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 창천(蒼天)으로 가는 길. (5) >
*
남궁채린은 언뜻 보기에 생각에 잠긴 듯했다.
하나 그는 실눈을 뜬 채 맞은편에 앉은 이훤을 꾸준히 살폈다. 산동악가에서 보았을 때만 해도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 애송이라 생각했다. 후기지수 중에는 발군이겠으나, 강호의 노회한 고수들 앞에서는 조족지혈이라 여겼다.
그랬던 평가가 지금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검제라는 별호가 이처럼 허망하게 될 줄이야.’
그는 검을 논할 때 빠지지 않을 만큼의 위명을 자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검제(劍帝)였다.
비록 강호에 검제가 다섯 명이라지만, 위명이 사라질 정도는 아니었다. 아닌 말로 그가 나서면 구파오가의 장문인과 가주들이 맞이할 정도였다.
‘내가 이런 신세라니.’
또한 다른 검제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들과 비무를 했던 것이 수십 번이고, 밤새도록 무리를 논의한 횟수도 부지기수였다. 하나 그들과 비무할 때에도 지난번처럼 무력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남궁채린은 이훤을 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흘렸다.
이훤이 떼를 쓰는 아이처럼 마차 안에서 발을 동동 굴렀기 때문이다.
“아! 재미없다. 재미없어. 지루해서 미치겠네.”
철없는 부잣집 자식처럼 투덜거리는 모습에 절로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 때 마차가 섰다.
이훤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또!”
검후가 문을 열더니 이훤을 향해 손짓했다.
“그래, 또다. 네 녀석이 미덥지 못하니 바로잡을 수밖에! 당장 나와라.”
남궁채린은 슬쩍 시선을 돌렸다.
자칫 이훤과 한데 묶여서 잔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술이나 한 잔 하시지요.”
“마실 사람 따로 있다. 나와라.”
검후는 단호했다.
결국 이훤은 한 숨을 푹푹 내쉬면서도 마차 밖으로 뛰어내렸다. 망아취자가 검후를 잘 돌봐달라고 신신당부를 한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내 나이 스물두 살때의 일이다.”
“그 시절에도 무공이 존재했습니까?”
검후는 이훤의 농담을 귓등으로 흘린 채 말을 덧붙였다.
“화전민 마을을 지나다 울고 있는 아이를 보았다. 아비가 산적들에게 끌려갔다더구나. 하나 나는 기연을 얻기 직전이었다. 한 시라도 빨리 안전한 곳을 찾아서 깨달음을 수습해야 했지. 그 때 내가 어떻게 했을 것 같으냐?”
“최대한 빨리 깨달음을 수습한 후 아이의 아비를 찾아주면 되지 않을까요?”
“세상은 그리 계산대로 돌아가지 않아!”
이훤은 검후가 모르게 한 숨을 내쉬었다.
매일 같이 이런 식이다.
검후는 정사지간으로 보아는 이훤의 언행을 개선하고자 했다. 화산연맹의 중추이며, 화산에 터를 잡고 있는 이상 당연한 일이라고 여겼다. 무엇보다 이훤으로 인해 망아취자의 명성에 누가 될 까 우려했다. 그 결과가 매일 같이 협객이 되어야 한다는 잔소리였다.
‘용호관주는 깨갱한지 오래고, 수발을 들겠다던 놈들은 눈도 못 마주치니······.’
심지어 남궁채린조차 검후의 일에는 개입하지 않으려 했다.
‘내가 해야 한다.’
탈마가 있었다면 어떻게 해서든 미뤘으리라.
하나 그가 없는 이상 이훤이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저랑 내기 한 번 하시지요.”
“내기?”
“어차피 제가 하루아침에 달라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으시잖아요. 그러니 내기를 해서 제가 진다면 진심으로 협객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누가 되지 않도록 행동할 게요. 어떻습니까?”
검후는 입꼬리를 올렸다.
“좋다!”
“검후께서 지셨을 때의 조건은 듣지 않고요?”
“상관없다. 술만 아니라면!”
그녀는 자신했다.
백 년을 살며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패배한 적이 없지 않은가. 게다가 이훤의 나이를 보면 지식과 경험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을 터였다.
다만 술이 걸렸기에 첨언을 했다.
한데 이훤이 흔쾌히 수락을 하는 게 아닌가.
“좋습니다. 이봐! 이쪽 보고 있는 거 아니까 나와서 심판을 좀 봐줘.”
남궁채린은 헛기침을 연발하면서 슬쩍 마차 밖으로 나섰다. 장치결과 용호관주 또한 호기심을 드러내며 한 쪽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쌍전! 그걸 가져와라.”
검후는 대단한 물건이라도 가져오는 줄 알았나 보다.
“아침부터 뚝딱거리더니 그걸 만든 게냐?”
풍백전과 복우전은 나무토막을 엮어 만든 의자를 가지고 왔다. 복우전은 취선관 생활을 하며 손재주를 키운 상태였다. 그는 자신의 것보다 허술한 풍백전의 의자를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앉으세요.”
“그래, 뭘 하고 싶으냐?”
“저 나무 보이세요.”
갈림길을 앞두고 두 그루의 나무가 우뚝 솟은 채 주변에 그늘을 드리웠다.
“나무를 하나씩 고른 후에 반 시진 동안 기다립니다.”
“그게 끝은 아니겠지?”
“네. 이곳은 숲이 우거져서 잡새가 많아요. 누가 고른 나무에 새가 많이 닿는지 내기하는 겁니다.”
검후는 미간을 좁혔다.
지난 밤 배에서 내린 후 이훤의 기감이 사라진 적이 없다. 그러니 누가 봐도 운에 맡긴 듯한 내기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실소가 절로 나왔다.
‘하긴 네게는 오 할의 승부라고 해도 득이겠지.’
그녀는 흔쾌히 내기를 수락했다.
무엇보다 내기의 과정이 생략됐기에 패배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 술 한 잔 해도 되겠지요?”
“클클, 뜻대로 해라. 네 인생의 방탕함이 반 시진 늘어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겠지.”
“남궁세가 정도면 참관인으로 차고 넘치겠죠.”
“그럽시다.”
일행은 침묵을 지켰다.
며칠 동안 이훤이 검후에게 시달린 것을 지켜보지 않았던가. 그들이 보았을 때 두 사람 모두 정상적이지 않았다. 누가 됐든 꼬투리를 잡아서 패배의 원흉으로 만들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일각이 흘렀다.
“흐음.”
검후는 마뜩찮은 표정으로 침음을 흘렸다.
남은 삶이 많지 않은 사람이다 보니 무료한 시간을 참기 힘들었다. 또 다시 일각이 흐르자, 검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흐음, 그냥 단지 반 시진 정도 쉬고 싶었던 게냐?”
“그럴 지도요.”
이훤의 대꾸에 검후는 인상을 썼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흐르더니 내기의 끝이 다가왔다.
다행히 제한 시간 내에 새가 등장했다.
“오는 구나.”
“온다 해도 우리가 찍은 나무로 향한다는 보장은 없지요.”
한데 날아오던 새가 이훤이 찍은 나무 위에서 날개를 펄럭이는 것이 아닌가. 이훤은 느긋했고, 검후는 초조한 듯 침음을 흘렸다.
‘마지막일 수도 있으니.’
검후는 호흡을 가다듬더니 한줄기 기파를 쏘아냈다.
새는 향하던 곳의 기운이 일렁이는 순간 반대쪽으로 고개를 틀더니 검후가 택했던 나무 위에 내려앉았다.
“내공을 쓰셨군요.”
이훤의 한 마디에 검후는 코웃음을 쳤다.
“후훗, 보았느냐? 이것이 강호다. 순리대로 흐르지 않고, 언제 어떤 상황이 벌어질는지 아무도 모르지. 그렇기에 올곧은 것을 신념으로 삼아 굳건하게 살아야 한다.”
“그렇군요.”
남궁채린이 심심했던지 슬쩍 끼어들었다.
“무슨 일이든 과정이 중요합니다. 내기를 하고자 했다면 과정까지 살펴서 유불리를 논했어야지요. 큰 것을 짊어진 자라면 작은 일에도 많은 생각을 해야 합니다. 내공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제약이 없었으니 검후께서 하신 건 잘못이 아닙니다.”
검후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별로 좋아하는 녀석은 아니지만, 그렇다는 구나.”
이훤은 빙긋 웃었다.
“그도 그러네요. 그래도 아직 시간이 남았습니다.”
검후는 오묘한 이훤의 표정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만약 새가 또 날아온다면 기를 조율하는 능력에 따라 승패가 결정될 것이다.
‘설마 나와 내공을 겨루겠다고?’
제아무리 이훤이 대단하다고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게다. 그것이 절대지경에 발을 들은 무인과 그렇지 않은 무인의 차이였다.
그리고 마치 기적처럼 새가 날아들었다.
검후는 이번에도 여지없이 기파를 쏘아냈다.
노골적으로 기파를 흘렸기에 새는 푸드득거리며 방향을 바꿨다.
‘끝났군.’
그 때 이훤이 벌떡 일어나더니 양 손을 휘돌렸다.
혈륜을 전력으로 쏟아내는 순간 붉은 기운이 넘실거렸고, 새는 날개가 꺾인 채 튕겨나갔다. 그리고 이훤이 찍은 나무에 부딪친 채 비산했다.
“너!”
검후가 눈을 부릅떴다.
“뭐하는 짓이냐?”
정신이 멀쩡한 사람이라면 하지 않을 짓이라 여겼다.
그렇기에 검후의 일갈에는 노기가 잔뜩 담겨 있었다.
“내공을 먼저 쓰신 건 검후가 아닙니까?”
“놈! 지금 나를 능멸하는 것이더냐?”
하나 이훤은 표정 변화 없이 말을 덧붙였다.
“애초에 내기는 나무에 닿으면 되는 거였습니다.”
“네 놈처럼 일어나서 전력을 쏟자는 이야기는 없었지.”
남궁채린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 그러고 보니 검후께 그냥 앉으라고 했을 뿐이군요.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무에 내려앉는 것이 아니라 닿으면 된다고 했지요.”
그는 자신이 말을 하면서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검후라면 정파 최고의 웃어른이 아닌가. 심지어 수십 년의 은거를 깨고 화산에 올라 축원까지 해준 상태였다. 그런 사람에게 음흉한 마음을 품었다는 것에 놀란 게다.
‘저 놈을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는 건 금물이야.’
이훤은 검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저는 모든 것을 술처럼 대합니다. 아무리 싸구려 술이라고 해도 한 잔을 마시기 위해 전력을 다하지요. 강호의 일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일이 생기면 방법을 찾을 겁니다. 그게 내 사람을 위한 길이라면 설령 나쁜 방법이라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사마외도라고 배척을 받아도 좋단 말이더냐?”
“화산이 좋고, 매화가 좋고, 술이 좋습니다. 이 세 가지가 가장 잘 어우러지는 곳이 바로 취선관입니다.”
“······.”
“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정파임을 드러내지 않았고, 정파의 후기지수임에 도움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도 그렇게 말했느냐?”
이훤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것을 받아주셨기에 술친구가 된 겁니다.”
검후는 한 숨을 흘렸다.
“후우. 정파의 내일은 안개 속과 같구나.”
“안개 속에 있다고 해도 길을 잃을 뿐 다치거나, 죽지는 않습니다.”
“주둥이는 이미 천마라고 해도 되겠구나.”
이훤은 대답 대신 빙긋 웃었다.
검후 또한 헛웃음을 흘렸다.
그녀가 걱정했던 건 이훤의 치기 어린 행동이 불어일으킬 파장이었다. 한데 스스로 신념을 만들고, 행동하는 이상 마냥 후학으로 대하는 건 불가능했다.
“좋다. 저것도 인정한다. 그렇다면 무승부가 되겠구나.”
검후가 대인의 풍모를 내비치며 웃었다.
하나 이훤은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뒷걸음질 쳤다.
“너?”
그리고는 검후가 부르는 순간 등을 돌리더니 대뜸 암천군림보를 극성으로 펼치는 것이 아닌가. 한순간 갈림길에 이르더니 나무에 올랐다. 그리고 품에서 죽은 새를 꺼내더니 올려놓으며 말했다.
“아직 반 시진 안 지났습니다.”
멀뚱히 앉아서 구경을 하던 풍백전과 복우전은 서로를 바라봤다.
‘치사해!’
‘비겁하잖아!’
그 때 이훤의 호기로운 외침이 들렸다.
“심판! 인정?”
남궁채린은 일행 중 유일하게 상황을 즐기지 못했다.
음흉함에 종잡을 수 없는 성향이 더해지는 순간 등허리에 소름이 돋았다.
“후우, 인정하겠소.”
이훤은 빙긋 웃으며 허공을 응시했다.
“아직 반 시진 안 지났습니다.”
이제라도 검후가 새를 잡아온다면 승부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터였다. 하나 그녀는 헛웃음을 연발하더니 손을 내저었다.
“됐다. 이 나이에 새를 잡겠다고 뛰어다니는 것도 우습구나. 이 내기는 내가 졌다. 네 소원이 무엇이더냐?”
“나중에 따로 말씀드리지요.”
이훤은 나무에 뛰어내려온 후 남궁채린 앞에 섰다.
“표정을 보아하니 생각이 바뀐 것 같네?”
“무슨 뜻인지 모르겠구려.”
“그쪽이 불러내지 않는다면 내가 불러야겠네.”
콰콰콰쾅!
이훤을 중심으로 붉은 기운이 안개처럼 퍼져나갔다.
그는 갈림길 너머를 향해 외쳤다.
“그만 훔쳐보고 나와!”
< 62, 창천(蒼天)으로 가는 길. (5)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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