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마신-153화 (153/226)

< 61, 급할수록 빨리해라.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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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연맹회담으로 화산 내부의 결속을 다졌다면 제2차 회담은 연맹의 존재를 외부에 알리는 것이 목적이다. 물론 발족식을 하기 전 이미 목적은 초과 달성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회음현의 규모가 두 배로 커졌고, 물류의 양은 스무 배 이상 폭증했다. 게다가 발족식에 참석하는 방파는 규모에 따라 깃발을 내걸었다. 허락을 받은 깃발만 백여 기가 넘었고, 그 외에 우후죽순 격으로 생긴 깃발까지 헤아리면 삼백을 넘겼다. 그러니 발족식은 좋은 분위기에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삼청의 기운이 내려와 서악에 담으려고 하니······.”

만류종의 각상동주는 화산 도맥의 적통이 아니던가. 그런 그가 노구를 이끌고 선인봉 정상에 올라 발족식을 주관했다. 나이와 어울리지 않게 청명한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렸다.

발족식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무림맹을 비롯해 구파오가의 대리인이 모인 자리였다.

마교라고 해도 정마대전을 각오하지 않는 한 문제를 일으키기 힘들었다.

“이에 화산의 한 자락을 빌려 쓰는 이들이 한 마음으로 천리를 따르려 하니 도문의 풍모를 해한다면 감히 자미성의 처결을 기다릴 것입니다.”

향과 지전이 안개처럼 퍼져나갔다.

연맹의 대표가 된 서평을 선두로 각 종파의 종주와 제자들이 도열하여 절을 했다. 그리고 각상동주가 발족식의 마무리를 알리며 식순을 끝맺었다.

이제 주인의 차례가 끝나고, 손님이 나설 차례였다.

무림맹의 사절단을 시작으로 구파오가의 대리인들이 화산연맹의 성세를 기원했다. 비록 주빈이 될 수는 없었지만, 초대를 받아 발족식을 구경하던 이들은 탄성을 연이었다.

“무림맹의 내단주가 직접 왔을 정도면 연맹의 앞날은 탄탄하겠군.”

“무당의 회암진인은 도맥의 대표가 아닌가.”

“제갈세가의 풍천목은 한 때 무림맹 군사부 서열 이 위까지 올랐던 명숙이야. 무당보다 조금 더 화산과 가까워지려고 하는 것일까?”

빈객들은 명숙들이 축언을 전할 때마다 대화를 나눴다.

하나 허리가 굽은 추레한 몰골의 노파가 등장했을 때에는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지?”

“가사를 걸친 것으로 보아 비구니인 듯한데?”

“크흠, 이런 곳에 초대받았을 정도면 사찰의 역사가 꽤 깊은가 보오.”

“그래도 그렇지. 지금 기다리는 사람들이 수두룩하잖아. 불문의 제자라는 노파가 새치기라니.”

그 때 호사가들의 곁에서 담담한 한 마디가 들려왔다.

“저 분은 그래도 돼.”

그들은 젊은 청년의 혀가 반 토막이라며 투덜거렸다.

“자신의 남은 삶을 오늘에 아낌없이 투자하시는 분이다. 헛소리하지 말고 지켜봐.”

결국 참다 못한 중년인이 헛기침을 했다.

“거! 어린 소협의 말본새가 너무······.”

“최소한 자식에게 몇 년 동안 자랑할 거리는 될 것이다.”

“어허!”

중년인은 본격적으로 청년을 혼내려다 눈을 휘둥그레 떴다. 새치기를 한 노파가 제단에 다가서는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구파오가의 대리인들이 일제히 일어나 예를 표했다.

서평을 비롯한 연맹의 수뇌부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입가에 환한 미소를 지은 채 노파를 반기는 것이 아닌가.

더욱 놀라운 건 노파, 스스로였다.

제단에 다가설수록 굽었던 허리가 펴졌고, 축 늘어졌던 몸뚱이가 활력을 되찾았다. 남녀의 구분을 떠나 뒷모습만 보아도 굳건함과 담대함이 절로 전해졌다.

“강호의 여협 중에 저런 분이 계셨나?”

호사가들의 웅성거림이 한 순간에 멈췄다.

노파가 계단을 오르기 전 손을 뻗으며 말했다.

“내가 검을 놓은 지 오래되어 지닌 것이 없구려. 누가 잠시 빌려주시겠소?”

유건평이 유려한 경공을 펼치며 내려섰다.

그리고 자신의 검이 아니라 등에 매고 있던 목곽을 푼 후 건넸다.

“고금에 이르러 한결같이 정협의 기치를 세우시고, 외지의 주산군도에 은거하셔 외적을 방비하시니 나라의 군주에 봉해지시고, 강호 여협의 상징으로서 검을 드셨으니 불정신니께 연맹의 마음을 담아 전하려 합니다.”

불정신니라는 이름에 검후를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무려 삼십 년 동안 은거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하물며 강호에 발을 담갔다면 무림맹주의 이름은 모를지언정 어찌 불정신니를 모를 수 있겠는가.

“클클, 육지에 나와 며칠 밖에 지나지 않았거늘 내게 빚을 지우려는 자들이 왜 이렇게 많단 말인가.”

검후는 빙긋 웃으며 검을 받아들었다.

“하나 좋은 일이니 고맙게 받겠네.”

그녀는 잠시 망아취자가 쉬고 있을 낙안봉을 힐끔 쳐다봤다.

‘서운함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리고 고개를 돌려 빈객들을 응시했다.

선인봉 정상에 모인 수백 명의 빈객들 사이에서도 히죽거리고 있는 이훤을 금세 찾을 수 있었다.

‘하나 저 아이가 있으니 죽기 전에 하루라도 마음 편하게 살 수 있겠구려.’

이훤은 검후의 속내를 눈치 챈 것처럼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당신의 뜻대로 최선을 다한 후 두 노인의 말년을 축하하겠다는 표정이다.

“되바라진 놈.”

검후는 혼잣말을 읊조린 후 계단을 올랐다.

제단 앞에 서 있던 각상동주가 예를 표했다. 검후라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화답이 될 터였다. 하나 그녀는 도문에 일생을 바친 각상동주에게 동수의 예를 표했다.

촤앙!

그리고 검을 뽑은 후 하늘을 향해 외쳤다.

“권한이 없더라도, 마음으로 일문을 이끌어야 하는 신세. 거기에 더하여 누군지도 모를 강호인들을 위해 일생을 바치겠다는 결의. 모든 욕망을 지웠다지만, 협의를 위한 욕망만은 지닌 채 헌신하는 배려”

망아취자를 떠올리자 입꼬리가 슬그머니 하늘로 치솟았다.

하나 목소리는 여전히 진중했다.

“그들이 이곳에 모여 하늘에 고하니 응대하소서!”

지이이이이이이잉-

용의 포효처럼 선인봉 전체가 울릴 만큼 우렁찬 검명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불같은 기세가 동심원처럼 퍼져나갔고, 이내가 황금 빛 기운이 햇살처럼 번쩍였다. 검기도, 검강도 아니었지만, 보는 이를 숙연하게 만드는 기운이다.

쾅!

검후가 검으로 하늘을 찌른 채 발을 구르는 순간 제단 전체가 요동을 쳤다. 하나 굉음과 달리 먼지만 피어오를 뿐 금조차 가지 않았다.

“불문의 불정은 회천과 더불어 결의하니 화산이 의기를 잃지 않는 한 동도로서 어깨를 나란히 하겠나이다!”

강호에서 회천(悔千)이라는 법명을 쓰는 이는 오직 소림의 방장인 회천대선사뿐이다. 불문의 양대 산맥인 소림과 보타암이 화산연맹을 인정한 것뿐 아니라 동격임을 천명한 셈이다.

좌중은 엄청난 충격에 한순간 넋을 놓았다.

무림맹과 구파오가의 대리인들도 눈만 휘둥그레 뜬 채 말을 잇지 못했다.

“하!”

검후의 일갈이 터져 나오는 순간 마치 검이 백팔 개로 분화하여 하늘로 흩뿌려졌다. 검후의 성명절기인 백팔연대검(百八蓮臺劍)이다. 한데 허공에 흩뿌려진 검영은 마치 꽃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매화?”

하나 웅성거림이 퍼지기 전 기행이 벌어졌다.

검후가 검을 역수로 쥐더니 그대로 제단에 내리꽂았다.

콰직!

검은 손잡이만 남긴 채 깊이 박혔다.

그 순간 허공에 흩뿌려졌던 검영은 빨려 들어가듯 손잡이에 겹쳐지기 시작했다. 마치 백팔 개의 검이 차례대로 꽂히는 듯한 장관에 좌중은 탄성만 내뱉었다.

동시에 검후가 내공을 실어 외쳤다.

“이 증표가 남아 있는 한 화산의 일은 곧 검후의 일이 될 것이다!”

그녀의 외침은 산울림이 되어 쩌렁쩌렁 울렸고, 군웅들의 함성이 더해진 채 한참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와아아아아아아!”

그 때 군웅들 사이에서 누군가 솟구쳤다.

이훤이다.

지금까지와 달리 만인 앞에서 무공을 드러낸 첫 번째 순간이었다. 암천군림보를 펼치는 순간 육지비행과 허공답보를 방불케 하는 속도와 안정감이 전해졌다.

오 장을 날아 내려서는 순간 좌중의 이목이 집중됐다.

“취선관의 관주인 이훤이라고 합니다.”

이훤은 조식을 함께 한 검후를 처음 보는 것처럼 정중한 자세로 허리를 굽혔다. 외인의 등장에 호기심들을 드러냈던 빈객들이 탄성을 내뱉었다.

당금 강호 제일의 풍운아가 등장한 게다.

역탑지대의 숨겨진 협객이며 화청궁을 불태운 악인들을 징치했고, 종남파의 위난을 구했으며, 산동성에 평화를 가져온 것도 모자라, 중경의 토착 세력인 봉황회를 멸절하지 않았던가.

“만매만전의 저자!”

지금껏 유례가 없는 방식으로 비급을 공개한 선인의 등장에 빈객들은 함성을 내질렀다. 어쩌면 검후를 보았을 때보다 더 큰 환호였다.

“후배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네.”

검후가 정겹게 인사를 받아주니 장강의 앞 물결과 뒷 물결이 어우러지는 듯했다.

“강호의 큰 어른께서 화산연맹의 앞날을 축하해주시니 후배로서 그냥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하여 부족한 재주나마 선보여 연맹의 탄생을 축하하고자 합니다.”

“화산을 축하한다면 어찌 막을 수 있을까.”

그녀는 기꺼이 한 걸음 물러섰다.

이훤은 제단 앞에 서서 강하게 바닥을 내리쳤다.

두둥-

검후 때와 달리 발을 구르는 순간 청석이 으깨지면서 파편이 튀었다. 하지만 제단은 멀쩡했고, 그 주변에만 거미줄처럼 금이 갔다.

“천신 거령이 강림하여 화산을 둘로 갈라 황하가 흐르게 했다. 그러니 황하가 끊이지 않는 한 서악 화산의 정기는 만고불변하리라!”

고사를 덧붙여 화산의 역사를 드러냈다.

빈객들이 고개를 끄덕여 수긍하는 순간 갑작스럽게 사방에서 검이 솟구쳤다.

쉭쉭쉭쉭쉭쉭!

처음에는 적의 습격으로 의심했다.

하나 상석에 앉은 이들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제야 군중의 시선이 허공으로 향했다.

마치 검후의 검영의 백팔 개였듯 사방에서 흩뿌려지는 검 또한 백팔 개였다. 놀랍게도 시간차를 두고 던졌지만, 정점에 이르는 순간은 똑같았다.

‘역시 내 동생.’

이훤은 입꼬리를 올렸다.

동시에 혈륜을 극한까지 끌어내는 순간 악재의 심득이 위력을 발휘했다.

그가 인지한 모든 것이 또렷하게 그려졌고, 붉은 선이 거미줄처럼 흩어졌다. 다룰 수 없다면 옅지만, 다룰 수 있다면 동아줄처럼 두터웠다. 전자는 사람의 경우였고, 후자는 사물의 경우였다.

검은 명백한 사물이다.

이훤의 눈이 붉게 번쩍이는 순간 백팔 개의 궤적이 한눈에 들어왔다. 양 손을 쥐락펴락 하는 순간 팔황과 무극이 덧씌워졌다. 눈빛의 붉은 기운으로 무거워진 분위기가 양 손의 금광으로 인해 화사해진다.

이훤이 양 손을 휘젓는 순간 백팔 자루의 검이 눈에 띄게 움직였다. 그렇게 만들어낸 모양은 검후가 보여줬던 검영보다 눈에 띄게 매화를 만들어냈다. 심지어 검 끝에 달린 수실은 두 종류였다.

백색과 홍색.

두 부류로 나뉘어 매화를 만드는 그것은 곧 백매(白梅)와 홍매(紅梅)를 의미했다.

“와아아아아아아!”

빈객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고, 귀빈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이훤의 무위에 두려움을 느낄 정도였다. 오직 검후만이 오묘한 눈빛으로 기특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는 되어야 달수도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겠지.’

이훤은 허공에 펼쳐놓은 장막을 걷어내듯 양 팔을 아래로 잡아끌었다.

그 순간 백팔 자루의 검이 한데 뭉쳐들었고, 용처럼 꿈틀거리며 내리꽂혔다. 목적지는 노골적으로 검후가 박아놓은 검이었다. 하나 지상에 가까워지는 순간 이훤이 허리를 펴며 양 손을 펼쳤고, 검들이 부채처럼 펼쳐졌다.

촤라라라라라라라락!

그리고 모든 검이 사방으로 흩뿌려지며 제단 근처를 벽처럼 감쌌다. 백팔 자루의 검이 박히는 순간 묘한 기운이 제단 주변을 맴돌았다.

푹푹푹푹푹푹푹푹푹!

[말로만 들었을 때에는 가능할까 싶었다. 한데 잘 했다. 항마심혼진이 제대로 펼쳐졌어.]

이훤은 검후의 칭찬에 입꼬리를 올렸다.

이것을 하기 위해 새벽부터 검후와 동선을 계산했다.

검후의 등장과 시연, 연설까지 밤새도록 준비한 셈이다. 거기에 이훤이 등장하여 화룡점정을 찍었다. 항마심혼진(降魔心渾陳)은 절진이라고 칭할 만큼 대단하지 않았다. 하나 햇빛을 반사하는 검신과 묘하게 복잡한 위치로 인하여 시계를 혼란시키기에 충분했다. 삿된 마음을 품었다면 보는 순간 움찔할 수밖에 없으리라.

“와아아아아!”

빈객들은 묘한 기운과 옅은 안개가 등장하는 순간 주춤거렸다가 이내 환호성을 내질렀다. 무림맹에서 개최하는 대회라고 해도 이런 신위를 구경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터였다.

“와아아아아아!”

이훤은 함성을 내지르며 화산연맹을 연호하는 자들에게 포권을 했다. 하나 군중 속에서 유일하게 오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인상을 쓰는 자가 있었다.

‘······.’

창무검제는 남궁채린은 진저리를 쳤다.

지난 밤 가주의 서찰을 전했을 때 이훤은 조건을 제시했다. 단순히 축하만 하는 것을 넘어 시연을 통해 남궁세가와 화산연맹의 동맹이 굳건함을 증명해달라고 하지 않았던가.

‘젠장! 뭘 해야 한단 말인가?’

남궁채린은 자신도 모르게 검을 쥐락펴락 하며 심호흡을 했다. 눈을 반짝이며 쳐다보는 하객들의 시선이 태산처럼 무겁게 다가왔다.

이제 그가 나설 차례였다.

‘차라리 먼저 할 걸.’

< 61, 급할수록 빨리해라. (3)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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