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 천룡(天龍). (3) >
종초홍은 여인을 포위한 사문의 어른들을 보자마자 이훤을 그대로 지나쳤다. 하나 이훤이 그런 종초홍의 소매를 낚아챘다.
“형님, 놓으세요. 저 아이가 백소입니다. 무슨 오해가 생긴 듯합니다.”
“침착해라.”
“네?”
이훤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장내를 살폈다.
“저 여자는 피를 흘렸지만, 피륙의 상처일 뿐이야. 치명상을 입지도 않았어. 그저 옷이 희어서 도드라질 뿐이야. 보법이 안정된 것으로 보아 아직 여력이 충분하다. 오히려 상대를 꺼려하기에 손속에 자비를 둔 듯 보이는데.”
종초홍은 소매를 떨쳐내려 했다.
“그러니 빨리 말려야지요.”
하나 이훤이 잡고 있는 이상 종초홍이 움직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오히려 이훤의 진중한 한 마디에 벼락을 맞은 것처럼 진저리를 쳤다.
“네가 나서는 순간 저 아이가 죽을 것 같아서 그런다.”
“아!”
종초홍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했다.
무암자와 딸, 그리고 천문진인.
세 사람의 관계를 조율한 것이 종초홍이다.
그러니 그가 개입하여 진실을 밝히는 건 무당파의 법규를 어겼다고 자복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백소라는 여인은 자신을 피붙이처럼 여겨주는 종초홍의 위기를 두고 볼 리 없으리라.
“형님.”
이훤은 종초홍이 몸에서 힘을 뺀 후에야 소매를 놓았다.
“너는 여기 없는 게 나아. 본산으로 가라. 가서 네가 잘하는 걸 해.”
천문진인의 죽음을 조사해달라는 의미였다.
종초홍은 백소와 이훤을 번갈아 본 후 한 숨을 내쉬었다.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손속의 정을...”
이훤은 히죽 웃었다.
“너와 원수로 만나고 싶지 않아.”
종초홍은 뒷걸음질 치면서 백소를 한참동안 바라봤다. 그리고 동굴의 입구에 이르러 몸을 돌린 후 빠르게 자소봉 방면으로 사라졌다.
“그나저나 이 새끼는 또 어디로 간 거야?”
어느새 자취를 감춘 탈마는 이제 혈륜을 극대화하지 않으면 감지하는 것이 어려웠다.
하나 녀석 또한 본인이 가장 잘하는 걸 하고 있으리라.
이훤은 어깨를 휘휘 돌리며 혈투가 벌어지고 있는 장내를 살폈다.
‘어디로 떨어져야 효과가 극대화되려나.’
무당파는 도가의 상징적인 방파였다.
불가의 소림이 변화하지 않듯 무당 역시 오랜 세월 초심을 잃지 않았다. 화산과 종남은 물론이고 청성파마저 속가와의 경계를 허물었다. 아미파는 봉문하여 수양하던 시절을 잊고, 강호를 종횡했다.
하나 소림과 무당만은 언제나 그대로였다.
강호에 큰 위기가 있지 않으면 쉬이 검을 뽑지 않았다.
그저 존재만으로도 상대를 압도했다.
당금 무당이 내외로 가장 중요하지 하는 규범은 두 가지였다.
첫 째는 강호행이다.
장문인과 장로들의 허락이 없으면 무당파의 문도는 하산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둘 째는 혼인이다.
이것은 장문인이라고 해도 바꿀 수 없는 내규였다.
오직 구도에 정진하여 깨달음을 얻는 것만이 무당파의 지향점이다.
그렇기에 무당파의 일대제자인 적암자(赤巖子)는 머리끝까지 화가 난 상태였다.
유선검 무암자는 일대제자의 막내로 사형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적암자 또한 동생처럼 그를 아꼈다. 한데 그랬던 그가 몰래 혼인을 하여 딸을 거둔 것도 모자라 사문의 비급까지 반출했단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의 배신감을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네 이 년! 아비의 인생을 망친 것도 모자라 비급을 욕심내서 천문사숙을 해하다니!”
적암자는 일갈을 내질렀다.
“뭣들 하는 것이야? 여인이라고 여기지 마라! 사문의 반도이자, 악적이며, 모두를 배신한 무암자의 핏줄이다. 손속에 정을 두지 마라!”
이대제자 십여 명 중 세 명이 빠졌다.
열 명이 덤벼서 그냥 제압하려 했거늘 백소의 경공이 제법 뛰어났기 때문이다. 하여 세 명이 빠진 일곱 명의 이대제자가 국자의 형태로 진형을 꾸렸다.
“북두천강진을 펼친다!”
청수한 인상의 중년인이 검면을 정면으로 한 채 하단을 겨눴다. 무당의 중시조라 불리는 괴공이 창안했다는 북두천강진(北斗天降陳)은 차력(借力)을 핵심으로 운용된다. 같은 심법을 익히고, 오랜 세월 함께 살아왔기에 내력이 전이되어도 폐해가 없다. 게다가 머리가 정면에서 힘을 쏟을 때 손잡이라고 할 수 있는 꼬리 부분의 제자는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상대의 배후를 노렸다.
그 결과가 금세 나타났다.
“흡!”
지금껏 굳은 표정으로 무당 제자들의 공세를 피해내던 백소가 거친 호흡을 흘렸다. 저들이 펼치는 북두천강진은 무당쌍선이라 불리는 청암진인마저 엄지를 추켜세웠을 만큼 완성된 검진이다. 초절정의 고수라고 해도 거미줄에 걸린 나비와 같았고, 절대지경을 앞뒀다고 해도 쉬이 벗어날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고 죄를 고하라!”
북두천강진의 수장인 청료자(靑了子)가 외쳤다.
하나 백소(白素)는 끊임없이 발을 놀리며 빈틈을 찾으려 했다.
‘검진을 벗어나도 저 자가 문제야.’
그녀는 검진 너머에서 눈을 부릅뜨고 있는 적암자를 쳐다봤다. 어째서 누명을 쓰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에 하나 사로잡힌다면 좋은 꼴을 볼 수 없을 터였다.
하나 그녀의 손은 여전히 소매 속에 존재했다.
어린 시절에는 무당파를 원망하기도 했으나, 천문진인의 수발을 들면서 깨우쳤다. 천문진인과 무암자, 그리고 자신을 피붙이처럼 아껴주던 종초홍이 무당파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이다. 그걸 알고 있기에 자신을 죽이겠다고 덤비는 저들에게 살수를 펼칠 수 없었다.
촤악!
그 때 청요자의 검이 백소의 오른 팔을 스쳐갔다.
핏물이 튀는 양으로 보아 피부만 베인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의 부상 중에서 가장 컸다.
‘이러면 보법에 문제가······.’
보신경은 보법과 신법, 경신술을 총칭한다.
하여 하수들은 보신경을 익힐 때 하반신의 단련을 필수로 했다. 하지만 보법의 핵심은 균형이다. 상반신과 하반신의 균형을 이뤄 신묘한 움직임을 보이는 게다. 그렇기에 상체의 부상은 곧 균형이 무너짐을 의미했다.
청요자가 그것을 놓칠 리 없다.
“요녀의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더욱 몰아붙여라!”
그가 맹렬한 검격을 뽐내는 순간 북두천강진의 꼬리인 명료자(明了子)가 기습적으로 사각을 파고들었다.
“잡았다!”
한데 그 순간 허공에서 시커먼 인영이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콰쾅!
*
이훤이 가장 멋지게 등장할 수 있는 지점을 찾던 중이다.
탈마가 바위 사이에서 튀어나왔다.
“형님, 누가 있어요.”
“무슨 소리야?”
“저들 때문에 소란스러우니 천문진인의 처소를 살피려고 했거든.”
물론 돈 될 만한 게 있으면 기꺼이 품에 넣었으리라.
“한데 처소로 향하던 중 숨어 있는 자들의 기척을 발견했습니다.”
“그게 어딘데?”
탈마는 반대편 절벽의 중턱을 가리켰다.
그가 뻗은 손가락은 중턱에서 호선을 그리더니 장내로 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중턱에서 폭음이 일더니 흑의를 걸친 세 명이 벼락처럼 내리꽂혔기 때문이다.
이훤은 입술을 오므린 채 탄성을 내뱉었다.
“이게 재밌게 흘러가시네.”
“냄새가 나죠?”
탈마의 물음에 동의했다.
“그래, 난다. 때려죽일 새끼들의 냄새.”
세 명의 흑의인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흑의를 둘러서 정체를 감췄다. 그러면서도 괴이한 검법을 펼치니 신분을 유추할 수가 없었다.
“막아라!”
“포위해!”
뒤로 빠져 있던 이대제자 세 명이 합류했다.
하지만 흑의인들을 무공은 저마다 초절정에 이르렀다.
적암자가 검을 뽑아들고 달려드는 순간 저들의 진형이 변했다. 애초에 적암자를 끌어들인 후 퇴로를 확보하기 위함이리라.
“피해주자.”
두 사람은 입구 쪽에서 비켜섰다.
그리고 예상대로 변화가 시작됐다.
흑의인들의 검에서 핏빛 기운이 넘실거렸다.
검을 내뻗고, 갈무리하는 과정이 더없이 음습하고, 끈적끈적했다. 일견하기에도 정파가 아니라 사마외도의 무공처럼 보였다.
“혈령노괴의 혈령골적검! 노괴가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었던가?”
적암자는 무당파 장로의 혜안을 자랑하듯 금세 적의 무공을 눈치 챘다. 흑의인은 혀를 차더니 경계심을 드러내는 백소에게 외쳤다.
“네 아비가 내 의제다! 따라와라.”
그리고는 강기를 흩뿌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혈령골적검과 직접적으로 부딪치지 마라! 몸을 노려.”
흑의인이 검을 방패처럼 한바퀴 휘돌리는 순간 핏빛 벽이 번뜩였다. 그것만으로도 이대제자들은 숨이 막히는 듯 헛구역질을 했다.
그리고 흑의인이 그 사이를 내달렸다.
“노괴야! 다시 관에 쳐 넣어주마!”
한데 그 순간 혈령노괴의 뒤에 머물던 흑의인이 비조처럼 내달리며 적암자와 검을 맞댔다.
터터텅!
적암자는 눈을 부릅떴다.
검격에서 느껴지는 기세는 둘째 치고서라도 상대는 무당파의 검술을 알고 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아니나다를까 절초를 펼쳐도 손쉽게 빗겨 치는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넌 누구냐?”
하나 흑의인은 대답을 하는 대신 눈짓을 했고, 백소를 이끌던 가냘픈 체구의 흑의인이 달려들었다.
적암자는 두 명의 흑의인을 상대로 금세 수세에 몰렸다.
“지금이다!”
혈령노괴가 벼락처럼 달려들더니 검을 내질렀다.
검 끝이 심하게 흔들리는 순간 적암자는 어깨를 내줘야 했다.
“큭!”
“흥! 드디어 무당 말코가 내 앞에 무릎을 꿇는구나!”
적암자는 비틀거리며 한 쪽 무릎을 꿇었다.
한데 흑의인이 혈령노괴를 만류했다.
“지금 떠나야 해.”
혈령노괴는 잠시 혀를 찰 뿐 과거의 원한을 금세 뒤로 한 채 달려나갔다. 백소는 엉겹결에 세 사람과 함께 어울려 풍천동을 떠났고, 한순간에 자취를 감췄다.
“사백!”
“경박하게 굴지 마라. 혈도를 막았으니 조금만 요양하면 된다. 검수들은 멀찍이서 적을 쫓아라. 결코 상대하면 안 된다. 너희들의 상대가 아니야. 그리고 나머지 셋은 바로 본산에 올라가서 보고를 해라. 이십 년 전 사라진 혈령노괴의 등장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
흑의인들은 자소봉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내달린 후에야 멈췄다. 무당산의 산세는 수백 리 밖 융중산의 제갈세가까지 이어졌을 정도였다. 그러니 이쯤 되면 추격조를 뿌리쳤다고 여겼으리라.
백소는 한 걸음 떨어진 채로 세 사람을 바라봤다.
무암자와 의형제라고 하지만, 한 번도 들어본 기억이 없다. 그렇기에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하여 발끝은 언제든 뒤돌아서 도망칠 수 있도록 바깥쪽을 향했다.
혈령노괴가 복면을 풀었다.
“비록 사마외도에 속했으나, 네 아비와는 정마를 초월한 우정으로 다져진 사이다. 그리고 이쪽은 초면이지만, 네 아비와 관계가 있다더구나.”
일남일녀가 정체를 드러냈다.
장년의 사내는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했으나, 피부는 나이를 파악하기 어려울 만큼 탱탱했다.
“무진방에서 왔소.”
혈령노괴가 탄성을 흘렸다.
“역시! 무당의 속가제일이라면 누구나 무진방주 비응검협을 손꼽겠지. 그래서 무당파의 검술에 능숙했군.”
무진방주는 사파인 혈령노괴와 어울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하여 슬쩍 고개를 돌린 후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트린 여인을 가리켰다.
“이쪽은 내 내자요. 그녀 또한 무당의 속가제자로 무암 사형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소이다.”
여인은 수심 가득한 얼굴로 한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다가가 백소의 양손을 맞잡았다.
“무암 사형이 죽었을 때만 해도 삼일 밤낮을 목 놓아 울었다. 한데 네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당장 달려왔느니라. 다행히 위급한 순간을 무사히 넘겼구나. 참으로 다행이다.”
백소는 자신의 손을 잡고 펑펑 우는 여인을 보며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하나 금세 표정을 풀었다. 의심을 하기에는 여인의 표정이 너무나 진실했기 때문이다. 초췌하면서도 수심이 가득한 얼굴을 보고 있자면 덩달아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잠시 목을 축인 후 떠나자. 너도 그렇겠지만, 우리도 무당파와 계속 검을 섞는 건 부담스럽단다.”
백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혈령노괴가 적암자에게 검을 휘두르려 할 때 그녀가 만류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네. 따르겠습니다.”
네 사람은 잠시 휴식을 취했다.
여인이 무진방주에게 눈짓을 하자, 그가 헛기침과 함께 나무 아래를 살폈다. 그 사이 혈령노괴는 호법이라도 서듯 주변을 경계했다. 여인이 백소의 상처를 살피는 사이 무진방주는 전서구가 들어 있는 새장을 꺼냈다.
“그게 뭔가요?”
백소의 물음에 여인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언제까지 도망칠 수는 없지 않느냐. 하여 도움을 줄 사람들을 찾았다. 전서구가 그들에게 소식을 알린다면 우리를 마중나올 것이야.”
“아! 다행이네요.”
여인은 백소가 안심한 듯 보이자,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걱정하지 마라.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야.”
무진방주는 서찰을 작성한 후 전서구의 다리에 매달았다.
그리고 힘차게 전서구를 날렸다.
푸드드드득!
하나 전서구는 일 장도 날아가지 못한 채 허공에서 날갯짓을 했다. 지금껏 아무도 모르게 그들을 뒤따른 이훤이 움직인 것이다.
“헙!”
그리고 네 사람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벼락처럼 솟구쳤다. 허공에서 전서구를 낚아챈 후 자연스럽게 내려선 그가 네 명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훤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훗, 그러니까 이 놈을 따라가면 천룡전이 나온다는 거네.”
무진방주와 혈령노괴가 검을 뽑으며 외쳤다.
“웬 놈이냐?”
하나 이훤은 두 사람 사이로 보이는 여인을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웃는 놈이 아니라 우는 년이었군.”
< 58, 천룡(天龍). (3)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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