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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마신-160화 (160/226)

< 63, 만환검제((萬換劍帝). >

63, 만환검제((萬換劍帝).

강호의 이목은 큰일에 쏠리기 마련이다.

그 결과 산동성으로 쏠렸던 시선은 섬서성 화산으로 옮겨간지 오래였다. 그러니 하북성 남부에서 일어나는 작은 사건을 신경 쓰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심지어 개방의 총타가 하북성에 있음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콰콰콰콰쾅!

하북성 남부의 청암산에서 군부에서나 쓸 법한 폭뢰가 수십 발이나 연이어 터졌다. 삐죽삐죽한 봉우리와 깎아지를 듯한 절벽이 절경인 산이었다. 하나 폭발로 인해 나무가 통째로 쓸려나갔고, 산기슭은 완전히 뒤집혔다.

하나 인근의 무가도, 관부도 개의치 않았다.

흑의인의 힘이었다.

그는 석가장의 대부인인 애난을 처리한 후 손쉽게 석가장을 손에 넣었다. 그 결과 석가장의 가솔들은 방해는커녕 산아래를 통제했다. 더불어 수십 명의 무인들을 파견하여 다시금 소천뢰를 설치하려는 상태였다.

잠시 후 폭음이 한 차례 더 울리며 먼지굶이 피어올랐다.

만리투안은 입꼬리를 올렸다,

“황보세가에 대한 영향력이 사라지기 전에 소천뢰를 빼돌려서 다행입니다.”

흑의인은 자신의 지낭 역할을 자처한 만리투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청암산의 일이 해결 되기 전에는 뒤가 불안할 뿐이야. 잘하셨습니다. 지금 임시 가주가 된 둘째는 청도대상단이 세운 허수아비라지요?”

“청도대상단의 여식인 예영영이 전마라 칭하니 그 또한 만환검제의 손길이 닿았겠지요.”

“후훗, 우리 이훤이 많이 컸군요. 매화검군도 모자라 만환검제의 별호까지 얻었어요.”

흑의인은 이훤을 자신이 키운 것처럼 웃었다.

“하나 그로서 산동성과 섬서성에 대한 지배력이 생겼음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번 연맹의 발족식에서 그가 백여 자루의 검을 이기어검처럼 다루며 진법을 만들어냈으니 검제라는 별호가 무색할 정도입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만리투안은 대꾸하지 못했다.

흑의인은 빙긋 웃었다.

“주인을 시험하는 건 나쁜 일이랍니다.”

만리투안은 한 숨을 내쉬며 말을 덧붙였다.

“죄송합니다. 절대지경의 고수라고 해도 이기어검을 펼치려면 일 갑자의 내공 이상을 소비해야 한다지요? 하면 이훤의 내공은 백 갑자가 넘는다는 소리인데 그건 불가능하지요. 응당 신마의 이능으로 만들어낸 이적이었을 겁니다.”

“신마의 무공은 불가능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어요. 일희일비할 필요 없답니다.”

머리와 눈이 유달리 큰 만리투안은 느긋하기만 한 주인이 걱정됐다. 하나 그 또한 강림혼요술에 종속된 상태였기에 더 이상 간언할 수 없었다.

“지금은 안제교를 건너는 게 우선입니다. 등 뒤에 적을 두고 무언가를 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안제교 너머는 사군사도의 생존자인 애죽과 애국의 은신처였다. 흑의인조차 두 여인이 숨어서 무슨 일을 꾸미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애초에 애난이 석가장의 대부인이 된 것도 청암산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결국 사군사도 중 세 명이 함께 하는 모종의 음모가 있을 터였다.

하여 화산파의 생존자인 조달수를 미끼로 애난을 끌어냈다. 그리고 그 후에야 벽이 사라진 청암산을 도모할 수 있었다. 한 마디로 지금껏 사군사도의 행적에는 모두 흑의인의 의도가 깔려 있는 셈이다.

“재밌네요. 도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었을지. 부디 제가 조금이라도 즐거워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흑의인의 말에 호응하듯 오좌 중 차석인 사객이 외쳤다.

“안제교를 찾았습니다!”

지형 자체가 달라진 산기슭 반대편에 놀랍게도 협곡이 등장했다. 그리고 절벽과 절벽 사이에 위태롭게 매달린 동아줄 세 개가 보였다. 양 손으로 두 개의 줄을 잡고, 외줄을 타야 할 만큼 위태로웠다. 흑의인이 다가오자, 사객이 수하들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화산 선인봉에서 철장방이 사용하던 쇠기둥이 연결된 후 폭이 넓은 다리가 되었다.

“길을 열어라.”

사객의 수하들이 비조처럼 다리를 건넜고, 흑의인과 만리투안이 뒤를 따랐다.

“진법이나 기관은 없습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만리투안은 입꼬리를 올렸다.

“그만큼 안제교 앞의 진법을 믿었거나, 저 안에 총력을 기울였다는 뜻이겠지요.”

“어느 쪽이든 문제될 건 없겠군요.”

사객이 턱짓을 했다.

“진입해라.”

동시에 수십 명의 무인들이 내달렸다.

만리투안의 결론을 믿기보다 사객의 명령을 죽음보다 중시 여긴다는 뜻이다.

“웬 놈들이냐?”

여기저기서 외침과 비명이 겹쳤다.

하나 사객이 개입하는 순간 비명이 연이었다.

그리고 일각도 지나지 않아 고요해졌다.

“드시지요.”

사객은 땀 한 방울,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은 채 돌아왔다.

그리고 그가 안내하는 곳에 한 여인이 무릎을 꿇은 채 상체를 숙이고 있었다. 사객의 수하가 목을 밟고 있었기에 고개만 살짝 돌린 채 흑의인을 올려다봤다.

“흑의! 네 놈이 감히 이곳을 침범해?

울상을 짓고 있는 여인이야 말로 사군사도 중 한 명일 터였다. 하나 흑의인은 사도끼리 적대하지 말라던 명령마저 무시한 채 이 자리에 섰다. 게다가 여인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주변을 살폈다.

“혼자인가요?”

“애죽입니다. 애국은 천룡께서 따로 내린 명령이 있기에 얼마 전 이곳을 떠났답니다.”

흑의인은 헛웃음을 지었다.

“신마의 심득을 찾으러 갔겠군요.”

애국(哀菊)은 이미 백소를 구출하는 과정에서 이훤에게 살해당한 후였다. 하나 흑의인을 비롯한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장소였다.

“여긴 무엇을 하는 장소인가요?”

“크흑! 네 놈에게 알려줄 듯싶더냐? 네 놈은 천룡께서 내리신 명령을 어겼다. 네 최후가 어떨지 벌써부터 눈에 보이는구나!흑의인은 애죽 앞에 쪼그려 앉았다.

“서로 간섭하지 말라는 명령을 누구에게 들었는가?”

애죽(哀竹)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떠오르는 것이 없다.

그 순간 흑의인의 눈빛이 칠채로 일렁였다.

“사도는 무공을 익힐 수 없다는 말은 또 누구에게 들었는가?”

“어어어.”

애죽은 더듬거리다가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했다.

“최초의 사도.”

“내게 오좌가 대체될 수 있듯 사도 또한 마찬가지다.”

“설마 네가 최초의 애국이라고 생각하느냐?”

흑의인의 무미건조한 말이 이어질수록 애죽의 눈이 혼탁해졌다.

“천공인.”

천공인(天恐人)이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녀의 칠공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흑의인은 피식 웃더니 몸을 일으켰다.

“좋은 걸 만들었군요.”

반면 만리투안은 기연이라도 얻은 사람처럼 좋아했다.

“진짜 천공인이라면 이 년들이 노린 건 남궁세가겠군요.”

“그렇겠지요. 강림혼요술이 통하지 않는 남궁세가라면 외부에서 흔들 수밖에 없을 테고. 그러려면 천공인만한 것이 없지요.”

흑의인의 말에 만리투안은 고개를 조아렸다.

“모두 수거하겠습니다.”

“따로 신경을 더 쓴 보람이 있었어요. 다시 강호로 돌아갑시다.”

만리투안은 사객에게 뒤를 맡긴 채 잰걸음으로 뒤를 따랐다.

“한데 천공인이 있음에도 천룡께서 직접 애국을 보내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궁금하십니까?”

“예, 천룡께서 움직이셨으니 강호에 파란이 일지 않겠습니까? 그 속내를 알아야 주군의 행보에도······.”

그는 흑의인의 눈빛이 묘하게 일렁이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 말끝을 흐렸다. 잔뜩 겁을 먹은 그의 귓가에 무미건조한 한 마디가 들려왔다.

“우리의 목표는 심득의 확보입니다.”

더 이상은 궁금해 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그리하겠습니다.”

흑의인은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은 채 애국의 은신처를 떠났다. 한데 안제교 반대편에는 뜻밖의 존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만리투안이 고개를 숙였다.

강호에서 그가 경외를 표할 상대는 오직 둘 뿐이다.

흑의인과 사자림주였다.

전자가 강림혼요술의 여파였다면 후자는 흑의인 때문이다. 만리투안은 흑의인은 정체가 사자림주의 아들임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심복이었다.

하나 저 둘은 부자로 만나는 것이 아닐 터였다.

흑의인은 광무제에게 강림혼요술을 사용하는 순간 아버지로 여기지 않았고, 광무제는 미혹당하는 순간 아들이라 여기지 않았다.

주종(主從)의 관계.

사자림주 광무제는 절대지경에 오른 고수였지만, 기꺼이 허리를 숙였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곳까지 찾아오신 걸 보면 중요한 일이겠군요.”

“만환검제가 남궁세가로 향했습니다.”

흑의인의 눈빛이 다시금 칠대로 일렁이기 시작했다.

“하하, 남궁세가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의 손을 떠나겠군요.”

광무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세가의 직계는 강림혼요술에 미혹당하지 않으니 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모략을 꾸미기에는 덩치가 너무 크지요. 그렇기에 십육사도 중 누구도 남궁세가의 생존자인 제룡검존 남궁천운을 노리지 않았습니다.”

흑의인은 손가락을 꼽으며 숫자를 헤아리기 시작했다.

“형산파의 축융노도는 행방이 묘연하고, 제갈세가의 소천기는 기관 안에 있으니 남은 건 남궁세가로군요.”

“도모하실 생각입니까?”

“안 될까요?”

“주군께서 원하신다면 사자림의 모든 힘이 남궁세가로 향할 것입니다.”

사자림주의 말에 흑의인은 빙긋 웃었다.

“이번에 재밌는 걸 얻었습니다. 만환검제가 남궁세가로 갔다니 제룡검존과 어울리기 전에 둘 다 회수하도록 하지요.”

“복안이 있으십니까?”

흑의인은 입꼬리를 올렸다.

“만환검제가 우리에게 남궁세가의 문을 열어줄 겁니다.”

*

“만환검제?”

“모르셨군요.”

이훤의 반문에 추혼검제 단학이 헛웃음을 흘렸다.

“지금 강호에는 관주께서 선인봉 정상에서 펼치신 신위로 인해 떠들썩합니다. 하여 만환검제라는 별호가 회자고 있지요. 본래 죽은 후검제는 관주께 적대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다만······.”

이훤은 히죽 웃었다.

수십 년간 중원에는 오직 다섯 명의 검제가 존재했다.

한데 갑작스럽게 오대검제가 육대검제로 늘어나게 생겼으니 제 딴에는 시험이라도 해볼 요량이었나 보다.

‘잘 됐네. 알아서 덤비지 않았으면 한참을 도발해야 했을 텐데.’

한데 후검제가 죽었으니 중원의 검제는 여전히 다섯 명인 셈이다.

“그럼 단 공은 오대검제를 맞추기 위해 내게 덤비지 않은 겁니까?”

사(四)보다는 오(五)가 좋을 수도 있지 않은가.

단학은 쓴웃음을 흘리며 난색을 표했다.

“그런 문제는 아니지요.”

“그럼 왜 함께 가는 거지?”

이훤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그를 만나고 이제 한 시진이 지났을 뿐이다.

하나 이훤은 단학이 마음에 들었다.

예의 바르고, 신중한 자였다.

거기에 더하여 검제라는 별호를 오히려 부담스러워하는 모습까지 드러냈다. 평소였다면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는다는 말에 화를 냈으리라. 하나 적진이나 다름 없는 남궁세가로 가는 길이 아닌가.

쓸 만한 자는 많을수록 좋았다.

“나는 남궁세가에 한두 번 가본 것도 아니니 관주의 적적함을 달래줄 수도 있을 게요.”

“술 못 마시는 친구는 싫은데.”

단학은 피식 웃더니 품에서 작은 서책을 슬쩍 꺼냈다가 넣었다. 겉면만 슬쩍 봐도 만매만전이다. 한데 얼마나 많이 보았던지 벌써부터 고서(古書)처럼 닳아 있었다.

“그저 신세를 갚고 싶을 뿐이외다.”

이훤은 눈을 흘겼다.

“이제 보니 그걸로 성장한 후에야 내가 어느 정도인지 눈치 챘나 보오?”

“아직 모르오. 어쩌면 죽는 그 날까지 모를 수도 있을 것만 같소. 그렇기에 오히려 더 관주를 보고 있자면 같은 검제라는 별호가 부끄럽게 여겨질 뿐이외다.”

이제야 단학이 처음 나타났을 때부터 머뭇거렸고, 자신에게 호의를 베푸는 까닭을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로 인해 상대에 대한 호기심이 더욱 깊어졌다. 만매만전으로 성장한 자라면 최소한 자기만의 신념을 지녔으리라.

“그러면 별호를 바꾸던가.”

하나 신념이라는 칼끝이 어디로 향할지는 지켜봐야 할 터였다. 그렇기에 이훤은 단학과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갔고, 날 선 대화로 그를 자극하려 했다.

“크흠, 그럼 저녁에 한 잔 정도는 마셔보리다.”

“안 마시는 거였군.”

이훤은 히죽 웃으며 그제야 전방을 바라봤다.

술을 마신다는 건 교우관계의 초석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제야 단학을 조금은 믿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내 방으로 와.”

그 때 선두에 섰던 창룡당주 남궁채황이 외쳤다.

“본가다!”

이훤은 혀를 찼다.

“반 나절 전부터 저들의 땅이랍시고 남궁세가 운운하더니 이제야 도착하는 건가.”

“사실 남궁세가의 힘이 미치는 곳이 아니라 실제로 땅 주인이 맞소. 안휘성은 물론이고, 옛 남직예의 요처는 아마 대부분 남궁세가의 것일 게요.”

빌어먹을 부자 놈들.

이훤은 짜증 섞인 표정으로 창밖을 슬쩍 바라봤다.

끝 모를 담장이 성벽처럼 높게 솟구쳤고, 그 너머로 전각군의 지붕이 배꼼 고개를 내밀었다. 회귀 전과 후를 통틀어 가장 넓은 구조였다. 게다가 정문은 마차 여덟 대가 동시에 드나들어도 될 만큼 거대했다.

“하아.”

이훤은 술로 입을 헹구며 입꼬리를 올렸다.

단일세력으로 유일하게 마교를 막을 수 있다는 곳이 남궁세가다. 적진이나 다름없는 곳에 홀로 들어서는 꼴이지만, 흥분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절명곡의 생존자, 비룡검존 남궁천운.’

이훤에게는 남궁세가가 천공혈륜겁의 십성으로 가는 입구처럼 보일 뿐이다.

‘그대는 내게 무엇을 줄 거요?’

< 63, 만환검제((萬換劍帝).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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