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 연회에 칼춤이 빠질 수 없지. >
57, 연회에 칼춤이 빠질 수 없지.
복운소는 어린 시절부터 동량(棟樑)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또래에 비견할 자가 없으니 여러 무관에서 제자로 받아들이려고 했을 정도였다. 돈을 가장 많이 주는 무관의 제자가 된 후 무공에 입문했다. 인근에 소문이 자자한 기재답게 무관의 무공을 빠르게 익혔다. 몇 년 지나지 않아 관주조차 서너 합 안에 이기는 것이 가능했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관을 떠났다.
그리고 사천성에서 독보적인 위명을 자랑하는 청성파의 문을 두드렸다. 치밀하고, 음험한 성격답게 돈을 밝히던 과거를 지우고, 훌륭한 도가의 제자처럼 행동했다.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절정의 반열에 올랐다.
후기지수들과 어울리면서 깨우쳤다.
사문의 배분은 넘어설 수 없고, 느지막이 입문한 그에게 상승 무학은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결국 사문의 비급을 훔쳐 도주했다.
몇 년 동안 산속에 숨어서 비급을 익혔고, 초절정에 근접한 고수가 되었다. 하산 후 몇 년 간 무명과 악명을 날리던 중 천무재 초륜강을 만났다.
일패도지(一敗塗地)한 후 손발을 자처했다.
초절정을 넘어선 초륜강은 그에게 돈과 무공을 아낌없이 베풀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는 어린 시절 숨겨뒀던 본성을 드러내 마음껏 악행을 저질렀다. 타고난 눈치로 초륜강의 속내를 기가 막히게 눈치 챘고, 봉황회의 기틀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중경의 왕, 봉황회.
그러니 총관인 복운소는 승상 정도 되지 않을까 간혹 히죽거리곤 했다. 하나 악행이 쌓일수록 불안함은 배가 됐고, 가끔 잠들기 전에는 자신의 최후를 그려봤을 정도였다.
하나 그 어떤 최후도 이렇지는 않았다.
“아흑!”
이훤이 내리친 술병에 얻어맞는 순간 눈앞에 별이 반짝였다. 두 눈은 찢어질 것처럼 커졌고, 머리의 피가 온통 눈에 쏠리는 듯했다. 술병이 정수리의 백회혈을 강타하는 순간 전신의 혈도가 갈가리 찢긴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한데 병은 깨지지 않았다.
그저 머리가 깨졌을 뿐이다.
“너.”
맹수가 울부짖듯 한껏 흉악한 표정을 짓는 순간 술병의 주둥이가 입안에 쑤셔 박혔다. 미처 검을 뽑기도 전에 무언가 턱을 강타했다. 턱뼈가 으스러지고, 치아와 살점이 뭉개졌으며, 하관 전체가 붕괴된 것처럼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아흐흐흐흐.”
스스로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할 괴성이 흘러나오는 순간 황금빛 덩어리가 안면을 강타했다.
콰직!
이훤은 얼굴 전체가 호박처럼 터져버린 총관을 발로 걷어차며 외쳤다.
“자! 이제 암행어사가 출두하실 차례다!”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훤은 연회장 밖에 구름처럼 모여든 군중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십여 개의 지풍이 폭사되더니 땅을 파헤쳤다.
파파파파파파파팟!
“봉황회와 관련이 없다면 넘지 마라!”
그가 돌아섰을 때 무림맹 중경지부장이 눈을 빠르게 끔뻑이며 삿대질을 했다.
“다, 다, 당신!”
이훤의 신형이 흩어졌다.
한순간 넓은 탁자를 지나 지부장의 면전에 이르렀다.
“무림맹의 법규를 어겼으니 노인네들도 나를 탓할 수 없으리라!”
팔황을 길게 뽑아내는 순간 팔목에 엉켜 있던 쇳덩이가 금빛으로 물들며 잔영을 남겼다. 황금빛 잔영이 흩어지는 것과 함께 지부장의 목이 허공을 날았다.
“지부장!”
“놈! 무림맹에서 직접 임명한 지부장을 죽이고도 무사할 성 싶더냐?”
이훤은 코웃음을 쳤다.
“맹에서 원하는 건 협과 의요, 측은지심이다! 약자를 수탈하는 광경에도 술이나 처마시는 너희들을 누가 그리워하랴!”
탁자를 걷어찬 후 허공으로 솟구친 접시와 수저를 가리지 않고 튕겨냈다. 탄지공인 절혼지를 물건으로 펼치는 것이니 우습게 봤다가는 큰일이 날 터였다. 물론 우습게보지 않았음에도 지부장과 함께 연회에 참석한 무림맹의 맹도들은 모조리 몸에 구멍이 뚫린 채 나뒹굴었다.
“하아.”
이훤은 바닥에 나뒹구는 술병을 들어 마셨다.
확실히 나쁜 사람보다는 좋은 사람 흉내를 낼 때 기분이 좋았다. 그런 그의 눈에 실금을 한 채 주저앉아 있는 황 도사가 보였다.
“어, 어사.”
“각 성의 치안을 관장해야 할 도사가 양민의 땅을 빼앗는 짓이나 돕고 있으니······.”
죽으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놈이 거품을 물었다.
촤악!
하여 놈이 뒤로 넘어가기 전에 목을 쳐버렸다.
그리고 한순간 벌어진 참극에 넋이 나간 현령들도 모조리 목을 벴다.
“쓰레기들은 다 같이 지옥으로 꺼져라!”
행정과 치안의 공백?
이런 놈들이 없다면 더 좋지 않을까 싶다.
이훤은 상석에 모여 있던 관리와 무인, 부호들마저 모조리 정리한 후 돌아섰다. 그곳에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미동조차 하지 않는 봉황회주가 보였다.
“화났냐?”
봉황회주의 얼굴은 악귀가 빙의된 것처럼 기이했다.
까무잡잡한 안색에 붉은 기운이 감도니 분노가 극에 달했을 터였다. 어지간한 사람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다리에 힘이 풀리거나, 실금을 했을 것이다.
하나 이훤은 봉황회주의 얼굴을 유심히 살핀 후 입꼬리를 올렸다.
“아! 너희 새끼들은 원래 그 표정이지.”
봉황회주는 총관과 귀빈이 몰살당했음에도 개의치 않았다. 하나 이훤의 조롱 섞인 한 마디에는 벼락을 맞은 것처럼 진저리를 쳤다.
“너!”
그 순간 이훤의 머릿속에 묘책이 떠올랐다.
그는 봉황회주를 질책하듯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아직도 모르는 거냐? 이 새끼가 신마의 심득을 얻어오라고 내보냈더니 시골에서 왕 노릇을 하느라 천룡의 명을 뒷전으로 해?”
동시에 천공혈륜겁을 아낌없이 흩뿌렸다.
쿠쿠쿠쿠쿠쿠쿵!
그것만으로도 지붕이 울리고, 땅이 뒤집힐 것처럼 진동했다.
“네 놈은 정녕 제 얼굴을 찾지 못하고 평생 그 표정으로 살고자 하는 것이더냐!”
내력이 담긴 일갈이 봉황회주의 귀를 파고들었다.
“크흑!”
내상을 입었다기 보다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것은 곧 이훤의 계책이 통했음을 의미할 터였다.
아니나다를까 봉황회주가 노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무미건조한 한 마디를 내뱉었다.
“사신사도인가?”
예기치 못한 한 마디였다.
대충 천룡전에서 봉황회주를 책문하기 위해 나온 수하처럼 보이고자 했다. 한데 아직까지 만난 적이 없는 사신사도(四神使徒)를 거론하는 것이 아닌가.
‘서로 몰라? 아니면 사신사도가 특별한 건가?’
봉황회주는 침음을 흘렸다.
“하긴 광인처럼 제 하고 싶은 대로 할 때부터 알아차렸어야 하는 거였나. 하나 그렇다면 따로 자리를 마련했어도 되는 것이 아닌가? 굳이 비선각의 부각주를 노렸다면 맹에서 처리했어도 되는 일이잖아. 왜 이곳까지 와서······.”
아! 너무 귀를 기울였나 보다.
이훤의 표정을 살피던 봉황회주가 말끝을 흐리더니 이를 갈았다.
“놈! 나를 속였구나!”
계책은 여기까지.
사신사도의 존재와 성향, 그리고 위치까지 파악했다.
이 정도면 원금에 이자까지 두둑하게 받은 셈이다.
이훤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종남파의 그 새끼도 그렇고, 화난 새끼들은 대체적으로 잘 속는구나.”
봉황회주는 검을 늘어트렸다.
천룡전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걸 알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놓인 듯했다.
“흥! 토노를 보았기에 나를 떠볼 수 있었군.”
이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면 다른 놈들은 신마의 심득을 얻기 위해 난리였는데 화난 새끼들은 유독 게으르구나. 천룡이 이걸 알면 얼마나 슬퍼하겠냐.”
“되었다. 천룡전을 알고 있으니 어차피 이 자리에서 죽을 운명인 게다. 그저 얌전히 내 검을 받아라.”
봉황회주의 사형 선고가 떨어지기 무섭게 이훤이 말을 받았다.
“라고 말하던 새끼가 무려 다섯이었다.”
“뭐라?”
“이 새끼가 시골에서 왕 노릇하더니 세상 돌아가는 걸 아예 모르는구나.”
이훤의 조롱에 봉황회주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그리고 이내 괴이한 웃음을 흘리며 노기를 한껏 드러냈다.
“내가 너 같이 하찮은 놈과 말을 섞인 이유를 이제 보여주마!”
그 순간 연회장 바닥이 통째로 뒤집어지며 열두 개의 그림자가 번뜩였다.
파파파파파팟!
봉황회의 핵심 전력으로 널리 알려진 비천십이경(飛天十二鏡)이다. 동일한 무공을 익혔고, 비슷한 체형을 갖췄기에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혼란을 초래했다.
“후우.”
이훤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열두 명이 완벽하게 팔방과 허공을 장악하는 순간 솟구쳤다.
콰쾅!
연회장 바닥이 움푹 파이는 순간 이훤의 신형은 이미 허공을 되찾았다. 허공을 장악하려던 네 명의 무인이 갈가리 찢겨 흩어졌다. 동시에 이훤의 양 손에서 붉은 기운과 금빛 기운이 뒤섞이더니 여덟로 나뉘었다. 각기 암천군림보를 펼치는 순간 여덟 명을 여덟 개의 잔영이 상대했다.
퍼퍼퍼퍼퍼퍽!
그리고 이훤의 진체가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그 순간 여덟 개의 잔영이 뒤늦게 겹쳐지듯 진체에 스며들었다.
콰콰쾅!
연회장 바닥이 뒤집히면서 숨어 있던 자가 피떡이 된 채 솟구쳤다. 그것을 시작으로 기둥에 균열이 갔고, 지붕 전체가 주저앉았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선을 넘었던 자들까지 휩쓸렸을 만큼 엄청난 폭발이었다.
먼지구름이 용권풍처럼 휘몰아쳤다.
하지만 좌우에서 강렬한 기세가 번뜩이더니 먼지구름을 밀어냈다.
“겨우 이걸 하겠다고 대화를 나눈 거야?”
비장의 한 수가 허무하게 사라졌다.
봉황회주의 두 눈썹은 역으로 팔 자를 그렸고, 감각사도가 그러하듯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죽여 버리겠다!”
지금껏 참고 있던 것이 용할 만큼 강렬한 분노를 발산하는 순간 핏빛 기운이 흩뿌려졌다.
촤앙! 촤앙!
이훤은 대답 대신 양 손을 쥐락펴락 했다.
그 순간 팔황과 무극은 길게 늘어져 검이 되었다.
“너한테 물어볼 게 많아.”
봉황회주가 검과 하나가 되어 쇄도했다.
“하지만 대답하지 않겠지.”
검 끝은 고정됐지만, 검기는 수십 개의 다발처럼 제각기 번뜩였다. 삼 장의 거리가 한순간에 좁혀졌고, 수십 개의 검기는 이훤의 몸 전체를 과녁으로 삼았다.
“죽어라!”
천무재라는 별호답게 한 번의 검격에도 서너 개의 무공에서나 볼 법한 묘리가 담겼다. 하여 수십 개의 검기가 허초처럼 사방으로 흩어지더니 강기가 중앙에서 쇄도했다.
쇄애애액!
이훤은 혈륜을 몸에 두른 상태에서 상체만 비틀었다.
봉황회주의 강기가 허무할 정도로 몸을 스쳐갔다. 기의 여파만 미쳤어도 범인은 칠공에서 피를 토했으리라. 하나 옷깃조차 흩날리지 않았다.
강기(罡氣)란 결국 기의 집합체가 아니던가.
단 한 번의 격돌로 우열이 단박에 드러났다.
심지어 비등함을 넘어 눈에 띌 정도의 우열이었다.
이훤은 무심한 눈빛으로 봉황회주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나 죽을 때까지 맞다 보면 천룡회고, 강림혼요술이고 간에 다 토해내더라.”
팔황과 무극이 금광과 혈광을 동시에 뿜어내며 공간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봉황회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노기는 여전했으나, 그 사이로 고통이라는 생소한 감각이 섞여들었다.
이훤이 봉황회주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너는 아닐 것 같지?”
*
이훤의 기분은 평소와 같았다.
감각사도를 죽이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매번 의미를 둘 필요는 없지 않은가. 최소한 천룡전의 수장인 천룡이나, 불구대천의 원수인 소마 정도는 되어야 기념주를 먹지 않을까 싶다.
“죽을 놈은 죽었고······.”
봉황회주는 다른 감각사도와 다르지 않았다.
결국 처절하게 얻어맞고, 베이고, 찔린 후에야 강림혼요술이 깨졌다. 그리고 놈은 죽기 전에야 저주를 빙자한 유언을 남기고 절명했다.
이제 남은 건 봉황회의 뒤처리였다.
“너희들은 도독부로 가서 사람들을 불러와라.”
이훤은 여전히 넋이 나가 있는 군중에게 명령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자들은 감히 반문하지 못하고, 도독부가 있는 방향으로 뛰었다.
‘어사 놀이는 해봤으니 판관도 한 번 해볼까?’
이곳에는 중경에서 난다 긴다 하는 명사들이 죄다 모여 있지 않은가. 죄지은 놈도 많을 것이고, 억울한 놈은 더 많을 터였다. 하여 자리를 마련하려는 순간 허공에서 탈마가 나타났다.
“형님.”
이훤은 농을 건네려다 탈마의 표정을 보고 말을 아꼈다.
녀석의 표정은 유례가 없을 만큼 굳어 있지 않은가.
“말해.”
“천라옥에서 종초홍을 찾기는 했는데요.”
“그런데?”
이훤이 탈마의 표정을 낯설어했듯 탈마 또한 이훤의 표정이 더없이 낯설었다.
“오래 버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불현 듯 총관이 죽기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 천라옥은 산 자는 내보내지 않습니다.
이훤은 씹어뱉듯이 읊조렸다.
“안내해.”
그리고 잠시 후 천라옥에 들어선 후 장탄식을 토해냈다.
눈앞에는 사람이 아니라 핏빛의 고깃덩이만 널브러져 있었다.
“초홍.”
나직한 부름에 고깃덩이가 더듬거리며 응대를 했다.
“끄으으. 형님, 술 가져왔소?”
< 57, 연회에 칼춤이 빠질 수 없지. > 끝
ⓒ 김태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