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 천룡(天龍). >
58, 천룡(天龍).
이훤은 종초홍의 안위를 한 번 더 살폈다.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호흡이 규칙적이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안심할 때는 아니었다.
종초홍은 현재 이훤이 새겨 넣은 진법이 안정화되는 단계였다. 그렇기에 섣불리 깨어나거나 움직인다면 오히려 더 큰 화를 불러올 수도 있었다.
“건물은 너무 시끄럽게 부쉈나.”
후회는 언제나 늦기에 후회였다.
이훤은 불을 줄인 후 창고에서 골라온 술병을 침상 주변에 늘어놓았다. 그리고 뚜껑을 열어놓자, 잠시 후 방안은 향긋한 주향으로 채워졌다.
‘우리 같은 술꾼에게는 약향이 아니라 이게 즉효지.’
이훤은 종초홍의 창백한 얼굴을 내려다 본 후 눈을 감았다.
자신으로 인해 바뀐 운명.
그것을 한 번 더 바꾼 셈이다.
그러니 불사검협(不死劍俠) 정도로 만족하지 말고, 불사검제(不死劍帝)로 성장하기를 빌어주었다. 하는 김에 무당파 장문인이 아니라 무림맹주도 한 번 해보라고 기원했다.
물론 신선이나 부처에게 빌지 않았다.
‘천지신명 중에 으뜸인 신마께 비나이다. 비나이다!’
이훤의 모든 건 신마에게서 비롯됐으니 거리낌이 있을 리 만무했다.
‘이제 슬슬 맞이할 준비를 해 볼까.’
비라도 오려는지 먹구름이 서서히 몰려들었다.
강림혼요술에 걸린 자들이라면 오늘을 놓치지 않으리라.
한데 그러고 보니 거치적거리는 자들이 버젓이 존재했다.
이훤이 모습을 드러내자, 엉거주춤한 자세로 경계를 서고 있던 군졸들이 허둥지둥 거렸다. 창을 겨누는 자는 서너 명에 불과했다. 창을 놓치는 자와 주저앉는 자, 그냥 도망치는 자가 속출했기에 잠시 기다려주었다.
“후.”
이훤은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자에게 손짓했다.
“대장을 불러와라.”
“예!”
지목 당한 군졸은 사면령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뛰어갔다.
그의 뒤통수에 이훤의 서슬 어린 한 마디가 들렸다.
“대장에게 당장 오지 않으면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갈아버릴 것이라고 일러라!”
“히익!”
군졸의 수장은 도살장에 끌러가는 소처럼 느릿하게 다가왔다. 그래도 도독부의 장수라는 자가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떨고 있는 걸 보니 나라의 안위가 걱정스럽기만 했다.
“다 집에 가라. 그리고 내일 아침에 다시 와.”
“무, 무슨 소리요. 우리는 봉황회를 포위하라는 명을 받았소이다. 도독첨사의 지엄한 명령에 의하여 본 대는 한 걸음도 물러나지······.”
쩡-
이훤이 손가락을 튕기자 장수의 군모가 튕겨나갔고, 한 번 더 튕기는 순간 검을 놓쳤다. 그리고 발을 가볍게 구르는 순간 대지가 요동을 치며 주변의 군졸들은 모조리 나뒹굴었다.
“이제 적이 올 거다. 너희들이 감당할 수 없으니 헛되이 죽지 말고 돌아가. 내일 아침에 다시 오면 모든 게 끝났을 것이다.”
장수는 턱을 달달 떨 뿐 말을 잇지 못했다.
이훤은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
할 만큼 했으니 이제 모든 건 상대의 책임이라고 여겼다.
“저들이 죽으면 다 네 탓이다.”
장수는 군졸들을 돌아봤다.
그들은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엉거주춤한 자세로 장수의 입만 뚫어져라 응시했다.
“장군, 집에 계신 노모가······.”
잠시 후 봉황회의 정문 밖이 부산스럽더니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찾을 수 없을 만큼 고요하게 변했다.
“자! 그럼 손님맞이를 시작해볼까.”
이훤은 봉황회의 무인들이 사용하던 무기를 하나씩 모았다. 한 손에는 술을 들고, 콧노래를 부르다 보니 종초홍이 누워 있는 처소의 주변에는 무기가 가득했다.
“구성, 구성, 누가 알았겠는가? 회귀 전의 너도 몰랐으리라. 스무 살에 회귀 전의 너를 뛰어넘을 줄은 말이야.”
되도 않는 가락에 노래를 부르다보니 어느덧 먹구름이 달을 가렸다. 사위에 어둠이 내려앉고, 고즈넉한 가운데 귀기가 맴돌았다.
봉황칠익의 나타난 건 그 때였다.
이훤은 헛웃음을 지었다.
“저것들이 단체로 미쳤나?”
놈들은 복면을 쓰고, 흑의를 입은 채 빠르게 접근했다.
하나 이훤의 안력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아무런 방책 없이 무작정 달려오는 적의 모습이 훤히 보였다.
‘확실히 다르네.’
이훤은 웃었다.
저들의 접근을 알아차리는 건 예전부터 가능했다.
한데 예전과 달리 지금은 적들을 개별적으로 파악하며 살필 수 있었다. 마치 진법 안에 들어온 적을 앉아서 파악하는 듯했다. 만약 이훤에게 수많은 활과 화살이 있었다면 동시에 모두를 겨누는 것도 가능했을 정도였다.
‘백이십칠.’
숫자를 헤아릴 필요도 없었다.
그저 지켜보는 순간 저절로 헤아려졌다.
이훤은 구성의 천공혈륜겁의 신위을 한 가지로 정의했다.
‘의식의 범주가 한없이 늘어났다.’
한 마디로 인식(認識)의 무한한 확장(擴張)이었다.
넓게는 저들처럼 대규모로 움직이는 경우였고, 좁게는 누군가의 미세한 움직임마저 자연스럽게 감지될 터였다.
‘크큭! 술 생각나네.’
대공(大功)을 이룬 것에 키득거리는 사이 적도가 봉황회에 난입했다. 그리고 적도가 등장하는 순간 모아놓은 무기들이 위력을 보였다.
‘······.’
눈앞의 적은 백스무 명이다.
그리고 일곱 명이 지붕 쪽으로 돌아들어온 상태였다.
한데 이훤은 그들까지 포함하여 인지한 후 의지를 드러냈다. 그것만으로도 처소 주변에 흩뿌려 놓은 검들이 두둥실 떠올랐다. 그리고 저마다 먹잇감을 정한 것처럼 칼끝을 겨눴다.
“헉!”
사천당가의 가주 비전이라는 만천화우도 이렇지 않았다. 마치 이기어검을 동시에 수십 명이 펼치는 듯한 신위에 봉황칠익을 비롯한 잔당들은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사, 사술이다! 현혹되지 마라!”
“단순히 검을 들었을 뿐이다!”
천룡이 만들어낸 강림혼요술은 인간의 본성인 두려움조차 이겨내게 만들었다.
이훤은 순수하게 탄성을 흘렸다.
“미친 새끼들.”
봉황칠익은 자신이 외쳐놓고, 자신이 설득당한 것처럼 달려들었다.
“죽여라!”
초절정의 고수가 내지른 검이 번쩍였다.
검기가 휘감기고, 다발로 늘어나 검사가 되었으며, 이내 강기로 화(化)화여 검과 함께 꽂혀들었다.
“그래, 죽어라.”
이훤의 담담한 한 마디와 함께 허공에 정지된 것처럼 멈춰있던 검이 움직였다. 단순히 물건을 움직이는 수준을 넘어 힘을 담을 수 있지 않던가. 그렇기에 개개의 검은 이훤이 직접 던진 것처럼 위력을 드러냈다
쇄애애애애애액!
누누이 말하지만, 강기는 맞지 않으면 무의미했다.
그리고 이훤은 검은 강기를 피해 시전자의 머리통을 관통할 만큼 위력적이었다.
콰직!
무인은 얼굴에 검이 꽂히는 순간 뒤로 튕겨나갔다.
곤란한 점은 죽은 그가 봉황칠익 중 일익이라는 점이다.
푹푹푹푹푹푹푹!
수장이 막지 못한 걸 수하들이 막을 리 만무했다.
백여 명이 넘는 고수들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제자리에서 픽픽 쓰러졌다. 그리고 일곱 자루의 검은 지붕을 뚫고 솟구치더니 매복하던 무인들을 반으로 쪼갰다.
촤아아아악!
봉황회의 잔당 백스물일곱 명이 절명하는데 걸린 시간은 그야말로 눈 한 번 깜짝할 사이였다.
“아! 찝찝해.”
이훤은 구멍 뚫린 지붕에서 쏟아지는 피를 몸으로 받아낸 후 인상을 썼다. 하나 구성의 천공혈륜겁이 만들어낸 광경에는 광소가 절로 터져 나왔다.
“크하하하하! 이게 구 성이다!”
그 순간 봉황회 정문으로 들어선 피 칠갑을 한 이훤을 보고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허미! 씨부럴. 깜짝이야.”
이훤은 투덜거리면서 목욕을 했고, 탈마는 도독첨사와의 거래를 알려줬다. 그리고 두 사람은 늦은 밤 종초홍을 들쳐 업은 채 야반도주를 했다. 도독첨사와 거래를 한 이상 마음이 바뀌기 전에 사라지는 것이 최선이었다.
“형님, 종 형을 이렇게 흔들어도 되는 거요?”
“안 되지.”
“그럼 어떻게 해요?”
“안 되기는 하는데 죽다 살아났잖아. 그러니 어느 정도의 후유증 정도는 괜찮아.”
탈마는 혀를 내둘렀다.
“아! 확실히 나쁜 사람은 아닌데 정상도 아니야.”
하나 이훤은 수레에 눕혀 놓은 종초홍을 일별한 후 말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별 일 없겠어.”
“아주 의원이 다 되셨네. 나중에 종 형이 깨어나면 다 말할 겁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종 형이었냐? 둘이 내기해서 네가 형이 됐다며?”
이훤의 물음에 탈마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냥 죽어가는 걸 보니 내가 너무 매정하게 대했나 하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칠대괴마는 못 되어도 나이 대우는 해줄 수 있지 않겠나 싶더라고요.”
“그래서 앞으로도 형이라고 부르게?”
탈마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죽을 줄 알고 그랬던 거죠.”
하나 그 순간 죽은 듯이 누워 있던 종초홍이 힘없이 한 마디를 남겼다.
“다 들었어. 그러니 지난 번 내기는 무효야.”
탈마는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이내 이훤을 노려봤다.
“형님이 깨웠죠? 일부러 그 얘기도 꺼냈고!”
이훤은 딴청을 피웠다.
탈마는 그래도 종초홍이 정신을 차리자, 반가웠나 보다. 종초홍이 빙긋 웃으며 팔을 들자, 탈마는 못이기는 척 손을 맞잡으려 했다. 하나 종초홍은 천천히 손가락을 접더니 검지만 펼친 채 수레의 구석을 가리켰다.
“동생, 술 좀 줘봐.”
탈마는 내민 손을 황급히 거둔 후 혀를 찼다.
“내가 왜 당신 동생이야? 미쳤네. 미쳤어. 정상이 없어. 형님! 우리는 화산으로 가야 하니 호적수인 무당의 제자와 동행할 수는 없지요. 그러니 그냥 버리고 갑시다!”
이훤은 키득거리며 노새를 몰았다.
“크큭! 호적수니까 데리고 가서 화산연맹의 위대함을 맛보게 해줘야지.”
*
종초홍이 연맹의 위대함을 맛보기 전에 시음(試飮)을 한 자들이 있었다.
바로 화산연맹의 수뇌부였다.
그들은 매일 같이 날아드는 전서구로 인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한중회의 회주와 부회주가 참석을 확정했네.”
광녕종의 종주인 서화종이 기분 좋은 한 마디를 건네자, 이대제자인 소요자가 벽에 이름을 적어 넣었다. 커다란 벽에 적힌 귀빈의 이름은 이미 백여 명을 넘은 지 오래였다.
하나 한중회(漢中會)라는 말에 수뇌부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섬서성 서남부에 위치한 한중회는 상인들의 연합이다. 그리고 그들은 섬서성과 인접한 감숙성과 사천성의 상인들을 중개했다. 한 마디로 섬서성에서 가장 큰 돈을 만지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지난 십 년 간 강호방파의 행사에 기부는 할지언정 모조리 불참했다.
“광풍단도 온다는군요.”
“그들은 정사지간이 아닌가?”
“하나 장성 인근의 마적 떼를 소탕한 것도 사실이지요.”
광풍단은 중견 방파였지만, 매일 같이 외적들과 혈투를 벌였다. 그러니 섬서성 내에서 실전 경험만 따지자면 겨룰 자가 없었다.
“아!”
화산연맹의 맹주로 내정된 관윤종의 종주, 서평이 탄성을 흘렸다.
“어디요? 어디기에 그렇게 놀라셨소?”
성격 급한 진박종주가 물었다.
서평은 심호흡을 한 후 전서응을 통해 전해진 서찰을 펼쳤다. 서화종과 태극관주는 물론이고, 대전에 모인 이들이 모두 환호성을 내질렀다. 서찰의 마지막에는 무림맹주의 직인이 선명하게 찍혔기 때문이다.
“무림맹에서 화산연맹의 중추절 발족식을 허가했소. 무림대회의를 중추절 이후로 미루겠다니 이제 우리의 역량에 모든 것이 달렸소이다!”
수뇌부는 이제야 이훤의 속내를 알아차렸다.
화산연맹은 그들의 예상보다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았고, 우호적인 시선을 끌어냈다. 화산의 퍼져 있던 오래된 도관들의 연합이라는 것에 누가 토를 달 수 있겠는가. 강호의 노회한 고수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이제 수뇌부들은 어깨를 펼 수 있었다.
한데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거기에 만매만전이 더해졌다.
망아취자가 만들었고, 이훤이 알린 만매만전은 이미 섬서성 내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로 인해 삶이 바뀐 사람만 해도 헤아리지 못할 지경이다. 그런 곳에서 축하할 일이 있다니 섬서성 밖의 문파들도 앞다투어 참석을 알렸다.
“역시 취선관주의 위명은 어마어마하군요.”
서화종이 휘파람을 불며 서찰을 내밀었다.
무당파의 직인이 찍혔고, 그 다음 장에는 제갈세가의 이름도 적혔다.
“하하, 그 콧대 높은 무당과 제갈이 먼저 움직이다니!”
하나 즐거움도 잠시였고, 이내 태극관주가 헛바람을 들이킨 후 말했다.
“이거 너무 큰 덩어리가 오겠다는 군요.”
그가 내민 서찰에는 남궁세가의 상징과 더불어 창무검제 남궁채린의 참석을 허락해달라는 정중한 요청까지 적혀 있었다.
“산동악가에서 창무검제와 부딪쳤다는 소문이 있던데······.”
“설마 연맹의 발족식에서 남궁세가의 삼인자가 무례를 저지르기야 하겠소이까?”
수뇌부는 남궁채린의 참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논의했다. 그러던 중 이대제자인 유리검 유건평이 굳은 표정으로 들어섰다.
“전서응이 도착했는데 흑응이었습니다.”
수뇌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파 내에서 검은 매를 쓰는 방파가 있던가?”
태극관주가 굳은 분위기를 풀기 위해 농을 건넸다.
“허허, 설마 사파나 마도가 참석하겠다고 전서를 보낸 건 아니겠지요.”
하나 서평이 서찰을 펼쳤을 때 장내의 모든 사람은 한참동안 굳은 표정을 풀지 못했다.
“이거······. 진짜일까요?”
< 58, 천룡(天龍).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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