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 열혈(熱血) 취마. (3) >
*
사람은 본래 자제력이 약하다.
한데 무공을 익히고, 칼을 찼다면 어떠하겠는가. 자제력은 쥐꼬리만하게 작아지고, 자신감은 태산처럼 높아질 터였다. 거기에 더하여 술까지 마셨다면 자존감은 하늘을 찌르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주루는 언제 피바람이 불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장소였다.
- 진실보다 힘이 우선시 되는 장소.
- 위세를 부리기 위해 일부러 시비를 거는 장소.
- 명성을 쌓거나, 악명을 드러내기에 제격인 장소.
아닌 말로 누가 칼만 뽑아도 양민들은 먹던 걸 내던지고 도망을 쳐야 했다. 주인 또한 그들을 쫓아가 돈을 받아내는 대신 머리를 감싸고 계산대 아래로 숨기 일쑤였다.
공공과 파파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들은 시비를 건 상대보다 주변을 먼저 살폈다.
이미 빈자리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손님이 많았고, 옆 사람에게도 목소리를 높여야 할 만큼 시끌벅적했다.
[저 쪽의 상인들은 돈이 많아 보여.]
[반대편에는 우리 아가씨보다 어여쁜 이들이 있군.]
그러니 이곳을 콕 찍어서 시비를 걸 이유가 없었다.
[미행이 붙더니 저들을 믿은 건가?]
[아무래도 돈을 주고 시비를 걸게 한 듯해.]
여홍이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하고, 두 노인의 오해가 기어지는 상황이다.
하나 정작 시비를 건 이훤은 떳떳했다.
그는 순수하게 시비를 걸었기에 거리낄 것이 없었다.
“다시 말해 봐! 뭐라고?”
여홍을 보며 눈을 부라리자, 무공이 일천한 그녀는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다.
“무, 무슨······.”
공공과 파파가 벌떡 일어나 여홍의 앞을 막아섰다.
“아가씨, 뒤로 숨으세요.”
“적입니다! 놈! 누구의 사주를 받고 나섰느냐?”
공공은 허리에 차고 있던 두 개의 철곤을 쥐었고, 파파는 지팡이를 비스듬히 세워 이훤을 경계했다.
이훤은 코웃음을 쳤다.
“사주? 내 뒤에는 오직 화산만 있을 뿐이다!”
너무나 당당한 한 마디에 공공과 파파는 한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오히려 상대가 이상한 수작을 부려서 빈틈을 엿보려는 것이 아닐까 우려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여홍은 여전히 뜬금없는 상황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결국 그가 나섰다.
“여기서 정상은 나 밖에 없는 건가.”
탈마가 한 숨을 쉬며 양 손을 펼쳤다.
“노인장, 잠시 이야기 좀 합시다.”
공공은 철곤으로 탈마를 겨눴다.
하나 홍천기공으로 인해 나날이 강해지는 탈마가 아닌가. 그는 철곤에 닿을 만큼 앞으로 나선 후 말을 덧붙였다.
“저 쪽은 제 의형입니다. 한데 저 사람이 화산이라면 자다가도 일어나서 박수를 칠 만큼 화산을 좋아합니다. 아무래도 여러분의 대화를 우연히 듣고, 발끈한 것 같네요.”
여홍은 순수하게 탈마의 말을 믿고, 탄성을 내뱉었다.
“아하, 그렇군요.”
하나 공공과 파파는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아가씨! 믿지 마십시오.”
“그래요.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건지 모릅니다.”
이미 배신자들이 붙여놓은 미행을 확인했고, 살수가 찾아올지도 모르는 상황이기에 경계심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러니 노회한 그들로서는 믿기 힘든 변명일 터였다.
“수작은 너희들이 부리는 거지. 태산의 웅위함과 숭산의 우아함! 그리고 형산의 매혹적인 풍광에 뒤지지 않고, 아마신의 경건함마저 뛰어넘는 중원 제일의 명산은 누가 뭐라고 해도 화산이다!”
이훤의 진지한 외침이었다.
공공과 파파조차 한순간 신뢰감이 들 만큼 진정성이 느껴졌다. 여홍은 잠시나마 현실의 척박함을 잊고, 머릿속으로 화산의 정경을 그렸나 보다.
“그런 곳이 있다면 꼭 가보고 싶네요.”
탈마는 잠시나마 훈훈해진 분위기에 명패를 꺼내들었다.
“의심할 필요 없습니다.”
명패는 금 띠를 둘렀고, 중앙 부근에 맹(盟)이라는 글자가 새겨졌다. 그리고 그 아래 중경이라는 지역 명과 소속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헉! 무림맹 중경 지부에서 나오셨소?”
이훤은 영문 모를 소리에 눈을 끔뻑였다.
탈마는 이훤의 옆구리를 슬쩍 친 후 빙긋 웃으며 말했다.
“본의 아니게 대화를 엿듣게 되었습니다. 중경 지부를 거론하니 신경이 쓰였거든요.”
공공과 파파는 명패가 진짜임을 확인하자, 무기를 거뒀다. 그리고 눈에 띄게 공손한 자세를 취했다.
“들었다면 다시 이야기할 필요가 없군요. 묘아산의 묘족은 비록 무림맹에 가입하지는 않았으나, 누대에 걸쳐서 정파와 한 몸처럼 움직였소이다. 한데 봉황회에서 묘족의 성지나 다름없는 흑송림을 노리고 있으니 난감하기 이를 데가 없군요. 그러니 부디 중경 지부에서 중재를 해주셨으면 하오.”
탈마는 난색을 표하며 침음을 내뱉었다.
“아! 사정은 이해하지만, 아시다시피 지부장과 봉황회의 관계가······.”
공공과 파파는 표정을 굳혔다.
“하긴 봉황회의 재력이라면 지부장도 회유되었겠군요.”
여홍은 조금 전의 결의를 잊은 듯 눈을 감았다.
이훤은 실의에 빠진 그들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야! 그건 또 언제 훔쳤냐?]
[하오문에서 정보료를 내고 기다리는데 중경 지부 놈들이 오가더라고요. 아무래도 외부에 있다가 형님 때문에 지부로 돌아가는 놈들 같았어요.]
탈마가 빙긋 웃으며 소매를 흔들었다.
그러자 또 하나의 명패가 암기처럼 날아든 후 이훤의 소매 속으로 사라졌다. 소매를 슬쩍 뒤집어 명패를 살피자, 건곤당(乾坤堂)이라는 세 글자가 확인됐다. 탈마가 전해준 정보에 의하면 중경 지부를 책임지는 타격대가 건곤당과 건곤대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 머리 좋은 새끼.’
이훤은 탈마의 의도를 깨닫고, 빙긋 웃었다.
‘저들을 미끼로 내세우면 봉황회를 자연스럽게 들어갈 수 있겠어.’
종초홍이 봉황회와 어떤 관계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묘족을 내세우면 감시를 받지 않고 움직이는 것이 가능할 터였다.
이훤은 헛기침을 시선을 끈 후 명패를 내밀었다.
“제가 화산을 너무 좋아하는 나머지 식사를 방해했군요. 중경지부의 건곤당주인······.”
슬쩍 손가락 사이로 명패의 뒷면을 확인했다.
“이훤이라고 합니다.”
공공과 파파가 통성명을 하는 사이 탈마의 짜증 섞인 전음이 들려왔다.
[갑자기 본명을 왜 밝혀요? 명패에 분명 맹부락이라고 적혀 있잖아요.]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러다 명패를 확인하면 어쩌려고요?]
이훤은 입꼬리를 올렸다.
[그 때는 내 탓이 아니다.]
탈마는 이훤이 말하는 ‘그 때’가 봉황회 최후의 날임을 직감하고 한 숨을 내뱉었다. 아닌 말로 이훤이 날뛰기 시작하면 종초홍의 생사는 몰라도 봉황회가 멸문하는 건 기정사실이다. 하나 화산연맹의 발족식을 위해 무림맹 쪽에 대회를 미뤄달라고 부탁한 상황이 아닌가.
‘봉황회 따위로 괜한 트집을 잡힐 수는 없지.’
공공은 탈마가 한숨을 내쉬자, 거절이라고 여겼는지 다급하게 매달렸다.
“강호의 도의가 땅에 떨어져 의지할 곳이 없소이다. 건곤당주께서 부디 묘족을 굽어 살피소서.”
여홍은 공공보다 더 적극적으로 부탁했다.
그녀는 수많은 이목이 집중되는 가운데 무릎을 꿇었다.
“흑송림은 묘족의 안식처입니다. 부디······.”
이훤이 손을 슬쩍 흔들자, 여홍의 몸이 저절로 일으켜졌다. 공공과 파파는 그 모습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무림맹의 합류도 큰 도움이 됐지만, 강호의 일은 고수가 있어야 해결되는 법이 아니던가.
“협객으로서 그냥 지나칠 수 없군요.”
탈마는 진중한 이훤의 표정을 보고 남몰래 미소를 지었다.
‘산동에서는 군자더니 중경에서는 협객인가요?’
*
일행이 다섯 명으로 늘었다.
이훤과 여홍이 선두에 섰고, 공공과 파파는 뒤로 빠졌다.
‘아가씨께서 건곤당주와 친해지시면 봉황회가 무리한 요구를 해도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게야.’
‘저 정도면 외모도 그리 빠지지 않지.’
공공과 파파는 이훤의 뒤통수를 힐끔거리며 눈짓을 주고 받았다.
‘화산은 오악 중 서악이야. 그런 곳을 숭앙하는 사내라면 본성이 나쁠 리 없지.’
‘아가씨가 강호의 호협들과 친분을 나누면 아무도 묘족을 무시하지 못할 것이야.’
나름대로의 목적을 지닌 채 이훤을 끊임없이 살폈다.
반면 탈마는 네 사람을 한 눈에 담고 싱글벙글 웃었다.
‘형님이 여자랑 서 있는 그림이 낯설기는 하네.’
이훤이 술 없이 여자와 서 있는 광경은 처음이다.
그렇기에 탈마는 경극을 구경한다는 기분으로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중경은 한족보다 묘족과 회족, 그리고 장족이 더 많아요. 그 중에서 장족이 칠 할 이상을 차지하지요.”
“그렇군요.”
“봉황회주도 장족 출신으로 알려졌어요. 본래 묘족과 장족의 관계가 그리 나쁘지 않았었는데······.”
이훤은 여홍의 조잘거림을 들으면서 술을 생각했다.
‘묵은 곡식으로 술을 담가서 훨씬 더 시큼하겠지. 돌아갈 때 돼지고기를 끊어놔야겠어. 간장에 수수를 갈아 넣은 후 삶은 고기를 재우면 꽤 달짝지근한 안주가······.’
그러던 중 입맛을 돋우는 말이 들려왔다.
“뭐라고요?”
“봉황회주의 고희연이 머지않았어요. 삼 일 전부터 연회를 열어서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대접한다더군요. 아마 내일이 고희연 당일일 거예요.”
“아!”
여홍은 쓴웃음을 지었다.
“맞아요. 일부러 고희연에 맞춰서 도착하려고요. 그도 사람이라면 생일 날 험한 일을 벌어지는 않겠지요.”
이훤은 여홍의 씁쓸한 읊조림을 귓등으로 흘렸다.
중경에서 왕처럼 군림하는 자가 고희연을 맞이했다면 얼마나 성대할지 생각만으로도 입맛이 돌았다.
“좋은 술에 맛좋은 음식이라. 빨리 가서 먹고 싶다.”
이각 이상 술을 끊었기 때문일까.
속내가 가감 없이 흘러나왔다.
“네?”
여홍은 눈을 끔뻑였다.
다행히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일어났다.
평야 곳곳에 위치한 구릉 사이에서 서른 명의 복면인이 등장했다. 그들은 불문곡직하고 만도를 꺼내들더니 달려들었다.
“계집을 죽여라!”
공공과 파파가 대경실색하여 철곤과 지팡이를 고쳐 잡았다. 봉황회가 위치한 봉황호에 가까워지니 결국 참다못한 배신자들이 살인을 계획한 듯했다.
파파는 다급하게 외쳤다.
“아가씨! 몸을 피하세요.”
하나 여홍은 수십 명의 살기에 진저리를 칠 뿐 움직이지 못했다.
그 때 이훤이 여홍을 감싸며 눈을 가리더니 한 손으로 무릎까지 자란 벼이삭을 훑었다. 그러자 수백 개의 낱알은 저절로 떠오르더니 전방을 향해 폭사됐다.
파파파파파파파팟!
공공은 목을 빼고 전방을 응시했고, 파파는 굳게 잡았던 지팡이를 놓쳤다. 그도 그럴 것이 기세 좋게 달려오던 복면인들은 이 장 거리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나자빠지는 게 아닌가. 두 노인은 꿈틀거리는 사람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 말을 잇지 못했다. 한평생 묘아산에서 지내온 그들에게는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신위였다.
‘우리가 은거고인을 만났구나!’
‘아가씨의 짝으로 차고 넘치지 않은가.’
이훤은 고개를 들지 못하는 여홍을 슬쩍 밀어낸 후 몸을 띄웠다. 벼를 밟고 뛰면서 암천군림보를 펼치자 삽시간에 엿가락처럼 신형이 늘어졌다. 그리고 기울어졌던 벼가 제자리를 찾기도 전에 이훤이 돌아왔다.
그는 구릉 뒤에서 잡아온 노인을 공공과 파파 앞에 내던졌다.
“아는 사람?”
“헉! 슬나 장로! 당신은 우리 편이었잖아. 그대가 배후였던가?”
수염은 가슴까지 늘어트렸고,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내려오는 노인이다. 그는 여홍을 보자마자 삿대질을 하면서 소리쳤다.
“그냥 큰돈을 받고 흑송림을 팔았으면 되는 일이다. 네 년 때문에 묘족은 터전을 잃고 멸족할 것이야!”
여홍은 믿었던 사람의 배신에 충격을 받은 듯했다.
장로가 기세등등하고 여홍을 욕하려는 순간 이훤의 손이 뒷목을 후려쳤다.
콰직!
이훤은 죽은 장로를 길가로 던져버린 후 말했다.
“배신자는 지옥으로. 아주 간단한 논리요.”
여홍은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그저 한 시라도 빨리 가서 술을 마시고 싶다는 진심을 밝히기에는 여홍의 표정이 너무 서글펐다.
탈마가 분위기 전환을 위해 외쳤다.
“저기! 봉황호가 보여요.”
하나 봉황호보다 먼저 수많은 인파가 그들을 맞이했다.
봉황회주가 잔치를 열었다는 소식에 온갖 군상이 몰려든 것이다. 오죽 했으면 호수의 절반을 끼고 만들어진 전각군 밖에도 수백 개의 천막을 설치했을 정도였다.
“중경 지부에서 왔소.”
탈마가 명패를 제시하자, 일행은 천막이 아니라 봉황회 내부로 안내됐다.
“봉황회주와 독대를 할 필요는 없어요.”
“중소방파의 주인들이 모여 있을 테니 그들 사이에서 이의를 제기하면 봉황회주도 마냥 무시하지 못할 겁니다.”
이훤은 묘족의 안녕을 위한 회의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인파 너머로 보이는 주연 자리를 보며 눈을 떼지 못했다.
“야, 저거 봐라.”
탈마 또한 이훤의 시선을 좇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형님, 저거 종남파의 죽은 노괴랑 똑같이 생겼는데요.”
그렇다.
주름진 눈매가 역팔자를 그려 일견하기에도 쉬이 범접할 수 없는 인상을 지닌 노인이 보였다. 봉황이 수놓인 금의를 걸친 그는 종남파의 진명삼성 중 대형이었던 주남노도와 똑같이 생겼다.
단지 피부가 조금 더 검을 뿐이다.
이훤의 두 눈에 핏빛 기운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사도가 많은 거냐? 아니면 내가 운이 좋은 거냐?”
< 55, 열혈(熱血) 취마. (3)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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