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 창천(蒼天)으로 가는 길. (6) >
*
천공혈륜겁(天恐血輪劫)은 기묘한 무공이다.
대저 무공이란 제아무리 신공절학이라고 해도 상식의 선을 벗어나지 않는다. 상식도 사람이 만들고, 무공도 사람이 만들기 때문이다. 그 어떤 무공도 강호라는 틀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저 높낮이가 있고, 좌우의 폭이 다를 뿐이다.
하지만 신마의 무공은 달랐다.
아니, 신마의 심득으로 미루어 추측할 뿐이다.
그는 고금제일인이나 절대고수라는 표현으로 단정 지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인세의 범주를 뛰어넘는 초월자(超越者)가 아니겠는가. 신마는 심득만으로 사람을 가리지 않고 성장시키며, 몸뚱이에 진법을 새기고, 예지를 하거나, 사람의 영혼을 저당 잡는 기묘한 위력을 발휘했다.
‘이런 허무맹랑한 것들을 가능하게 만들다니.’
어쩌면 피를 돌려 육신을 성장시킨다는 천공혈륜겁이 가장 평이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나 이훤은 신마의 심득이 겹쳐질수록 확신했다.
팔황무극존이 만들어낸 천공혈륜겁이야 말로 신마의 이능과 가장 밀접하다고 말이다.
결국 천공혈륜겁을 대성해야 했다.
‘회귀 전에 8성은 천공혈륜겁에 천관심결이 더해졌기 때문이지.’
그리고 신마의 심득을 얻을 때마다 벽을 깨지 않았던가. 그러니 남은 자들의 심득을 얻어 12성 대성에 이른다면 신마가 보던 것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런 세상을 인간이 규정지은 절대지경에 국한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규격 외의 세상이니 강호라는 틀 너머를 뜻하리라.
그래서 초월경(超越境)이다.
‘그 세상을 꿈꾸는 내게 너희들 정도가 가당키나 하겠냐?’
이훤은 웃었다.
그 모습에 이훤의 외침으로 어쩔 수 없이 나타난 이들이 서로를 바라봤다. 저마다 소개하기를 추혼검제(追魂劍帝) 단학과 후검제(朽劍帝) 이백기, 그리고 비룡사천(飛龍四天) 주 씨 형제라 했다.
“어떻게? 혼자? 아니면 함께?”
저마다 한 성의 패주는 아니더라도 제멋대로 독행강호를 장담하던 자들이다. 만약 의형제를 맺은 남궁채린의 호출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오지 않았으리라.
“허, 남궁 형의 말대로 제정신이 아니구나.”
후검제 이백기는 검제의 별호를 얻었으나, 정사지간의 무인이다. 그렇기에 전후사정을 따지기보다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했다.
“그래서 먼저?”
“하하! 남궁 형, 저 놈을 내가 마음대로 요리해도 되겠소?”
남궁채린은 난감한 듯 얼굴을 감쌌다.
그는 산동악가에서 이훤을 본 후 친구들을 불러들였다. 도리를 짓밟고, 배분마저 우습게 여기니 진짜 강호를 보여줄 셈이었다. 하여 검제라 추앙받는 동료들을 불러 이훤을 압박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미 화산과 이곳에서 이훤의 무위를 견식하지 않았던가.
“그쪽이 불렀군. 아! 이건 그럼 남궁세가의 선물인가?”
이훤이 히죽 웃으며 하는 말에 남궁채린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세가가 아니라 내가 한 일이외다.”
“아! 그럼 무슨 일이 벌어져도 남궁세가가 나를 탓하지는 않겠네?”
남궁채린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관주, 내가 친우들을 불렀을 뿐이외다. 비록 허락을 구한 것은 아니지만, 너무 격하게 반응하는 것 같지 않소이까?”
이훤은 코웃음을 쳤다.
“그런데 한 시진 동안 우리를 미행했구려. 그렇지 않나요?”
검후는 풍백전이 만들어온 의자에 앉은 채로 말했다.
“흥! 날파리가 주변을 맴돈다고 어찌 태산이 미동조차 하겠느냐.”
단학과 이백기를 비롯한 이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훤이 그들을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도 모자라 검후에게 날파리 취급까지 당했다.
“크흠, 검후께서는 태산이시니 이 일에 개입할 뜻이 없다고 봐도 되겠습니까?”
“쯧, 내기에서 지고, 기분이 좋지 않다. 너희들끼리 정리하여라.”
그리고는 헛기침과 함께 마차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이훤은 남몰래 입꼬리를 올렸다.
‘스승님의 말 대로네.’
망아취자는 검후에 대해 논할 때 이렇게 말했다.
인정을 받기 힘드나, 한 번 인정받으면 더 없이 든든한 우군이 될 것이라고 장담하지 않았던가. 전후사정을 모르는 상태에서 자리를 비켜주니 감사할 따름이었다.
“너 같은 녀석들을 많이 보았다. 얄팍한 재주를 믿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엉겨 붙는 놈들 말이야. 그런 놈들의 끝은 모두 좋지 않았단다.”
“이 형! 그만 하시오. 가벼운 비무나 하자고 모인 것이 아니오. 분위기를 너무 어둡게 만들지 마시구려.”
남궁채린이 다급히 외쳤다.
어찌됐든 이훤은 남궁세가의 가주가 초대한 귀빈이다. 승패를 떠나서 문제가 생기는 것이 반가울 리 만무했다.
하나 후검제 이백기는 완전히 혈기가 솟구친 상태였다.
“남궁 형, 이건 이제 내 문제요.”
남궁채린은 황급히 전음을 보냈다.
[놈의 무공은 상상 이상이야. 게다가 음흉하기 짝이 없으나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른단 말이오.]
그는 자신이 패배했다는 사실은 숨겼다.
이백기는 대답 대신 검을 뽑았다.
“너 이리 와라. 하늘 위에 하늘이 있음을 보여주겠다.”
남궁채린은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이번에는 이훤을 만류했다.
“관주, 갑자기 왜 이러시오?”
이훤은 주먹을 쥐락펴락 한 후 손을 뻗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듯하니 검이나 빌려주시오.”
“뭐라고요?”
“검! 아니면 내 것을 써도 좋고.”
남궁채린은 며칠 전 이훤의 손에서 뻗어 나왔던 팔황과 무극을 떠올렸다. 기형병기인 것은 둘째 치고, 강도가 상상을 초월했다. 마치 전설상에 나오는 만년한철이나 자단묵철로 만든 것처럼 강기를 베어버리지 않았던가.
그는 흔쾌히 검을 건넸다.
이훤이 신병이기를 쓰지 않는다면 스스로 손을 묶는 것과 같았다. 그러니 이백기를 상대로 수준을 맞춰주려는 것처럼 보였다.
“잘 쓰고 돌려주시오.”
“그래야지.”
갑작스런 싸움에 분위기가 한껏 가라앉았다.
용호관주와 장치결을 비롯한 일행은 벙어리가 된 것처럼 말을 아꼈다.
반면 추혼검제 단학과 비룡사천이라 불리는 주 씨 사형제는 눈짓을 주고받았다.
[이래도 되는 겁니까?]
비룡사천의 대형인 주일공의 말에 단학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와 후검제 이백기는 친분이 있었으나, 생사를 염려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차피 남궁세가라는 뒷배를 지닌 남궁채린을 통해 만들어진 인맥이 아닌가.
[내가 나서서 말리면 꼴이 더 우스워질 거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에 하나 문제가 생기면 그 때 개입하도록 합시다.]
단학은 침음을 흘렸다.
옛 친우의 부름에 유람하는 기분으로 나선 길이다.
한데 갑작스럽게 생사결이 펼쳐지니 귀신에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하나 막상 싸움이 시작되자, 근심이 조금은 사라지는 듯했다.
“하핫! 겨우 이따위 실력으로 기고만장했던 것인가?”
후검제 이백기는 이훤을 사정없이 밀어붙였다.
첫 수부터 강기를 흩뿌리는 것으로 보아 죽어도 상관없다고 여기는 듯했다. 반면 이훤은 기세 좋게 나선 것과 달리 수세에 몰렸다.
겉으로 보기에는 말이다.
‘진짜 까맣게 잊고 있었네.’
이훤은 흉신악살처럼 인상을 쓰며 달려드는 이백기를 보며 속으로만 웃었다. 상대는 이훤이 처음이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이백기야 말로 회귀 전 자신을 죽이기 위해 모였던 열다섯 중 하나였다.
‘네 놈은 예나 지금이나 지랄 맞은 성질은 그대로구나.’
이백기는 그 중에서도 무당의 도인이었다.
지금 모습에 주름을 더하고, 검버섯을 찍으면 영락없는 그였다. 회귀 전에는 십수 년이 흘렀을 때 이훤과 처음 마주했다. 백여 합의 검을 나눴고, 마지막에 이르러 머리카락을 잘린 채 이백기가 도망쳤다. 그리고 다시 만났을 때에는 무당의 도인이 되어 있었다.
‘소마를 따라 왔으니 너 또한 천룡전의 주구로 전락했겠지.’
그렇지 않으면 저 성격에 무당파를 제 발로 찾아갔을 리 만무했다.
이훤은 웃음을 참기 위해 있는 힘껏 참았다.
그저 미행하는 자가 있기에 남궁채린을 탓하려고 불러들였다. 한데 그 중에 자신을 죽이려고 덤볐던 자가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것도 두 명이나 말이다.
그는 이백기의 검을 피하며 추혼검제와 비룡사천을 힐끔 쳐다봤다. 별 생각 없이 멀뚱히 서서 구경하는 자의 허리춤을 보아하니 확실했다.
‘너는 잠시 후에 보자.’
지금은 눈앞의 먹잇감을 깔끔하게 먹어치우는 것이 먼저였다. 정사지간이라지만, 명색이 후검제라 불리는 자다. 일검에 쳐 죽였다가는 남궁세가에 꼬투리를 잡힐 수도 있을 터였다.
해서 놀아줬다.
터터터터터터텅!
검후는 남궁세가로 향하는 동안 잔소리만 하지 않았다.
인정은 하지 않았으되 망아취자를 대신할 수 있도록 가르쳤다. 비록 천공혈륜겁으로 인해 초식 없이 싸우는 것이 가능했지만, 검후의 가르침은 그 폭을 더욱 넓히는데 일조했다.
삼 할의 혈륜에 칠 할을 덧씌웠다.
겉으로 보기에는 강맹해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는 전력이라는 의미였다. 남궁채린의 검이 화로에 넣은 것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화르륵!
그것이 기세 좋게 꽂혀들던 이백기의 검을 맞받아쳤다. 그 순간 절세보검이 된 것처럼 남궁채린의 검은 이백기의 검을 관통했다. 쇠가 잘리는 미세한 파열음만 남긴 채 검을 둘로 갈랐고, 힘을 잃지 않고 내리꽂힌 검은 이백기의 몸을 베고 지나갔다.
촤아아아아악!
한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이백기의 시간이 가장 먼저 흘렀다.
몸뚱이가 좌우로 흩어지면서 말이다.
그 후 남궁채린의 두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고, 추혼검제와 비룡사천이 뒤이었다.
“관주!”
이훤은 헛웃음을 지으며 검을 늘어트렸다.
“너무 잘 드는데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합니까!”
“그럼요?”
“아니! 죽일 것까지야······.”
“그럼 내가 죽어줘야 합니까?”
남궁채린은 발악을 하듯 일갈을 내질렀다.
“그건 아니지만! 그저 성격이 급하고, 혈기가 방장한 친구였을 뿐인데.”
이훤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걸 내가 어찌 압니까?”
대꾸할 말이 있을 리 없다.
초면에 살기까지 드러냈는데 죽였다고 해서 탓을 한다면 강호는 예전에 사라졌을 터였다.
이훤은 남궁채린의 검을 던진 후 돌아섰다.
“동료의 복수를 할 차례가 아닌가?”
의외로 추혼검제가 아닌 비룡사천이 움직였다.
그들은 학사의를 멋있으려고 입은 게 아니었나 보다.
말투에서 유가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후검제는 우리와 의형제는 아니었으나, 많은 일을 함께 했었소. 선후관계를 떠나 그가 죽었으니 복수를 하지 않을 수가 없구려.”
촤촤촤촹!
발검을 한 후 말을 이었다.
“하나 정파인으로서 힘이 빠진 자를 공격할 수 없으니 운기조식 할 기회를 주겠소.”
“괜찮아. 검이 날카로웠을 뿐이야.”
“좋소. 우리는 음양괘공검진으로 그대를 상대할 거요.”
“편한 대로.”
비룡사천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은 후 빗살처럼 쇄도했다.
이훤의 눈빛은 비룡사천의 막내인 주사공에게 꽂힌 채 떨어지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주사공의 허리춤에서 덜렁거리는 호리병이었다.
‘맛 좋았지.’
이훤은 입맛을 다신 후 튕겨나갔다.
음양괘공검진의 묘리가 뭔지는 관심 없다.
그저 빈 곳이 보일 때마다 치고 들어갔더니 한순간 주사공의 코앞이다.
“엇!”
이훤은 양손으로 검을 내리치는 주사공의 손목을 가볍게 밀친 후 학사의를 걷어냈다. 그리고 가볍게 허리춤의 호리병을 뜯어버렸다.
“내 술!”
회귀 전에도 그러더니 회귀 후에도 같은 말이다.
이훤은 피식 웃으며 가볍게 손을 놀렸다.
그가 손목을 꺾을 때마다 무극이 여의봉처럼 늘어났다가 줄어들었다. 그리고 한 번 늘어날 때마다 주사봉의 사지에서 핏물이 비산했다.
“으악!”
하나 주사공은 마음대로 쓰러질 수도 없었다.
이훤이 주사공의 뒷목을 잡아끌더니 귀엣말을 건넸다.
“술 마실 손은 남겨뒀다.”
그리고 아랫배를 걷어찼다.
퍽!
단전이 으깨졌을 것이고, 검붉은 핏물이 튀었다.
이훤의 신형이 번쩍이면서 사라지더니 원래 있었던 곳에서 다시 휘몰아쳤다. 그는 비룡사천을 향해 손을 뻗었고, 순간 핏빛 기운이 줄줄이 뻗어나갔다.
“헉!”
동시에 비룡사천의 주변이 뒤집혔다.
콰콰콰콰콰콰쾅!
“지금이라면 목숨은 붙여놓을 수 있을 거야. 꺼져라. 복수를 하고 싶다면 강해져서 돌아와라.”
비룡사천은 노기를 드러냈으나, 결국 의제를 부축한 채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그쪽은?”
추혼검제는 양 손을 들어 적의가 없음을 드러냈다.
이훤은 그제야 피식 웃으며 호리병을 기울였다.
“꿀꺽! 꿀꺽! 꿀꺽!”
그 때의 그 술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떻게 만든 술인지 알아내고서 두들겨 팰 것을 그랬다.
그 때 저 멀리서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서른 필 이상의 말이 내달렸고, 다섯 대의 화려한 마차가 뒤이었다. 선두에 섰던 장년인이 안장을 박차고 뛰어오르는 순간 푸르스름한 기운이 안개처럼 흩어졌다.
“창룡당의 당주인 남궁채황입니다.”
복우전이 풍백전에 앞서 귀엣말로 알려주었다.
이훤은 남궁채황의 신묘한 경신술에 탄성을 흘렸다.
‘호오, 제법이잖아.’
남궁채황은 허공에서 두 번이나 몸을 뒤집더니 먼지가 일어나지도 않을 만큼 가볍게 내려섰다. 그는 이훤을 힐끔 본 후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더니 창무검제 남궁채린에게 다가갔다.
“형님.”
남궁채황은 감정 없는 얼굴로 대뜸 남궁채린의 뺨을 후려쳤다.
쫘악!
“귀한 손님을 모셔오라고 했더니 쓸데없는 일로 시간을 허비해. 언제부터 남궁세가의 가법이 우스웠더냐?”
남궁채린은 볼을 붉힌 채 고개를 들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이훤은 그 광경에 흥미로운 듯 입꼬리를 올렸다.
‘검제의 뺨을 후려치는 당주라.’
남궁채황은 갈림길 앞에 서서 정중하게 손을 모았다.
“남궁세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62, 창천(蒼天)으로 가는 길. (6) > 끝
ⓒ 김태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