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 강호 유일의 세가(世家). >
64, 강호 유일의 세가(世家).
남궁세가는 본래 황산 기슭에 위치했다.
그리고 흔히 제검백가(諸劍百家)라 불리는 속문이 안휘성과 인근 성 곳곳에 퍼져 있었다. 남궁세가의 영향력은 거대했고, 그들의 손길이 미치는 곳은 중원의 동부 전체일 정도였다.
하나 남궁세가는 그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다.
점조직처럼 퍼져 있는 것보다 한데 뭉쳐 있기를 원했다.
남궁세가는 황산에서 내려와 평지에 터를 잡았다.
구화산과 황산의 사이에 위치한 창천평이다.
그리고 제검백가를 모조리 이주시켰다.
이주한 것이 아니라 강제력을 사용했다.
이주하지 않는 방파는 연을 끊었고, 그들은 여러 이유를 들어 강호에서 사라졌다. 배후에 남궁세가가 있음을 모두가 의심했지만, 누구도 추궁하지 않았다.
그 결과 창천성(蒼天城)이 탄생했다.
중심부에 남궁세가가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제검백가가 방사형으로 외곽에 터를 닦으니 무인의 숫자만 일만 명에 이를 정도의 거대 조직이 만들어졌다.
남궁세가를 내원으로 삼고, 높은 담을 세웠다.
제검백가를 외원으로 삼아 더 높은 벽을 쌓았다.
창천성은 단 한 명의 간자조차 허락하지 않은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이 때부터 단일 세력으로는 마교에 버금간다는 평을 듣게 되었다.
“남궁세가의 직계가 오십 명이라면서?”
이훤의 물음에 단학은 주변을 살피며 수긍했다.
“그건 맞지만 섣불리 입 밖에 내지 마시오.”
두 사람은 창천성의 내원이라 할 수 있는 남궁세가에 입성한 상태였다. 하나 내원에 들어왔을 뿐 심처를 거닐 수 없었다. 손님으로 왔기에 빈객청에서 가장 좋은 방을 지원받는 것이 전부였다.
“밖에 깔려 있는 자들이라면 걱정하지 마.”
“기막을 펼치면 그것으로 인해 또 의심을 살 수도 있소.”
이훤은 헛웃음을 지었다.
“겁쟁이처럼 왜 이래? 그래도 검제잖아. 남궁세가에 삼두육비의 괴물이 있는 것도 아닌데 절절 매는 이유가 뭐야?”
“······.”
대답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진짜 두려워하는 듯했다.
“걱정 마. 저딴 녀석들은 기막을 친 것도 모를 테니까. 그래서 대답은?”
이훤에게 필요한 건 정보였다.
개방이나 하오문이 아니라 사적으로 남궁세가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사람의 정보가 필요했다.
“후우, 비밀이랄 것은 없으니 얘기해주겠소. 직계는 오십 명 남짓이 맞소. 방계까지 더해도 오백 명을 가까스로 넘길 게요.”
“남궁세가에 속한 무인이 일만이라는데 고작 오백 명의 명령을 따르는 건가?”
“충분하지요. 그들이 남궁이기 때문이오.”
이헌은 아랫입술을 핥았다.
‘괴물들이 얼마나 득실거리는 걸까?’
그는 잠시 후 추혼검제를 응시했다.
단학은 만매만전을 통해 성장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나 이제야 창무검제와 비슷한 수준이 되었을 뿐이다. 한데 창무검제에게서는 만매만전은 물론이고, 신마의 이능을 익힌 자가 퍼트려야 할 특유의 기운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말인즉슨 남궁세가의 무공만 익혀서 천하에 손꼽히는 검수가 되었다는 의미였다.
‘희한한 구조야.’
그런데 내원의 창룡당주는 창무검제의 뺨을 서슴없이 때리고, 남궁세가는 이름값만으로 추혼검제를 주눅 들게 만들었다. 그리고 창룡당주인 남궁채황은 이훤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선 기운을 쉼 없이 흩뿌렸다.
신마의 이능이지만, 겪어본 적이 없는 기운.
아마 제룡검존 남궁천운의 손길이 닿았으리라.
‘그러니 남궁 놈은 악재처럼 반쪽짜리를 열심히 가르친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걸 선별해서 가르쳤다는 뜻이잖아.’
창룡당주 남궁채황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무위의 무인을 궁리하다보니 떠오르는 자들이 있다.
‘무당쌍선과 비슷한 수준이 고작 당주라고?’
생각만으로도 재밌었다.
이훤은 별실의 안쪽 문을 열어젖혔다.
황토방처럼 생긴 곳의 안쪽을 미는 순간 냉기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안에는 주향을 흩뿌리는 항아리와 병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처음 별채로 안내할 때 마시고 싶은 만큼 마시라더라.
‘무공도 무공이지만, 별채마다 빙고를 만들 정도의 재력이라면······.’
남궁세가의 거처에서 시간을 보낼수록 사람들의 평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정도라면 작은 강호는 물론이고, 하나의 국가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잘 봐달라는 뇌물일까? 아니면 죽기 전에 베푸는 마지막 호의일까?”
이훤은 술병을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술병의 마개에는 선운상단의 표식이 찍혔고, 마개를 뽑는 순간 흘러나온 주향은 갓 담은 것처럼 신선했다. 분명 이훤이 방문이 알려진 후 취향에 맞춰서 모아온 것일 터였다.
“선운상단이 제검백가 소속이지?”
“그렇소.”
“내가 알기로 선운은 황산에서 사백 리 이상 떨어진 곳이야. 하면 선운상단의 가족과 무인들이 모두 이곳에 있는 건가?”
“그건 그렇지 않소. 제검백가는 자신들의 영역에 존재하는 중소방파들에게 위임을 했소. 적당한 수수료를 받고 제검백가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하지요.”
“만약 누가 제검백가의 영역을 공격해. 그럼 당장 대응할 수가 없잖아. 설마 남궁세가가 나서서 혼내주나?”
단학은 고개를 내저었다.
“작은 문제는 백가회의를 통해 자구책을 실행합니다. 바로 제검백가에 속한 다른 방파들까지 함께 가서 처리하지요.”
“하아, 한 놈을 건드리면 떼로 와서 쓸어버리니까 감히 건드릴 수 없게 되는군.”
“그렇지요. 큰 문제는 백가회의에서도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열 명이 남궁세가의 창궁대회의에 참석합니다.”
이훤은 탄성을 흘렸다.
“이야! 완전 무림맹 같은 구조잖아.”
“그렇기에 창천성을 가리켜 하나의 강호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단학은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반면 이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입꼬리를 올린 채 시시덕거렸다.
“그렇다면 내가 온 걸로 인해 창궁대회의가 열렸겠네.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골머리 좀 앓겠는 걸?”
“설마요. 창궁대회의는 세가의 존폐에 해당하는 큰 문제에만······.”
단학은 말끝을 흐린 채 눈치를 봤다.
지금껏 이훤과 얽힌 방파들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떠오른 게다. 단 한 곳도 멀쩡하게 지나친 곳이 없지 않던가. 멸문과 봉문은 기본이었고, 그나마 종남파가 건재할 따름이다. 하나 그런 종남파마저 화산연맹의 한 축이 되어버렸으니 학을 뗄 만도 했다.
이훤은 선운상단에서 진상했을 술병을 기울이며 탄성을 흘렸다.
“하아! 실력을 자랑한 게 주효했어.”
“해도 너무 잘했지요.”
“그러니까 남궁세가가 대단하면 대단할수록 내 접객 수준을 쉽게 결론 낼 수 없을 거야. 검제! 근처에 정자 없을까?”
“네? 갑자기 정자는 왜 찾으시나요?”
“좋은 술에는 좋은 분위기가 뒤따르는 법. 이 술을 위해서라도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네.”
“하나 허락 없이 구경할 수 없어요. 최소한 안내를 부탁해야······.
이훤은 단학의 말을 귓등으로 흘린 채 대뜸 문을 열고 나섰다
단학은 눈을 끔뻑였다.
‘고작 분위기 있게 술을 마시려고 남궁세가 내부를 휘젓겠다는 건가?’
*
남궁석은 남궁세가의 방계 출신이다.
조모가 전전대 가주와 육촌 지간이니 핏줄을 자랑할 처지는 않았다. 아닌 말로 타인으로 지내도 이상할 것이 없는 관계였다.
결국 남궁석은 남궁세가의 가솔로 인정받기 위해 한 가지 재주만을 연마했다.
바로 기감이다.
그렇게 수십 년을 수련한 끝에 일신의 무위는 높지 않으나, 경계를 서기에는 충분한 실력을 갖췄다. 그래서 서공채라 불리는 귀빈의 처소를 경계할 수 있었다.
‘대화를 하는 것 같지는 않아. 그렇다고 기막을 친 것도 아니고······. 설마 잠이라도 자는 걸까?’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는 본인이 보고, 듣고, 느낀 것만 정리하여 상부에 알리면 되는 게다.
한데 어떠한 기척도 없이 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이훤이 술병을 들고 나타나는 순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고, 말을 할 수 없었으며 눈동자를 굴리는 것이 전부였다. 주변을 살피니 수하들의 상태 또한 자신과 같았다.
“바람 좀 쐬고 올게.”
이훤은 그 말을 남긴 채 휘적거리며 정원을 이동했다.
‘안 되는데. 막아야 하는데.’
무림맹의 수뇌부라고 해도 창천성 내에서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는 없는 법이다. 무당파의 해검지가 존재하듯 창천성을 돌아다니려면 방계와의 동행이 필수였다.
하나 이훤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남궁석은 존재 자체를 부정당한 듯하여 울화가 치밀 뿐이다.
‘크흑! 어린 놈의 새끼가. 저런 놈이 검제라니. 강호가 망할 날도 멀지 않았구나!’
그 때 추혼검제 단학이 모습을 드러냈다.
남궁석은 자신이 몇 번이나 접객을 했던 단학이 나타나자 눈을 번뜩였다. 하나 단학은 겸연쩍은 표정을 짓더니 도둑질을 하듯 조심스럽게 지나치는 것이 아닌가.
“미안하네. 내 뜻은 아니야.”
단학의 말에 남궁석의 두 눈은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빌어먹을! 검제 놈들!’
이훤은 기세 좋게 나선 것과 달리 기척을 최대한 감췄다.
추혼검제 단학이 고자질을 하지 않는 한 이각 정도는 별채의 상황이 전해지지 않을 터였다. 그러니 어렵게 만든 시간을 소중하게 써야 했다.
‘적진에 들어왔으면 일단 꼬투리부터 잡아야지.’
다행히 꼬투리를 잡는 건 어렵지 않을 터였다.
이곳은 남궁세가가 아닌가.
남궁세가를 하나의 강호로 여기며 자긍심으로 똘똘 뭉친 놈들이 널려 있는 장소였다. 게다가 명가의 후예들이란 어릴 때부터 예의를 가르쳐도 자연스럽게 상대를 내려다보는 법부터 배우게 된다.
“적당한 놈이 어디 없으려나?”
이훤의 진짜 목표는 고작 남궁세가의 가주 따위를 만나는 것이 아니다. 어딘가 있을, 혹은 남아 있을 제룡검존 남궁천운의 심득을 얻는 것이 최종목표였다.
파팟!
하여 기척을 감춘 채 빠르게 이동했다.
이미 남궁세가로 오던 중 악재의 심득을 활용하여 몸뚱이에 진법을 새겨 넣은 후였다. 그렇기에 그는 탈마가 홍천기공을 통해 은신을 하듯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던 중 귓가에 웃음이 들려왔다.
거리는 이십여 장 남짓.
소리의 울림으로 보아 벽은 네 개 정도 일 터였다.
‘서른네 명.’
벽 근처에 은신하고 있는 자들을 살핀 후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고작 오십 명의 직계와 오백 명의 방계를 위해 좁은 공간에 모인 게 벌써 서른네 명이다. 이것만으로도 남궁세가의 핏줄이 지니는 우월감을 맛볼 수 있었다.
‘고로 이 계획은 실패할 수 없다는 거지.’
이훤은 가볍게 네 개의 벽을 돌파했다.
그가 지나쳤어도 경계를 서던 무인들은 이상하다는 느낌조차 받을 수 없었다.
잠시 후 활짝 열린 월동문이 나타났다.
안쪽을 살펴보면 정자와 호수가 보였다.
젊은 남녀의 웃음이 울리니 무엇을 하는지 불을 보듯 뻔했다. 한데 월동문 근처에 모인 호위 무인의 숫자만 해도 오십 명을 넘겼다.
분명 직계가 있으리라.
이훤은 득의의 미소를 지으며 담을 넘었다.
그리고 수풀 속에서 뒷짐을 진 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언뜻 보면 산책을 하다가 길을 잃은 사람처럼 보일 것이 분명했다.
“누구냐?”
날 선 목소리가 들려왔고, 웃음이 한순간에 끊겼다.
이훤은 자연스럽게 몸을 돌려 정자 위에 모인 자들을 훑어봤다.
잘 생긴 놈 둘에 덩치 큰 놈 하나.
그리고 여인이 다섯이다.
덩치 큰 놈은 술을 마셨는지 살짝 얼굴이 붉었고, 이훤을 쳐다보는 눈빛에 멸시의 감정이 듬뿍 담겼다.
“산책을 하고 있는데.”
“감히 남궁세가의 경내를 허락도 없이 함부로 돌아다니면서 산책을 운운해?”
이훤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를 꼽을 때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것이 튀어나왔다. ‘감히’라는 말에 입꼬리가 더욱 치솟았고, 목소리는 느긋했다.
“나는 세가의 초청을 받고 온 손님이다. 너희들이야 말로 누구이기에 나를 핍박하는 건가? 사적인 자리였다면 출입을 통제하는데 신경을 썼어야지!”
덩치 큰 놈은 이훤의 일갈에 화를 참지 않았다.
폭발할 것처럼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대뜸 허리춤의 검을 낚아채려 했다.
한데 잘 생긴 놈 중 하나가 초를 쳤다.
“양호! 양호!”
월동문 밖에서 십여 명의 무인이 비조처럼 달려왔다.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불청객이 있는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엇!”
“양호! 경계를 어떻게 섰기에 외인이 함부로 발을 들일 수 있는 건가?”
“죄송합니다. 공자.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공자라면 직계가 아니라 방계다.
남궁세가의 방계 중 별호가 없는 자를 공자라 칭했고, 직계라면 소주라고 했다. 직계가 아닌 것은 아쉽지만, 내원의 깊은 곳에서 꽃놀이를 할 정도라면 어깨에 힘 좀 줄 수 있는 방계이리라.
“쯧.”
이훤은 혀를 차며 돌아섰다.
그러자 양호의 수하들이 길을 막았다.
“멈추시오.”
“나는 남궁세가의 초청을 받고 온 손님이다.”
“초대장을 보여주시오.”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아마 있어도 용호관주가 지니고 있겠지.
“방에 놓고 왔소.”
이훤은 그 말을 끝으로 가볍게 발을 내딛었다.
양호의 수하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이훤의 어깨를 잡았다. 이훤은 가볍게 수하의 손목을 올려쳤고, 자리를 뜨려는 것처럼 걸음을 옮겼다. 비틀거리며 물러난 수하가 자세를 바로하기 전 대갈일성이 튀어나왔다.
“본가의 손님으로 왔다는 놈이 본가의 가법을 무시해? 거기 서라!”
사흘 굶은 멧돼지가 칡이라도 본 것처럼 달려들었다.
이훤은 덩치 큰 놈이 지척에 이르는 것을 보며 진심을 담아 읊조렸다.
“너라도 참 고맙다.”
덩치 큰 놈이 뜻밖의 속삭임에 의문을 표하기 전에 모든 것이 끝났다.
이훤이 상대의 주먹을 잡아채더니 팔꿈치를 꺾은 후 밀친 게다. 그 순간 덩치 큰 놈은 제 주먹에 코를 얻어맞고 튕겨나갔다.
“아흑!”
“천보!”
잘생긴 놈들이 참지 못하고 튀어나왔다.
이훤은 그들을 보며 남궁채황을 떠올렸다.
자신을 만났을 때 남궁세가에 온 것을 환영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가 눈앞에 있다면 이렇게 말해주련다.
“매화의 세상에 온 것을 환영한다. 꼬맹이들아.”
더불어 허리춤에 매달린 주머니 속에서 매실의 씨앗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 64, 강호 유일의 세가(世家).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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