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 급할수록 빨리 해라. >
61, 급할수록 빨리 해라.
회귀 전과 후의 삶을 걸고 장담한다.
부족하다면 천공혈륜겁도 걸겠다.
‘넌 술에 취하지 않았어!’
이훤은 불콰한 얼굴로 고발과 고백의 경계를 묘하게 넘나든 북리혜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한데 그녀가 슬쩍 고개를 돌리더니 흘리듯 한 마디를 남겼다.
“그렇게 보지 마요. 나름 큰 용기를 낸 거니까.”
근래에 들었던 가장 큰 개소리다.
이훤은 언제나 술자리 전체를 눈에 담았다.
머릿수 대비 남은 술의 양을 파악하기 위함이다.
항상 제일 좋은 술을 제일 많이 마시고 싶은 마음에 체득한 기술이 아니던가.
‘넌 고작 네 잔의 술을 마셨을 뿐이야!’
게다가 북리혜는 빙정을 녹여서 무령빙공의 성취가 극에 달했고, 만매만전으로 인해 한 단계 더 성장한 상태였다. 무엇보다 빙궁의 궁도들은 추위를 막기 위해 어릴 때부터 독한 술을 물처럼 들이키는 작자들이 아니던가.
‘옥화전에서 내가 미끼로 썼다고 복수하는 거냐?’
이훤은 눈을 부릅뜬 채 취중 고백의 진위를 밝히려 했다.
하나 어디선가 박수가 들려왔다.
남궁무향은 반짝이는 눈동자로 북리혜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강호의 남녀는 예법의 구애를 받지 않으니 궁주께서는 부끄러워하실 필요 없어요. 오히려 멋있는 걸요. 궁주의 호방하고 용기 있는 모습에 제가 반할 지경이에요.”
이훤은 미간을 좁혔다.
회귀 전 남궁무향은 무공에 심취하여 사내를 멀리하지 않았던가. 한데 사내에게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무공에 꽂혔기 때문임을 알 수 있었다.
‘그냥 저 하고 싶은 것만 하는 녀석이로구나.’
하나 그것을 탓하기에는 경국의 남녀 주인공을 보듯 반짝이는 눈동자가 거슬렸다.
“두 분은 재자가인처럼 잘 어울리실 거예요. 아! 이런 날 화공이 있었다면 매화를 배경으로 참 아름다운 흔적을 남길 수 있었을 텐데요.”
확실했다.
저 녀석도 정상이 아니다.
그리고 비정상인 것들은 또 있었다.
복우전과 소연명은 어느새 손을 맞잡은 채 눈물을 글썽였다.
“허허, 나신까지 보았으면······.”
“그걸 극복하고도 연정을 품은 궁주가 더 멋있어!”
분위기가 점점 이상하게 변했다.
이훤이 참다못해 진실을 밝히려는 순간 북리혜가 얼굴을 감싸더니 뛰쳐나갔다.
“어.”
복우전은 혀를 차며 이훤에게 턱짓을 했다.
“안 따라가십니까?”
“이 새끼가!”
이훤은 왜인지 모르게 선배의 흉내를 내려는 복우전을 걷어찬 후 몸을 일으켰다. 전각을 나서는 순간 탈마의 호기로운 외침이 뒤통수에 꽂혀들었다.
“우리 형님! 장가 가자아!”
‘미친 것들.’
북리혜는 멀리 가지 않았다.
오히려 전각 밖의 작은 정자 앞에 있는 것으로 보아 이훤을 기다린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낯빛은 언제 불콰했냐는 듯 하얗기만 했다. 달빛을 받아 매끈하게 반짝이는 피부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하나 지금은 그녀의 미색을 감탄할 때가 아니지 않던가.
“왜 이러는 거야?”
이훤의 투덜거림에 북리혜는 느긋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 건 나를 병풍으로 쓰기 전에 생각했어야지.”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엿을 먹여?”
북리혜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거짓말을 한 건 아니잖아.”
“뭐라고? 그러면 반했다는 것도······.”
“취한 척한 게 문제라면 다시 말해 줄게.”
그녀는 이훤을 똑바로 바라보며 조금 전의 달짝지근했던 한 마디를 흘렸다.
“너를 좋아해.”
이훤으로서는 믿기 힘든 말이었다.
물론 빙정을 녹이는 거래를 통해 그녀가 호감을 가졌다는 것 정도는 알아차렸다. 하나 그 후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의 삶을 살지 않았던가. 심지어 불과 하루 전에는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기에 좌불안석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반편이같은 한 마디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점점 커졌다고 하는 쪽이 낫겠지.”
북리혜가 담담할수록 이훤은 탄성을 흘렸다.
“대범해도 너무 대범하잖아.”
그녀는 빙긋 웃었다.
이제야 마음에 품었던 사내를 마주한 듯했다.
“강호의 남녀가 예법에 민감하지 않다고 해봤자, 거기서 거기야. 하지만 북해는 달라. 해가 짧고, 밤이 길거든.”
이훤이 능글맞은 표정을 짓자, 이번에는 북리혜가 얼굴을 붉혔다.
“이상한 상상하지 마! 아무리 빙궁의 궁도라고 해도 밤에는 돌아다니지 못해. 집 앞에 나가려고 해도 완전무장을 해야 할 정도야. 그렇기에 모든 일을 낮에 처리해야 해. 그나마 눈이 내리거나, 해가 나오지 않으면 불가능하지. 그래서 우리는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고 해도 내일로 미루지 않아. 누군가를 좋아한다면 더더욱 그렇지.”
그녀의 대범함과 추진력은 빙궁의 삶과 밀접하게 관련됐다. 그러니 빙정을 녹일 수 있게 되자마자 북해를 떠났을 것이고, 불과 일 년 사이에 궁주에 올랐으리라.
“그렇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밝혔어야 했어?”
“발족식이 끝나면 곧장 빙궁으로 돌아가야 해. 그리고 네 느긋한 행동을 보아하니 이런 식이 아니면 결론이 나지 않을 것 같았어.”
“빙궁의 방식, 마음에 드네.”
이훤은 빙긋 웃은 후 손을 뻗었다.
북리혜는 손이 끌려가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나 이훤이 슬쩍 다가와 숨소리가 들릴 거리에 이르렀을 때에는 잠시 머뭇거렸다.
‘진심이라면 아무리 대범한 사람도 목석이 될 수 없지.’
이훤은 그녀의 뒤통수에 슬쩍 손을 올린 후 가볍게 힘을 줬다. 북리혜는 조금 전의 당당함을 지운 채 못이기는 척 안겼다.
“대답은?”
이훤은 북리혜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빙긋 웃었다.
“너는 내 첫 여자다.”
내심 고르고 골라서 내뱉은 한 마디였다.
하나 가슴팍에서 한기가 피어오르더니 북리혜의 냉막한 읊조림이 들려왔다.
“그럼 두 번째 여자도 있냐?”
“······.”
이훤이 잠시 멈칫하는 사이 북리혜가 거리를 뒀다.
한데 그녀의 얼굴에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드리워진 후였다.
“네가 당황하는 표정을 보니까 기분이 좋아졌어. 내가 화산에서 살 수 없듯 네가 빙궁에서 살 수 없겠지. 그 정도도 이해하지 못해서는 빙궁의 궁주로 살아남을 수 없어. 그러니 적당히 즐기면서 살아.”
“어.”
“대신 소개는 시켜줘. 누군지도 모를 년들이 언니라며 달라붙는 건 질색이니까.”
예쁘게 웃으면서 저런 말을 하는 건 반칙이다.
이훤이 멋쩍게 웃는 사이 북리혜는 뒷짐을 진 채 앞장섰다.
“저쪽에 봐둔 장소가 있어. 분위기 좋더라.”
가자는 이야기였다.
하나 이런 상황이라고 해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있지 않던가.
“잠깐만! 술 좀 가져오고.”
“내가 챙겨뒀어.”
이훤은 북리혜를 뒤따르면서 침음을 흘렸다.
‘흐음.’
왜인지 모르게 그녀의 치마폭 안에서 허우적대는 느낌적인 느낌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돌아가자.”
“뭐라고 하지?”
이훤의 물음에 북리혜는 미간을 좁혔다.
“성인남녀가 반 시진 동안 자리를 비웠으면 알아서 생각하겠지. 지금 변명이라도 할 생각이야?”
행복한 시간을 보냈거늘 어째서 북리혜는 더욱 당당해지는 건지 모르겠다.
이훤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게 아니라 내가 너무 오랜만에······.”
한순간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고, 자연스럽게 북리혜를 힐끔거렸다. 회귀 전의 삶이라면 모를까, 회귀 후에는 첫 경험이 아니던가. 다행히 북리혜의 안색은 밝았고, 입가의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잘못하면 평생 시달릴 뻔했네.’
북리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그러고 보니 전각 근처에 이르렀음에도 사람이 없는 것처럼 고요했다. 하나 누군가 위협하거나, 살기를 드러냈다면 혈륜이 먼저 반응했으리라.
하여 이훤은 별 생각 없이 전각의 문을 열어젖혔다.
북리혜는 언제 그렇게 당당했냐는 듯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손을 모았다.
“어.”
탈마가 울상을 지은 채 돌아봤다.
“형님, 왜 이렇게 늦었어요?”
복우전과 소연명은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로 정면만 응시했다. 온 세상을 놀이터처럼 바라보던 남궁무향조차 고개를 숙인 채 술잔만 만지작거렸다.
그 중심에 검후가 있었다.
그녀는 불퉁한 표정으로 술잔을 비웠다.
“왔냐?”
이제야 화기애애했던 술자리가 장례식으로 변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마을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으셨나 봐요?”
검후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흥! 어떤 놈이 내가 검후인 걸 소문냈더구나. 그러니 재미가 있을 리 있겠느냐?”
그냥 사람을 괴롭히지 못해서 심심했다는 말이 아닌가.
검후는 심드렁한 이훤과 다소곳한 북리혜를 번갈아보더니 미간을 좁혔다.
“너희들 뭐 했냐? 설마 여기 이 되바라진 것들처럼 손이라도 잡은 건 아니겠지?”
복우전과 소연명은 창백한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이훤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설마요.”
손만 잡았겠는가. 포옹도 했고, 입맞춤도 했고.
다 했다.
하나 진실을 밝히는 순간 칼부림이 날 수도 있다.
오십 년 동안 정인에게 버림받았다고 여기는 여인이라면 무슨 일이든 개의치 않으리라.
“크하!”
검후는 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술 냄새가 진동을 했다.
그녀는 어차피 절대지경에 발을 들였기에 마음만 먹으면 한 호흡에 취기를 밀어낼 수 있는 고수였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술에 취했을 때 무슨 일을 벌일지 예상하기 어려웠다.
지금처럼 말이다.
“가자.”
“네?”
“가자고! 네 말대로 발족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는데 안 되겠다. 지금 당장 조 가 놈을 봐야겠어!”
북리혜가 입만 벙긋거렸다.
‘조 가?’
이훤은 북리혜에게 미소를 보낸 후 흔쾌히 수락했다.
“가시지요.”
화산까지는 탈마에게 떠넘겼다.
이제 화산에 도착했으니 검후는 원 주인에게 떠넘기는 편이 만인에게 편하리라.
“가자!”
검후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후기지수들이 자동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우전, 소연명. 부축해드려.”
검후는 두 사람이 슬쩍 다가와 부축을 하자, 입꼬리를 올렸다.
“흐흐, 그 영감탱이를 만나러 갈 때까지 너희들이나 괴롭혀야겠구나.”
이훤이 낙안봉 쪽을 가리키자 복우전과 소연명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서 스승님께 알려라.]
[헉! 이 재밌는 걸 왜 알려요?]
탈마는 망아취자와 검후의 해후를 구경할 생각에 들뜬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네 생각처럼 안 될 텐데?’
이훤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라. 그럼.]
탈마는 북리혜를 힐끔거리더니 히죽 웃었다.
[이야! 어른이 되시더니 너무 너그러워지셨네.]
이훤은 잠시 침음을 흘렸다가 마지막으로 남은 남궁무향과 북리혜에게 말했다.
“너는 돌아가. 그리고 너는 나와 가자.”
남궁무향은 노골적으로 서운한 기색을 드러냈고, 북리혜는 왜인지 모르게 콧대를 높였다. 마치 승자의 권리를 누리듯 미소를 지은 채 남궁무향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럼 이만.”
“네, 궁주님. 다음에 또 뵈어요.”
“못 볼 거예요. 남궁세가와 빙궁은 수천 리나 떨어져 있으니까.”
이훤은 눈을 끔뻑였다.
어째서 마지막 말이 경고처럼 들리는 것일까.
‘그래도 스승님께 인사 정도는 시켜야 저 녀석도 편하게 돌아갈 수 있겠지.’
그는 북리혜만의 기 싸움을 구경하다가 손목을 낚아챘다.
“가자!”
파팟!
암천군림보를 펼치는 순간 이훤과 북리혜의 신형은 안개처럼 흩어지며 자취를 감췄다.
*
탈마는 망아취자와 검후의 만남이 재밌을 것이라 여겼나 보다. 아닌 말로 오십 년 동안 헤어졌다가 만났으면 무슨 일이 벌어져도 놀랄 일은 아니다.
“왔구려.”
망아취자는 검후를 보는 순간 놀란 기색 없이 환하게 웃었다. 검후는 언제 술주정을 부렸냐는 듯 헛웃음을 흘리며 걸음을 옮겼다.
“어! 왜?”
이훤은 눈을 휘둥그레 뜬 탈마의 뒤통수를 후려친 후 말했다.
“같이 보고도 모르겠냐? 스승님이 만매만전을 만드실 때 가장 중하게 여기신 건 모든 이가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한데 검후만 알아 볼 수 있는 특유의 글자를 써 넣었다면 다 이유가 있지 않겠냐?”
“······.”
망아취자는 당황해하지 않았고, 검후는 화를 내지 않았다. 검을 휘두르지도 않았고, 욕설과 고성이 오가지도 않았다. 두 노인은 그저 평범한 평상에 앉아 평범한 대화를 나누며 평범하게 술잔을 채웠다.
이훤은 그 모습을 보며 소리 없는 탄성을 흘렸다.
“하아.”
오십 년 동안 누군가를 원망했다면, 그만큼 애정 또한 깊어졌으리라. 그렇기에 망아취자가 세상을 위해 희생했음을 알게 되면 두 사람의 오해는 자연스럽게 풀릴 것이라 여겼다. 한데 두 사람은 그러한 과정 없이도 서로의 마음을 이해한 것처럼 같은 곳을 응시할 따름이다.
“부럽네.”
북리혜가 슬쩍 다가와 이훤의 손을 맞잡았다.
복우전과 소연명은 어느새 한 몸처럼 붙어선 채로 자신들의 미래를 보듯 두 노인을 응시했다.
“······.”
반면 탈마는 홀로 우두커니 선 채로 눈을 끔뻑였다.
그는 취선관 주변을 휘휘 둘러보더니 어딘가 모르게 힘 빠진 한 마디를 내뱉었다.
“가을은 가을인가. 왜 이렇게 춥냐?”
< 61, 급할수록 빨리 해라.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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