각자의 강호가 매순간 충돌하고, 합쳐지고, 변화하니까.”

단학은 말을 잇지 못했다.

‘내 강호는 어디 있는가?’

매순간 눈치를 보고, 타협하고, 미뤄두고, 모른 척했던 삶이다. 운 좋게 상승 무공을 익히고, 미움을 사지 않으려고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다. 강호가 무엇인지, 협의가 무엇인지도 개의치 않았다. 도인도 아니면서 그저 물 흐르듯 살았던 게다.

그는 주변을 돌아봤다.

조금 전에 놀라서 뒤집힐 때 술상이 뒤집혔고, 술과 안주가 어지럽게 흩어져서 더럽기 짝이 없다. 원래의 그였다면 남궁세가가 마련해준 별채에서 이런 짓을 벌이지 않았으리라.

“허허.”

단학은 손으로 바닥을 쓸었다.

오물이 묻은 손가락 끝을 혀로 핥았다.

짜고, 시고, 달고, 냄새까지 더러웠다.

“이게 내 강호구려.”

그는 웃었다.

타인의 눈치를 볼 때와 달리 박장대소를 했다.

“크하하하하! 강호라는 게 별 거 없잖아. 그냥 내가 강호요. 내가 별 거 아니니 강호도 별 거 아닌 게지. 이훤! 너는 정말 기이한 자다. 내 생각을 이렇게······.”

하나 천천히 말끝을 흐렸다.

이훤이 오만상을 짓고 있었다.

단학은 헛기침을 하며 눈치를 봤다.

“크흠, 내가 이름을 불러서 기분이 나빴다면 사과하지.”

“그건 상관없어. 다만 그렇게 더러운 짓을 해가면서까지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건가?”

“하하하하!”

이훤의 투덜거림에 단학은 한 번 더 박장대소를 했다.

그 모습만 봐도 조금 전과 달라졌음이 느껴졌다.

괄목상대라고 하지 않던가.

‘생각이 달라졌으니 행동이 달라질 것이고, 나아가 삶이 바뀌겠지. 아마 그건 만매만전을 통해 성장한 것보다 더 큰 변화를 불러오리라.’

이훤은 술잔을 들었다.

단학 또한 두 손으로 쥔 술잔을 이마까지 들어올렸다.

“은공께 단학이 술을 올립니다.”

“이번에는 받아도 되겠네.”

두 사람은 석 잔의 술을 나눴다.

“여기 계속 있다가는 나로 인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 알아서 피하라고.”

단학은 경고를 하고 떠나려는 이훤을 불렀다.

“내가 도와줄 일이 있겠소?”

이훤은 헛웃음을 흘렸다.

“나 지금 가주를 보러 간다니까?”

“은공으로 인해 변했다고 생각하오. 한데 내가 지금 당신을 돕지 않는다면 변하지 않았음을 자인하는 꼴이 아닌가. 그러니 이건 당신을 위해서도 아니고, 남궁세가를 걱정해서도 아니야.”

단학은 더러운 손을 슬쩍 닦은 후 말했다.

“내 강호는 지금부터 시작이니까. 시작부터 망치고 싶지 않을 뿐이외다.”

이훤은 단학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 품에서 화살촉을 꺼낸 후 건넸다.

“원래 이렇게 쓸 물건은 아니었지만, 맡기도록 하지.”

“던지면 소리가 나는 명적이구려.”

“백까지 헤아리고 던지시오.”

“어디로?”

“황산까지 들릴 만큼 아주 높이.”

단학은 명적을 만지작거리다가 히죽 웃었다.

“이걸로 빚을 갚을 수 있다면 달까지 올려 보내리다.”

이훤은 술 한 병을 들고, 휘적거리며 별채 밖으로 나아갔다. 그가 정원에 발을 들이는 순간 지풍이 수십 발이나 허공을 수놓았고, 누구 한 명 앞을 막지 못했다.

방향은 정확하게 북쪽이다.

단학은 잔을 채운 후 술을 비웠다.

그리고 땅에 떨어진 안주를 주우려다 슬쩍 손을 뗐다.

“하나, 둘, 셋, 넷······.”

이훤은 후원을 거닐다가 멈춰 섰다.

남궁세가는 가목을 소나무로 삼았기에 사방에 가득했다.

“푸른 수해 가운데 붉은 매화가 피면 예쁘기는 하겠네.”

히죽 웃으며 손으로 솔잎을 쓸었다.

쉭쉭쉭쉭쉭쉭!

은신한 호위들의 기척이 느껴질 때마다 솔잎이 허공을 날았다. 호위들은 이훤이 지척에 이를 때까지 눈치조차 채지 못했고, 혈도를 점혈 당한 후에야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나 걸음은 조금씩 느려졌다.

‘하, 초절정은 되어 보이는데 호위를 서고 있다고?’

그것도 가주의 처소가 아니라 내원 어딘가를 지키고 있는 게다. 남궁세가의 힘은 직계와 방계가 아니라 무언가를 향한 맹목적인 충성심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렇게 되니 단학에게 명적을 맡긴 것이 주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였다.

“그 분을 이렇게 써먹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 즈음 기다렸다는 듯 남쪽에서 귀곡성처럼 기이한 울림이 한없이 퍼져나갔다.

삐이이이이이이이-

*

대부분의 무가는 문을 걸어 잠그는 것으로 방비를 대신한다. 하나 남궁세가는 구화산과 황산 사이의 창천평을 모조리 영역으로 삼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창천성의 외원으로 출입하는 문만 해도 십여 개였고, 들판 주변의 망루와 목책만 해도 백여 개에 이르렀다.

“저쪽에서 누가 오는 것 같습니다.”

칠십이 막사와 목책을 담당하는 남궁속은 방계 출신이지만, 세가의 무공을 배울 수 있었다. 하여 세가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가장 외곽의 목책을 책임졌다.

“경계하라.”

그가 나직이 읊조리는 순간 스무 명의 무인이 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남궁속은 수하들이 검진을 펼칠 준비를 끝내자, 목소리를 높였다.

“멈춰라! 이곳은 남궁세가의 영역이다.”

하나 자그마한 체구의 의문인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상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남궁속은 경계심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노파?’

저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노파가 지팡이를 통통 울리며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더 이상 접근하면 우리도 나서지 않을 수가 없소이다.”

노파가 혀를 찼다.

“나도 오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고, 나서고 싶어서 나서는 것이 아니란다.”

챙!

남궁속은 검을 뽑으며 외쳤다.

“그게 무슨 소리요?”

하나 노파는 대답 대신 지팡이로 땅을 내리찍었다.

그 순간 굉음과 함께 땅이 거미줄처럼 갈라지더니 목책과 막사를 통째로 날려버렸다.

콰쾅!

그 사이로 노파의 짜증 섞인 한 마디가 들려왔다.

“너희들의 주인에게 검후가 왔다고 알려라.”

< 64, 강호 유일의 세가(世家). (5)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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