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 강호 유일의 세가(世家). (2) >
*
“제대로 먹혔군.”
사내의 말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던 청년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들이 있는 삼층 누각 아래로는 정원과 작은 연못이 위치했다. 그리고 연못가에 만들어놓은 정자에서는 싸움이 한창이었다. 싸움이라기보다는 한 명이 일방적으로 두들겨 팼다.
“사람들은 만환검제라는 별호를 신경 쓰느라 이훤이라는 자의 진면목을 보지 못했습니다.”
“소주의 혜안이 대단한 것이겠지.”
남궁세가는 직계를 가리켜 소주(少主)라 칭했고, 방계는 공자(公子)라 불렀다. 이러한 호칭은 강호에 나가 별호를 얻거나, 가문의 직위를 맡게 되면 자연스럽게 대체됐다. 결국 소주란 아직 강호에 나가지 않은 자들에게 붙는 꼬리표였다.
남궁제종은 직계 중에서도 세가 내의 영향력이 컸다.
제검백가를 총괄하는 외원주를 아버지로 두었고, 당금 가주를 백부라고 부를 수 있는 몇 되지 않는 직계였다. 그러니 세가에 대한 자긍심과 명성에 대한 목마름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런 그에게 이훤이란 부러움과 질시의 대상이었다.
“세가의 학사들이 며칠 동안 이훤의 행적을 역추적한 끝에 결론을 내렸습니다. 일견하기에는 성급하고, 뒤를 보지 않는 듯하나 실제로는 음흉하다고 했습니다. 상대의 약점을 찔러서 명분을 얻고, 그 후에는 제멋대로 행동하지요. 한데 그 제멋대로인 행동조차 철저한 손익 계산 후라는 것이 학사들의 결론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분란을 일으키려 할 것이라고 예견한 겐가?”
“제가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학사들이 했지요.”
“그렇다고 치지. 그럼 이제 어찌 할 테냐?”
남궁제종은 중년인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이제 숙부께서 도움을 주십시오.”
중년인은 방계 출신으로 외원의 전검당(前劍堂)을 이끌었다. 외원주의 심복이며 남궁제종과는 혈연관계는 칠촌이다. 그렇기에 남궁제종의 보좌역을 자처하기도 했다.
“가서 저들을 탓하고, 이훤에게 사과를 하라는 뜻이군.”
“그리고 팔을 잘라 사죄한다고 하십시오.”
남궁제종의 눈빛이 기이하게 번들거렸다.
전검당주는 침음을 내뱉었다.
“저 아이들의 팔을 잘라야 하겠는가?”
남궁제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훤은 자신의 뜻대로 진행된다고 여기겠지요. 그 때 선택지를 주는 겁니다. 팔을 자르라고 하면 놈의 흉악함을 세가에 알릴 것이고, 괜찮다고 만류하면 놈은 기세를 잃습니다. 한 번 기가 꺾인 놈을 휘어잡는 건 일도 아니지요.”
전검당주는 한 숨을 내쉬었다.
“그 문제가 아니야. 저 아이들의 팔을 잘라서까지 그래야만 하냐는 거다.”
남궁제종은 히죽 웃더니 어깨를 으쓱거렸다.
“괜찮습니다. 이미 이야기를 끝냈어요. 제게 빚진 것이 있는 녀석들입니다. 그 일을 없던 것처럼 해주고, 더불어 재물과 몇 가지 가르침까지 내려주기로 했습니다. 제가 숙부께서 생각하는 것만큼 나쁜 놈은 아니랍니다.”
전검당주는 어딘가 비틀린 조카의 대꾸에 말을 잇지 못했다. 결국 그는 더 이상 충고하지 못한 채 창밖만 힐끔 쳐다본 후 누각을 내려갔다.
“알았다.”
*
덩치 큰 놈은 이미 피투성이가 된 채로 나뒹굴었다.
잘 생긴 두 녀석이 달려들었지만, 싸움이라고 부를 수 없을 만큼의 구타가 이어졌다. 정자에서 교소를 흘리던 여인들은 연방 비명을 내지르며 서로 한 몸처럼 붙어 있을 뿐이다.
잘 생긴 놈의 호위였던 양호가 수하들과 함께 달려들려 했지만, 내공이 담긴 일갈이 먼저였다.
“검제!”
정원의 입구인 월동문 근처에 수십 명의 무인들이 몰려왔다. 선두에는 추혼검제 단학이 별채에서부터 이곳까지 경계를 선 듯한 무인들과 함께 하고 있었다.
단학은 당황스러워하며 말했다.
“이게 무슨 일이오?”
그 때 전검당주가 자연스럽게 섞여들었다.
“그건 내가 묻고 싶구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란인가?”
그가 등장하자 경계를 서던 무인과 호위들이 고개를 숙였다. 그는 다친 자들을 슬쩍 살피더니 이훤을 향해 공수했다.
“만환검제가 아니시오?”
이훤은 갑작스런 고수의 등장에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누구시더라?”
“외원의 전검당을 맡고 있는 남궁채궁이외다.”
꽤 높은 사람의 등장이었다.
추혼검제 단학이 설명하길 외원은 제검백가로 이뤄졌으나, 그들을 보조하는 곳이 사당이라 했다. 전후좌우(前後左右)의 사당이니 남궁채궁은 외원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실력자였다.
“아! 이훤이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남궁세가의 격을 보여주려는 듯 다툼이 있었음에도 무작정 편을 들지 않았다. 하나 이훤은 남궁채궁의 배려를 가볍게 무시했다.
“답은 저쪽에서.”
맞은 놈들에게 물어보라는 의미였다.
남궁채궁은 슬쩍 눈을 가늘게 떴다.
이훤의 언행이 사람을 깔보는 듯하여 심기가 불편했다. 남궁제종의 말처럼 상대를 자극하여 이득을 취하려는 자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니겠는가.
“어떻게 된 일인지 하나도 빼놓지 말고 보고해라!”
그는 맞은 이가 아니라 호위인 양호에게 물었다.
양호는 상대가 만환검제라는 말에 이미 반쯤 넋이 나간 상태였다. 세가는 물론이고 제검백가 내에서도 만환검제는 유명했다. 무엇보다 가주의 초청을 받고 세가에 찾아왔다는 말이 쫙 퍼졌을 정도였다.
‘화산의 도인인 줄 알았는데 시정의 잡배 같을 줄 내가 어찌 알았을까? 이럴 줄 알았으면 거래를 받아들이지 말았어야 했어.’
뒤늦게 후회를 해봤지만, 방법이 없다.
그저 솔직하게 말한 후 사문에 피해가 가지 않기를 소망할 뿐이다.
“그것이 검제께서 길을 잃으셨는지 이곳에 오셨습니다. 한데 작은 말다툼 끝에······.”
전검당주의 두 눈이 역팔자로 치솟았다.
“뭐라고? 남궁세가의 귀빈에게 그런 무례를 저질렀단 말이냐? 입이 있으면 변명이라도 해보아라!”
맞은 녀석들은 고개를 들지도 못했다.
“귀빈의 몸에 손을 댄 호위는 무공을 폐하고, 너희들은 손목을 잘라라!”
미리 약속을 했더라도 정작 손을 잘릴 생각을 하니 두려웠나 보다. 그들은 새하얗게 질린 채 입술만 뻐끔거리며 진저리를 쳤다.
전검당주는 이훤을 향해 포권을 하며 사과했다.
“저들의 손목을 잘라 일벌백계로 다스릴 테니 귀빈께서는 마음을 푸소서.”
“네. 그러세요.”
이훤의 한 마디에 전검당주는 말을 이었다.
“세가의 가법은 엄정하고, 철저하며······. 네? 뭐라고 하셨소이까?”
전검당주는 당연히 이훤이 말리고 나설 것이라 여겼다. 현재 남궁세가 내에서 이훤은 혈혈단신의 입장이 아닌가. 아량을 베풀어 남궁세가에 빚을 지울 것이라 여겼다. 하여 자신도 모르게 반문한 후에도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자르라고요?”
전검당주의 말에 경계무인과 호위들은 노기를 내비쳤다.
외인이 세가의 심처에서 제멋대로 행동하고 있으니 좋은 마음을 품을 리 만무했다.
하나 이훤은 거리낌이 없었다.
오히려 맞은 이들에게 다가서며 재촉했다.
“뭐 하냐? 안 잘라? 내가 잘라줄까?”
그러더니 대뜸 양호의 수하가 떨어트린 검을 주워드는 것이 아닌가.
“손목을 내밀어라. 깔끔하게 잘라주마.”
“크흑! 잔악무도한 놈! 그래, 잘라라. 남궁세가를 건드리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네 놈은······.”
퍽!
이훤은 몇 번이나 연습했는지 이 와중에도 또박또박 저주를 퍼붓는 녀석의 턱을 걷어찼다.
“너, 남궁세가 아니잖아. 그리고 원망을 하려면 내가 아니라 이걸 시킨 놈을 원망해야지. 안 그래?”
맞은 놈들의 표정이 다른 의미로 하얗게 질렸다.
그리고 ‘안 그래?’라는 질문은 받게 된 전검당주는 잠시나마 표정을 관리하지 못했다.
“무슨 말이오?”
“이 놈들 방계 아니잖아. 제검백가에서도 하찮은 어딘가의 누군가겠지.”
“······.”
이훤은 굳은 표정의 전검당주를 보며 웃었다.
“누군가 내 행동을 예측하고 함정에 빠트리고 싶었나 본데 말이야. 어설퍼. 너무 어설퍼서 이런 판 위에 올라왔다는 게 수치스러울 정도야.”
전검당주는 대본에 없던 상황에 헛기침을 했다.
“크흠.”
“방계 흉내를 내고 싶었으면 무공이라도 제대로 펼치는 놈을 데려다 놨어야지. 딱 봐도 창을 쓰는 놈이잖아. 아! 혹시 남궁세가에 창술이 있었나?”
그럴 리 없다.
검중제일이 되고자 도법과 창술을 비롯한 무공을 잡술 취급하는 곳이 남궁세가였다.
“그리고 저 여자들은 뭐냐? 남궁세가의 내원에서 웃고 떠들기에는 너무 없어 보이지 않아? 남궁세가는 최고, 최대, 최강이라며? 제검백가에서도 버림받은 놈들이 이런 허술한 판을 깔아놓고, 나를 농락하려 했다면 손목 정도는 감사히 바쳐야지. 아! 너도 있었지.”
이훤이 발을 뒤로 빼는 순간 양호가 신음과 함께 주저앉았다. 이훤이 아랫배를 후려친 후 머리채를 잡고 집어던졌다.
“남궁세가의 가법의 그리 엄정하다면 방계가 아님에도 공자라 칭한 죄도 있겠지?”
전검당주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학사들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고, 이훤은 예상대로 행동했다. 다만 남궁제종의 실책은 이훤이 파악한 것보다 똑똑하고, 강하다는 것이다.
‘애초에 가주가 초빙한 손님을 제종이 건드리는 것부터가 말이 되지 않았어.’
강호에서, 또는 남궁세가 내에서 이름을 날리고 싶다는 남궁제종의 욕망이 화를 불러일으킨 셈이다.
이훤은 전검당주가 아닌 맞은 놈들 앞에 쪼그려 앉았다.
“이쯤 되면 계획은 실패한 거네.”
그는 덩치 큰 놈의 손을 잡았다. 손목 위에 검을 올려놓은 후 입꼬리를 올렸다.
“자! 그럼 너한테 이걸 시킨 놈은 네게 한 약속을 지킬까? 지키지 않을까?”
“흐어억!”
덩치 큰 놈은 이훤의 눈이 붉게 번들거리는 순간 학질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진저리를 치며 팔을 잡아 뺐다.
“사람이야 말이야. 상황이 급하고, 어려우면 나쁜 짓을 할 수도 있어. 하지만 그래도 네 삶이니 더 신중하게 생각했어야지. 이걸로 먹힐까? 이거면 될까? 하려면 확실하게 했어야지!”
이훤은 검을 들고 수십 장 밖의 누각을 겨눴다.
그리고 그가 검을 던지는 순간 붉은 빛이 번뜩였다.
콰직!
누각 삼 층에 꽂힌 채 검이 요동을 친다.
그 사이로 이훤의 일갈이 터져 나왔다.
“이래도 나오지 않을 테냐? 허술한 놈의 새끼가 어설픈 계획이나 짜는 걸 보면 겁쟁이가 분명하겠군. 언제까지 높은 지붕 아래서 숨어 있을 거냐?”
하나 누각에서는 어떠한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하! 이거 생각보다 더 병신 같은 새끼잖아.”
이훤은 걸음을 옮겼다.
전검당주가 그를 막아섰다.
“검제. 모든 건 내가 시킨 일이오. 그러니 책임을 물으려면 내게······.”
그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눈앞에 있던 이훤이 환영처럼 흩어지는 것이 아닌가.
“담 위입니다!”
“막아!”
전검당주의 외침에 수십 명이 이훤을 뒤따랐다.
하나 이훤의 신형은 암천군림보를 펼치는 순간 점멸을 하듯 번쩍이며 오 장씩 이동했다. 그리고 누각의 처마를 박차고 뛰어오르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 창문을 열고 사라졌다.
쾅!
그리고 잠시 후 창문을 터져나가며 남궁제종이 튕겨 나왔다. 삼층 높이에서 호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모습이 더없이 비현실적이다.
“어어어!”
“받아! 소주다!”
전검당주가 내달리며 외쳤다.
연못에 떨어지겠지만, 무방비한 상태로 추락하면 팔다리가 성치 못하리라.
한데 담장 너머에서 누군가 솟구치더니 유려한 경공을 펼쳤다. 정자의 지붕을 밟고 뛰어오르며 남궁제종을 낚아챘다. 손목을 흔들자 줄이 튀어나와 정자의 기둥을 감쌌다. 남궁세가의 절예인 천풍신법을 펼치는 순간 가볍게 두 사람이 정자 앞에 내려섰다.
콰쾅!
이훤이 누각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낙뢰처럼 내리꽂혔지만, 내려설 때 소리가 없었다.
“어! 또 보네.”
창룡당주 남궁채황은 여전히 무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까딱였다.
이훤은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내 놔.”
“검제께 무례를 범한 죄는 용납할 수 없지요. 본가의 가법에 따라 엄중히 처리하겠습니다.”
“싫은데.”
남궁채황은 이훤이 손을 뻗자, 손목을 낚아챘다.
“이곳은 남궁세가입니다.”
이훤은 눈을 가늘게 떴다.
“스승님이 그러더라. 무인이 선 그곳이 강호라고. 저마다 강호가 있어 사연이 있는 거라고 말이야. 이곳은 남궁세가가 아니야.”
남궁채황은 이훤의 입꼬리가 올라가자 미간을 좁혔다.
그 순간 태산 같은 압력이 남궁채황을 짓눌렀다.
가쁜 숨을 내쉬는 순간 어느새 이훤이 손이 남궁채황의 손목을 휘감았다.
콰드득!
이훤은 남궁채황의 손목을 꺾은 후 읊조렸다.
“내가 선 곳은 나의 강호다.”
< 64, 강호 유일의 세가(世家).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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