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 창천(蒼天)으로 가는 길. (2) >
*
“풍백전입니다.”
“장통입니다.”
풍백전은 삐쩍 말랐고, 장통은 통통했다.
두 사람은 연맹에서 파견한 삼대제자였다.
아무래도 이훤과 안면이 있던 사마충이나 포대웅은 뽑히지 못했다. 대신 각 종파에서 의지할 만한 이들을 선별한 듯보였다.
용호관주는 진박종이고, 유건평은 광녕종이다.
풍백전은 서평이 직접 뽑은 관윤종의 기린아였고, 장통은 선한 인상만큼이나 도경에 밝았다. 무엇보다 풍백전은 출가 이전 하오문의 지소장이었단다. 그렇기에 길잡이 역할을 하게 되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풍백전은 장통이 길잡이를 맡았기에 이훤의 수발을 자청했다. 하나 이훤의 수발은 원래부터 복우전이 도맡아하지 않았던가.
“아닙니다. 익숙한 제가 하는 게 낫겠네요.”
심지어 복우전은 종남파의 장문인에게 비밀스런 임무까지 받은 상태였다. 남궁세가까지의 여정은 짧게 잡아도 이십 일에서 달포가 걸린다. 그 사이에 이훤과의 친분을 더욱 돈독하게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풍백전은 술 항아리가 든 궤짝을 놓지 않았다.
그는 화산을 떠나기 전날 마주했던 서화종의 당부를 잊을 수 없었다.
- 취선관은 연맹에 속하지 않았으나, 화산에 있다.
짧은 한 마디에 숨겨진 속내를 어찌 모르겠는가.
이훤이 혼을 내주기 위해 잡아간 종남파의 문도들은 어느새 취선관의 관도처럼 행동했다. 정작 이훤과 친해져야 할 화산의 맹도들은 구름 위의 존재처럼 이훤을 대하는 것이 전부였다. 풍백전은 이번 여행을 통해 취선관과의 거리를 좁히고자 했다.
“화산의 고인이신 관주를 맹도인 제가 모셔야지요. 무엇보다 관주는 본 맹의 고문이셨습니다.”
복우전도 뒤지지 않았다.
“이셨지요. 지금은 아무 감투도 쓰지 않으셨으니 응당 취선관의 소사를 맡고 있는 제가 수발을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스스로를 소사로 낮춘다는 건 오히려 관주의 위명에 먹칠을 하는 일이지요. 저는 관주에 대한 경외심과 함께 살아가는 이로서 작은 보탬이라도 되고 싶을 뿐입니다.”
“소사라는 건! 관주께서 붙여주신 건데요?”
“허허, 종남파의 문도께서 어찌 화산의 일에 이렇게 관심이 많으실까?”
“같은 연맹 소속끼리 이런 식으로 세를 가르자는 겁니까?”
풍백전과 복우전은 궤짝을 맞잡은 채 서로를 노려봤다.
여차하면 검을 뽑아서 우열을 가를 기세였다.
“크흠! 내가 취선관의 총관이외다.”
장치결이 직위를 들고 복우전을 도왔다.
유건평이라고 해서 질 수 있겠는가.
“참으로 사소한 일이지만, 한 때 제가 관주에게 아주! 작은! 도움을 드린 적이 있지요.”
아이 싸움이 어른 싸움으로 번지는 전형적인 과정이 이어졌다.
“어이! 쌍전.”
이훤의 한 마디에 네 명은 투기를 거뒀다.
“쌍전이라니요?”
용호관주의 물음에 복우전과 풍백전을 가리켰다.
“둘 다 이름에 전이 들어가니 앞으로 쌍전이라고 부릅시다. 어차피 다
같은 화산연맹의 맹도잖아요.”
이훤의 말에 용호관주는 박장대소를 했다.
“너희들은 좋겠구나! 강호에 나오자마자 별호가 생겼어. 이 기회에 의형제라도 맺지 그러느냐?”
복우전과 풍백전은 마뜩치 않았지만, 이훤의 말을 거스를 수 없었다. 반면 장치결은 표정을 굳혔다. 지금껏 이훤과 어울리면서 느꼈지만, 웃을 때가 가장 위험했다.
‘관주가 없을 때 따졌어야 했는데······.’
기선제압을 하려다보니 무리를 하게 된 셈이다.
이훤이 용호관주에게 물었다.
“종남파가 짊어지고 가는 술과 관윤종이 짊어지고 가는 술 중 어느 것이 더 맛있을까요?”
용호관주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술은 언제나 맛있는 법이외다. 다만 어디서 마시느냐에 따라 작은 변화가 있을 뿐이지.”
그는 엄지와 검지를 살짝 벌리며 웃더니 구릉 너머를 가리켜며 말을 이었다.
“저걸 넘으면 한적한 호수가 나온다오. 그곳의 정자라면 운치가 제법이니 한 잔 하고 갑시다.”
“크큭! 그렇다면 마다할 수 없지요.”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장치결은 침음을 흘렸다
‘아! 연맹에서 제대로 골랐구나.’
그 때 전음이 들려왔다.
[남궁세가가 보는 앞에서 잘하는 짓이다.]
검후가 따끔한 한 마디에 일행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해가 지기 전에 원산평까지는 가야 하지 않겠소?”
남궁채린의 채근에도 이훤과 용호관주는 여유로웠다.
“검제께서도 이 기회에 풍광을 좀 즐겨보시구랴. 강호의 협객이라고 해서 협행만하고 살 수는 없지 않소이까?”
“관주의 말이 옳습니다. 밥만 먹고 살 수 있나요.”
이훤은 용호관주의 말에 추임새를 넣은 입꼬리를 올렸다.
‘탈마가 산동성에서 돌아올 때까지는 느긋하게 가는 편이 낫겠어.’
*
산동강호는 흡사 태풍이 지나간 듯했다.
산동성의 패주를 자처하던 문파는 대략 세 곳이다.
황보세가와 신공부, 그리고 산동악가였다.
하나 어느 곳도 멀쩡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황보세가의 가주는 폐인이 되었고, 소가주는 행방불명이다. 심지어 황보세가가 벌인 혈사로 인해 산동강호의 중견방파들은 대부분 후계자를 잃었다. 그 와중에 삼남도 목숨을 잃은 상태였다.
하여 둘째가 무너진 가문을 수습하는 형국이다.
한데 둘째는 어디선가 엄청난 자금을 끌고 왔고, 신비 세력을 등에 업은 채 세가의 복구를 가속화했다. 그러니 황보세가 주변의 방파들은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신공부 또한 마찬가지였다.
부주는 자신의 아들을 죽인 황보세가주와 어울리며 모략을 꾸몄다가 반편이 소리를 들어야 했다. 체면과 명예를 목숨처럼 여기는 유학자들의 시선이 고울 리 없다. 하여 이미 봉문을 한 후 바깥출입을 금한 상태였다.
“산동성은 산동악가가 먹은 게지.”
“봉문을 했는데 어떻게 군림할 수 있단 말인가?”
“전에는 활동을 하지 않았으나, 이제는 할 수 있게 되었잖은가. 그러니 봉문을 푸는 순간 산동강호는 악가의 수중에 떨어질 것이야.”
폭풍의 중심이었던 산동악가는 호사가들이 매일 같이 떠들어댔음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다 끝나셨나요?”
예영영은 의당에서 나오는 악마를 보고 방긋 웃었다.
살 떨리게 아리따운 여인이 환하게 웃을 때마다 분위기가 바뀌는 듯했다. 하나 악마의 본체는 백 년 가까이 살아온 악재가 아니던가. 오십 전에는 세가를 부흥시키기 위해 애썼고, 오십 후에는 세가를 위해 은거했던 이였다. 그런 그가 손녀 뻘인 예영영을 보며 두근거릴 리 만무했다.
“어, 이제 얼추 끝났다.
악마는 환골탈태를 넘어 반노환동한 상태였다.
그러다 보니 예영영의 또래로 보였으나, 눈동자의 색과 피부결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이훤이라고 해도 악마의 곁에 서면 짐꾼으로 보일 정도였다.
“고생하셨어요. 시간 괜찮으시면 차라도 한 잔 하실래요?”
“됐어. 애들의 기혈만 바로잡는다고 될 일이 아니야. 세가 내에 진법을 펼쳐야 하니 한 시가 바쁘다.”
예영영은 탄성을 내뱉었다.
잘 생긴 사람이 상승의 무위를 갖춘 것도 모자라 진법까지 알고 있지 않은가.
‘멋있어.’
청도대상단은 색마에게 투자하여 황보세가를 암중에서 장악하는 중이다. 그 일만 마무리되면 청도대상단은 중원에서 손꼽히는 대상이 될 터였다. 하나 여전히 무공에 대한 갈증은 채워지지 않았다.
돈이 아무리 많으면 무엇 하나.
지키지 못하는 돈은 자신의 것이라 할 수 없었다.
‘어차피 대형과 탈마는 역마살이 껴서 평생을 떠돌아다닐 게야. 그러니 악마와 혼인을 하면 상단의 미래가 아주 창창하겠지.’
예영영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얼굴을 붉혔다.
지난 밤 등목을 하던 악마의 몸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 때 악마가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취마가 돈을 만들어놓으라고 했잖아. 가능하겠어?”
예영영은 악마가 자신을 걱정하는 듯하자, 배시시 웃으며 대꾸했다.
“하고 있어요. 제 상재는 중원에서 으뜸이라고 자부한답니다.”
장점을 피력하는 사이 예기치 못한 한 마디가 들려왔다.
악마가 빙긋 웃으며 손을 내미는 것이 아닌가.
“그럼 돈 좀 빌려다오. 세가를 다시 정비하는데 생각보다 큰 돈이 들 것 같아.”
“아. 네.”
예영영은 전낭을 풀어 은자 천 냥 짜리 전표를 서른 장이나 건넸다. 악마가 햇빛을 등지고 웃으니 마치 후광이 비치는 듯했다.
“아아.”
악마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녀의 시선이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뭐 해?”
산동악가의 천암일화(千巖一華) 악설은 부용지희(芙蓉智姬) 예영영과 더불어 한 때 산동쌍화라 불렸다. 하나 전자는 무공으로, 후자는 상재로 이름을 날리지 않았던가. 하여 악설은 오늘도 땀에 흠뻑 젖은 무복을 갈아입지도 않은 채 다가왔다.
“뭐 하냐고?”
예영영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한 숨을 흘렸다.
“언니, 우리 막내 너무 잘생긴 것 같아요.”
취마나 탈마, 색마에 비해 인물도 훤칠했고, 무엇보다 열정이 그녀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아니, 여자라면 누구나 악마의 매력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터였다. 예영영은 전마가 아니라 한 명의 여자로서 동조를 구하듯 악설을 바라봤다.
“언니도 그렇게 생각하지요?”
한데 악설은 북해빙궁의 사람처럼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꺼져. 말 걸지 마.”
예영영은 악설이 인상을 쓰며 사라지자, 입술을 삐죽였다.
“설마 악마를 노리는 건 아니겠지?”
악마는 산동악가의 악운을 대동했다.
가주인 악오춘의 나이가 칠순을 넘겼고, 이제 악운이 전면으로 나서야 할 시기였다. 또한 악오춘은 새롭게 정립한 구궁벽력공을 완전하게 받아들일 수 없으리라. 그렇기에 아직 젊은 악운에게 짐을 지워주려 했다.
“산동악가에 대한 방비도 이제 끝났다.”
악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대저 진법이라면 외인의 접근을 막고, 경계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는 자신보다 열 살 이상 어려보이는 악마에게 존칭을 사용했다. 시술을 받기 전에는 몰랐지만,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흘렀다면 가솔들은 모두 광기에 시달리거나, 주화입마에 빠졌을 터였다. 그렇게 되면 세가의 멸문은 기정사실이고, 옛 영광마저 퇴색되었으리라.
“이것은 뻔히 보이는 적을 위한 것이 아니야. 우리의 진짜 적은 천룡전이다. 그들이 벽력창을 노렸고, 취마로 인해 신마의 심득이 퍼졌으니 더욱 노골적으로 세가를 노릴 것이야. 이것은 그걸 위한 진법이다.”
“제가 이걸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악마는 악운을 보며 말했다.
“지금 재료를 모으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라. 모든 준비가 끝나면 대법을 펼쳐서 네 실력을 끌어올릴 것이야.”
“후우, 신마의 무공이 퍼진 이후 제가 알던 강호가 없어진 것 같습니다.”
“신마의 것은 단순히 무공이라 할 수 없어. 인외비경이라는 말처럼 인간에게 허락되지 말아야 했을 무언가일 수도 있지. 하나 강호는 변화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누구도 막을 수 없다. 그러니 누구보다 바르게 순응해야 변한 강호에서 군림할 수 있을 것이야.”
“뇌진공만 믿겠습니다.”
뇌진공(雷震公)은 세가 내에서 악마를 부르는 별호였다.
악마는 돌아서려다 인상을 썼다.
“누군가 왔군.”
“침입자입니까?”
“익숙한 기운이다. 아마, 탈마겠지.”
아니나다를까 이백여 장 밖에서 탈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악운으로서는 경악할만한 상황이다.
이백여 장이면 범인이 보지도 못할 만큼 먼 거리였다. 한데 아직 나타나지도 않은 자를 감지할 수 있다면 단순히 무공의 범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기의 흐름으로 보아 표정이 좋지 않군. 전마를 불러주게. 급히 만나야 할 것 같아.”
악운은 더욱더 공손한 자세로 허리를 숙였다.
“예.”
악마는 탈마와 마주한 후 침음을 내뱉었다.
“하아, 내가 절벽에 홍천기공을 새겨넣은 까닭은 하나였다. 홍천기공을 껍데기라고 여겼고, 진체를 얻었으니 그저 기념하기 위해서였지. 한데 이제 와서 보면 내가 절명곡에서 얻은 진짜 심득은 홍천기공이 아닐까 싶다.”
탈마는 입꼬리를 올렸다.
“대신 잘생긴 얼굴을 얻었잖아.”
악마는 내심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그건 그래. 그나저나 혼자 무슨 일이지?”
탈마는 이훤의 전언을 전달했고, 악마는 침음을 흘렸다.
“지금 당장은 곤란해. 시간이 빠듯할 텐데 언제 떠나야 하지?”
“나흘.”
악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생각보다 여유롭군.”
“무당산을 가지 않았어. 하오문에 들르는 순간 종초홍의 전언이 있더군. 그는 완치되지 않았지만, 맹으로 복귀했어. 해서 곧장 이곳으로 온 거야.”
“좋아. 악운에게 대법을 펼칠 시간이 충분하군.”
때마침 전마가 들어섰다.
그녀는 악마의 부름에 꽃단장까지 하고 온 상태였다.
하나 탈마가 있는 걸 보고는 인상을 썼다.
“똥 씹은 표정을 보니 악마한테 꼬리라도 치려고 했나?”
“닥치세요.”
“돈은?”
“흥! 대형께서 오심 어련히 준비해서 드릴 겁니다.”
“그 중 절반은 내 돈인데?”
“어차피 훔친 돈이잖아요.”
“그래서 안 줄 거야?”
악마는 탈마와 전마의 영양가 없는 대화를 들으며 입꼬릴르 올렸다. 겉모습만 젊은 자신과 달리 저들이야 말로 저 나이에 어울릴 법한 언행이 아닌가. 따지고 보면 그는 이훤과 대화할 때 가장 편했다.
마치 비슷한 연배인 것처럼 말이다.
‘응?’
그는 자신의 주름 없는 손을 내려다봤다.
‘내가 했으면, 그도 했을 수 있지 않은가?’
반노환동이야 말로 그가 생각할 수 있는 이적의 끝이었다. 하여 지금까지 이훤의 언행을 되새겼다. 한데 생각할수록 놀라운 존재가 바로 이훤이었다.
‘술에 가려져서 몰랐을 뿐이야.’
홀로 천하를 종횡하며 천룡전의 암수를 모조리 깨부쉈다는 사실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나 잠시 후 미간을 좁혔다.
“조용.”
탈마와 전마가 자연스럽게 침묵하는 가운데 웃음이 들려왔다.
“후훗, 손님이 또 왔군.”
“올 사람이 있나?”
악마는 대답 대신 눈을 가늘게 뜨고 침음을 흘렸다.
“벽하원령칠채대진을 깨려던 놈의 기운과 흡사하다.”
“그렇다면 천룡전이잖아! 거리는?”
탈마의 물음에 악마는 불을 피웠다.
그리고 다구를 올려 차를 끓이기 시작했다.
“차 한 잔 하다보면 도착하겠어.”
전마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이렇게 느긋하게 있어도 되는 거예요?”
악마는 눈을 빛냈다.
“산동악가 내부에서는 내가 신이다.”
< 62, 창천(蒼天)으로 가는 길.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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