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마신-139화 (139/226)

< 57, 연회에 칼춤이 빠질 수 없지. (3) >

*

탈마는 죽은 듯이 잠에 빠져든 종초홍을 살펴본 후 돌아왔다.

“형님, 축하드려요.”

“뭐가?”

“아까 병으로 벽을 통째로 날려버렸잖아요.”

이훤은 모르는 척 딴청을 피웠다.

“그게 뭐?”

“종 형을 살리겠다고 그 고생을 하다가 갑자기 그런 걸 할 리가 없잖아요. 형님에게 뭔가 좋은 일이라도 생겨서 시험해본 것 아닙니까?”

눈치 빠른 놈.

확실히 천하제일의 대도가 될 놈은 싹수부터 달랐다.

“그래, 구궁벽력공을 통해 얻어야 할 걸 얻었다.”

“이야! 역시 사람은 좋은 일을 해야 복을 받는 건가.”

“그게 아니지. 나한테 하는 것보다 남을 통해 시험을 해 본 게 주효한 것 같아.

탈마는 입술을 삐죽였다.

“자라나는 동량의 순수함을 더럽히지 말라고요.”

“도둑놈 주제에 순수는 개뿔.”

이훤의 말에 탈마는 두 손을 들고 항복했다.

“네! 악담으로는 형님을 이길 수 없죠.”

“알았으면 술이나 가져와.”

하나 탈마는 술을 가져오는 대신 창밖을 바라봤다.

“해가 졌으니 슬슬 놈들이 오겠네요.”

“훗.”

이훤은 코웃음을 쳤다.

탈마가 걱정하는 무리는 봉황회의 잔당이다.

봉황회주의 고희연을 맞이해 회의 무인들을 불러 모았다. 몸집을 부풀려 성세를 자랑할 좋은 기회가 아닌가. 하나 마교를 위해 요처에 뿌려놓은 핵심 세력은 건제했다. 그리고 그들은 당연하게도 강림혼요술의 영향권 아래 있을 터였다.

“한 덩어리가 되어 기습을 한다면 나야 고맙지.”

등 뒤에 잔당들을 두고 떠나기에는 찝찝했다.

알아서 복수를 천명하고 찾아온다면 두 팔 벌려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물론 두 팔의 끝에는 팔황과 무극이 활성화될 터였다.

“형님과 강호의 일이라면 사실 걱정할 것도 없죠.”

탈마의 시선은 지평선이 아니라 봉황회 밖으로 향했다.

“저건 어쩌려고요?”

창밖은 여전히 불야성이다.

봉황회주의 고희연 때문에 몰려든 군중은 여전했다. 회주가 죽고, 봉황회가 풍비박산 난 상태였다. 하나 불구경과 싸움 구경은 본래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보는 게 사람의 호기심이다.

“알아서 하겠지.”

안으로 들어와서 구경할 만큼 용기 있는 자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니 그냥 두면 알아서 하나둘씩 흩어지지 않을까 싶다.

하나 탈마가 가리킨 건 군중이 아니었다.

현재 봉황회는 백여 명의 군졸에게 포위된 상태였다. 황 도사를 죽이고, 도독부에 말을 전하라 했더니 저것들이 나타났다. 포위만 한 채로 대화를 시도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도독부 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한 듯했다.

“초홍이 회복되는 대로 함께 떠나자.”

이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탈마는 침음을 흘렸다.

“이거 잘못하면 일이 복잡해질 수도 있어요.”

“관부와 대립하는 것 때문에?”

“네. 관과 무림이 물과 기름처럼 서로를 모른 척한다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잖아요. 어쨌든 형님이 어사를 사칭했으니 상부에 알려지면 추포령이 내려질 수도 있어요.”

탈마의 걱정에도 이훤은 여유로웠다.

지금껏 나라에서 추포령을 내렸을 때 잡혀온 무인은 한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애초에 약한 놈은 관부와 대립하지 않고, 강한 놈은 관부에서 잡을 수 없다. 게다가 중원의 땅덩이는 마음만 먹으면 평생 숨을 수 있을 만큼 넓지 않은가.

“연맹.”

이훤은 미간을 좁혔다.

“봉황회에 있던 자들에게 형님의 용모파기를 받아낸 후 퍼트리다보면 화산연맹과 취선관이 거론될 수도 있어요. 그 때 나라에서 화산에게 형님을 요구하면 어쩌실 건데요?”

“흐음.”

“설마 지금 머릿속으로 ‘다 죽여 버릴까?’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는 건 아니겠죠.”

탈마의 일침에 이훤은 헛기침을 했다.

“크흠, 그건 문제가 될 수 있겠네. 지금이라도 도사와 현령들의 죄를 적어서 제출할까?”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주면 봉황회가 이만큼 클 수 있었겠어요?”

“그건 그렇지. 역시 다 죽이는 게······.”

“됐고요. 여기는 제가 없어도 되죠?”

이훤은 탈마의 반문에 입꼬리를 올렸다.

“당연하지.”

“그럼 그쪽은 제가 해결할 게요.”

“역시 내 동생!”

탈마는 피식 웃으며 망루를 내려갔다.

“그것 또한 악담.”

이훤은 탈마를 뒤따르기 전 봉황회의 전각군을 응시했다.

이제 탈마가 빠져나가기 위한 미끼가 될 차례였다.

시선을 끌어야 하니 최대한 화려하게 해 볼 생각이다.

우두둑-

손을 풀면서 망루를 내려갔다.

그리고 망루의 입구에서 심호흡을 했다.

“후우!”

주먹을 말아 쥐는 순간 팔황은 투갑이 됐고, 이내 핏빛과 금빛이 뒤섞였다. 그리고 내력이 담긴 주먹질이 망루의 기둥에 꽂혀들었다.

콰쾅!

나무로 만든 삼 층 높이의 망루였다.

일권을 내지르는 순간 하단부가 산산조각 났다.

이훤은 망루가 굉음을 내며 무너지는 사이 다른 곳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석조건물이다. 봉황회의 요인들이 거처로 사용하는 장소였다. 안에 온갖 귀물이 즐비하겠지만, 주먹은 여지없이 기둥을 강타했다.

쾅!

기둥이 움푹 파이며 산산이 흩어졌다.

하나 건물의 특성 상 한 방에 무너트리는 건 불가능했다.

‘이런 일에 힘을 빼기도 그렇고.’

이훤은 기둥마다 주먹질을 해서 건물을 허물어트렸다. 그렇게 혈륜이 번뜩일 때마다 종초홍이 요양하고 있는 건물 주변의 전각군은 모조리 자취를 감췄다.

콰콰쾅!

*

청무백(靑務伯) 조일권은 황족이다.

하여 도독부의 삼인자인 도독첨사가 됐다.

도독부가 사천과 중경, 귀주를 관장하기에 도독은 변경이라 할 수 있는 사천에서 머물렀다. 하여 수하인 도독첨사를 중경에 파견하여 다스리게 했다.

가히 중경의 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하지만 청무백은 관료로서 평범했다.

적당히 뇌물을 받고, 적당히 풍류를 즐기며, 적당히 보신을 하려 했고, 적당히 게을렀다. 그저 중경에서 죽을 때까지 머물 수 있으면 족하다고 여겼다.

그런 그에게 황 도사는 좋은 수족이었다.

많은 일을 알아서 처리했고, 많은 돈을 알아서 챙겨줬으며, 많은 문제를 아무도 모르게 해결했다.

하여 그를 입안의 혀처럼 아끼고, 밀어줬다.

한데 지금은 그가 입안의 가시처럼 여겨졌다.

‘어사가 등장하고, 봉황회가 풍비박산이 나고, 황 도사의 목이 잘렸다니······.’

생각만으로도 정신이 혼미했다.

일개 어사였다면 벌써 추살대를 보냈으리라.

하지만 중경에서 살아온 청무백은 봉황회의 위세가 어느 정도인지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그런 봉황회를 홀로 무너트렸단다. 아무래도 단순한 어사가 아니라 황실의 무공을 익힌 대내무관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아니, 애초에 대내무관이 그렇게 강할 리 없다.

아무래도 황제가 따로 키워낸 숨은 고수일 가능성도 존재했다.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없는.’

그는 지금껏 수하들과 쉬지도 않고 회의를 이어갔다. 기껏 해야 백여 명의 군졸을 보내서 포위를 하게 한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결국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처소로 돌아와야 했다.

‘말년에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감찰어사는 황제와 독대하여 보고를 할 만큼 위세가 대단한 존재였다. 그가 황제에게 중경의 부패한 관리들을 고발한다고 생각하니 술을 마시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하아.”

그때 나지막한 한 마디가 들려왔다.

“고민이 많으시군요.”

청무백은 화들짝 놀라며 검을 뽑으려 했다.

하나 장식용으로 차고 다니는 검을 관리했을 리 만무하니 제대로 뽑히지도 않았다.

“헙!”

다행히 의문의 상대는 의심스러운 행동을 하는 대신 포권을 했다. 달빛이 뒤에서 비치는 바람에 역광이 생겨 얼굴을 제대로 확인하기 힘들었다.

그는 자신의 정체를 말이 아닌 물품으로 행했다.

청무백은 상대가 내놓은 명패를 확인하고는 침음을 흘렸다.

“헛! 감찰어사.”

어사는 조금 더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저 때문에 첨사께서 귀찮아하실 것이라 생각되었습니다. 하여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청무백은 평범한 관료였다.

그렇기에 관료들의 대화에 익숙했다.

상대의 배려를 느끼는 순간 종 2품 도독첨사의 권위가 자연스럽게 살아났다.

“크흠! 봉황회에서 큰일을 벌였다지?”

“적도의 무리가 너무 많아서 단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만 첨사께 미리 허가를 받지 못한 점에 대해서는 송구한 마음뿐입니다.”

청무백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상대가 먼저 저자세로 나오니 목소리가 한층 누그러졌고, 이내 입가에 미소까지 드리웠다.

“나랏일을 하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 그래, 황 도사라는 자가 그렇게 큰 죄를 저질렀다고?”

어사는 절을 할 듯 상체를 숙인 후 말했다.

“첨사께서 산을 보시는 사이 미천한 자가 나무를 좀 베었더군요. 본래 아랫것들은 주인 모르게 이런저런 일을 하기 마련이지요. 놈의 죄는 첨사께서 조사하시면 바로 드러날 것입니다.”

허가 없이 나라의 관리를 죽였으면서 당장 증거를 내놓지 않는 기이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청무백은 만족했다.

어사는 황 도사와 청무백을 별개로 보았고, 죄도 알아서 조사하라며 칼자루를 넘겼다. 그 말인즉슨 청무백이 원하는 대로 상황을 정리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닌가.

‘클클, 어사라고 해서 뻣뻣한 자일 줄 알았거늘.’

하긴 생각해보면 저들이라고 해서 평생 어사만 하는 건 아니었다. 승진도 하고, 좌천도 하면서 조금씩 신분이 바뀌기 마련이다.

“크흠, 무슨 말인지 알겠네. 한데 이 늦은 시간에 본 첨사의 처소를 허락도 없이 난입한 죄는 어찌 설명하시려는가?”

어사가 슬쩍 비켜섰다.

그 자리에는 두 개의 궤짝이 놓여 있었고, 뚜껑을 슬쩍 열었다가 닫는 사이에 금빛이 번쩍였다.

“적도의 수괴에서 압류한 물품입니다.”

청무백은 조금 전까지의 혼미함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듯했다. 오히려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기에 그는 만족한 관리가 그러하듯 너그러움을 드러냈다.

“고생했군. 자네의 이름이 무엇인가? 차후 황도에서 좋은 인연이 될 것이야.”

끌어주겠다는 의미였다.

하나 어사는 정중하게 예를 표한 후 말했다.

“어사의 본명은 쉬이 밝힐 수 없으니 유념해 주십시오.”

청무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했다.

섣불리 이름을 남겼다가 추후 조사가 들어온다면 위증의 소지가 될 수도 있지 않은가. 상대가 어사만 아니었다면 황 도사를 대신해 수족으로 삼고 싶을 정도였다.

“알았네. 다만 오늘의 인연은 잊지 않겠네.”

어사는 아예 대례를 올리며 말했다.

“첨사의 강녕함을 빌겠나이다.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뒷걸음질을 치더니 창문을 넘어 자취를 감췄다.

“후우.”

청무백은 빙긋 웃은 후 밖을 향해 외쳤다.

“술상을 내오너라! 한 잔 해야겠다!”

“나라 꼴 잘 돌아간다.”

탈마는 도독부를 벗어난 후 어사의 명패를 산산조각 냈다. 이제 도독첨사는 봉황회의 일을 제 입맛에 맞게 봉합할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사에 대한 이야기는 절묘하게 사라질 것이 분명했다.

“너도 고생했다.”

그는 품에서 두 권의 서책을 꺼낸 후 양 손으로 잡았다. 하오문 중경 지부와 무림맹 중경 지부에서 훔쳐온 도독부의 정보였다. 그로 인해 도독부의 실권자인 첨사의 성정을 파악했고,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이제 쓸모를 다한 두 권의 서책은 양 손을 비비는 순간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하아.”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비라도 오려는지 먹구름이 가득했다.

누군가를 기습하기에는 참으로 좋은 날씨였다.

아마 봉황회의 잔당은 이 순간을 놓치지 않으리라.

하나 탈마는 주루에서 술을 고르느라 여념이 없었다.

“어떤 술을 사가야 형님이 좋아하시려나?”

*

봉황회주의 비천십이경이 내부를 지킨다면 봉황칠익(鳳凰七翼)은 봉황호 주변에서 퍼져서 권속들을 다스렸다. 그리고 봉황칠익은 강림혼요술에 심신을 사로잡힌 자들이 분명했다. 그러니 주인이 죽었다고 곧장 수하들을 이끌고 봉황회로 달려왔으리라.

“텅 비었군.”

“굉천뢰라도 터트렸나? 전각이 모두 무너졌어.”

“하나가 멀쩡하지 않은가.”

“저기 있겠군.”

“가자!”

봉황칠익을 선두로 백수십 명의 무인들이 복면을 한 채 난입했다.

“왔냐?”

취기가 가득한 목소리에 잔당들이 걸음을 멈췄다.

친구를 부르는 것처럼 정다운 목소리였지만, 어딘가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네 놈이 회주를 죽였구나!”

봉황칠익은 대청에서 홀로 술을 마시는 이훤에게 삿대질을 했다.

이훤은 눈을 반개하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다행이네.”

“무슨 소리냐?”

봉황칠익은 한순간 이훤이 주사를 부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나 그들은 이훤을 중심으로 일어난 기사(奇事)에 말을 잇지 못했고, 눈만 부릅떴다.

“헉!”

이훤을 중심으로 주인을 잃은 검이 떠올랐다.

그것도 한 개가 아니라 백여 개가 넘는 검이었다.

“백스물일곱 명이면 부족하지 않겠구나.”

< 57, 연회에 칼춤이 빠질 수 없지. (3)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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