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마신-135화 (135/226)

< 56, 암행어사(暗行御士). >

56, 암행어사(暗行御士).

천룡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감각사도는 기이한 존재였다. 같은 얼굴에 같은 체구를 했고, 천룡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도 기이했다.

천룡는 신마의 심득으로 강림혼요술을 만들었다.

아닌 말로 악재가 몸속에 진법을 그리고, 망아취자가 거울 같은 비급을 만들었으며 이훤은 회귀까지 했다. 그러니 인상 자체를 바꾸는 미혼술이 있다고 해도 이상할 일은 아닐 터였다.

오히려 이훤에게는 다행이리라.

같은 얼굴을 했기에 한 놈만 잡으면 나머지 세 명을 찾아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아닌 말로 종남파에서 죽였던 주남노도가 사상사도 중 누구인지도 신경 쓰지 않았다. 사상사도(四象使徒) 중 화노(火怒)이면 어떻고, 수노(水怒)이면 어떻고, 석노(石怒)이면 어떻고, 토노(土怒)라고 해도 무슨 상관이랴.

‘죽을 때까지 패면 죽기 전에 진짜 얼굴이 나오잖아.’

그렇기에 이훤은 사상사도 중 한 명이 분명한 봉황회주를 보자마자 입꼬리를 올렸다. 하나 그가 튀어나가려는 순간 황급히 소매를 잡아채는 손길이 있었다.

탈마였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냥 뿌리쳤으리라.

하나 이훤의 동반자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녀석이기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

“형님, 안 돼요.”

예기치 못한 만류였다.

탈마는 이훤에 뒤지지 않을 만큼 난장판을 환영했다. 상황이 어수선해질수록 움직이기 편했고, 도둑질을 하기가 쉬웠다. 게다가 이훤의 무위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당사자가 아닌가. 그러니 실력에 대한 의문이나, 이훤을 방해하기 위함은 아닐 터였다.

“화산연맹.”

“응?”

“화산연맹의 발족식 때문에 무림맹에 대회를 미뤄달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형님이 여기서 중경지부장을 두들겨 팬 걸로도 모자라 맹에 속한 봉황회주를 때려눕히면 어떻게 되겠어요?”

이훤은 히죽 웃었다.

“무림맹은 개망신이지.”

“여기는 중원처럼 정보가 활성화되지도, 맹의 이름값이 높지도 않아요. 자칫 잘못 건드리면 맹에 있는 놈들이 화산연맹을 음해하는 핑계거리가 될 수도 있어요.”

화산연맹이 걸려 있으면 곤란하기는 했다.

그래봤자 약간의 배려를 발휘하는 정도였다.

“그리고 종초홍이 아직 어디 있는지 모르잖아요.”

“네 표정을 보아하니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니로구나.”

“뭐가요?”

이훤은 미간을 좁힌 채 되물었다.

“사실 너는 종초홍의 생사에는 큰 관심이 없잖아.”

그도 그럴 것이 개미굴 이후로는 따로 인연을 맺을 기회가 없던 두 사람이다. 그러니 가벼운 친분 외에는 사적인 감정이 전무했다.

탈마는 혀를 찼다.

“쯧, 감이 좋은 형님은 그리 귀엽지 않은데.”

“개소리하지 말고.”

이훤의 말에 탈마는 턱짓으로 봉황회주를 가리켰다.

“저런 새끼를 보면 옛날 주인이 생각나요.”

탈마가 전했던 봉황회주의 행적이 머리를 스쳐갔다.

잔악무도하다는 말조차 순화된 것처럼 보일 만큼 대단한 악적이라고 했다.

“쉽게 죽이기는 아깝다는 뜻이로구나.”

탈마는 대답 대신 히죽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제가 봉황회를 한 번 들쑤셔 볼 테니까 형님은 회주 근처에 있으세요.”

이훤은 인상을 썼다.

“야! 가짜 명패로 근처에나 갈 수 있겠어?”

탈마가 손가락을 튕겼다.

이훤은 자신의 손으로 전해진 물건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야! 이런 건 언제 또 만들었냐?”

“심심할 때마다 하나씩 만들었죠.”

“확실한 거야?”

“장차 천하제일대도라고 불릴 사람을 의심하시는 겁니까?”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 되기는 될 터였다.

이훤은 명패를 감쌌고, 탈마는 주변을 살피며 전음을 보냈다.

[도둑질을 할 때 제 일 법칙이 뭐라고 했죠?]

[미끼를 던져주고, 먹잇감의 근처에서 기다린다?]

이훤의 대꾸에 탈마는 엄지를 들고 히죽거렸다.

“정답.”

“나 따라하지 마라.”

“한 번쯤 해보고 싶었어요.”

녀석은 그 말을 남기고, 인파 사이에 섞여서 자취를 감췄다.

이훤은 수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은 후 수하들의 공과(功過)를 점검하는 봉황회주를 바라봤다. 그리고 잔치가 벌어지는 순간에도 수하를 때리거나, 칼을 휘두르는 모습에 침음을 흘렸다. 확실히 저런 놈을 단칼에 죽이는 것이야 말로 자비가 아닐까 싶다.

그는 탈마가 남긴 말을 떠올리며 읊조렸다.

‘미끼라.’

그러고 보니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먹음직스러운 미끼가 눈앞에 있지 않은가.

그는 공공과 파파, 그리고 여홍과 거리를 뒀다.

그리고는 욕심을 형상화하여 얼굴에 붙인 듯한 중년인의 근처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는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허허, 저들은 묘족이 아닌가?”

중년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이훤을 좇았다.

“요즘 묘아산의 일로 묘족들이 회주를 원망하고 있다던데······. 혹여나 오늘 같이 좋은 날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이훤은 그 말을 남기고 슬쩍 자리를 떴다.

홀로 남은 중년인의 눈동자가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

봉황회(鳳凰會)라는 명칭은 봉황호를 거점으로 삼았기에 만들어졌다. 봉황회의 재력과 무력은 넓은 호수를 제 것으로 삼을 만큼 대단했다.

특히 회주인 초륜강의 무위는 중경은 물론이고, 광서와 운남에까지 알려졌을 정도였다. 봉황회주 이전의 초륜강도 강했지만, 회주가 된 이후에는 더 강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온갖 영약을 섭취하고, 돈과 힘으로 모을 수 있는 비급을 죄다 긁어모았다.

그렇기에 그의 별호가 천무재(千武齎)였다.

일천 종의 무학을 담은 서재라니.

어찌 보면 검제나 도왕처럼 직관적인 별호보다 더 대단했다. 하나 누구도 그의 별호를 비웃거나, 의심하지 않았다.

봉황회주의 진정한 힘은 금력이나 무력이 아니라 잔인한 성정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오죽 했으면 그가 하루에 가장 많이 하는 말을 손꼽으면 ‘잘라라!’가 되었겠는가.

작은 죄를 저지르면 손을 잘랐고, 중간 죄를 저지르면 다리를 잘랐으며, 큰 죄를 저지르면 사지를 잘랐다.

목불인견의 참상이 매일 같이 만들어졌다.

하나 중경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자랑하는 봉황회가 아니던가. 무림맹 중경 지부도, 관부나 도독부에서도 그에게 벌을 줄 수 없었다.

그렇기에 천무재 초륜강의 고희연이 열리는 봉황회의 앞마당은 여느 잔칫집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다음은 백포방주입니다!”

총관은 회주의 고희연에 선물을 가져온 이들을 일일이 호명했다.

“고하라.”

초륜강의 목소리는 강림혼요술의 영향으로 인해 음울하고, 낮았다. 크게 화가 난 것처럼 보이는 표정으로 인해 백포방주는 조심스럽게 나선 후 한 쪽 무릎을 꿇었다.

“백포방주는 봉황호 남부를 잘 관리하여 작년에 비해 소출을 두 배 이상 늘렸습니다.”

총관의 보고에 백포방주는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봉황회주는 손을 내저었다.

“회주의 만수무강을 빌겠나이다.”

백포방주는 축객령 자체를 큰 상으로 여기는 것처럼 반색하며 뒷걸음질 쳤다. 하나 모두가 무사히 물러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다음은 남조검계입니다.”

“고하라.”

남조검계(南釣劍契)는 봉황호 인근의 남호에서 어업을 하는 자들이 모인 조직이다. 한 마디로 수적이다. 한데 계주는 봉황회 무인들에게 끌려나왔다.

“며칠 전 부호가 꽃놀이를 나왔는데······.”

총관의 말이 끝나지 않았는데 계주가 청석에 머리를 박으며 외쳤다.

“살려주십시오! 따로 빼놓은 것은 사실이나······.”

봉황회주가 손을 들어 계주의 말을 막았다.

“사람이 살다 보면 뒷돈을 챙길 수 있다.”

계주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대체로 뒷돈을 챙기다가 걸리면 손목을 자르는 정도로 끝났기 때문이다. 팔을 잘리게 생겼음에도 기뻐할만큼 봉황회주의 성정은 잔악했다.

“하나 우리는 약조하지 않았던가? 너는 내게 충성을 맹세하고, 나는 네게 남호를 내려줬다.”

나라의 땅을 자신이 줬다고 스스럼없이 말했지만, 상석을 차지한 관부의 인물들은 못들은 척 딴청을 피웠다.

“총관, 신뢰가 무너진 자의 처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지를 자르고, 남호의 나루터에 내걸어 만인의 본보기로 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봉황회주의 입꼬리가 실룩였다.

“좋군. 잘라라.”

남조검계의 계주는 목이 터져라 외쳤지만, 결국 머리채를 잡힌 채 끌려 나가야 했다.

“다음은!”

그때 총관이 수하의 보고를 받고는 황급히 다가와 귀엣말을 건넸다.

“회주, 묘족의 대표가 찾아왔습니다.”

“묘족?”

“묘아산의 흑송림 건으로 찾아온 듯합니다.”

“아직도 해결이 되지 않았던가?”

“송구합니다. 그대로 밀어버리면 편하겠지만, 흑송을 관리하려면 묘족이 필요합니다.”

봉황회주의 입매가 비틀렸다.

“어디 있는가?”

총관이 고개를 들어 손짓을 하자, 빈객들이 모인 곳에서 누군가 벌떡 일어났다.

“회주를 음해하려는 자들이 여기 있습니다!”

얼굴에 기름기가 흐를 만큼 비대한 체구의 장년인이 꼬리를 살랑이듯 소리쳤다. 사람들은 회주와 음해라는 말이 섞이는 순간 장년인이 가리킨 곳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그곳에는 젊은 여인과 두 노인만이 남은 채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묘족의 대표인 여홍, 그리고 공공과 파파였다.

여홍은 봉황회주의 음습한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이훤을 찾았다.

‘무림맹의 도움을······.’

하나 방금 전까지만 해도 술을 마시고 있던 이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지 오래였다.

봉황회주는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여홍을 흘겨본 후 손짓을 했다. 공공과 파파가 제법 반항을 하려 했으나, 주변을 가득 채운 이들은 모두 아군이 아니었다.

무인들은 공공과 파파의 노구를 신경 쓰지 않았다. 거칠게 꿇어앉히나 싶더니 이내 대자로 눕힌 후 서너 명이 달려들어서 짓눌렀다.

“묘족 따위가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기어들어오느냐!”

총관의 눈썹이 역팔자를 그렸다.

여홍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사람들이 이렇게 많아. 그러니 저 놈도 무도한 짓을 할 수 없을 거야!’

그녀는 결의를 다진 후 외쳤다.

“묘아산 묘족의 성지입니다. 자격이 없는 자들과 거래를 하고, 공증을 받은 후 묘족을 나가라고 할 수는 없는 겁니다!”

봉황회주가 총관을 힐끔 쳐다봤다.

“얼마를 썼는가?”

“은자 칠만 냥과 사천의 비단 이백 필입니다.”

여홍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묘족은 한 해 생활비로 은자 칠백 냥을 사용했다.

그러니 봉황회주는 백 년치 생활비를 내려준 것이나 다름 없었다. 주변의 시선이 좋지 않게 변했다. 그냥 빼앗았어도 회주의 편을 들 사람들이 아닌가. 제값마저 치렀다면 묘족을 도와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여홍은 사람들의 날 선 시선에 입만 벌리고 있어야 했다.

“공증은 받았는가?”

“예.”

“믿을 만한 곳인가?”

총관은 허리를 펴고 외쳤다.

“묘아산의 공증을 서주신 분들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자 무림맹 중경 지부의 지부장이 먼저 일어났다.

이훤에게 얻어맞고, 멱살을 잡혔기에 목에 부목을 대고 있었다. 그는 앓는 소리를 내며 일어나더니 총관이 내민 공증서의 아랫부분을 가리켰다.

“당시 묘아산 묘족의 장로와 황 총관이 거래할 때 이 몸이 동석했소이다. 그는 삼십 년 동안 묘족의 장로였기에 묘아산의 권리를 주장할 자격이 있었소.”

총관이 입꼬리를 올리자, 상석에서 기녀를 끼고 있던 자가 일어났다. 관복을 걸친 것도 모자라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검을 패용하고 있었다.

“도독부의 황 도사다.”

무인들은 물끄러미 응시했지만, 몇몇 부호들은 죽은 조상이 돌아온 것처럼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그도 그럴 것이 도사(都司)란 도독첨사 밑에서 실무를 관장하는 벼슬이다. 한데 도독첨사의 경우 중앙에서 파견 나온 귀족이 도맡았다. 그런 이들이 지역의 실무에 관심을 가질 리 만무했다. 그러니 도독첨사의 손발이 되어주는 도사는 지역 내에서 현령도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아닌 말로 봉황호 인근의 현청에서 초대를 받은 현령들은 지금까지 황 도사의 곁에서 아부를 하고, 술을 따르느라 고개를 들지 못했다.

황 도사는 권력을 만끽하듯 히죽 웃더니 마치 사건을 종결하듯 외쳤다.

“묘아산은 이제 봉황회의 것이다!”

총관은 코웃음을 치며 서류를 접었다.

“네 이년! 감히 회주의 성스러운 탄신제에 찬 물을 끼얹어도 유분수지. 아무리 중원의 법도가 묘족에게 미치지 않는다고 해서 예의까지 저버려서야 되겠는가?”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내가 묘족의 대표입니다. 내 허락 없이 저들끼리 주고받은 거래를 어찌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공공과 파파는 침음을 흘렸다.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오늘의 일진은 사납기 그지없을 듯했다. 수많은 사람 앞에서 사지를 잘라도 욕을 먹지 않는 상대였다. 더 이상 자비를 구하려 했다가는 큰 화가 있을 듯했다.

“아가씨, 그만 하세요. 이미 끝났습니다.”

“돌아가시지요.”

여홍은 탄식을 하며 읊조렸다.

“하지만······.”

총관이 여홍의 말을 끊고 일갈을 내질렀다.

“닥쳐라! 올 때는 마음대로였지만, 갈 때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봉황회의 근거지에 허락 없이 난입한 것도 모자라 회주를 욕보이고서 그냥 가겠다고? 봉황회가 우습더냐?”

그는 수하들을 향해 손짓을 했다.

“계집은 안에 가두고, 두 노물은 목을 베서 하천에 던져버려라!”

“존명!”

여홍은 진저리를 쳤다.

사람을 죽이겠다고 공언을 했음에도 주변 사람들은 호쾌한 처사라며 손을 모으고 있지 않은가. 인면수심의 행위가 버젓이 일어나는 상황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크흑! 한 때 묘족이 광서와 운남을 통치했거늘······.’

그녀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비틀거리던 순간이다.

콰쾅!

활짝 열려 있던 봉황회의 문짝이 가루가 되어 흩날리는 것이 아닌가.

여홍은 굉음에 고개를 돌렸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곁에 있던 이훤이 돌아온 게다.

한데 복장은 더없이 화려했고, 온갖 장신구를 주렁주렁 매달았다. 학과 거북이를 그려 넣은 부채를 살랑일 때마다 손잡이에 딸린 꿩의 깃이 흔들렸다. 마치 대갓집 자제처럼 품격이 가득했다.

“웬 놈이냐?”

총관이 봉황회주를 대신해 외쳤다.

이훤은 부채를 접고, 허리춤에서 명패를 꺼낸 후 내밀었다.

“암행감찰어사다.”

< 56, 암행어사(暗行御士). > 끝

ⓒ 김태현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