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마신-146화 (146/226)

< 59, 여난(女難). (3) >

이훤은 썩은 술을 마신 것처럼 인상을 썼다.

‘저 노인네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상대는 위명에 비해 더없이 자유분방했다.

그리고 한 번 물면 놓지 않는 것으로 악명을 떨쳤다.

물론 사마외도에게만 해당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파인들이 좋아한 것은 아니다.

특히 후기지수들은 노파가 떴다는 소리만 들어도 자리를 피했다. 이처럼 정파의 후기지수를 만나게 되면 아들이니 손자이니 하며 노비처럼 부려먹으려 들었기 때문이다.

의식주는 물론이고, 말상대까지 해야 했다.

거기에 더하여 언제 풀려날지는 노파의 마음대로였다.

‘똥을 밟아도 제대로 밟았어.’

이훤은 회귀 전 노파와의 일화를 떠올리는 순간 체한 것이 속이 더부룩했다.

그저 맛 좋은 술이 있다기에 찾아간 장원이었다.

조상의 기일을 대비하여 준비한 술이라지만, 취마가 이해할 리 만무했다. 하여 빼앗았고, 기분 좋게 마셨다. 나쁜 짓이라는 건 분명했지만, 육대괴마라면 기억에도 남지 않는 소소한 일화가 아니겠는가.

문제는 그 후였다.

노파가 선대 장주와 친분이 있었단다.

하여 그녀는 몇 년 동안 이훤을 끈질기게 쫓아다녔다.

‘지금은 정파의 후기지수처럼 보이겠지만, 얽혀서 좋을 것이 없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매정하게 돌아설 수도 없는 노릇이다. 조금 전 탈마가 소식을 전하길 노파가 연맹의 발족식에 참가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지금 모른 척했다가는 분명 발족식 때 문제를 일으킬 터였다.

[가족이 있었소?]

탈마는 배신자를 보듯 입술을 내밀었다.

[그럴 리가 있냐!]

그 사이 왈패가 짜증 섞인 말투로 말했다.

“네 할멈이었어? 이 놈아! 거동도 불편한 노인네를 홀로 돌아다니게 하면 어떻게 해?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왈패 주제에 효자 흉내는 개뿔.

그 사이 노파가 먼저 움직였다.

그녀는 느긋하게 몸을 일으키더니 왈패에게 다가갔다.

“그것 좀 빌려다오.”

왈패가 박도를 내어줬는지, 빼앗겼는지 확인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주인이 바뀌었다. 왈패가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것으로 보아 후자가 분명했다.

“네 집에 할멈이 있다고?”

노파는 말을 하면서 손가락으로 박도를 두드렸다.

그 때마다 박도는 한 치씩 쪼개진 채 튕겨나갔다. 도를 부러트리거나 산산조각 내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신위였다. 제아무리 물색없는 왈패들이라고 해도 강호의 격언을 모를 리 없다.

노인과 여인, 그리고 아이를 조심하라.

“효도해라. 갈 날이 머지않으면 서운한 게 많아지는 법이야.”

왈패의 수장은 바로 박도를 내던진 채 무릎을 꿇었다.

“예, 어르신! 어르신을 처음 뵙는 순간 집 안에서 저를 위해 죽을 끓여주시던 조모가 떠올라서 눈물이 날 뻔했습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주신다면 당분간은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고 조용히 있겠습니다.”

처음부터 느꼈지만, 왈패 치고는 평범하지 않았다.

운이 나빴다면 눈 먼 칼에 맞아 단명할 상이지만, 노파는 그런 왈패의 모습을 괜찮게 보았나 보다.

“아이쿠! 무릎이야.”

노파는 절반 밖에 남지 않은 박도를 무릎에 올려놓은 후 반대편에 있던 상인을 불렀다. 상인은 기사회생이라도 한 것처럼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은공께 감사 인사를······.”

“이 할.”

상인은 노파의 말에 눈을 끔뻑였다.

“예? 무슨 말씀이신지······.”

“물건의 이 할을 놓고 가거라. 물품을 보아하니 그래도 손해는 보지 않겠구나. 본디 산적을 만나면 물품의 일 할을 통행세로 내놓지 않던가. 너희들이 불운하게 저 녀석들을 만났지만, 그 또한 상행을 하다보면 부지기시로 겪어야 하는 일이 아닌가. 이 노인네가 짧은 혀를 놀려 입술이 마를 때까지 권고를 했으니 거절하지는 마시게나.”

이훤은 헛웃음을 흘렸다.

담담한 어조에 부드러운 분위기처럼 보였지만, 손가락으로 박도를 두드릴 때마다 구멍이 숭숭 나고 있었다.

“그, 그럼 일 할만 해도 되는 것이 아닌지······.”

노파의 미간에 주름이 늘어났다.

그녀는 손가락 두 개를 펴고 말했다.

“바다에서는 두 개라네.”

“하지만 이곳은······.”

“내가 있는 곳이 바다야.”

상인은 더 이상 뻗댈 수 없었다.

언뜻 보기에 정파의 여협으로 보이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반쯤 미친 노인네처럼 보였다. 돌이켜보면 싸움이 났는데 국수를 먹겠다고 병자 흉내를 낼 때부터 정상은 아니었다.

결국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락했다.

왈패들에게 물품의 이 할을 건넸고, 서로 포옹을 하며 건승을 빌어준 후에야 객잔을 벗어날 수 있었다.

“아이고, 허리야.”

노파는 왈패와 상인들이 떠난 후 언제 그랬냐는 듯 허리를 두드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연기는 그만 하시죠.”

이훤의 시큰둥한 한 마디에 노파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놈아! 연기라니! 내 나이가 벌써 백 세에 이르렀어. 내 나이가 되면 숨만 쉬어도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법이야! 네 놈이 그것을 알아?”

이훤은 탈마에게 손짓을 하며 몸을 돌렸다.

“가자.”

하나 두어 걸음도 떼기 전에 노파의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아예 각혈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헛기침을 연발했다.

“아이고, 허리가 아파서 누가 마차라도 태워주면 참 좋을 텐데! 강호의 도의가 땅에 떨어지다 못해 지하암반까지 파고 들어갔구나.”

이훤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마차가 필요하면 가지세오. 걷기도 힘들어 보이시는데 그 정도 배려는 할 수 있죠.”

“이 놈아! 마차를 몰 사람이 있어야지.”

탈마는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이훤이 이처럼 곤란해 하는 경우는 처음이 아닌가.

[형님, 누군데요? 아는 사람입니까?]

알다 못해 지긋지긋할 정도였다.

“검후다.”

이훤의 말에 탈마는 노골적으로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정파제일여협이자 여중제일인이라 불리면 누구보다 근엄하고, 자애로운 검후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한데 왈패로 잔뼈가 굵은 듯한 노파가 떼를 쓰는 모습에서 검후를 떠올리기란 요원했다. 그러나 그런 검후를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무사히 넘어갈 수 없는 법이다.

‘명복을 빈다.’

이훤이 슬쩍 탈마와 거리를 벌리는 순간 노파의 신형이 바람처럼 다가섰다. 그리고는 마치 친손자를 혼내주듯 탈마의 엉덩이를 후려쳤다.

퍽!

“아흑!”

탈마는 무릎을 꿇은 자세로 밀려났다.

“이 놈아! 노인을 보면 공경할 생각을 해야지. 실망을 해? 네가 그러고도 의기천추를 마음에 담은 정파인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검후의 일갈은 꽤 멋있었다.

그 전에 떼를 쓰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우씨! 나는 도둑인데······.’

하나 제아무리 탈마라고 해도 검후의 면전에서 천하제일대도를 논하지는 못했다. 그렇기에 속내는 숨겼지만, 화까지 참을 수는 없었다.

“허리 아프다면서요? 숨만 쉬어도 오장육부가 뒤틀린다면서요? 여기 있는 사람 중에서 제일 멀쩡해 보이네.”

검후는 어느새 꼬부랑 할머니가 된 채 허리를 두드렸다.

“클클, 이것이 삶의 지혜라는 것이다. 필요한 순간을 위해 힘을 비축해두는 것이지. 네 놈 때문에 힘을 썼더니 몸에 무리가 온 듯해. 책임져라!”

이훤은 잠시 눈을 감았다.

검후는 늘 이런 식이다.

그녀와 함께 했던 후기지수들은 괄목상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성장을 이뤄냈다. 검후가 괴롭히는 것처럼 보여도 그녀는 삶의 가르침을 아끼지 않았다.

괴팍하지만, 절제된 삶을 사는 자.

그것이 당대 검후인 불정신니에 대한 평가였다.

“마차 몰아라.”

탈마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꺼려하던 사람이 동행을 요구하니 이상했으리라. 하나 이훤은 이미 결정을 내린 듯 주렴을 걷어내고, 검후의 앞길을 열어주었다.

어차피 정상적으로 떨쳐내기 어려운 상대였다.

그러니 잘 구슬려서 화산연맹의 조력자로 삼는 편이 나을 듯했다. 무엇보다 검후의 뒤치다꺼리를 대신할 사람이 있지 않은가.

“뭐해? 고삐 잡아.”

탈마는 어딘가 모르게 불안한 이훤의 미소를 뒤로 한 채 마차에 올랐다. 이훤은 탈마의 곁으로 앉으려 했으나, 검후의 손짓으로 인해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왜 저였습니까?”

이훤의 물음에 검후는 묘한 눈초리로 바라봤다.

“내가 출관한 것이 삼십 년 만이다. 한데 왜인지 모르게 너는 나를 아주 잘 알고 있구나.”

회귀 전의 기억과 겹쳐졌을 때 이런 문제가 생기곤 했다.

하여 이훤은 능숙하게 화제를 돌렸다.

“여중제일인이신 검후의 일화를 워낙 많이 들었어야지요.”

“보고 들은 것의 차이를 모를 나이가 아니다. 하나 깊이 캐묻지는 않으마. 강호에 저마다 사정없는 이가 어디 있겠느뇨? 어차피 알려질 것이라면 저절로 알려질 터.”

“아직 제 물음에 답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왜 저였습니까?”

“무슨 소리냐?”

검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뱃속에 구렁이가 열 마리는 족히 들었을 노강호의 순진무구한 표정에 뒷골이 당겼다.

“검후께서 주산군도를 벗어나 호북 무한에 오셨으니 응당 무당파와 제갈세가에 마중을 나오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검후께서 말만 해도 자식을 내보낼 아비들이 수두룩할 겁니다. 한데 왜 저였습니까?”

이훤의 물음에 검후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 너 같으면 수십 년 만에 뭍에 발을 들이자마자 상단전이 열린 스무 살 남짓한 후학을 보고 그냥 지나치겠느냐?”

예상치 못했던 답변이다.

상단전의 개방은 무공처럼 눈으로 보거나, 기감으로 느낄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절대지경의 고수에게나 허락된 공능 중 심안(心眼)이 있지 않다면 결코 눈치챌 수 없을 터였다. 의기살인이라 하여 마음이 일면 내공이 저절로 발출하여 상대를 압박한 후 죽음에까지 이르게 만드는 족속이 바로 절대지경의 고수다.

그러니 검후 또한 절대지경에 발을 들였다는 의미가 아닌가.

‘스승님과 비슷한 배분일 텐데······.’

망아취자는 신마의 심득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 절대지경에 발을 들였다. 한데 검후는 오롯이 자신의 힘으로 지고의 경지에 오른 셈이다. 천문진인의 심득으로 받아들인 본능의 감이 쉴 새 없이 경종을 울렸다.

더 이상의 대화는 좋지 않음을 경고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훤의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상대가 비록 절대지경의 고수라고 해도 파악을 해놓아야 동료나 적으로 구분하는 것이 가능했다.

“상단전의 개방만으로 제가 정파의 후기지수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아니더냐?”

검후의 천연덕스러운 질문에 대하여 마땅한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하여 진정 하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한 가지 이야기를 드리고자 합니다.”

“그래라. 화산으로 가는 길은 아직도 많이 남았다.”

“예를 들어서 말입니다. 술을 아주 좋아하는 괴인이 있습니다. 술을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는 주당이지요. 정사지간이라 불리지만, 성향만 보면 사마외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한데 그런 자가 검후의 지인이 남겨놓은 술을 훔쳐서 마셨다면 어찌 하시렵니까?”

회귀 전의 이야기였지만, 검후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술을 좋아하는 놈이 술을 마신 게 무슨 잘못이랴?”

이훤은 미간을 좁혔다.

‘당신 그런 사람 아니었잖아!’

하여 말을 조금 바꿨다.

“한데 검후께서 만약 그 자를 몇 년 간 쫓으셨다면 이유가 뭐겠습니까?”

“쫓지 않는다.”

“만약에 쫓았다면요?”

탈마가 고삐를 흔들다가 슬쩍 뒤를 돌아봤다.

녀석의 ‘저 형이 오늘 왜 저래?’라는 표정을 모른 척하고 검후를 응시했다. 검후는 이훤의 맑은 눈동자를 마주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

“아까웠나보지.”

이 또한 예기치 못한 대답이다.

“네?”

“그렇지 않으면 그깟 녀석에게 몇 년이라는 시간을 쏟아 부을 리가 있겠느냐. 나는 지금도 하루하루를 감사히 여기며 살고 있다. 그러니 정말 키워보고 싶었고, 정말 아까웠다면 내 삶을 포기해서라도 뒤쫓을 것이다. 정파의 기둥이랍시고 살아왔거늘 새로운 기둥 정도는 만들어놔야 체면이 살지 않겠느냐.”

이훤은 말을 잇지 못했다.

회귀 전 검후에게 몇 년 동안 쫓기면서 온갖 저주를 퍼부었다. 기적적으로 그녀의 암수를 피해 도망친 것이 몇 번이던가.

‘하지만 검후는 지금도 절대고수다.’

그러니 십 년 후에는 더 강한 고수가 되었으리라.

‘봐줬구나.’

운 좋게, 머리 좋게, 기적적으로 살아나왔다고 여겼다.

한데 그 모든 것이 검후의 배려였단다.

그녀는 이훤을 쫓아다니며 온갖 훈계와 알아듣지 못할 말을 쏟아냈었다. 당시에는 귀찮기만 한 잔소리였지만, 지금의 무위라면 아마 다르게 들렸으리라.

“내가 손주라고 칭했지만, 진짜 할미는 아니다. 그러니 그리 정겨운 눈으로 볼 것 없다.”

이훤은 할 말이 없어 헛기침만 연발했다.

한데 검후가 불현 듯 저 멀리 병풍처럼 펼쳐진 산세를 지켜보더니 탄성을 흘렸다.

“아! 술과 지인을 논하다보니 그 치가 생각나는구나.”

“······.”

“술을 참 기가 막히게 담그는 녀석이 있었어. 그 놈도 지금은 꽤 늙었겠구나.”

이훤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곳이다.

회귀 전 그가 술을 훔쳤던 장원이 분명했다.

지금이야 이름도 기억나지 않지만, 지역 정도는 희미하게나마 기억에 남아 있었다.

“버릇 없는 꼬마야! 원륜장원으로 가자!”

“거기가 어딘데요?”

이훤은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저기 두 번째 봉우리 쪽으로 가다보면 왼편에 마을이 하나 있다.”

검후가 한 번 더 묘한 눈초리로 이훤을 응시했다.

“크흠, 며칠 전에 지나가다가 봤습니다.”

“클클, 술을 좋아하느냐?”

이훤은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말 좋아합니다.”

“그럼 마음껏 마시게 해 주마. 그 술의 원료는······.”

탈마는 술 얘기에 정신이 팔린 두 사람을 보며 입술을 내밀었다.

“불제자가 고기도 먹고, 술도 마시는데 검후라니. 세상 참 잘 돌아가네요.”

퍽!

그는 뒤통수를 강타당한 충격에 매서운 눈매로 뒤를 돌아봤다. 한데 그를 때린 건 검후가 아니라 노기를 잔뜩 드러낸 이훤이 아닌가.

“혀, 형님.”

“우리 할머니한테 못하는 말이 없구나!”

< 59, 여난(女難). (3)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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