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 강호 유일의 세가(世家).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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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의 호사가들은 추혼검제를 가리켜 신중하다고 했다. 평정심이 대단하여 일희일비하지 않고, 겉으로 보이는 현상에 현혹되지 않으며 공명정대하게 일을 처리한다고 알려졌다.
하나 실상은 달랐다.
그는 심약했기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겁이 많았기에 신중해보였으며, 욕을 먹고 싶지 않았기에 최대한 중립을 지키려 했을 뿐이다.
‘이것이 알려지면 사람들은 나를 우습게 여길 테지.’
단학은 늘 이런 마음을 품고 살았다.
하나 만매만전을 접하고 달라졌다.
그는 만매만전을 비급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만매만전을 정독할수록 자신을 꽁꽁 싸매고 있던 껍질을 벗어던지는 듯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옷을 벗어던진 후에야 넘을 수 없었던 벽을 넘게 되었다.
그러니 이훤에 대한 고마움은 상상을 초월했다.
남에게 미움 받고 싶지 않은 만큼 남에게 받은 것을 돌려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 그가 이훤을 위험에 빠트릴 뻔했다.
자괴감과 미안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것으로 끝내면 사람이 아니지. 신세를 지고, 실수를 했으니 앞으로도 계속 보답해야 할 것이야.’
하여 그는 평생 부리지 않던 위세까지 부리며 최고의 술을 얻어왔다. 하나 이훤의 숙소로 돌아왔을 때 예기치 못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왔어?”
단학은 이훤의 반말보다 바쁘게 오가는 이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 사람들이 다 누구요?”
이훤은 비단 보료에 비스듬히 누운 채 술 잔을 내밀었다. 시비가 술잔을 채우고, 술잔을 기울인 후 탄성을 내뱉는 일련의 과정이 물 흐르듯 이어졌다.
“귀한 손님이랍시고 불렀으면 이 정도 대접은 당연하지.”
단학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래도 그렇지 등 뒤에서 부채질을 하는 두 명의 시비와 쉼 없이 음식을 내오는 하인을 보고 있자니 이곳이 과연 남궁세가가 맞나 싶었다.
‘이러다 금이라도 타겠네.’
한데 말이 씨가 된다는 말처럼 중년의 미부가 문을 열고 들어서더니 빙긋 웃으며 말했다.
“준비가 됐습니다.”
“아! 그럼 아까 말했던 것처럼 부탁해.”
“그리 하겠습니다.”
문이 열리고 칠현금과 비파로 무장한 악사들이 아름다운 선율을 쏟아냈다. 그리고 목소리가 유달리 맑은 여인이 시를 읊었다. 누구의 시인가 했더니 죄다 주당이라 불리던 시인들이 아닌가. 이백으로 시작해 도연명과 왕학보를 지나고 나니 단학의 지식으로도 알지 못하는 시구가 연이었다.
“허허. 허허.”
이훤은 헛웃음을 흘리는 단학을 향해 손짓했다.
“말 상대가 필요했는데 잘 왔어. 이리 와 앉으시오. 어디를 갔다 온 거야?”
자신에게 술을 가져오라고 시켰던 건 까맣게 잊은 듯한 모양새였다. 하나 이훤이 마시고 있는 술을 보고 있자니 강짜를 부려 빼앗아 온 술이 너무나 하찮아 보였다.
그는 보따리를 슬쩍 내려놓은 채 자리를 차지했다.
이훤이 술을 따르며 농을 건넸다.
“또 어디서 음모라도 꾸미고 온 건 아니겠지?”
“허허, 그럴 리가 있겠소.”
왜인지 모르게 단학은 서글펐다.
그래서 마셨다.
이훤에게 무슨 말이라도 들었는지 시비들의 술을 따르는 속도 또한 더없이 빨랐다. 그리고 단학은 반 시진이 지나기도 전에 만취하여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내가! 그래도 검제인데!”
“그렇지. 추혼검제. 누가 모르겠어?”
“그런데 너무 한 거 아닌가? 내가 남궁세가와 얼마나 돈독한 관계였는데! 내가 왔을 때에는 이런 거 하나도 없었다고. 심지어 잠시 정원을 거닐다가 돌아왔더니 밥 때가 지났다지 않소! 사람을 이렇게 차별하고 말이야!”
이훤은 단학의 술주정을 듣다가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단 선배 정도면 강호의 경험이 아주 많겠죠?”
“그렇지! 내가 북해와 남해는 가보지 않았어도 대강남북을 돌아다니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하면 남궁세가와도 많이 어울렸겠죠.”
“그렇지 않으면 내가 왜 지금 한탄을 하고 있겠나? 나 원래 그렇게 서운해하고, 막 그러는 사람 아니야.”
단학은 한 숨을 푹푹 내쉬더니 술을 병째로 들이켜기 시작했다.
아주 좋은 현상이다.
틈을 보아 슬쩍 물었다.
“그럼 신마의 심득을 익힌 사람도 보셨소?”
“흐음.”
이훤의 물음에 단학은 침음을 흘렸다.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나, 분위기만 봐도 경험한 적이 있어 보였다. 해서 화제를 슬쩍 돌리며 단학의 경계심을 풀고자 했다.
“화산의 심득은 만천하에 전해졌고, 산동악가나 무당도 때가 되면 그렇게 될 거 같소. 단 선배는 남궁세가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지 않소?”
타인의 정보가 아니라 개인의 생각을 물었다.
술에 취한 단학은 그저 자신의 생각을 말할 뿐이니 별 고민 없이 말을 꺼냈다.
“허어, 공유가 쉽지 않을 거야. 그리고 남궁세가는 궤가 좀 다를 걸?”
“어차피 다 같이 들었다는데 달라봤자 얼마나······.”
다르다.
들은 이에 따라 전해지는 심득은 사람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괴이했다. 하나 이훤이 슬쩍 빌미를 던지자 단학이 냉큼 물었다.
“다르지! 당시에도 비룡검존은 천하삼십대 고수에 손꼽혔을 만큼 유명했다고.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말이야.”
이러면 다 넘어온 셈이다.
“아마 심검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어.”
예상 외의 비밀이었다.
본래 심검(心劍)이란 의기상인을 넘어 의념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경지를 뜻했다. 보통 절대지경의 끝을 보면 가능하다는 신위였다. 실제로는 의념을 쏘아보내는 것이니 형태가 있을 리 만무했다. 다만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무기가 검이었고, 도가 일직선으로 날아가는 건 그림이 좋지 않기에 심검이라 할 터였다. 한데 절대지경의 고수라고 해도 정작 심검을 펼칠 수 있을지는 확인된 바가 없다. 절대지경의 고수에게 한 번 보여 달라고 할 수도 없고, 절초를 펼치는 상황에 구경꾼이 많을 리 만무했다.
그러니 심검처럼 느껴지는 무언 가였으리라.
“호오! 심검. 이야기 속에서나 나오는 거 아니었습니까?”
“사실 정확하게는 몰라. 내가 어릴 때 남궁세가의 빈객들과 작은 일을 한 적이 있지. 그 때 빈객 중 누군가 마도의 잔당을 향해 묘한 자세를 취하니까 크흑! 하고 죽어버리더라고.”
단학이 어렸을 때라면 수십 년 전의 이야기다.
만약 비룡검존이 빈객에게 무공을 전했다면 세가의 가솔보다는 제어하기 쉽지 않았으리라. 그러니 신공을 익혔다는 기쁨에 자신도 모르게 펼쳐보았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게 누구였는데요?”
“누구였더라?”
단학이 술기운에 기억이 가물가물한 듯 침음을 흘렸다.
잠시 후 그가 손가락을 튕기며 탄성을 내뱉었다.
“아! 그 사람이······.”
그 때 누군가 의도한 것처럼 문 밖에서 헛기침을 했다.
“크흠! 이곳에 취선관주가 있는가?”
이훤은 혀를 찼다.
“쳇! 역시 틈을 주지 않는군.”
조금 전부터 묘한 기운이 정원에서 느껴졌다.
한데 정작 중요한 순간에 끼어드는 것을 보아하니 남궁세가에서 보낸 자일 게다.
“누구야?”
이훤의 퉁명스런 물음에도 상대는 느긋하기만 했다.
“허허, 모르는 사이도 아닐 텐데 정 없기 굴지 마시게.”
그리고는 허락도 없이 문을 열어젖히는 것이 아닌가.
이훤은 훤칠한 키에 수려한 용모를 지닌 노인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남궁채황에게서 느껴졌던 기운이 조금 더 강하게 발산되고 있었다.
그것도 일부러 그러는 듯했다.
마치 네가 찾고 있는 것이 여기 있다고 손이라도 흔들어주는 것처럼 말이다.
“초면인데.”
광운십칠비의 일인이면서 사절에 속한 청죽휘는 마치 손자를 대하듯 입꼬리를 올렸다.
“자네와는 초면이지만, 내가 화산과 작은 인연이 있지. 이름은 잊었기에 그저 청죽휘라고 부르면 된다네.”
화산이라는 말에 무작정 박대할 수가 없었다.
혹여 망아취자와 인연이 있을 수도 있는 노릇이다.
“무슨 인연입니까?”
“일단 화산연맹의 창립을 축하하네. 내가 화산에 있을 때에는 모든 것이 어려웠어. 아! 나는 삼십삼동의 후계자였네. 지금은 남궁세가의 빈객으로 있지만 말이야.”
단학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그의 말대로라면 남궁세가는 직계와 방계는 물론이고, 빈객 중에서도 자격이 되는 자를 골라 신마의 심득을 전했으리라.
눈앞의 청죽휘도 그 중 한 명일 터였다.
동시에 연맹의 서화종이 건넸던 소속 도관들의 명칭이 스쳐갔다. 당시 서화종은 삼십삼동의 존재를 알리며 안타까워 했다. 도력이 깊은 것은 물론이고, 일신의 무예 또한 도관 중에서 손꼽힌다고 하지 않았던가. 오죽 했으면 만류종의 종주인 각상동주가 삼십삼동주의 건재함을 이유로 몇 번이나 종주 자리를 고사했었다.
“삼십삼동이라면 토굴 서른세 개에 모든 잡념과 속세의 인연을 묻어둬야 한다던데요. 당시 화청궁의 금검노호 복천적이 궁도들을 이끌고 화산을 침범했을 당시 동주께서는 서른세 개의 동굴에 적을 모조리 쑤셔박았습니다.”
“허허, 성료가 벌써 그 정도의 실력을 갖췄던가?”
성료(星了)라면 현재 삼십삼동주의 이름이다.
이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분의 존성대명을 함부로 입에 담지 마라.”
청죽휘는 갑작스런 이훤의 도발에 헛웃음을 지었다.
“허허, 지금 뭐라고 했느냐?”
“화산에 평생을 머물고, 오직 하나의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 매진하시는 그 분의 존함을 너 같은 자가 함부로 입에 담는 것이 불쾌하다는 의미다.”
“성료는 내 사제다!”
이훤은 병을 내려놓고, 입안에 머금었던 술을 뱉었다.
마치 저자거리의 왈패가 시비를 거는 것처럼 건들거리는 모양새로 청죽휘를 바라봤다.
“삼십삼동의 고련은 화산 내에서도 소문이 자자할 만큼 뼈를 깎는 고통이 수반된다고 하더라. 한데 그게 싫어서 도망친 새끼가 이제 와서 배분을 논해?”
청죽휘는 눈을 부릅 떴다.
그는 오래 전부터 남궁세가를 통해 이훤의 정보를 습득한 상태였다. 그렇기에 자신이 등장하면 신마의 기운을 느끼고 어떻게 해서든 시비를 걸려 할 것이라 예상했다. 이미 그에 대한 대비책과 조력자를 준비한 상태가 아닌가. 한데 순수하게 분노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울화가 치밀었다.
“운 좋게 절학을 주워 배웠으면 감사한 마음이나 가져라! 삼십삼동의 수련이 어느 정도인지 네가 알기나 하더냐?”
이훤은 입꼬리를 올렸다.
“모르는데. 그래서 난 삼십삼동에 안 가잖아. 그런데 너는 갔다고 도망쳤잖아. 겁쟁이에 패배자에 의지박약이면 남궁세가에서 주는 밥이나 처먹다가 뒈질 생각을 해야지! 감히 화산의 고인을 나를 평가하겠답시고 미끼로 내 걸어?”
청죽휘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훤은 마치 청죽휘의 계획을 모조리 알고 있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렇기에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하는 사이 이훤의 일갈이 이어졌다.
“내가 남궁채황이나 아까 어린 새끼는 나름 생각이 있어서 두들겨 팼거든. 그런데 너는 화산의 반도로서 내가 응징을 해야겠다.”
“뭐라? 반도!”
“그래! 반도다. 떠났으면 조용히 살 것이지. 남궁세가를 위해 화산의 고인을 입에 담았으니 배신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니 일단 신마의 심득이든, 뭐든 간에 화산을 대신해 너를 징치하겠다!”
쨍그랑!
이훤은 술상을 걷어찬 후 곧장 청죽휘를 향해 달려들었다. 청죽휘의 쌍장이 파랗게 물드는 순간 무당의 면장을 방불케 할 만큼 음유한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놈!”
어차피 남궁세가 내에서의 싸움이다.
그러니 설령 죽더라도 자연스럽게 묻힐 터였다.
청죽휘는 그렇게 생각하며 첫 수부터 전력으로 내공을 운용했다. 하나 이훤의 주먹과 맞부딪치는 순간 무언가 잘못됐음을 깨우쳤다. 수강(手罡)을 이루는 강기는 그 자체로 내력의 집합체가 아닌가. 한데 이훤의 주먹은 마치 송곳처럼 강기를 파고들더니 곧장 손바닥을 노렸다.
“흡!”
청죽휘의 두 눈이 벽안으로 물들었다.
똑같은 파란색이나 기운이 일변했다.
신마의 심득으로 인한 기운일 터였다.
‘······.’
이훤의 본능이 경종을 울리듯 위기를 알려주었다. 곧장 고개를 좌로 꺾는 순간 천공혈륜겁이 꿈틀거렸다. 눈으로 보이는 것도 아니고, 귀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하나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무언가 살기를 담은 채 우측을 지나갔다.
무형지기(無形之氣)였다.
‘겨우 이게 비룡검존의 심득인가?’
< 64, 강호 유일의 세가(世家). (4)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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