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마신-154화 (154/226)

< 62, 창천(蒼天)으로 가는 길. >

62, 창천(蒼天)으로 가는 길.

화산연맹의 탄생이 공식적으로 알려졌다.

전축제와 발족식이 끝났으니 이제는 즐길 시간이다.

회음현과 화산연맹 경내에서 동시에 비무대회가 열렸다.

마을에서 열린 대회는 굳이 강호인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참가가 가능했다. 힘자랑을 하며 은자를 타냈고, 재주를 뽐내서 직업을 얻었다.

반면 화산에서 열린 대회는 소규모였다.

하지만 강호의 중진문파에 해당하는 곳의 후기지수들이 대부분 참석했다. 구파오가까지 포함했으니 비무대회는 삼일 밤낮에 걸쳐 이어졌다.

그리고 우승은 복우전이 차지했다.

그는 회귀 전의 정인인 남궁무향과 이어지지는 못했으나, 소연명이라는 좋은 짝을 만났다. 즉흥적이고, 호전적인 성향의 태극관주는 비무대회 내내 미소를 달고 다녔다. 하나 그 외의 수뇌부와 구파오가의 대리인들은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그들은 심처에서 거래를 했고, 화합을 했으며, 치세를 논했다. 화산연맹은 며칠 사이에 수많은 방파들과 수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수많은 것이 결정되었다.

“앞으로도 좋은 관계가 이어지기를 기원합니다.”

이 모든 일에서 취선관은 한 걸음 물러났다.

그저 평소처럼 낙안봉에 은거한 채 술을 마실 뿐이다.

이훤은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진무궁을 떠나는 무인을 보며 웃었다. 잠시 후 상인들이 굳은 표정으로 사라졌고, 일각 후 기분 좋은 미소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는 조금 익숙해졌겠네.”

그가 바라는 건 연맹의 굳건함이다.

그로 인해 화산이 건재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연맹주 서평을 비롯한 수뇌부들은 예전처럼 어수룩하지 않았다. 오히려 연맹의 힘을 피부로 느낀 후 당당함을 회복했다.

“아! 광녕종주는 사마외도처럼 가차 없네요.”

탈마가 진무궁을 엿보고 돌아왔다.

화산파의 장문인이었던 서화종에 대한 험담을 있는대로 지껄였다. 듣자하니 서화종은 문파와 무관, 상단과 표국을 상대로 은원 정리를 하는 중이란다. 어려울 때 조금이라도 관계가 좋았다면 대등한 거래가 이뤄졌고, 조금이라도 밉보인 것이 있다면 후려치기 일쑤였다.

“사람이 아니라 칼이에요. 칼! 냉정하게 결정하는데 상대방이 아무 말도 못하더라고요.”

“그게 잘하는 거야.”

이훤은 탈마를 향해 손짓했다.

오랜만에 가을바람이 좋아 하산한 상태였다.

다시 돌아가서 술 한 잔 기울이다보면 다시 해가 질 터였다. 한데 누군가 이훤을 보고, 상부에 알렸나 보다. 서화종이 황급히 달려 나왔다.

“관주. 오랜만이군요. 그간 격조했습니다.”

“봉우리 하나 차이라고 해도 쉬이 올 수 없잖아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나저나 잘 하고 계시다면서요?”

서화종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나름 구도자라 자칭했거늘 예전의 서운함이 남았나 봅니다.”

“그게 잘 하고 있는 겁니다. 모든 사람이 구도를 하고, 협행을 쫓으면 돈은 누가 버나요? 수뇌부야 경지에 이르렀으니 참을 수 있겠지만, 제자들은 한창 먹어야 할 나이입니다. 종주께서 손을 더럽힐수록 연맹과 제자들은 고결해질 겁니다. 이럴 때 좋은 말이 있잖아요. 내가 아니면 누가 지옥에 가랴?”

이훤의 말에 서화종은 잠시 눈을 끔뻑였다.

하나 이내 농이었다는 걸 깨닫고, 헛웃음을 지었다.

“이 모든 게 관주의 덕분이지요. 남궁세가에 가기로 하셨다고요?”

“며칠 후 창무검제가 떠날 때 함께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아! 이 기회에 연맹의 제자들 중 쓸 만한 이들의 강호행도 실시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서화종은 만면 가득 미소를 띄웠다.

그러지 않아도 제자들의 견문과 인맥, 그리고 실전을 위해 강호행을 염두에 둔 상태였다. 한데 이훤이 함께 해준다면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 아니던가.

“배려에 감사합니다. 좋은 아이들을 추려보겠습니다.”

“이게 뭐 대수라고요.”

이훤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반면 탈마는 앞으로의 상황을 예견한 듯 똥 씹은 표정을 내비쳤다.

‘또 나한테 떠넘기겠지.’

문파 관리는 정치의 영역이다.

이제 이훤이 할 일은 없다.

그렇기에 오히려 홀가분한 마음으로 낙안봉에서의 여유를 즐겼다. 장치결은 새로 담근 술을 자랑했고, 망아취자와 검후는 매일 같이 화산의 석양을 바라봤다. 복우전은 평소보다 풀이 죽은 채로 하루를 보냈다. 비무대회에서 우승했지만, 알아주는 이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탈마와 비무를 했다가 박살이 난 후 자괴감에 빠졌을 정도였다.

“힘들어 보이네?”

정치의 영역에서 돌아온 북리혜는 며칠 전보다 훨씬 더 초췌했다. 빙궁의 궁주가 됐다지만, 새외는 척박하기 짝이 없다. 사방에서 빙궁을 노렸기에 중원과 새롭게 결속을 다지러 나온 길이다. 하여 이훤과 정분을 나눴다지만, 따로 시간을 뺄 수 없었다. 매일 같이 회의와 회담, 그리고 은밀한 거래가 오갔다.

북리혜는 피식 웃었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 더 힘들어. 지금이 좋은 거야. 아니, 행복한 거지.”

이훤은 북리혜를 품에 안고, 읊조렸다.

“그건 그렇지.”

회귀 전 무력했던 시절을 떠올려보면 차라리 공적으로 몰려서 쫓길 때가 좋았다. 그 때는 최소한 의지를 드러낼 힘을 갖췄기 때문이다.

북리혜의 호흡이 잠시 늘어졌다.

색색 거리는 숨소리 끝에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나 오늘 돌아가.”

“가지 마.”

이훤이 머뭇거림 없이 내뱉은 한 마디에 북리혜는 피식 웃었다.

“숨 쉴 틈도 없이 내뱉는 걸 보면 준비 좀 했나 보지?”

“연습은 필수지.”

어쩌면 두 사람은 중원과 새외에서 가장 바쁜 존재일 터였다. 빙궁을 안정시키려는 자와 천룡전을 섬멸하여 강호를 구하려는 자가 아닌가.

“나는 삼 일 후야.”

“남궁세가로 간다고?”

“응.”

“남직예는 예로부터 미인이 많다더라.”

항주와 소주는 중원에서 가장 화려한 도시였다.

북리혜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 호위해주는 녀석이 그러더라. 고드름으로 찌르면 시간이 지났을 때 증거가 남지 않는다고.”

“증거 없으면 너네.”

“안 한다고는 죽어도 못하시지.”

“남궁세가부터 조지고 생각할 거야.”

이훤 또한 농을 하듯 엄청난 말을 내뱉었다.

북리혜가 그의 품에 안긴 채로 올려다봤다.

“정말 싸우게?”

“천룡은 정파야. 무림맹, 남궁세가, 소림. 이 정도는 의심을 해줘야지.”

그녀는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빙궁에는 언제 올 거야? 장로들을 설득하려면 최소한 당사자가 있어야지. 멋지게 꾸미고 멀쩡하게 와. 이러다가 젊은 궁주가 망상에 빠져서 존재하지도 않는 사내와 혼인을 하려 한다고 소문이 날 수도 있으니까.”

“늦지 않게 갈게.”

“기왕이면 겨울에 와. 중원에서부터 추위에 익숙해지면 북해도 조금은 버틸만 할 거야.”

이훤은 입꼬리를 올렸다.

“훗, 다치지 말라는 말을 참 어렵게도 하네.”

북리혜는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인생은 어려워. 쉽게 살려고 하지 마.”

이훤은 피식 웃으며 손을 뻗었다.

슬쩍 다가온 탈마가 손에 술병을 쥐어주고 떠났다.

북리혜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읊조렸다.

“당신 형, 잘 좀 부탁해요.”

탈마는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히죽 웃었다.

“얼음에 찔려 죽고 싶지 않으니 노력 할 게요.”

이번에는 북리혜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랄 차례였다. 다가오는 건 눈치 챘으나,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탈마가 떠난 후 술을 마시는 이훤에게 물었다.

“저걸 뭐라고 해야 하는 거지? 단순히 보신경의 문제가 아니잖아. 대단하네.”

이훤은 술병을 북리혜에게 건넨 후 침음을 흘렸다.

“후우, 이게 신마가 남긴 심득의 힘이야. 한 조각만 얻어 배워도 강호의 상리를 벗어나게 만들어버리지.”

“어쩔 수 없네.”

“뭐가?”

북리혜는 이훤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죽지 마라.”

두 번 죽을 생각은 없다.

이훤은 속으로 결의를 다진 후 북리혜의 손을 마주잡았다.

“봄이 되기 전에 다시 볼 수 있을 거야.”

그 날 밤 북리혜가 떠났다.

*

“남궁세가는 작은 강호라 불릴 만큼 거대한 곳이다.”

“알고 있습니다.”

“할 수 있는 걸 해라. 조심하고, 또 조심해라.”

“저 장수할 겁니다.”

“또한 예부터 정파를 위해 헌신한 공 또한 대단하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망아취자의 말에 이훤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세가를 경계하고, 살피라는 뜻이다.

그리고 만에 하나 최악의 결과가 나오더라도 여지가 있다면 감안해달라는 의미였다.

“당신에게 면목이 없구려.”

망아취자의 시선이 옆에 앉은 검후에게 닿았다.

“당신에게는 술친구지만, 내게는 손자 같은 녀석이오.”

이훤은 미간을 좁혔다.

‘언제부터?’

검후는 먹잇감을 보는 시선으로 이훤을 훑었다.

“비록 남궁세가에는 함께 가지 않지만, 그 전까지 잘 살펴보겠소. 그러니 무림대회의까지 잘 지내시구랴.”

망아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에는 어찌됐든 신마의 심득에 관한 논의를 끝낼 게요. 그렇게 되면 나도 한시름 놓을 수 있겠지.”

“그렇게 될 거예요.”

검후가 눈을 빛냈다.

여차하면 노골적으로 무림맹을 압박해서라도 일을 끝맺을 사람이다. 그렇게 만들겠다는 의지가 강렬하게 느껴지자, 망아취자가 겸연쩍은 듯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인원은?”

“꽤 많습니다. 어차피 저 녀석이 고생이지요.”

이훤은 탈마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늦지 않게 떠나거라. 대회의 때에는 노군과 함께 갈 터이니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게야.”

“더 강해져서 오세요. 스승님이 한 마디 하면 맹주도 쩔쩔 맬 정도로 말입니다.”

“노력해보마.”

검후가 먼저 일어났다.

“가자!”

하나 그녀는 이훤이 나설 때에도 처소를 지켰다.

아마 망아취자와 인사를 나누고 있으리라.

이훤은 탈마와 함께 낙안봉을 내려와 장공잔도 앞에 섰다.

“넌 따로 가라.”

탈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생각이에요?”

“남궁세가야. 단일 세력으로는 비교하면 무림맹과 전성기 마교가 아니라면 뒤처지지 않을 정도지. 제아무리 나라고 해도 창무검제가 건넨 서찰만 믿고 찾아갈 수는 없지.”

“그래서요?”

“무당산에 먼저 가서 종초홍과 만나 봐. 무림맹 내의 정보를 모으고, 그 후에는······.”

탈마는 히죽 웃었다.

“악가에 가서 색마 녀석을 만나야겠네요.”

“그래, 일단은 총력전이야. 악가가 정리됐으면 악마와 쓸 만한 녀석들을 다 데리고 와.”

“내가 좋아하는 판이네요. 개판.”

이훤은 고개를 끄덕인 후 장공잔도로 몸을 날렸다.

탈마의 배웅을 받으며 노군동에 도착하자, 이미 일련의 무리가 세 무리로 나뉜 채로 대기 중이다.

처음은 창무검제 남궁채린과 제자인 남궁무향이다.

두 사람이 남궁세가까지의 안내를 맡기로 했다.

두 번째는 서화종이 보낸 화산연맹의 제자들이다.

“관주, 오랜만이외다.”

“아! 용호관주께서 오셨군요.”

용호관주는 화산파가 전화에 휩싸였을 때 연화봉에 찾아왔던 도인 중 한 명이다. 진박화산의 후예로 태극관주에 이은 두 번째 서열인 셈이다. 무공도 무공이지만, 겉치레에 신경 쓰는 성향인지라 예법에 밝았다. 지금도 여행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화산의 옛 정식 도복을 입은 채 학우선까지 흔들고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서화종만큼 강호에 경륜이 깊은 고수였다. 화산연맹은 용호관주를 수장으로 유건평과 두 명의 이대제자를 보냈다.

“관주께서 술을 그렇게 좋아하신다고요?”

“일단 그건 천하제일을 자부합니다.”

“클클, 오랜만의 외유이니 한껏 마셔봅시다.”

주당과의 즐거운 대화를 끝낸 후 마지막 무리를 불러들였다.

“이야! 종남파의 기린아인 한중복가의 복우전이 아닌가! 비무대회에서 우승한 후 까불다가 얻어맞은 상처는 다 나았냐?”

복우전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비무대회에서 우승했다고 거들먹거리다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인 게 불과 며칠 전이다.

“딱히 거들먹거린 건 아니었는데······.”

“놈! 너는 무공보다 다른 걸 먼저 배워야겠다.”

장치결이 복우전을 보며 혀를 찼다.

종남파는 화산연맹의 우방임을 증명하는 의미에서 장치결과 제자들을 보냈다. 연맹의 뜻이 곧 섬서 무림의 뜻임을 알리려는 게다.

그는 이훤을 향해 포권을 했다.

“가시는 길에 들러도 좋을 만한 곳들을 추려놨습니다.”

“역시 총관이 최고입니다.”

남궁채린이 때마침 운기조식을 끝내고 다가왔다.

“관주.”

이훤은 자신에게 목례를 하는 남궁채린을 보며 히죽 웃었다.

“검제께서 발족식 날 보여주신 신위에 연맹의 모든 이들이 감사를 전하더이다. 역시 검중제일이라 불리는 남궁세가의 검법은 참 대단했습니다.”

남궁채린은 어색한 표정을 보였다.

그 날 검후와 이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단전이 텅 빌 정도로 공력을 쏟아내지 않았던가. 그로 인해 하루 종일 앓아야 했고, 지금도 시간이 빌 때마다 운기조식을 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후나 이훤의 신위를 따잡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젠장! 놀리는 것도 아니고.’

그는 표정을 수습한 후 말했다.

“크흠, 슬슬 출발하는 것이 좋겠소이다.”

이훤은 고개를 끄덕인 후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이제 돌아올 수 없을 지도 모를 먼 길을 떠나게 된다.

하나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기에 호연지기를 담아 외치려 했다.

“자! 그럼······.”

그 때 검후의 일갈이 들려왔다.

“가자! 남궁세가로.”

< 62, 창천(蒼天)으로 가는 길.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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