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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마신-144화 (144/226)

< 59, 여난(女難). >

59, 여난(女難).

이훤이 예상하는 절명곡의 생존자는 여덟이었다.

정파의 여섯과 팔황무극존, 그리고 천룡이다.

그들의 삶과, 성향, 당시의 무위는 당사자라고 해도 쉬이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러니 그들이 신마의 유언을 통해 무엇을 얻었는지는 대면하지 않는 한 알 길이 없다.

‘하나 깊이로만 따지면 스승님이 최고다.’

이훤은 망아취자와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절명곡의 비사도 전해 들었다.

작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당시의 맹세를 지킨 건 망아취자가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그만큼 그는 고아한 풍취와 고결한 성정을 지녔으며 무욕의 깨달음을 추구했다.

하여 그는 일신의 영달이나 무공의 증진을 생각지 않았다.

‘천하제일고수가 될 수는 없지만······.’

분명 달마나 장삼봉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천하제일인이 되었으리라.

그런 사람의 결과물이 바로 만매만전(萬梅萬傳)이다.

평범한 비급일 리가 없다.

사람이 본래 지닌 성정과 살아온 발자취를 비춰서 깨달음을 얻게 해주는 희대의 비급이었다.

이훤은 망아취자가 만매만전을 화산연맹은 물론이고, 온 강호에 알리겠다고 천명했을 때 우려를 금치 못했다. 만에 하나 악인에게 도움이 된다면 망아취자의 명성에 먹칠을 할 것이라 여겼다.

그 때 망아취자가 웃으며 한 말이 있었다.

- 거울과 같다는 건 그저 단편적인 설명에 불과하다.

- 신마의 심득은 조화와 균형을 기반으로 한다.

- 그러니 선인이 본다면 더욱 조화를 이뤄 만인에게 이로울 것이다. 반면 악인이 본다면 부족한 면을 채워 조화를 추구하게 될 것이다.

이훤의 눈이 번쩍 뜨일만한 대답이었다.

사마외도의 무공은 역리(逆理)라 하여 자연스럽게 성장하는 과정을 배제한다. 더 빠르고, 더 강하고, 더 쉬운 길을 찾으려 하는 욕망에 순응하지 않던가. 차후 폐해가 있더라도 눈앞의 성장을 포기하지 않는 게 바로 사마외도였다. 그러니 사마외도가 만매만전을 보고 깨달음을 얻는다는 건 조화를 추구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아픈 것을 고치며, 무거운 것을 덜어낸다는 의미였다.

- 그렇다면 악인이 스스로 교화될 가능성이 있다는 뜻입니까?

이훤의 물음에 망아취자는 고개를 내저었다.

- 만매만전은 강요하지 않는다. 그 또한 순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스스로 잘못된 것을 알고, 바로잡겠다면 도울 뿐이다. 그러니 만매만전으로 인한 깨우침을 받아들이는 건 오롯이 스스로 결정해야 할 사안이란다.

당시 망아취자는 비가 오는 것에 빗대어 설명을 했다.

몸에 오물이 묻은 상태로 길을 걷는 중에 비가 온다면 피하는 것도, 그대로 서서 오물을 씻는 것도 오직 스스로에게 달렸다고 알려주었다.

이훤은 그 날의 망아취자에게 진심으로 감복했다.

회귀를 한 그조차 술이라는 욕망을 벗어던지지 못했고, 소마에 대한 복수를 꿈꾸고 있지 않던가.

더불어 언젠가 이런 날도 예상했다.

‘이렇게 꼬리가 밟힐 줄은 놈도 생각하지 못했겠지.’

이훤은 입꼬리를 올렸다.

천룡은 만매만전을 통해 자신의 심득과 악재의 심득을 하나로 뭉쳤다. 한데 그는 교화되지 않았다. 애초부터 부조화의 무공, 즉 사마외도가 익히는 역리의 무공과 관련이 없다는 뜻이다. 결국 순리를 통해 성장했으니 천룡의 기반이 저절로 드러났다.

정파(正派).

천룡은 정파 내부에 존재하는 것이 확실했다.

‘정파 내부에서 숨죽인 채 지내느라 얼마나 지루했을까? 바퀴벌레처럼 숨어서 모략만 꾸미느라 좀이 쑤셨겠지.’

그러니 대공(大功)을 이루자마자 뛰쳐나와 오늘과 같은 실책을 저질렀으리라.

이훤은 가루가 되어 흩어진 애국의 흔적이 있는 자리를 보며 웃었다.

“고맙다. 네 덕에 오늘 강호의 절반이 혐의를 벗었어.”

이제 사마외도는 개의치 않는다.

정파 내부에서 천룡전의 꼬리를 밟고, 나아가 천룡의 정체를 만천하에 공개할 것이다.

생각만으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때 담담한 어조의 목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백소였다.

그녀는 공터 한 쪽에 멀뚱히 선 채로 이훤을 응시했다.

“그래?”

“네. 아까는 삶을 마무리하는 사람처럼 권태로워보였어요. 한데 지금은 즐거워 보여요.”

그러고 보니 흑의인들을 처음 마주했을 때의 귀찮음과 권태로움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후였다. 천룡이 나타나고, 기괴한 대법마저 확인하니 활력이 샘솟았다.

지금 당장 서 말의 술을 마실 수 있을 만큼 말이다.

이훤은 히죽 웃었다.

“역시 할 일이 있다는 건 좋은 거야. 그나저나 왜 떠나지 않았지?”

백소는 담담한 어조로 대꾸했다.

“떠나고 싶었어요. 하지만 떠나면 죽을 것 같았어요.”

본능의 경고를 따랐나 보다.

그리고 그건 좋은 선택이었다.

조금 전 천룡이 애국의 몸을 빌려 등장했을 때 공터 주변에는 묵빛의 기운이 가득했다. 그리고 이훤은 묵빛의 기운이 어디서 흘러왔는지 찾기 위해 혈륜을 흩뿌리지 않았던가. 만에 하나 백소가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무슨 일이 생겼을지 모를 일이다.

“지금은?”

“당신이 보내주지 않을 것 같아서요.”

이 또한 정답이다.

이훤은 고개를 끄덕이며 백소를 향해 손짓했다.

“너는 나와 함께 간다.”

“납치인가요?”

백소의 소매가 스르륵 흘러내렸다.

그렇게 등장한 그녀의 손은 섬섬옥수라는 말로도 부족할 만큼 희고 고왔다. 일견하기에도 천관진인이 신마의 심득을 전했을 터였다. 그러니 적이라고 생각되는 순간 수강(手罡)이 날아오리라.

이훤은 속내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네 아버지는 두 번에 걸쳐 내게 큰 은혜를 베푸셨다.”

회귀 전에도 회귀 후에도 목적과 상관없이 큰 도움을 얻은 사실이 아니던가.

하나 백소는 이훤의 말을 믿지 않았다.

“조금 전의 그들도 그렇게 말했지요.”

진위 여부를 판단하는 건 백소의 몫이 아니다.

강호의 대소사란 언제나 강자의 의지에 따라 진위가 결정되지 않던가.

하여 이훤은 구구절절하게 설명하는 대신 손가락을 튕겼다.

파팟!

오래 전 절명지라는 이름으로 펼쳤던 지공은 이제 완전히 다른 무공이 되었다. 점혈 당하는 것도 인지하지 못할 만큼 은밀하고, 빨랐다.

“엇!”

백소는 몸을 비켜서려고 꿈틀거렸으나, 움직일 수 없음을 깨닫고 침음을 흘렸다.

“이게 무슨 짓인가요?”

이훤은 화제를 전환했다.

“오음절맥이라며? 치료해주마.”

백소는 미간을 좁혔다.

“여인의 몸을 점혈하고 강제로 치료해주겠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야 할까요? 무엇보다 당신에게 오음절맥을 치료할 약이 있을 것이라 믿지 못하겠어요.”

이훤은 히죽 웃었다.

“왜? 조용한 안가도 마련해야 하고, 탕약도 끓여야 하니 도구도 필요할 것이라 생각해?”

그는 백소의 뒤로 다가가 재차 지풍을 날렸다.

다리의 점혈을 푸는 순간 그녀가 움직이려 했다. 하나 가볍게 무릎 뒤를 걷어차서 강제로 앉혔다. 그리고 지풍을 날날리자 그녀는 꼼짝달싹할 수 없는 상태가 됐다.

“네 아버지에게 진 빚을 네게 갚는다. 그리고 그 방법이 네 생각보다 단순해보일 뿐이다. 그 뿐이야.”

이훤은 백소의 정수리와 명문혈에 손을 댄 후 혈륜을 끌어올렸다.

“크흑!”

백소는 이훤의 양 손에서 전해지는 기운으로 인해 침음을 내뱉었다. 그리고 혈륜이 주입되는 순간 신음과 비명을 연이어 토해냈다.

“울어도 좋고, 소리를 질러도 좋아.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몸을 맡겨라.”

백소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다.

고금을 통틀어 이런 방식으로 절맥을 치료하는 경우가 어디 있단 말인가. 게다가 절맥이란 기경팔맥이 손상됐음을 의미하니 자칫 잘못 건드렸다가는 폐인이 되기 십상이다.

‘어디 보자.’

이훤은 혈륜이 제집처럼 백소의 몸뚱이를 휘저은 후에야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 순간 눈동자에 뇌기가 어렸다.

동시에 이훤과 백소 사이에 반투명한 그림이 나타났다.

지도처럼 수많은 점이 찍혀 있었고, 점과 점을 잇는 선이 무수하게 얽혀 있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몸뚱이를 투시하니 절맥의 위치를 발견하는 건 물속에서 땅을 짚고 헤엄치는 것처럼 간단했다.

‘흐음.’

하나 발견하는 것과 치료하는 것은 별개였다.

무엇보다 다섯 개의 절맥이 몸 곳곳에 퍼져 있었고, 모든 것이 주요혈도가 아닌가. 무공을 익히고도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이 용할 정도였다.

첫 번째 절맥인 풍부혈은 척추를 따라 뇌로 이어지는 독맥의 요처다.

하여 가장 먼저 혈륜을 쏟아 부었다.

천공혈륜겁은 육신을 극한까지 단련시킨 후 심력을 성장시켰다. 그렇기에 만매만전과 구궁벽력공을 더하니 재생을 가능하게 했다. 혈륜은 끊어진 맥을 조금씩 채워 넣었다. 절벽에서 돌을 하나씩 쌓아 앞으로 나아가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뭉개졌던 풍부혈에 내기가 고였다가 자연스럽게 흘러나가는 것을 확인했다.

그 후로는 일사천리였다.

네 개의 절맥을 치료한 후 마지막 절맥에 이르렀다.

‘흐음.’

이훤은 미간을 좁혔다.

척추를 기준으로 가슴과 배로 이어지는 임맥과 충맥이 맞닿는 곳에 위치한 회음혈이 관건이다.

회음혈은 사타구니 쪽 포궁에 위치하지 않았던가.

백소가 여인이라고 해도 손으로 만져서 치료하는 촉진(觸診)을 하지 않는 한 예법에 문제될 것은 없다. 하나 뭉개진 혈도에 혈륜을 쑤셔 넣는 순간 엄청난 자극이 동반될 터였다.

“너도 느낄 것이야. 혈맥의 흐름이 정상적으로 변하고 있음을 말이다. 마지막 절맥이 회음부에 위치하여 예기치 못한 충격이 있을 수 있다. 정신을 집중하고, 대비해라.”

백소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훤이 말을 복잡하게 했으나, 결국은 흥분하지 말라는 이야기였다. 또한 치료의 일환이니 오해하지 말라는 내용이기도 했다.

‘······.’

그녀 역시 천문진인을 통해 회음혈에 문제가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같은 오음절맥이라고 해도 자신의 상태가 얼마나 열악한지도 파악한 상태였다. 결국 그녀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치료를 수락했다.

“최대한 빨리 끝내주마.”

백소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 말도 하지 마!’

*

“형님이 좋은 일을 하는 건 또 오랜만에 보네요.”

탈마는 공터 구석에서 운기조식을 하고 있는 백소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지금껏 만났던 또래의 후기지수들과 달리 부드러운 성향의 백소가 마음에 들은 듯했다. 게다가 백소의 외모는 절맥에 걸린 여인들이 그러했듯 더없이 아름다웠다.

이훤은 두 사람은 번갈아보며 피식 웃었다.

그는 운기조식을 하고 있는 백소를 보며 생각했다.

‘너는 스스로 얼굴에 칼자국을 내고, 원한을 갚기 전에는 여인으로 살지 않겠다고 했지.’

그녀가 애국의 손아귀에서 어떻게 도망쳤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다시 강호에 나타난 그녀는 온 세상을 적대시했다. 그렇지만 무당파가 몰락했을 때 말없이 찾아와 취마의 술을 빼앗아갔다. 삼일 동안 사라졌던 그녀가 다시 돌아왔을 때 수법은 더욱 잔혹해졌다.

‘하지만 너 또한 나로 인해 운명이 바뀌었구나.’

이제 백소는 한마(恨魔)도, 수라혈녀(修羅血女)도 아닌 백소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 정도면 무암자에 대한 빚을 갚고, 한마와의 인연을 마무리해도 좋은 만큼 훌륭한 결말이 아닌가 싶다.

“하아.”

백소가 깨어났다.

이훤은 탈마에게 손짓을 한 몸을 돌렸다.

"행복해라."

이제 그녀에게 해줄 일이 없다.

종초홍에게 그녀의 위치를 알려주면 두 사람이 알아서 앞날을 준비하리라. 한데 백소의 담담한 한 마디가 이훤의 발을 잡아끌었다.

“은공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빚을 갚은 거야. 은공은 과분하다.”

이훤의 너스레에도 백소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흙탕 위에 무릎을 꿇고 대례를 올렸다.

“천문진인께서 유언하시길 제 절맥을 완벽하게 고치려면 죽은 신의가 돌아오거나, 신마의 심득이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신마의 심득 중에서도 특별한 무언가가 있어야 하니 살아남기가 지난하다고 하셨지요.”

유언보다는 당부의 한 마디가 아닌가.

이훤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백소가 일어나며 포권을 했다. 그녀는 왜인지 모르게 얼굴을 붉힌 채 읊조리듯 말을 건넸다.

“하여 제 병을 고쳐주는 사람이라면 믿을 수 있으니 신마의 심득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 59, 여난(女難).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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