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마신-143화 (143/226)

< 58, 천룡(天龍). (4) >

*

이훤은 지금껏 다섯 명의 감각사도를 척살했다.

백의와 애매, 애난, 그리고 종남파의 주남노도와 봉황회주까지 총 다섯이다. 어차피 똑같이 생긴 연놈이니 굳이 이름을 구분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그만큼 귀찮았다.

그리고 지루했다.

벽력창 악재가 죽인 청의인까지 헤아리면 무려 여섯 명이다. 이훤이 회귀한 이후 불과 일 년 사이에 열여섯 명 중 여섯 명이 죽은 셈이다. 어찌 보면 엄청난 성과였고, 천룡전 입장에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것처럼 어처구니가 없었으리라.

‘그게 무슨 의미가 있으랴?’

하나 당사자가 지루했으니 숫자는 의미가 없었다.

무엇보다 어차피 감각사도를 잡아봤자, 죽기 직전까지는 강림혼요술을 벗어날 수 없지 않은가. 또한 죽기 직전에 내뱉는 유언이 만족스러울 리 만무했다.

하여 이번에는 방법을 바꿨다.

‘살아있는 천문진인의 심득이 바로 백소다.’

그러니 감각사도의 행선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천룡전(天龍殿).

이훤은 은밀하게 흑의인들을 추적했다.

천공혈륜겁의 성취가 구궁벽력공으로 인해 구 성에 이르는 순간 내외의 구분이 무의미해졌다. 그렇기에 이훤이 숨자고 마음을 먹으면 탈마조차 찾지 못했다

그렇기에 편안하게 상대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작금의 상황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이제야 아귀가 맞는군. 천룡전의 주구가 된 무당파 문도가 풍천동을 알렸을 것이고, 백소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우는 건 식은 죽 먹기였을 테지.’

그 후에 백소의 조력자처럼 행동하며 그녀의 심득을 빼먹으려 했으리라.

이훤은 손안에서 파닥거리는 전서구를 보다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쯤 되면······.’

종초홍과을 만나기 위해 떠난 후 이곳에 이르기까지 마주했던 모든 상황은 단지 우연이나 운이 좋았다는 말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했다.

‘정말 하늘의 뜻이라는 게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구려.’

그 때 혈령노괴가 빈틈을 찾았는지 은밀하게 혈령골적검법을 펼쳤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귀곡성이 울리며 상대의 심력을 흐트러트리고, 검에서 새어나온 독기로 인해 음습하기로 유명한 검법이다.

“죽어라!”

하나 이훤은 시선을 마주하지도 않은 채 혈령노괴의 검을 잡았다. 마치 이훤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간 것처럼 보였기에 혈령노괴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쩡-

힘을 주자 검이 산산이 부서졌다.

하나 이훤의 손은 멀쩡했다.

그리고 독이 스며들지도 않았다.

“똘마니는 빠져라.”

혈령노괴는 수치심으로 인해 얼굴을 붉혔다.

초절정의 무인이 어디 가서 이런 소리를 듣겠는가. 그가 울분을 토해내려는 순간 쇳덩이가 목을 옭아매는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컥!”

착각이 아니다.

어느새 이훤이 다가와 목울대를 움켜쥔 것이다.

그는 그대로 혈령노괴의 목을 꺾어버렸다.

콰직!

여인과 무진방주는 혈령노괴의 허망한 죽음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거였다.

이훤의 귀찮음과 권태로움은 괜히 생긴 것이 아니다.

어느 순간부터 적이랍시고 나타나는 자들이 우스웠다. 손짓 한 번에 나가떨어지고, 발길질 한 번에 상황이 정리됐다. 이처럼 하찮은 것들로 인해 강호가 도탄에 빠졌다니 그 또한 우스웠다. 그러다보니 이런 것들과 상대하기 위해 장강을 오갔던 것인가 싶어서 자괴감이 들 정도였다.

손을 쓰기도 귀찮았다.

누가 나서서 대신 죽여줬으면 참으로 편할 듯했다.

그 순간 생각지도 못했던 사실을 떠올렸다.

‘아! 이래서 세력을 만드는구나.’

손발을 대신할 수하가 있다면 저깟 놈들을 상대하느라 심력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짜증은 배가 됐다.

“어느 쪽부터 죽여주랴?”

이훤의 한 마디에 무진방주가 발끈했다.

그 또한 한평생 천재 소리를 들으며 승승장구하지 않았던가. 한데 이훤의 목소리는 자신이 뒷골목 흑도를 대할 때와 다르지 않았다.

무미건조하다 못해 메마른 목소리.

“놈!”

무진방주가 검을 늘어트린 채 쇄도했다.

적암자를 몰아세우던 강렬한 검격이다.

검기조차 발산하지 않은 쇳덩이가 달빛을 받아 번뜩였다. 하지만 필요에 의해서는 언제든 검기나 강기가 덧씌워질 것이 분명했다.

촤라라락!

하나 그 또한 무의미한 발버둥이었다.

이훤이 늘어트린 팔을 들어 올리는 순간 무극이 저절로 펼치며 왼손을 감쌌다. 그것도 모자라 길게 늘어지더니 검이 되었다. 그리고 검풍 대신 강기가 번뜩이며 탄강으로 전방을 찢어발겼다.

촤악!

무진방주가 좌우로 갈라진 채 튕겨나갔다.

이훤은 눈을 부릅뜬 채 서 있는 여인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감각사도 주제에 주눅이라도 든 건가? 다른 것들은 그래도 발악을 하던데 말이야. 네깟 것들에게 천룡전이라는 이름은 참으로 아깝다.”

짜증으로 점철된 조롱이었다.

이훤은 전서구를 왼손으로 옮긴 후 오른팔의 팔황을 활성화했다.

“생각해보면 너처럼 손쉽게 잡은 감각사도는 처음이네. 너는 애국이냐? 애죽이냐?”

싸늘한 눈초리에 여인은 학질에 걸린 사람처럼 진저리를 쳤다.

“됐다. 그냥 죽이고 마지막 남은 계집에게 물어보마.”

이훤은 막대기를 주운 아이처럼 팔황을 휘휘 돌리며 걸음을 내딛었다. 상대를 조금도 경계하지 않아도 될 만큼 격차를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인의 지척에 이른 후 검을 내질렀다.

일단은 단전이다.

그리고 팔다리의 근맥을 끊고, 심장 주변을 헤집으면 강림혼요술이 사라질 터였다.

푹!

팔황은 두부를 파고드는 것처럼 너무나 쉽게 여인의 아랫배를 꿰뚫었다. 여인은 신음도 흘리지 않은 채 주저앉았다. 이훤이 그녀의 배를 밟고, 팔다리를 겨눌 때였다.

‘응?’

묘한 감각이 바늘처럼 온몸을 찔러왔다.

혈륜이 경고했다.

오랜만에 울리는 경종에 한순간 소름이 돋았다.

은밀하면서도 생소한 기운이 스며든다.

이훤이 아닌 여인의 몸이 변화하고 있었다.

‘이건 뭐냐?’

구궁벽력공을 통해 구 성의 성취를 이루지 못했다면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했으리라.

눈을 부릅 뜨는 순간 시각(視覺)이 무한대로 확장됐다.

그 순간 이훤은 여인의 정수리를 통해 스며드는 묵빛의 기운을 볼 수 있었다. 아득히 먼 곳에서 가늘게 전해진 기운이 거미줄처럼 여인의 백회혈을 관통했다.

그 순간 여인의 입이 열렸다.

한데 여인의 목소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굵직한 음성이다.

“이 아이의 이름은 애국이다.”

정수리에 벼락을 맞은 듯했다.

이훤은 엄청난 위화감에 미간을 좁힌 채 물었다.

“천룡이냐?”

“생각보다 크게 놀라지 않는군.”

아끼는 수하가 죽어가고 있음에도 개의치 않는 모습에 천룡임을 확신했다. 예상대로 상대는 감각사도를 소모품처럼 여겼다. 이제 그가 처음으로 타인의 입을 빌어 나타난 이유를 알아야 했다.

이훤은 애써 놀란 마음을 숨긴 채 어깨를 으쓱거렸다.

“강호에는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나니까.”

틀린 말은 아니지 않은가.

죽은 후 수십 년을 거슬러오거나, 보는 사람마다 다른 깨달음을 얻는 비급, 거기에 더하여 사람의 몸뚱이를 진법처럼 개량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니 타인의 몸을 빌려 의지를 전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지는 않으리라.

다만 그 대상이 천룡이었기에 놀랐을 뿐이다.

“그래서 대답은?”

이훤이 재차 질문하는 순간 여인이 방긋 웃었다.

우는 것 외에는 할 수가 없는 감각사도의 얼굴에 더없이 자연스러운 미소가 드리워졌다.

“신이 되지 못했으니 그곳을 배회하는 용이라도 되고 싶은 미물이라네.”

스스로를 미물 취급하는 여유로움에 울화가 치밀었다.

“이제 내가 묻지. 반노환동을 했는가?”

“아니.”

“그렇군. 그나저나 이제 그만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이훤은 미간을 좁혔다.

“무슨 소리지?”

“악재의 깨달음으로 인해 점의 세상이 선의 세상으로 바뀌지 않았는가. 그러니 그대가 나의 기운을 엮어보려고 이렇게 고생을 하는 거고.”

여인의 눈동자가 허공을 향했다.

반면 이훤은 혀를 찼다.

‘걸렸군.’

처음 묵빛의 기운이 거미줄처럼 이어지는 것을 보는 순간 깨우쳤다. 천룡은 이미 벽력창 악재의 심득을 온전히 흡수한 것이 분명했다. 생각해보면 악재가 가솔들에게 심득을 전했으니 그들 중 한 명을 통해 전해듣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닐 터였다. 하나 신마의 심득을 얻지 못한 자에게는 영문 모를 소리에 불과했다. 반면 천룡에게는 전문(傳聞)을 통한 지식이었으나, 큰 도움이 됐으리라.

하여 천룡의 거미줄에 자신의 진법을 슬쩍 얹으려 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거미줄의 원류를 찾을 수 있었으리라.

“후우.”

이훤은 혈륜을 거둬들였다.

천룡이 지척에 있지 않는 한 혈륜으로 역추적을 해봤자, 중간에 끊길 것이 분명했다. 헛되게 힘을 소모하는 것보다는 눈앞의 적에게 집중하는 편이 옳았다.

“괜한 짓은 그만 하지. 어차피 우리는 조만간 보게 될 테니까 말이야.”

이훤은 기세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왼손에 쥔 전서구를 흔들며 말했다. 하나 전서구를 내려다보는 순간 눈을 부릅뜨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느새 축 늘어진 여인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거미줄이 전서구에 연결되어 있지 않은가.

“언제 이런 짓을!”

이훤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 전서구가 구슬픈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고 한순간에 낙엽처럼 말라비틀어졌다. 재가 되어 손가락 사이로 흩어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설마 이제 와서 자네가 궁금했기에 찾아온 것이라 여겼는가?”

대답하지 않았다.

틀린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듣던 대로 광오한 자신감이다. 그 혈기가 참으로 부럽구나.”

울화가 치밀었다.

천룡의 부럽다는 말에서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광오한 자신감이라니! 어떤 새끼가 그런······.’

이훤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듣던 대로?’

전서구를 빼앗긴 탓에 머리끝까지 치솟았던 분노가 눈처럼 녹아서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그 자리를 혈륜으로 인해 안정된 평정심이 대신했다.

이훤은 여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 이내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구나.”

“······.”

“지금까지는 계속 듣기만 했구나. 눈으로 본 건 이번이 처음이지?”

“무슨 소리더냐?”

“지금까지는 네 심득만 파고 들었어. 악재의 심득을 얻었지만, 하나로 뭉치지 못했던 거야. 한데 할 수 있게 되었어. 어떻게 되었을까?”

자문자답이 이어졌다.

이훤은 탈마가 외워두라고 주었던 만매만전의 비급을 꺼내들었다.

“이걸 봤구나.”

한순간 여인의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

“봤구나. 봤어. 그래서 다른 감각사도를 죽일 때에는 개입하지 못했던 거야. 지금까지는 나에 대해서 보고만 받았던 거지. 한데 만매만전을 보고 마침내 네 것과 악재의 것을 하나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이로구나!”

이훤의 외침에 여인은 코웃음을 쳤다.

“그래, 네 철없는 짓거리 덕분에 이 몸은 큰 도움을 얻었단다. 신마의 심득 중 세 가지를 얻었으니 너처럼 광오하고, 버릇 없는 놈을 쳐죽여도 되지 않을까 싶구나.”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훤은 박장대소를 했다.

“하하하! 거지같은 새끼. 남이 베푼 걸로 밥 밀어먹게 됐으면 고맙다는 말을 먼저 해야지. 그렇지 않아?”

여인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사람은 칼을 얻으면 휘두르고 싶고, 책을 구하면 읽고 싶은 법이다. 그러니 천룡 또한 악재의 심득을 흡수한 후 써먹고 싶었으리라. 그 대상으로는 최근 천룡전에 막대한 타격을 준 이훤이 제격이다. 혓바늘처럼 귀찮기 만한 이훤을 조롱하면서 그간의 화를 억누르려 했을 터였다.

“네 놈은 물론이고, 네 놈과 관련된······.”

이훤이 검지를 들어 입술의 중앙을 막았다.

“쉿.”

그 순간 천룡은 이훤이 그를 처음 느꼈을 때처럼 생소한 감각에 휩싸였으리라.

“만매만전을 세상에 뿌린 게 철없는 짓거리라고 생각해?”

놈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훤은 입꼬리를 올렸다.

“일부러 뿌린 거야.”

스릉-

팔황이 길게 늘어졌다.

“너 보라고.”

길게 늘어진 팔황이 달빛을 받아 금광을 쏟아냈다.

그 위로 핏빛의 혈륜이 서서히 덧씌워지니 달빛 자체가 붉게 물드는 듯했다.

“그러니까 목 씻고 기다리고 있어라.”

촤악!

검이 횡으로 공간을 베는 순간 여인의 몸뚱이가 핏물로 화하여 흔적도 없이 흩어졌다.

< 58, 천룡(天龍). (4)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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