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 연회에 칼춤이 빠질 수 없지. (2) >
*
종초홍은 온갖 고신을 당해 넝마가 된 상황에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이훤이 올 줄 몰랐음에도 너스레를 떨 정도였다.
“새끼, 술타령을 하는 걸 보니 아직 죽을 정도는 아닌가보네.”
“불사주귀라 불리는데 불사는 못 할 것 같고, 주귀라도 해야 하지 않겠소?”
한 마디를 하면서 세 번이나 피를 토했다.
피를 머금어 탁하게 변한 눈동자가 조금씩 원래의 빛을 찾았다. 탈마의 말처럼 생기가 다하여 죽기 직전 회광반조의 단계에 접어든 듯했다.
“술 있냐?”
탈마가 슬쩍 술병을 건넸다.
아무래도 종초홍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음을 알고 미리 준비했으리라. 정상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이라면 종초홍에게 술을 주지 않을 것이다. 하나 준비한 탈마도, 그걸 받아 건넨 이훤도, 그리고 입맛을 다시며 술병을 기울이는 종초홍도 정상이 아니었다.
“크헉!”
종초홍은 한 모금의 술도 제대로 마시지 못했다.
흘리는 게 태반이다.
하나 그는 뭐가 그리 좋은 지 한 숨을 내쉬었다.
“하아.”
아마 술보다 이훤을 만났다는 것에 안도했으리라.
아니나 다를까 말라붙은 목을 축이자마자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가기 전에 만나서 다행이오. 그리고 조매는 없지만, 술은 그때보다 더 좋았고. 이곳까지 온 것을 보면 봉황회주는 정리했나 보오?”
이훤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종초홍은 쓴웃음을 지었다.
“형님을 보면 참 쉬운데. 난 왜 이렇게 어려운지 모르겠소. 무당의 직전제자로 부러운 것 없이 대강남북을 종횡했거늘 형님을 만난 이후로는 부족한 것투성이외다. 이번에야 말로 내가 형님에게 먼저 천룡전의 정보를 전해주고 싶었는데······.”
그가 다시 몇 번의 토악질을 반복했다.
“말하지 마라.”
“클클, 말 할 거요. 그래도 내가 이곳을 조사하면서 알아낸 것이 있으니까.”
그럴 필요가 없음을 말하고 싶었다.
이미 봉황회주를 통해 알아낼 만한 건 죄다 파악한 후였다. 하나 종초홍이 마지막 심력을 불태우려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봉황회주는 형님이 알려준 천룡전의 감각사도와 달랐소. 그들은 모두 명산이나 명가의 근처에서 음모를 획책했거늘 중경은 아무 것도 없지 않소이까?”
그게 조금은 이상했다.
봉황회주는 감각사도다.
그러니 절명곡의 생존자들 근처에서 신마의 심득을 얻어내기 위해 힘써야 했다. 그것이 감각사도의 사명이며, 살아갈 목표가 아니던가. 한데 그는 중경의 왕으로 군림하며 이 생활을 즐기는 듯했다. 여타의 감각사도에게서는 보지 못했던 행위였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니 계속 이상하더이다. 왜 저 새끼가 여기에 터를 잡았을까?”
“무언가를 찾았냐?”
큰 기대 없는 질문이었다.
하나 대답은 상상을 초월했다.
“찾았소. 마교요.”
이훤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미 마교는 칠십 년 전 정마대전에서 패배한 후 신강 반대편으로 사라지지 않았던가. 정과 마는 당시의 전투로 극복하기 힘들만큼 큰 피해를 입었다. 하여 혹자는 신마가 날뛸 수 있었던 이유를 정마대전의 폐해에서 찾기도 했다.
종초홍은 이훤의 표정이 마음에 들었는지 히죽 웃었다.
“형님 표정을 보아하니 내가 헛수고를 한 건 아닌 것 같소. 정마대전 이후 신강으로 주력이 도주했고, 강남에서 싸우던 마교의 잔당들은 갈 길을 잃었지. 하여 그들은 무림맹을 피해 남쪽으로 사라졌소.”
탈마가 탄성을 흘렸다.
“설마!”
“맞아. 십만대산이다.”
십만대산(十萬大山)은 남해와 맞닿은 광동성과 광서성을 통째로 가로지를 만큼 거대한 산맥을 일컫는다. 고래로부터 중원의 모든 권력자들이 탐을 냈지만, 누구도 발을 들이지 못했던 오지(奧地)였다.
하여 천산(天山)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본래 마교는 장성 북쪽의 천산산맥에서 발호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마교의 잔당들은 십만대산을 제 2의 천산이라고 여겼으리라.
‘만약 마교의 잔당들이 다시 발호한다면?’
십만대산에서 중원으로 나오기 위한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호남성의 동정호를 통해 장강에 이르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귀주와 중경을 거쳐 중원에 이르는 것이다.
전자는 수많은 무림방파를 거친 후에야 구파오가와 접촉할 수 있고, 후자는 아무도 모르게 중원에 들어와 곧장 무림맹을 타격하는 것이 가능했다.
‘후자겠지.’
마교처럼 음험한 자들이라면 중소방파와 싸우는 사이에 무림맹이 집결할 시간을 주지 않을 터였다.
이훤은 생각을 정리한 후 말을 건넸다.
“그렇다면 봉황회주는 신마의 심득에 관여하지 않고, 십만대산의 잔당들을 견제했다는 게냐?”
종초홍은 탄식했다.
“그것까지는 알 수 없소. 봉황회가 아무리 대단해도 마교의 잔당을 홀로 감당할 정도는 아니지. 하나 봉황호의 수원이 광서성과 연결이 되니 그들을 감시하기에는 요처라고 할 수 있소. 혹은 천룡전 자체가 십만대산의 마교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도 버릴 수 없죠. 그렇게 되면 봉황회는 마교의 전초기지일 테고요.”
어느 쪽이라고 해도 이제 봉황회에서 느꼈던 모든 위화감이 해소되는 듯했다.
“형님. 무림맹에도 적이 있다면 마교에도 적이 있을 수 있소. 아니, 드러나지 않았을 뿐 중원 어디에나 놈들이 숨어 있다고 봐야 할지도 모른다오.”
“다 죽이면 돼.”
종초홍은 축 늘어졌다.
“후우, 그건 선계에서 느긋하게 지켜보리다.”
“도인이라도 누구나 선계에 가는 건 아니다.”
“인연이 깊지는 않았으나, 형님으로 모시기로 했잖소. 그러니 가는 길에 덕담이라도 해주쇼.”
녀석은 그 말을 끝으로 눈을 감았다.
마지막 생의 불꽃의 꺼져가는 듯했다.
“하아.”
이훤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의술이라도 익혔다면 어떻게라도 해줬을 텐데.
반덕구의 죽음 이후 어쩌면 처음 마주하는 지인의 죽음이다. 종초홍과의 인연은 처음 만남에 비해 생각보다 깊어지지 않았다. 하나 회귀 전의 경험으로 미뤄봤을 때 믿을 만한 자였다. 그렇기에 인연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래서 살릴 수만 있다면 살리고 싶었다.
‘내 탓인가?’
무엇보다 종초홍은 비선각 부각주를 지나 무당파의 차기 장문인이 될 호협이 아니었던가. 장차 불사검협이라 불리며 정파 무림을 인도할 영웅이었다. 한데 그래야 했던 그가 자신으로 인해 운명이 바뀐 듯했다.
‘씨발.’
심란하고, 답답하고, 짜증이 났다.
하나 속이 터지는 상황에서도 할 수 있는 건 하나 밖에 없었다.
“한 잔 더 해라.”
종초홍은 눈을 감은 상태에서 쿨럭였다.
“크큭, 그런 덕담이라면 언제나 환영이죠!”
이훤은 종초홍이 떨어트린 술병을 들었다. 그리고 그의 상체를 부축하여 술병을 가져다 댔다. 하나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은 사람에게 술을 주기는커녕 눈을 가늘게 떴다.
종초홍도 탈마도 그것을 장난이라도 생각하지 않았다.
이훤은 술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사람이 아니다.
아니나다를까 밝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야. 너, 고신만 당했네.”
종초홍은 미간을 좁혔다.
“그게 무슨 소리요?”
이훤의 입매가 점차 호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새끼, 혈맥이랑 혈도가 멀쩡하잖아. 단전도 내력이 금제됐을 뿐 그대로야.”
탈마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럼 몸뚱이만 고신을 당했다는 거잖아요. 아니! 세상에 어떤 무식한 새끼들이 고신을 이렇게 해? 보통은 독도 퍼붓고, 단전도 깨고, 근맥도 자르고 그러잖아!”
종초홍은 두 사람의 대화에서 핵심을 찾지 못했다.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 혈맥이 멀쩡하면 무엇하고, 혈도가 멀쩡하면 무엇 하나. 피를 쏟고, 살이 찢고, 뼈가 모조리 부러진 상태였다. 게다가 더러운 뇌옥에 버려진 것 때문에 온갖 벌레가 썩은 살을 파고들었다.
“형님! 구궁벽력공으로 할 수 있는 거죠?”
이훤은 탈마의 물음에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야! 내가 너한테 그림 좀 그리자.”
종초홍은 한 숨을 흘렸다.
“둘 다 미친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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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궁벽력공은 인체를 지형으로 삼아 진법을 설치하는 것으로 위력을 발휘한다. 그러니 종초홍의 죽어가는 땅에 돌과 나무를 새로 배치하여 진법을 설치한 후 생문을 개방하면 활기가 스며들 터였다.
여기서 천공혈륜겁이 중요했다.
혈륜은 육신의 단련을 극대화한 후 심력과의 조화를 꾀하지 않던가. 쉽게 말하면 혈륜을 제대로 주입할 수 있는 환경만 만든다면 죽은 놈을 살리지는 못해도, 죽어가는 놈을 살리는 건 가능하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이곳에는 천공혈륜겁과 구궁벽력공을 동시에 익힌 사람이 존재했다.
“하지만 전제 조건이 있다.”
바로 종초홍이다.
그는 한평생 무당파의 제자로 살았고, 무당파의 무공을 익혔다. 그러니 그의 혈도와 혈맥은 무당파 무공에 맞춰서 성장한 것이 당연했다.
그것을 외인인 이훤이 파악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네가 익힌 무공의 구결과 수련 방식이 필요해.”
“그럼 산다는 거요?”
“그래.”
종초홍은 꽉 막힌 정파의 무인이 나이었다.
협행을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음모와 협잡, 그리고 거래까지 용인했다. 이훤이 직접 개미굴에서 겪었고, 그 후에도 몇 번이나 공조를 하면서 확인하지 않았던가. 하여 종초홍이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럼 살아야죠.”
그래도 명가의 제자랍시고 명분을 찾는다.
“비인부전이라. 형님의 행적을 직접 지켜본 저는 믿습니다. 당신이 무당의 무학을 엿본다고 해서 악용하지 않을 것을 말입니다.”
그건 장담할 수 없는데.
다행히 종초홍은 이훤에게 확답을 요구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의 입에서 강호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무당파의 무공이 구결로 전해졌다.
“좋아. 혈륜을 주입하면서 헷갈리는 걸 물어볼 테니 정신 똑바로 차려라.”
본래 운기조식을 할 때에는 눈과 입을 닫는다.
내부의 기운이 외부로 흘러나가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하나 이훤의 무위라면 종초홍이 허락하는 한 얼마든지 내력이 반출되는 것을 막아내는 것이 가능했다.
“정광에 반하여 음양이 돌고 도니 이것은 곧 백회와 명문을 통해 태극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다.”
이훤은 종초홍의 정수리와 등에 손을 붙인 후 천공혈륜겁을 끌어올렸다.
“네 몸의 기경팔맥을 벽으로 삼고, 혈도에 망루를 지을 것이다! 철옹성 같은 요새를 만든 후 마지막에 이르러 문을 열 것이야. 그 때 너는 다시 내 동생이 될 것이다.”
이훤은 웃었고, 종초홍은 비명을 내질렀다.
“하하하하!”
“으아아악!”
탈마는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뇌옥 밖으로 움직였다.
양 손에 쥔 소천뢰는 언제든지 던질 준비가 되었다.
여차하면 뇌옥의 입구 전체를 무너트릴 요량이다.
탈마는 유례가 없을 만큼 진지한 표정을 뇌옥의 입구를 노려봤다.
‘형님의 무위면 만근의 바위도 밀어낸 후 탈출할 수 있으리라!’
이훤은 종초홍의 몸에 기어코 요새를 완성했다.
이제 종초홍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반복하여 수련한 초식에 대한 습득력이 상승할 터였다. 또한 갑작스런 상황에 반사적으로 대응할 때의 위력 또한 전과 비교할 수 없으리라. 또한 어지간한 반탄력은 요새의 벽을 뚫을 수 없으니 그냥 흘려보내는 것도 가능했다.
한 마디로 벽력창 악재가 가솔들에게 해줬던 탈태환골에 준하는 기연을 얻은 셈이다.
‘이 정도면 진짜 개처럼 부려먹어도 될 것이야!’
한데 어느 순간부터 잡념이 사라졌다.
바로 요새를 만든 후 문을 만드는 순간이었다.
천공혈륜겁을 모조리 끌어내 혈륜을 요새에 쑤셔 박는 순간 눈앞에 환영이 보이는 듯했다.
‘아!’
반투명한 그림이었다.
마치 귀신이 허공에서 너울거리듯 뒤가 훤히 보이는 그림이 종초홍의 몸뚱이에 덧씌워졌다. 자세히 살피니 머릿속으로 연상하며 종초홍의 몸뚱이에 새겨넣던 요새의 전경이다. 혈륜을 주입하여 벽을 튼튼히 하고, 망루를 높게 쌓을 때마다 그림이 선명해졌다.
상상만 하던 것이 눈앞에 구현된 셈이다.
‘이것은 무엇인가?’
회귀 전에도 회귀 후에도 전무후무한 상황이다.
그렇다면 이것이야 말로 천공혈륜겁의 구 성에서만 마주할 수 있는 광경이 아닐까 싶었다.
‘악재의 심득이 이제야 빛을 보는 구나!’
이제 종초홍의 육신은 안정되어 생사의 고비를 넘겼다.
하나 이훤은 여전히 환영과 마주했다. 하여 종초홍을 밀어내고 환영을 바라봤다.
“크헉!”
종초홍은 죽은 피를 한 움큼이나 토해낸 후 앞으로 나자빠졌다. 제가 내뱉은 토사물에 얼굴을 박았지만, 죽지는 않으리라. 그렇기에 이훤의 시선은 종초홍의 정수리와 등을 짚고 있던 손끝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손끝에서 흘러나온 붉은 선이 사방으로 연결됐다.
사람과 물건을 가리지 않았다.
마치 이훤을 중심으로 살아 있는 진법이 설치된 듯했다. 그리고 그가 의도하는 순간 저 멀리 떨어져 있던 술병이 두둥실 떠올랐다.
‘이건 허공섭물이 아니다.’
단순히 물건을 드는 것이 아니라 힘을 부여했다.
손을 움직이지 않아도 마음먹는 순간 술병이 튕겨나가더니 벽 전체를 무너트렸다.
콰콰콰콰쾅!
이훤은 뇌옥 밖으로 보이는 달을 보며 웃었다.
‘회귀 전의 나를 뛰어넘었다.’
< 57, 연회에 칼춤이 빠질 수 없지.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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