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 강호 유일의 세가(世家). (3) >
전검당주는 눈을 부릅 떴다.
같은 돌림자를 쓰고, 같은 당주라고 해도 전검당주와 창룡당주는 격이 달랐다. 내원의 핵심 중 한 곳인 창룡당은 가주와 소가주의 명령이 있을 때만 움직였다. 게다가 창룡당주는 현 남궁세가에 오십 명만 존재하는 직계가 아닌가.
‘채황 형님이 한 수에.’
또한 남궁세가의 직계는 방계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을 만큼 대단한 무공을 수련했다. 그러니 지금 당장이라도 남궁채황이 멋들어지게 일어나 이훤을 제압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하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감히!”
“너도 별다를 것 없구나. 어릴 때 배웠잖아. 잘못을 했으면 감히가 아니라 죄송합니다. 변상하겠습니다. 술을 사겠다고 하는 게 정상이잖아.”
이훤이 위에서 누르는 순간 남궁채황의 얼굴이 붉어졌다. 손목이 꺾인 상태에서 짓눌리니 고통과 충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하나 그의 눈빛은 여전히 독기로 가득했고, 이훤을 꿰뚫어볼 것처럼 번뜩였다.
‘이래도 안 보여줘?’
반면 이훤의 속내는 조롱하고, 거칠게 행동하는 것과 달리 의구심으로 가득했다. 어차피 누군지도 모를 놈의 삼류 음모쯤을 깼다고 해도 술자리의 안줏감도 될 수 없을 터였다. 하찮은 놈을 두들겨 팬다고 해도 손맛을 제외하면 얻을 것도 없다.
그렇기에 남궁채황의 등장이 반가웠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를 겁박할 수 있는 상황이 즐거웠다. 그도 그럴 것이 남궁채황에게서는 창무검제인 남궁채린과 달리 신마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렇기에 그를 압박하면 자연스럽게 남궁세가가 얻은 신마의 심득을 엿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한데 놈은 버텼다.
마치 이훤의 속내를 훤히 아는 것처럼 말이다.
‘저 어린 놈은 몰라도 창룡당주까지 박살내면 내 쪽도 곤란한데 말이야.’
그래서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을 흉수를 노렸다.
이훤은 손목을 한 차례 더 비튼 후 남궁채황의 발목을 걷어차려 했다. 남궁채황은 제압을 당한 상황에서도 몸을 뒤로 빼기 위해 발을 들었다. 그리고 그 때를 노려 이훤이 몸을 휘돌렸다. 등으로 상대를 떠받치는 형상이 되는 순간 사량발천근의 묘리를 활용해 집어던졌다.
“흡!”
남궁채황도 저자의 싸움질에서나 쓸 법한 공격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가 허공에서 몸을 비트는 사이 이훤이 내달렸다. 조금 전부터 자신을 찢어발길 것만 같은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는 흉수를 목표로 삼았다.
“눈깔아! 이 새끼야!”
회귀 전부터 수많은 적을 상대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고결하고, 자긍심 넘치는 놈들은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지 않는다. 자신을 믿고, 주변을 믿고, 가문을 믿기 때문이다. 하여 손해를 보더라도 우아하고, 고상하게 보려 했다. 그런 놈들을 상대하는 데에는 왈패의 방식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욕하고, 때리고, 무시했다.
마치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벌레를 밟는 것처럼 말이다.
퍽!
이훤의 일권에 남궁제종의 얼굴이 돌아갔다.
혈륜을 담아서 내질렀다면 얼굴 전체가 날아갔으리라.
하나 내공조차 사용하지 않은 채 그저 주먹을 내지르는 힘으로만 만들어낸 충격이었다.
“크헉!”
남궁제종은 맞으면서도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것은 주변에 있던 무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소주!”
세가의 직계를 뜻하는 칭호가 소주(少主)다.
이훤은 남궁제종을 빤히 쳐다봤다.
눈앞의 독기만 가득한 놈이 남궁세가에서도 오십 명 밖에 없다는 소주란다. 하나 남궁채황에게서 감지했던 신마의 기운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네 나이에 이 정도면 버림받은 것이나 다름없잖아?”
“뭐라? 이 새끼가 뚫린 입이라고.”
끝까지 들어줄 이유가 없다.
이훤은 남궁제종의 주둥이를 중점적으로 후려쳤다.
“내가! 가주의 친서를 받고! 친히! 와주신 귀빈이다! 그런데 코딱지만한 무공과 위세를 믿고, 나를 이용해서 명성을 날리려해?”
말을 끊을 때마다 후려쳤더니 이빨이 사방으로 튀었다.
입술을 찢기고, 부어 원형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역시 화풀이를 할 때에는 매질이 최고다.
이훤은 남궁제종의 양 손목을 붙잡은 채 발로 짓밟았다.
콰직!
뼈가 부러지다 못해 으스러지는 순간 비명이 정원을 울렸다. 놈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독기를 보이더니 이제는 눈물과 콧물을 흘리며 울부짖었다. 시끄러웠기에 뒷목을 잡고 연못으로 던져버렸다.
“하아.”
숙면을 취한 후 일어나 산책이라도 한 것처럼 상쾌했다.
저벅저벅!
이훤은 무인들이 남궁제종을 구하기 위해 어수선한 사이 정자에 올랐다. 정자 위에서 연기를 하던 여인들은 하얗게 질린 채 주저앉은지 오래였다. 게다가 가까이 갈수록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단체로 실금이라도 한 듯했다.
이훤은 여인들을 향해 혀를 찬 후 술상에 놓인 병을 들었다. 그리고 제 것을 마시듯 자연스럽게 술병을 기울였고, 목울대가 꿀렁거릴 때마다 기분 좋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크아!”
그가 멈춰선 곳은 남궁채황이 앞이다.
“남궁제종은 세가의 직계입니다.”
“직계가 나를 음해하고, 무례를 범했으니 죄가 더욱 크겠군.”
“당신이 선 곳이 당신의 강호일지언정 창천평은 남궁세가의 강호입니다. 결코 생각처럼 풀리지 않을 겁니다.”
이훤은 남궁채황을 빤히 쳐다보다가 히죽 웃었다.
“무섭네.”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군요.”
“아니야. 정말로 무서워. 그래서 당장이라도 화산으로 돌아가고 싶어지네.”
“남궁세가는 마음 내키는 대로 오고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 순간 남궁채황은 미간을 좁혔다.
이훤이 암천군림보를 펼쳐 다시 정자로 갔다가 술병을 들고 돌아왔다.
“아! 술이 떨어져서.”
하나 남궁채황에게는 도망을 치면 잡을 수나 있겠냐고 비웃는 것처럼 들렸다. 그러나 이훤의 말이 이어지는 순간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가주가 직접 나를 만나고 싶다잖아. 그런데 내가 사라지면 네 선에서 감당할 수 있겠어?”
이훤은 남궁채황의 어깨를 툭툭 친 후 지나쳤다.
“그러니 그만 짖어대고, 가서 주인 불러와. 더 기다리게 하면 무슨 짓을 하고 다닐지 모른다.”
하나 남궁채황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이훤이 월동문을 나서자, 단학이 슬쩍 다가섰다. 그는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앓는 소리를 내며 이훤을 힐끔거렸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이 말을 하고 싶은 건가?”
단학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알고 있었소?”
이훤은 코웃음을 쳤다.
“남궁세가를 두려워하는 자가 묻는 대로 세가의 정보를 흘려주기에 누가 부탁을 한 것 같기는 하더라.”
단학은 한 숨을 내쉬었다.
“믿기 힘들겠지만, 이렇게 될 줄은 몰랐소. 그저 남궁 형이 검제가 물어보면 답해도 된다고 하기에 그런 줄만 알았소이다.”
“지랄하지 마. 소주와 공자의 용어, 그리고 직계와 방계의 숫자. 전자는 비밀이 아니겠지만, 후자는 아무에게나 알려도 될 만한 정보는 아니잖아.”
“미안합니다. 두 가지는 남궁 형이 알려주라고 해서 별 일 아닌 줄 알았소이다.”
“됐어. 덕분에 하고 싶은 걸 다 했으니까.”
이훤이 웃으며 말했지만, 단학은 여전히 우려를 금치 못했다. 간혹 뒤를 돌아보는 것으로 보아 직계를 반병신으로 만든 것이 불안했나 보다.
“이거야 원. 자칫 큰일이 벌어질 것 같은데······.”
“그래서 좋은 거야.”
단학은 침음을 흘렸다.
“검제는 단순히 성숙하거나, 머리가 좋은 것과 달리 묘한 구석이 있구려. 나보다 강호에 더 능숙한 것도 그렇고.”
이훤은 대꾸하지 않았다.
하나 그가 단학보다 강호의 대소사를 잘 처리하는 건 맞는 말이다. 회귀 전 이훤은 추혼검제 단학이라는 이름을 술자리에서 들을 수 있었다. 즉 향후 십 년 안에 강호에서 사라진다는 의미였다.
“아!”
이훤이 멈춰서자, 단학도 덩달아 걸음을 멈췄다.
“나한테 빚진 거요.”
단학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흘렸다.
“알았소.”
“저녁이 되기 전에 결론이 날 거요. 그러니 그 전까지 술이나 마셔야겠소.”
“그래서요?”
“생각보다 눈치가 없구려.”
이훤의 핀잔에 단학은 머쓱한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가서 좀 구해오시오. 좋은 걸로. 다섯 병 이상.”
단학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번 일은 변명의 여지가 없을 만큼 큰 문제였다.
자칫 잘못됐다면 단학은 남궁세가와 화산연맹 사이에 끼어서 난감한 처지가 됐으리라. 한데 그런 빚을 고작 술 몇 병에 갚을 수 있으니 좋으면서도 의아했다.
‘무슨 속셈이기에······.’
*
창천각은 세가의 내원에서도 비처에 위치했다.
남궁세가의 상징인 창천으로 명명했으니 평범한 건물은 아니었다. 무려 세가의 내원에서도 장로와 전주, 그리고 각주들만 참석할 수 있는 창궁대회의가 열리는 장소였다.
장로원주를 의장으로 삼아 사십여 명 남짓되는 명사들이 둘러앉았다.
“만환검제가 세가의 문을 넘어온 것이 벌써 반 시진 전이외다. 이제 슬슬 결론을 내려야겠소이다.”
원주의 말에 좌중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가주께서 삼경까지 일을 끝마치신다 했으니 그 때까지 검제를 응대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 일은 곧 가주를 대리한다는 것과 같으니 응당 소가주께서 가셔야지요.”
몇몇 사람이 찬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검제라고 해봤자 강호에 나온 지 고작 일 년을 넘긴 말학이외다. 대 남궁세가가 언제부터 강호의 평가를 인정했습니까? 우리가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는 여전히 말학이외다. 무엇 하나 검증받지 않은 자를 소가주가 맞이한다면 이 얼마나 격이 떨어지는 일이외까! 그러니 소가주가 아니라 화산과 연이 있는 장로가 나서서 맞이하는 것이 그림도 좋고, 외부의 반응도 나쁘지 않을 게요.”
“가주께서 친서를 보냈고, 대외적으로 남궁세가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채린과 동행하도록 했소. 감히 지금 가주의 결정을 의심하는 게요?”
“말을 이상하게 하시는 구려! 놈과 엮인 방파들의 말로를 듣지 못했소? 창천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아야 하오. 그런 놈에게 더럽혀질 계기 자체를 없애자는 것뿐이외다!”
쾅!
장로원주가 지팡이로 바닥을 내리쳤다.
“잠시 휴회하겠소.”
좌중은 원주가 결론을 내리지 않고, 휴회를 말하자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하나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거나, 재촉할 수 없었다.
당금 가주의 의형인 그를 누가 건드릴 수 있겠는가.
창궁대회의에 참석했던 이들이 하나둘 씩 자리를 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리를 비우고, 남은 건 열 명 정도였다.
“들라.”
장로원주의 한 마디에 반대편 문이 열렸고, 남궁채황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쳤구나.”
남궁채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훤입니다.”
장로원주는 헛웃음을 지었다.
“과연 명불허전이로군. 그새를 참지 못하고 또 일을 저지른 건가?”
강호의 정보는 대부분 개방과 하오문을 통해 퍼졌다.
하나 남궁세가는 오래 전부터 독자적인 정보망을 만들어냈고, 하오문도나 개방도들까지 속했을 만큼 거대했다. 아닌 말로 무림맹의 비선각보다 한 수 위라고 자평할 정도였다. 그러니 이훤의 행적을 개미굴 때부터 유심히 지켜보는 것이 가능했다.
“남궁제종이 허락 없이 일을 치렀습니다.”
남궁채황은 친족인 남궁제종의 일을 무덤덤하게 털어놓았다.
“애초에 노린 건 아니었겠으나, 너라는 대어를 물었구나.”
“그런 것 같습니다.”
장로원주의 눈동자가 푸르스름하게 번들거렸다.
“심의형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점혈을 하여 외부로의 발출을 금했습니다. 하여 신마의 심득을 익힌 것은 알아차렸더라도 무엇을 익혔는지는 알 수 없을 겁니다.”
“심의형은 세가의 모든 것과 같다. 확실히 하라!”
남궁채황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그 또한 제가 재단할 수 없습니다. 그저 알지 못했으리라고 추정할 뿐입니다.”
“좋다. 그래서 결론은?”
장로원주의 말에 남궁채황은 한 숨을 내쉬었다.
“소가주는 안됩니다.”
“부족하다는 건가?”
“굳이 놈과 엮여서 좋을 건 없으니까요. 대신 광운십칠비는 되어야 놈을 감당할 수 있을 듯합니다.”
“예상보다 평이 좋구나.”
광운십칠비(廣雲十七秘)는 장로원과 전각군에 퍼져 있는 남궁세가의 빈객들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신마의 심득을 조금씩이나마 얻어 배운 상태였다.
“원주. 제가 가겠습니다.”
회의에 참석한 후 침묵을 고수하던 노인이 나섰다.
“오기도 아니고 사절에 속한 자네가 벌써부터 드러낼 필요가 있겠는가?”
광운십칠비는 칠공(七公)과 사절(四絶), 그리고 오기(五奇)로 구성됐다. 노인은 사절 중 청죽휘라 불리는 절대지경의 고수였다.
“채황의 말처럼 어설프게 응대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남궁세가입니다. 그저 존재함으로 빛을 발하니 상대가 어떻든 신경 쓸 필요가 없지요.”
“그 뿐인가?”
청죽휘(靑竹輝)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 작은 인연이 있지요. 오늘 그것을 정리하려 합니다.”
장로원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가주가 나오시면 모든 일이 해결될 터이니. 삼 경 까지만 버티시게.”
< 64, 강호 유일의 세가(世家). (3)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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