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마신-156화 (156/226)

< 62, 창천(蒼天)으로 가는 길. (3) >

*

천룡전의 수괴 중 흑의인은 사색사도의 일인일 따름이다.

사군사도와 사상사도, 그리고 사신사도까지 더하면 열여섯 명 중 한 명에 불과했다.

하나 사도들은 저마다 역할이 달랐다.

사색사도와 사군사도는 짧은 시간 효과를 낼 수 있는 모략에 집중했다. 사상사도는 노인의 외모로 인해 장기적인 모략을 꾸몄다. 사신사도는 천룡의 허락 하에 자유분방하게 움직이는 존재들이다.

그러니 흑의인이라고 해서 대단할 것이 없다.

그 또한 천룡이 만들어낸 하수인에 불과했다.

하나 그를 여러 번 겪은 이훤이나, 다른 사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 최초(最初)의 사도(使徒).

그렇기에 사도들은 흑의인을 알 수 없었다.

그가 만들어낸 세력, 천룡과의 관계, 진정한 목표까지 안개처럼 모호했다. 그렇기에 사도들은 흑의인을 경계했고, 사도들의 수족으로 전락한 인형들은 흑의인을 우러러봤다. 똑같이 강림혼요술에 미혹당할 거라면 최고의 상대에게 당하고 싶어 했다.

그게 흑의인이다.

그리고 그가 천룡전에 내어놓은 것이 오좌였다.

흑의인은 이훤의 주변을 정리하기 위해 기꺼이 사좌와 오좌를 내세웠다. 그들이 바로 혈룡인(血龍印)과 묵음거사(默音居士)였다. 혈룡인은 근자에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이급낭인이었고, 묵음거사는 낡은 십이현금을 들고 다니며 가락을 파는 악사일 뿐이다.

하나 당당했다.

그리고 잔인했다.

특히 주인의 허락을 받은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피를 갈구하는 듯한 목소리에 이어 고저 없이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흑의인이 원하는 건 악재의 제자요. 더불어 전마라 불리는 예영영의 목을 자르는 것이지. 그 외에는 생각해 본 적이 없소."

“반항을 했으면 좋겠군. 생각 같아서는 산동 강호 자체를 지우고 싶거든.”

광오한 한 마디였다.

하나 세상이 알지 못할 뿐 능력은 충분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오좌의 서열이란 흑의인을 만난 시기의 문제였다. 일좌인 사자림주나 이좌인 사객에게 뒤쳐진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것을 오늘 증명하려 했다.

산동악가의 앞마당인 충암평에 도착한 순간 묵음거사가 미간을 좁혔다.

“이상하군.”

혈룡인이 목을 돌리며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아! 불쾌하군. 진법인가?”

“그런 듯해. 지금껏 느껴본 적이 없는 진법이야. 이상해. 아주 이상해.”

“크큭, 잘 됐군. 더 이상 느긋하게 갈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닌가?”

묵음거사가 슬쩍 곁눈질을 하며 말했다.

“앞장 설 텐가?”

“당연하지!”

쾅!

혈룡인이 포탄처럼 튀어나갔다.

그가 내달린 지형을 따라 붉은 기운이 선처럼 늘어졌다.

묵음거사가 그 뒤를 따라 느긋하게 나아갔다.

콰쾅!

산동악가의 정문이 산산조각 나며 비산했다.

혈룡인의 쌍장은 철문도 쪼갤 정도이니 놀랄 일은 아니다. 하나 묵음거사가 도착할 때까지 혈룡인은 세가 내부로 발을 들이지 못했다.

“이거 너무 불길하잖아!”

그 때 어디선가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육합전성이라도 되는 것처럼 한순간 방향을 찾을 수 없었다. 하나 이미 진법의 힘을 엿본 그들은 이 또한 기관진식의 위력으로 여겼다.

“우습게 보였군.”

묵음거사의 한숨 섞인 말에 혈룡인은 코웃음을 치며 걸음을 내딛었다.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힘을 발휘할 날이다. 계획을 바꿔야겠어. 살아 있는 모든 걸 죽이겠다.”

“돕겠네.”

혈룡인의 분노가 담긴 외침에 묵음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

“나도 돕겠네.”

악오춘의 결연한 한 마디였다.

하나 그는 새로이 정립된 구궁벽력공을 받아들이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하여 악운과 악설이 세가의 가솔들을 이끌고 모였다.

“다 모였나?”

악마의 한 마디에 가솔들은 대답 대신 결연하게 눈을 빛냈다. 한데 뒤이은 말에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고, 서로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시 말해주지. 지켜보라. 이것이 그대들을 불러낸 까닭이다.”

악설은 두 자루의 단창을 꼬나 쥔 채 나섰다.

“그럴 수 없습니다. 세가에 적이 나타났는데 구경만 하라니요.”

“지금은 그럴 때다. 분한가? 그렇다면 더욱 열심히 수련하고, 더욱 궁리해라. 새로운 강호는 단순히 근골이 좋고, 좋은 사문을 만났다고 해서 빛날 수 없다. 하나 이렇게 말해봤자 피부에 와 닿지 않을 터, 하여 그대들을 불러 모은 것이다.”

악마는 뒷짐을 진 채 걸음을 옮겼다.

“천룡전의 주구를 먹잇감으로 삼아 보여주겠다. 너희들에게 얼마나 대단한 기연이 다가온 것이 확실히 마음에 새겨라.”

가솔들은 악마의 존재감에 짓눌려 말을 잇지 못했다.

오직 악마의 정체를 아는 악설만이 근심 가득한 눈빛을 내비쳤다. 악오춘만 해도 이미 근골이 상했고, 기맥이 원활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보다 나이가 많은 악마가 자칫 적을 상대하다가 다칠 것을 우려한 게다.

“하지만······.”

그 때 악마의 전음이 전해졌다.

[구궁벽력공의 형은 악운에게 전했지만, 가장 적합한 이는 너다. 하여 의를 네게 전하고자 한다. 잘 보아라. 세상을 진법으로 보았기에 육신마저 진법처럼 꾸미고, 다루었다.]

“······.”

[내공의 운용은 요혈을 지날 때가 핵심이듯 세가 내부의 진법 또한 요처마저 위력을 달리한다. 눈으로 똑똑히 보고, 마음에 새기거라.]

악설은 두근거림과 근심이 공존하는 가운데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사이 악마가 손짓을 하며 읊조렸다.

“모두 따라오게. 관전을 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로 안내하겠네.”

대전을 떠나 세가 내부를 거닐었다.

한데 수십 년을 살아온 세가의 구조물이 낯설기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악마는 건물은 그대로 둔 채 주변에 수많은 기물을 덧붙였다. 예를 들어 본래 건물과 건물 사이는 세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지나갈 수 있었다. 한데 벽을 세워 팔만 넣을 수 있게 좁아진 상태였다.

그곳을 통해 맹렬한 바람이 휘몰아친다.

근처에서는 어지간히 소리를 내지 않는 이상 들키지 않을 정도였다.

“새로운 구궁벽력공을 십전진뇌공이라 칭한다.”

구궁보다 십전이 낫고, 벽력보다 진뇌가 대단했다.

[작명하고는 참.]

탈마는 투덜거렸지만, 속으로는 감탄을 연이었다.

그는 어쩌면 악재의 심득 중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홍천기공을 몸에 새겼다. 그렇기에 소가주인 악운이나 악마가 기대하는 악설보다 더욱 빠르게 눈치 챌 수 있었다. 세가 내부에 펼쳐진 진법의 위력은 상식으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내 몸은 내 것이야. 악마는 진짜 세가를 자신의 몸처럼 만들어놨네.’

악마는 탈마의 복잡한 눈빛에 피식 웃은 후 근엄한 어투로 말했다.

“십전진뇌공은 법보와 역법보로 이뤄진다.”

그 또한 이훤이 그랬듯 신마의 심득을 전하는데 있어서 거리낌이 없다. 자격이 되면 얻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뜬구름 잡기에 불과했다.

십전진뇌공(十全震雷功)의 법보(法譜)는 이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역법보(逆法譜)는 해로운 것을 배출하는 행위였다. 단전에서 뽑아 올린 내공을 운용하고, 노폐물을 방출하는 행위를 세가 내에 설치한 진법으로 표현하는 게다.

“엇, 적이다.”

누군가의 눈이 찢어질 듯이 커졌다.

두 명의 적이 외원에서 내원으로 들어서는 중이다.

거리는 이십여 장.

한데 놀랍게도 저들은 아직 산동악가의 가솔들을 인지하지 못했다.

악마는 당연하다는 듯 악설을 불러들였다.

“여기 서서 저들을 봐라.”

“네.”

“어떠냐?”

악설은 멀뚱히 서 있다가 한순간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 저들이 잘 보여요.”

가솔 중에 한 명을 악설의 곁에 세웠다.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곳은 산동악가를 기경팔맥의 구조로 설정했을 때 풍부혈이 지나는 곳이다. 그렇기에 법보다. 이곳에 서면 눈이 맑아지고, 시계가 넓어진다. 향후 이곳에 망루를 세워라. 그렇게 되면 은밀하게 접근하는 적들을 발견하기 쉬울 것이다.”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인가?”

가솔들은 악마를 따로 조심스럽게 걸음을 내딛었다.

“내일 이곳을 파라. 이곳은 요혈의 위치로 보았을 때 통정혈이 지나는 곳으로 역법보다. 노폐물을 배출하기에 적당한 장소야. 그러니 땅을 파면 진흙탕이 될 것이고, 쇠침을 꽂아놓으면 녹이 슬어서 더 위협적이 될 것이다.”

악마는 아직 마무리 짓지 못한 기관진식에 대한 설명을 하는 내내 가솔들의 무리를 나눠 곳곳에 자리하게 했다.

마치 관중처럼 적을 바라볼 수 있는 자리였다.

‘이건 마치 우리 안의 동물을 구경하는 느낌이 아닌가?’

소가주 악운은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조금 전만 해도 산동악가의 흥망성쇠가 결정된다고 여겼기에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다. 하나 지금은 사태를 관망할 정도의 여유를 되찾았다.

“지금부터 내가 적을 상대하마.”

악마는 그 말을 끝으로 성큼성큼 움직였다.

“보면서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탈마에게 물어라. 그라면 너희들 중 누구보다 내 행동을 이해할 수 있을 게다.”

졸지에 지목을 당한 탈마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걸 중원 전체에 새겨놓을 수 있다면 고금제일인은 형님이 아니라 악마가 되겠어.’

*

“아무도 없는 건가?”

혈룡인의 말에 묵음거사는 짊어지고 있던 십이현금을 풀었다.

“그럴 리가 없지.”

“진법 치고는 아무 위협도 없어.”

“그래서 더 불길하군.”

“방금 지나간 곳인가?”

“그렇지 않네. 우리는 같은 곳을 돌지 않았어. 고작 그 정도의 진법이었다면 벌써 눈치를 챘겠지.”

“그렇군.”

그 때 두 사람의 이목이 집중됐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서 장창을 쥔 청년이 느긋하게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한데 두 사람은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청년이 언제부터 걸어왔는지 인지할 수 없었다.

“저 놈이 악재의 제자인가.”

“그렇겠지. 그렇지 않다면 오늘 일진이 꽤 사나울 것 같아.”

두 사람의 읊조림이다.

하나 악마는 바로 옆에서 대화를 들은 사람처럼 말을 걸었다.

“내가 악재의 제자다. 천룡전에서 왔겠지.”

천룡전을 거론하는 순간 혈룡인과 묵음거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 집 담벼락을 두드리던 놈과 흡사한 기운인 것을 보아하니 흑의인이 보냈겠구나. 죽음이 두려웠던가? 아니면 실패가 걱정됐던가? 그렇기에 졸개들을 보낸 거겠지. 그렇지 아니한가?”

“어린놈의 주둥이가 제법 여물었구나.”

혈룡인과 묵음거사에게 흑의인이란 부모였고, 신이었고, 세상이었다. 악마가 그를 조롱한 이상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했다.

“가게.”

묵음거사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무릎 위에 십이현금을 올려놓더니 줄을 튕기기 시작했다. 동시에 혈룡인이 양 팔을 늘어트린 채 내달렸다. 보법을 펼치는 순간 잔영이 번뜩이더니 어느새 악마의 지척에 이르러 쌍장을 내질렀다.

콰콰콰콰쾅!

한데 그 순간 악마의 신형이 무너져내렸다.

그리고는 좌측에서 솟구치더니 벼락처럼 창을 내지르는 것이 아닌가. 사각에서 절묘하게 등장한 창두가 혈룡인의 귀를 노렸다.

따라라라라라-

그 순간 묵음거사가 튕겨낸 음파가 동심원을 그리며 쇄도했다. 이 또한 악마의 움직임을 예상한 후 미리 공세를 펼쳤을 만큼 절묘한 한 수였다. 그러나 악마는 누군가 뒤에서 잡아당기는 것처럼 뒤로 밀려났다.

타타타탓!

그 사이 두 손으로 잡은 창을 한 손으로 지탱했다.

창 끝을 엄지와 검지로 잡은 채 흔드는 순간 기음이 터져나왔다. 악마는 뒤로 밀려났지만, 혈룡인과의 거리는 더욱 좁혀진 셈이다.

“크흑!”

혈룡인이 귀를 감싼 채 뒷걸음질 쳤다.

악마는 어느새 창을 수습한 후 혼잣말을 이어갔다.

“방금 이 곳을 전장으로 삼은 까닭은 전각에서 칠 보, 연못에서 십이 보 떨어졌기에 요혈 중 천중혈과 배치가 같다. 법보로서 십전진뇌공을 활성화시키니 평소보다 활력은 배가 될 것이다.”

“뭐라고 지껄이는 것이야?”

< 62, 창천(蒼天)으로 가는 길. (3)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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