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마신-136화 (136/226)

< 56, 암행어사(暗行御士). (2) >

*

한순간 장내가 얼어붙었다.

장강 이남에서 유명한 고수나, 무림맹의 장로가 나타났어도 이처럼 놀라지는 않았으리라. 아닌 말로 천마라도 뚝 떨어지지 않는 한 봉황회의 위세를 누가 뛰어넘겠는가.

반면 감찰어사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존재였다.

마른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진 것과 같았다.

“못 들었느냐? 감찰어사라 했다!”

이훤의 일갈이 재차 터져 나오는 순간 관부의 인물들이 먼저 반응했다. 중경 도독부의 도사에게 아부를 하던 현령들이 무릎걸음으로 뛰쳐나오더니 고개를 조아렸다.

반면 황 도사는 술잔을 든 채 돌이 된 것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어떻게 어사가, 갑자기 이런 곳에······.”

이미 부호와 상인, 양민들은 모두 무릎을 꿇은지 오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어사가 아닌가.

나라의 관제는 중앙과 지방이 다르고, 각 성의 지배를 재량껏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하나 유일하게 중앙과 지방을 통틀어 권세를 자랑하는 집단이 있었다.

도찰원(都察院)이다.

이곳의 역할은 간단했다.

감찰, 평가, 보고.

이들은 황족과 귀족은 물론이고, 각 부의 수장들까지 가리지 않았다. 그 중 정 7품의 감찰어사야 말로 도찰원에서 실제로 감찰을 수행하는 관리였다.

“네 복장을 보아하니 도독부의 도사로구나.”

이훤은 이미 저들의 대화를 엿들었지만, 지금 도착한 척 연기를 했다.

“그, 그렇소. 어사가 온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거늘······.”

황 도사가 종 7품의 도사였으니 두 사람의 직위는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하나 황제에게 직접 감찰에 대한 보고를 할 수 있는 어사와 지역 유지들에게 하사되는 도사를 동급으로 여기는 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놈! 어사가 암행을 하는 건 국법에 정해져 있거늘! 미리 알고 있다면 더 큰 문제가 아니더냐?”

이훤의 일갈에 도사는 자라처럼 목을 움츠렸다.

“또한 네 놈은 도독부의 도사가 아닌가? 한데 어째서 양민의 잔치에 참석한 것도 모자라 상석에서 대우를 받고 있느냐? 당장 아래로 내려오지 못할까!”

황 도사가 황급히 달려 나왔다.

한데 총관이 막아섰다.

봉황회에서 도독부에 뿌린 뇌물만 해도 만금에 이를 터였다. 한데 봉황회와 도독부를 중개하는 황 도사가 꼬리를 말면 지금까지의 모든 뇌물은 헛수고가 되지 않겠는가.

[자중하시오. 그대가 봉황회의 잔치에 참석한 건 죄가 아니외다. 게다가 감찰어사라고 해봤자, 오래 머물 리가 없지 않소이까?]

총관은 황 도사의 앞으로 나선 후 손을 모았다.

“봉황회는 중경의 안녕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관부와 한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일단 감찰어사께서는 먼 길을 오셨으니 상석에 오르시지요.”

이훤은 눈을 가늘게 뜨고 총관을 응시했다.

그가 갖춰 입은 화려한 복장은 봉황회 외곽을 배회하던 시인묵객에서 잠시 빌린 것이다. 감찰어사처럼 보일 만큼 화려한 복장이 즐비했기에 몇 명의 옷을 빌리니 더없이 호화로웠다.

스릉-

그가 검을 뽑았다.

그러자 봉황회주 주변에 있던 무인들은 물론이고, 연회를 돕던 하인들까지 이목을 집중했다. 총관의 명령만 떨어져도 감찰어사를 죽일 자들은 차고 넘쳤다.

하나 이것이야 말로 이훤이 원했던 순간이었다.

지붕에서 나타난 탈마의 신형이 처마 아래로 흘러내리듯 스며들었고, 이내 수많은 무인들의 이목을 피해 내부로 사라졌다. 묘족이라는 미끼를 내세워 일차로 시선을 끌었고,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감찰어사의 흉내까지 냈다.

그 결과 탈마는 아무도 모르게 내부로 잠입했다.

그렇다는 건 더 이상 신경 쓸 일이 없다는 의미였다.

‘좋았어!’

이훤은 탈마가 위조한 감찰어사의 명패를 한껏 활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사내로 태어나 한 번쯤은 대과에 급제하여 만인의 우러름을 받는 고관대작 정도는 한 번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나라에 대한 충성심과는 별개였다.

이훤은 회귀 전에도 관부와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강호에서는 무림공적이지만, 관부에게는 똑같은 강호인이었기 때문이다.

하여 그들의 방식 또한 낯설지 않았다.

그는 검으로 하늘을 겨눈 후 외쳤다.

“이것은 황상께서 친히 내게 하사하신 정의검이다!”

아마 검을 빼앗긴 녀석도 정의검이라는 이름에 만족하리라.

좋은 관리란 이런 것이지.

“금 항아리에 담긴 좋은 술은 만 명의 피일 것이고, 옥 쟁반에 담긴 요리 또한 만 인의 기름이리라. 춤을 추며 흘리는 땀은 양민의 눈물이고, 가희의 노랫소리는 양민의 곡소리가 아니겠는가!”

이훤의 일갈에 관리와 양민들은 하얗게 질렸다.

홀로 의기를 드높이는 광경이야 멋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 동안 봉황회의 일처리를 지켜본 이들이 아닌가. 그들의 머릿속에는 이미 이훤의 몸뚱이가 잘게 갈려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광경이 그려졌다.

“묘족의 일처리 또한 그렇다! 황상께서는 이민족 또한 자식처럼 아끼며 가족처럼 지내라 명하셨거늘 이처럼 강압적인 행위로 땅을 빼앗는다면 어느 양민이 안심하고 살 수 있겠는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풍악과 웃음이 넘치던 연회장이다.

하나 지금은 장례식처럼 고요했다.

아마 누군가 도망치거나 빠져나가면 밑 빠진 독처럼 도망칠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오직 여홍만이 이훤의 등장을 신장의 강림처럼 여기며 기뻐했다. 하늘이 묘족을 불쌍하게 여겨 동아줄을 내려준 것처럼 생각할 터였다. 그러나 공공과 파파는 봉황회의 대응을 짐작하고 말을 잇지 못했다.

‘우리는 물론이고, 묘족 전체가 말살당할 수도 있겠구나.’

이훤의 무위를 모르는 바가 아니다.

하나 묘족들이 불러낸 살수와 봉황회의 정예를 비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닌 말로 봉황회는 회주의 고희연을 계기로 전역에 퍼진 무인들을 불러 모은 상태였다.

“어사의 의기는 참으로 놀랍군요. 그래서 판관의 역할이라도 하실 겁니까?”

총관은 이미 허리춤에 손을 올린 채 물끄러미 이훤을 응시했다. 머릿속에는 이훤을 죽인 후 뒤처리하기 위한 과정을 생각하고 있으리라.

“어사인 내가 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냐?”

이훤의 외침에 총관은 손짓으로 화답했다.

그러자 군중 사이에 섞여 있던 봉황회의 무인들이 개떼처럼 몰려들었다.

흔한 외침조차 없이 살기만 가득했다.

이훤은 가볍게 검을 휘돌린 후 외쳤다.

“봉황회의 수족이 아니라면 엎드려라!”

일갈을 내지른 후 잠깐의 시간만 허락한 상태에서 검을 횡으로 베었다. 그 순간 일어난 놀라운 광경은 삼대에 걸쳐서 우려먹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대단했다.

솨아아아!

한순간 보검의 손잡이에서 피어오른 붉은 기운이 안개처럼 검을 휘감았다. 불꽃처럼, 안개처럼 휘감긴 기운은 이내 검 끝에 갈무리 된 후 폭사됐다.

검이 그어진 궤적 그대로.

촤아아아아악!

탄기(彈氣)가 부채꼴로 펼쳐지는 순간 기세등등하게 달려들던 스무 명의 무인들이 목이 잘렸다. 이것만 봐도 기의 조율이 극에 달한 고수임을 알 수 있었다. 한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정확하게 일장만 뻗어나간 후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재차 몸을 돌려 검 끝을 흔드는 순간 대막의 신기루처럼 공간이 일렁였다.

“크아아악!”

이번에는 비명이라도 터져 나왔다.

이훤이 점거한 공간에 발을 들인 이들은 사지 중 한 곳이 잘려나갔고, 장내는 한순간 피 냄새로 자욱했다.

한 호흡에 썰려나간 자만 사십여 명에 이르렀다.

이쯤 되니 총관도 마냥 여유를 부릴 수 없을 터였다.

“적이다! 쳐라!”

이훤은 그제야 총관을 향해 몸을 돌린 후 근엄한 어투로 말했다.

“이것이 바로 황실의 대천황룡검법이니라!”

멋진 이름을 붙여줬으니 황제도 탓하지 못하리라.

이번에는 밖이 아니라 봉황회 내부에서 적이 쏟아져 나왔다. 이렇게 되면 탈마가 운신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렇기에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적을 환영했다.

환영인사로 검법을 선보였다.

대천황룡검법(代天黃龍劍法)이라는 공명정대한 명칭과는 전혀 상관없이 뇌전과 같은 검기가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벽력창 악재의 구궁벽력공을 받아들인 후 성장한 천공혈륜겁의 위력이다.

타타타타타타타타탁!

천공혈륜겁과 달리 구궁벽력공은 절제를 핵심으로 한다.

탈마가 홍천기공에서 깨우쳤듯 깊게 찌르나, 얕게 찌르나 죽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구궁벽력공의 심득으로 펼쳐낸 검기는 절명(絶命)을 목적으로 했다.

그 결과 저마다 비장의 한 수를 지녔을 무인들이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진저리를 치며 널브러졌다. 자세히 살펴보면 미간과 심장 어림에 콩알만한 구멍이 존재했다.

“또 누가 황실의 위엄에 도전하겠는가?”

이쯤 되니 봉황회주의 표정은 더없이 일그러졌다.

감각사도 중 노(怒)의 감정만 극대화됐으니 당장이라도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 절예를 펼쳐도 이상할 것이 없으리라.

“흥!”

봉황회주가 앉은 자리에서 손을 뻗었다.

벽에 걸린 장검이 부르르 떨더니 저절로 날아와 잡혔다.

그 때 이훤이 표정을 풀었다.

“없으면 인사는 여기까지 하지.”

봉황회주는 생각지도 못한 말에 눈을 가늘게 뜨고 이훤을 노려봤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만세라도 부를 것처럼 들떴던 여홍의 두 눈은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그것이 무슨 말씀이신지요?”

총관은 이훤의 기도가 완전히 달라진 것을 확인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존대를 사용했다.

“황상의 눈과 귀를 자처하니 황실의 위엄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훤의 외침에 총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왜인지 모르게 뇌물을 요구하던 관리들의 언행이 겹쳐지는 듯했다.

“그렇지요.”

스릉-

이훤은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낸 후 갈무리를 했다.

그리고 헛기침과 함께 말을 이었다.

“크흠, 황실의 위엄을 지켰으니 나 또한 선량한 양민의 좋은 날을 축하해도 되지 않겠는가?”

좋은 관리도 해봤으니 나쁜 관리도 할 요량이다.

그러다 보면 탈마가 돌아오리라.

“혹여 나 같은 자는 함께 할 수 없는 건가?”

이훤의 너스레에 총관은 봉황회주를 곁눈질로 응시했다. 봉황회주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총관은 노회함을 자랑하듯 무기를 치운 후 방실방실 웃으며 이훤에게 포권을 했다.

“하하하! 성도의 감찰어사께서 봉황회의 연회에 참석해주신다면 누대에 걸쳐 큰 광영이 될 겁니다.”

“크하하하! 원한다면 축문도 한 장 써주지!”

누가 봐도 탐관오리였다.

여홍은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넋을 놓았고, 봉황회의 무인들은 동료의 시신을 수습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이훤은 계단을 오르다가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던 황 도사의 어깨를 두드렸다.

“공무에 고생이 많은 사람끼리 한 잔 합시다.”

황 도사는 이훤의 신위를 목도한 후 한껏 공손함을 드러냈다. 그는 이훤의 소매를 살포시 받친 후 앞장서서 자리를 내주었다.

“감찰어사께서 이리도 호탕하신 분인 줄 알았다면······.”

아첨이 이어지는 가운데 몇 순배의 술이 돌았다

이훤은 취기를 억제하지 않고 술을 즐겼다.

봉황회가 중경의 왕이라는 소문답게 술과 음식은 어디에서도 맛보기 힘들만큼 최상급이다.

“아! 저쪽의 대협은 낯이 익군.”

이훤에게 얻어맞았던 무림맹 중경지부장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까는 미안했소. 내가 사적으로 쫓는 놈이 있는데 중경으로 갔다기에 결례를 범했네.”

관과 무림은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하나 사람이 사는 세상에 그런 논리가 제대로 지켜질 리 만무했다.

중경지부장은 이훤의 무위를 확인한 후 얻어맞았던 사실을 머릿속에서 지운지 오래였다.

“아! 그 종초홍이라는 작자였지요.”

“그렇소! 무림맹이라는 강호의 도적 집단에서 한 자리를 차지했다고 하더군. 한데 도사도 아닌 것이 무당산의 이름을 팔며 성도에서 뒷조사를 하는 게 아닌가. 반드시 잡아서 사지를 잘라야 속이 시원해질 것이야.”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무슨 말이오? 사실 이곳에 온 것도 그 놈을 찾을 수 있을까 해서였지.”

중경지부장은 술을 홀짝이며 키득거렸다.

“놈은 봉황회에서 처리했으니 신경 쓰실 필요가 없지요.”

이훤은 봉황회주를 힐끔 바라봤다.

그러자 총관이 슬쩍 나서며 물었다.

“어사께서 일개 강호의 무부를 어찌 찾아다니십니까?”

이훤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살았소? 죽었소?”

“아직 목숨은 붙여놨지요. 혹여 시신이라도 필요하신 겁니까?”

총관의 물음에 이훤은 코웃음을 쳤다.

“달라면 줄 것인가?”

“본회의 천라옥은 산 자는 내보내지 않습니다.”

이훤은 그 말에 가장 단단해 보이는 술병을 들었다.

그리고 목울대를 꿀렁거리며 병에 든 술을 단박에 마셔버렸다.

“크아아아아아! 탈마야! 들었냐? 천라옥이란다!”

이훤은 대갈일성을 내지른 후 술병을 거꾸로 쥔 상태에서 총관의 머리를 향해 내려쳤다.

쩡!

< 56, 암행어사(暗行御士).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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