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마신-150화 (150/226)

< 60, 취선관주는 어떤 놈인가? (3) >

이훤은 술을 내려놨다.

북리혜가 아니라면 이곳을 찾아올 사람은 한 사람뿐이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검후께서 벌써 돌아오셨나?”

탈마는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 할머니도 아닌데요.”

“이 새끼가!”

이훤은 탈마의 장난에 술잔을 집어던졌다.

하나 잔은 일직선으로 날아갔고, 술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탈마가 그것을 가볍게 낚아챈 후 잔을 비웠다. 그리고 히죽 웃으며 문을 열었다.

“나도 누군지 몰라요.”

이훤은 엉거주춤한 자세에서 멈칫했다.

달빛을 받으며 공손히 서 있는 여인은 아름다웠다.

남궁세가의 무복을 걸친 것을 제외하면 유명한 기루에 속한 기녀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매력적이다. 한데 더욱 놀라운 점은 화장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저 가만히 서 있음에도 치장을 한 것처럼 얼굴에서 빛이 났다.

[아는 사람이에요?]

이훤은 탈마의 전음이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알고 있지만, 아는 척 할 수 없는 상대였다.

회귀 전 그가 처음으로 연정을 품었던 유엽비(柳葉飛) 백예예가 생뚱맞게 등장했기 때문이다. 지난 번 종남파의 제자인 청관의 속명을 들었을 때에도 그녀가 떠올랐다.

‘하아, 설마 이렇게 눈으로 보게 될 줄이야.’

남궁세가의 속가인 연자방 출신으로 창술이 일절이던 그녀였다. 무공에 열중하여 사내를 멀리 했으나, 청관의 끊임없는 구애로 한 쌍의 원앙이 되지 않았던가. 하나 그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흉수에게 간살(姦殺)을 당했고, 청관은 얼마 후 남궁세가를 월담하던 중 척살됐다.

“하아.”

이훤은 주마등처럼 회귀 전의 기억이 스쳐간 후에야 한 숨을 흘렸다.

“탈마야.”

“네.”

“복우전 좀 데리고 와라.”

탈마는 눈을 끔뻑였다.

“그게 누군데요?”

“종남파의 청관!”

“아! 도관에서 비질하던 애.”

여인은 탈마가 떠나자, 조심스럽게 방문 목적을 말했다.

“조금 전 옥화전에서 뵈었던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결례를 무릅쓰고 찾아뵙게 되었어요.”

이훤은 한 숨을 내쉰 후 여인을 불러들였다.

“남궁세가의 가솔을 박대할 수는 없으니 들어와요.”

그리고 그녀가 들어설 때에 맞춰 창문을 열었다.

이미 복우전을 만났을 때부터 이번 생에는 두 사람의 인연을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돕고자 했다. 그것이 한 때 그녀를 좋아했던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라고 여겼다. 그러니 쓸데없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밀실은 좋지 않았다.

“옥화전에서는 옆 탁자에 있었습니다. 하여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되었어요. 그분들의 무례한 언사에는 저도 화가 났지만, 나서지 못했습니다. 구파오가의 한 사람으로서 용기를 내지 못한 점을 사과드리고 싶어요.”

이훤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됐어요. 어차피 연맹이 아니었다면 남궁세가가 찾아오지도 않았을 만큼 격조했던 사이였소. 그러니 당신이 나섰더라도 내가 마뜩치 않았을 거요.”

정을 붙이면 안 된다.

그러니 일말의 정도 느낄 수 없도록 미리 선수를 쳤다.

“그도 그러네요. 제 소개를 빼먹었군요.”

알고 있다. 연자방(燕子幇) 소속 백예예.

“연자방 출신의 남궁무향이라고 합니다.”

이훤은 눈을 부릅떴다.

“백 씨가 아니라?”

이번에는 남궁무향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그걸 어찌 아셨지요?”

이훤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연자방은 대대로 백 씨가 많다고 들었는데.”

다행히 남궁무향은 빙긋 웃으며 설명했다.

“아! 그러시군요. 창무검제께서 연자방 소속이었던 저를 조카로 삼아주셨어요. 하여 돌아가신 동생분의 호적에 들어갔기에 성과 이름을 바꿨습니다.”

변했다.

하나 이번의 변화는 다소 의외였다.

이훤의 행보는 남궁세가와 동떨어져 있지 않았던가.

“불과 반 년 전의 일이지만, 운이 좋았지요. 사실 이건 이 대협의 덕분이기도 합니다.”

이건 또 무슨 조화란 말인가?

남궁무향은 옛 은인을 대하듯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채 이훤을 힐끔거리며 쳐다봤다.

“무공에 대한 열망이 아주 강할 때였어요. 하나 연자방의 무학은 한계가 있었고, 고민도 많았지요. 그 때 우연히 남궁세가에서 만드는 가보를 보게 되었습니다.”

가보(家報)란 남궁세가와 같이 수많은 속가를 거느린 거파가 휘하에 강호의 소식을 전하는 호외와 같았다.

“맹과 무당파가 역탑지대를 평정한 소식이 담겨 있었지요. 거기서 이 대협에 대한 소식을 들었어요. 화산의 제자로서 공명을 논하지 않고, 오로지 핍박받는 자들을 위해 역탑지대에 잠입하셨다고요. 송구한 말씀이지만, 그 때의 화산은 쇠락의 기로에 섰다고 알려졌었기에 대협의 협심에 크게 감동했답니다.”

“아.”

경악할 만한 일이다.

이훤은 역탑지대, 즉 개미굴에서 암약할 때만 하더라도 강호에 크게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의 신분과 행적은 무림맹과 무당파 내에서도 소소에게만 알려지지 않았던가. 한데 남궁세가는 이미 알고 있었고, 가보에 실어 속가들에게 정보를 전했을 정도였다.

새삼 남궁세가에 대한 경계심이 피어올랐다

회귀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의 남궁세가 또한 복마전(伏魔殿)이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 거대한 조직이었다.

남궁무향은 그 후 이훤에게 자극을 받아 닥치는 대로 비무행을 떠났단다. 무공의 부족함을 실전으로 채우겠다는 목표였다.

“질 나쁜 자들에게 걸렸는데 백부께서 도와주셨지요.”

이훤은 남궁무향의 자기소개를 들으면서 침음을 연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백소에게 천문진인의 심득을 전해 듣는 과정에서 천룡전의 수괴인 천룡을 만나지 않았던가. 그 과정에서 놈이 사마외도가 아니라 정파 내부에 숨어 있음을 알게 됐다.

‘놈이 남궁세가에 숨어 있다고 해도 이상할 일은 아니야.’

다른 명문거파라면 경악할 만한 일이지만, 남궁세가라면 그럴 줄 알았다는 생각이 먼저 들 터였다. 그만큼 남궁세가는 무림 안의 무림이라는 평을 들을 만큼 거대한 세력을 자랑했다.

‘창무검제는 지난 번 산동악가 때도 봤었지.’

당시 스쳐가듯 보았던 창무검제 남궁채린의 표정은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다. 하나 도통 알 수 없는 표정이었기에 오히려 경계했다. 산동악가 앞에서 이훤이 천명했던 내용은 무림맹은 물론이고, 절명곡의 생존자들이 돌아간 사문에 똥을 던진 행위였다. 그러나 남궁채린은 사건의 당사자였음에도 여유로운 표정만 지었다. 그 이유를 알 수 없기에 남궁세가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못했다.

“사실.”

이훤은 탄성을 흘렸다.

남궁무향을 앞에 두고 너무 다른 생각에 열중했다.

하나 그녀는 개의치 않고 미소를 유지한 채 말을 건넸다.

“대협을 본 건 오늘이 두 번째에요.”

“······.”

“산동악가의 일이 있을 때 저도 백부와 함께 있었거든요. 본래 장성 침범하는 외적과 사마외도를 척살하는 강호행을 계획했지만, 화산연맹의 발족식으로 인해 섬서성에 오게 됐답니다. 다행히 오는 길에 산서성에서 역탑지대를 지나올 수 있었어요. 아! 이건 그 때 화공이 그려준 그림이에요.”

그녀는 품에서 족자를 꺼냈다.

‘그림?’

이훤은 그녀가 건넨 족자를 받아 펼쳤다.

보는 순간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제는 폐허가 되어버린 인왕전을 배경으로 남궁무향이 그려져 있었다. 그녀는 누가 만들었을지 모를 석상을 검으로 겨눈 채 결연한 표정을 내비쳤다.

‘이 따위 걸 누가 만들었고, 이걸 왜 그리는 건데?’

남궁무향은 슬쩍 손을 뻗어 석상을 지목했다.

“이게 인왕이래요. 대협께서 보시기에는 비슷한가요?”

그런 삼류 악당 따위의 얼굴을 누가 기억한단 말인가.

이훤이 어이없어 하는 사이에도 남궁무향은 홍조를 띄운 채 빙긋 웃었다.

“백부께서 허락해주셔서 일각 동안 저 자세를 취해야 했어요. 그래도 이른 아침에 가서 기다리는 사람이 많지 않았답니다. 만약에 오후였다면 한참 기다려야 했을 거예요.”

심지어 그림을 그려달라는 사람이 많단다.

‘미친놈들 천지로구나.’

한데 이훤은 헛웃음을 짓다가 표정을 굳혔다.

자신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남궁무향의 반짝이는 눈동자가 부담스러웠다. 마치 엄청나게 귀한 술을 발견했을 때에나 지을 법한 눈빛이 아닌가.

‘이러면 곤란한데.’

저 여자는 복우전과 연결되어야 한단 말이다.

다행히 남궁무향이 우상을 대하듯 질척거리기 전에 탈마가 돌아왔다. 한데 복우전과 둘이서 올 줄 알았거늘 왜 이렇게 소란스럽단 말인가.

“······.”

탈마가 들어왔고, 복우전이 들어섰다.

그리고 그 뒤로 종남파의 장로인 장치결의 제자이자, 취선관에서 잡무를 담당하는 소연명이 뒤따랐다.

“너는 왜 왔어?”

소연명은 힐끔 남궁무향을 보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관주께서 오셨으면 제가 수발을 들어야지요!”

종남파의 제자가 시비를 자처하다니 장문인이 보았다면 뒷목을 잡을 상황이다. 하나 소연명이 있다면 술과 음식을 내오는데 문제가 생기지 않을 터였다.

복우전은 어정쩡한 자세로 자리를 잡았다

소연명이 이훤과 복우전 사이에 엉덩이를 붙였다.

“어머! 술이 떨어졌네요. 어디 보자. 아! 이게 좋겠어요. 방금 드신 것보다 조금 더 독한 술을 열게요.”

이훤은 소연명이 능숙하게 술병을 구분하고, 마개를 뽑는 행위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스승님 밑에서 많이 배웠군.’

한데 그 사이 탈마의 한 마디가 청천벽력처럼 꽂혔다.

“뭐해요? 들어와요!”

그 순간 등허리에 소름이 돋았다.

온도가 내려간 것이 구분될 만큼 한기가 스며들었다.

이훤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북해빙궁의 궁주인 북리혜가 헛기침과 함께 등장했다.

“크흠! 나는 됐다니까요. 그냥 가도 되는데······.”

말과는 달리 이미 발은 전각 안을 침범한 상태였다.

“궁주께서도 모두 또래인데 편하게 앉으세요.”

소연명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북리혜는 멋쩍은 웃음을 짓더니 슬쩍 그녀의 곁에 자리를 잡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복우전을 데리고 오려는데 소연명이 갑자기 따라붙잖아요. 그리고 궁주는, 크큭! 근처에서 배회하는 걸 잡아왔어요. 엄청 오고 싶었나 봐요.]

조촐한 술자리가 갑자기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이훤은 헛웃음을 지었다.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조합이지만, 어린 녀석들이 자연스러운 열기가 나쁘지 않았다. 역시 늙으면 젊은 녀석들과 함께 있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기 마련이다.

술 한 잔씩 들어가다 보니 분위기가 더욱 느슨해졌다.

이훤은 남궁무향에게 복우전의 성실함과 끈질김을 자랑했다. 그리고 은연중에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지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내가 알아서 다 엮어주마!’

회귀 전 수많은 여인과 어울렸던 그가 아니던가. 아마 지금은 남궁무향이 된 백예예를 제외하면 누구도 그가 뻗은 마수를 피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또래 중에서는 남녀관계에 대하여 통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였다.

한데 복우전은 내내 불편한 표정이다.

[관주, 제가 무슨 실수를 했나요? 의도적으로 남궁 소저와 말을 섞게 만드시는 것 같은데요.]

[예쁘지? 막 매달리고 싶지 않아?]

이훤은 사내만 파악할 수 있는 묘한 웃음을 지은 후 복우전의 옆구리를 쳤다.

한데 예상치 못한 한 마디가 들려왔다.

[아! 아직 모르셨습니까? 저는 소 사매를 마음에 품었고, 이미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상태입니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불편한 상황을 만드시면 소 사매를 보기 곤란해집니다.]

이훤은 눈을 끔뻑이다가 소연명을 쳐다봤다.

그녀는 술자리의 분위기를 띄우고, 궁주의 말상대를 해주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복우전을 힐끔거렸다.

‘아니! 언제 이 새끼들이 눈 맞은 거지?’

허탈한 마음에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하나 생각해 보면 이훤으로 인해 강제로 끌려온 후 일 년 내내 낙안봉에서 지냈던 두 사람이 아닌가. 남녀가 일 년이나 붙어 있었으면 없던 정도 생길 터였다.

이훤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아! 내가 세상을 구하는 사이에 저 새끼는······.’

울화가 치밀어서 멀뚱히 앉아 있는 복우전을 걷어차 버렸다.

“악! 왜 그러세요?”

소연명이 번개처럼 달려 나가서 감싸는 걸 보고 있자니 한 숨이 절로 나왔다. 하나 설명을 하자면 더 비참한 꼴이 되지 않겠는가.

“사내가 말이야. 하늘을 품고, 호연지기를 길러야지 말이야. 어! 정파의 후기지수라면 협객이 되어야지? 안주하지 말고 말이야! 목적이 없어. 목적이! 단 한 번이라도 도탄에 빠진 강호의 동도들을 생각해본 적이 있느냐?”

회귀 전의 경륜까지 끌어 모아 일장연설을 했다.

밑도 끝도 없는 일갈에 좌중에 모인 이들은 눈만 끔뻑였다.

그 때 북리혜가 불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잘 들어둬요. 뼈가 되고, 피가 되는 말이니까.”

갑작스런 도움에 불길함만 배가 됐다.

그리고 슬픈 예감은 언제나 틀리지 않았다.

“저 인간은 술을 만들겠다고 온천까지 숨어 들어와서 내 나신을 훔쳐봤다니까요. 하지만 당당했어요. 목적이 뚜렷했거든요. 술을 마시겠다는 일념 하나로! 내 몸을 보고도 주정만 탐하던 그 모습! 당당하고, 사내다웠지. 사실 그 때 반했어.”

이훤은 눈을 끔뻑였다.

이것은 칭찬인가, 비난인가, 고발인가?

아니면 삐뚤어진 고백이라고 봐야 하는 건가.

무엇보다 뜬금없는 취중진담에 말문이 막혔다.

‘너 술 안 취했잖아!’

< 60, 취선관주는 어떤 놈인가? (3)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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