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마신-133화 (133/226)

< 55, 열혈(熱血) 취마. (2) >

중경은 중원과 변경의 경계 지역이다.

그렇기에 발전한 곳과 미개한 곳이 공존했고, 무림맹의 이름보다 토착 세력의 이름이 더 무게를 지녔다. 아닌 말로 남쪽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다른 세상이나 마찬가지인 운남성이 아닌가.

그렇기에 무림맹의 중경 지부는 소규모였고, 지부에 속한 무인들도 신뢰하기 어려웠다. 아닌 말로 문제가 생겼을 때 먼저 달려오는 건 토착 세력이 아니던가. 그렇기에 무인들은 지역 유지나 다름없는 봉황회의 정보를 쉬이 넘기려 하지 않았다.

“봉, 봉황회는 장강의 지류인 봉황호의 주인이자, 하곡평야의 절반을 소유한 방파다."

하나 사람의 마음이란 조석변개(朝夕變改)하는 법이다.

이훤에게 지목당한 무인은 평소였다면 이리 쉽게 대꾸하지 않았으리라. 하나 이러다 지부장이 죽기라도 한다면 책임 소재는 뻔했다.

‘어차피 금방 알 수 있는 정보니까.’

그는 어쩔 수 없다는 핑계로 입을 놀렸다.

“수십 년 동안 중경을 유지한 거대방파란 말이다! 지금쯤 그들에게도 연통이 갔을 테니 네 놈은 당장 지부장을 풀어줘라. 그렇지 않으면 크게 후회할 것이야!”

변경 지부의 무인이 촌각을 다투는 일에 휘말려봤을 리 만무했다. 그러니 그가 떠들어댄 정보가 평소에는 하급일지언정 지금 이훤에게는 상급이나 마찬가지였다.

“헉!”

이훤은 무인의 호통에 속으로 웃음을 참아야 했다.

협박을 하는 것 치고는 너무도 상세한 정보였다.

“그렇다면 도망쳐야겠군!”

짐짓 겁을 먹은 것처럼 지부장을 무인들에게 집어던진 후 창문을 통해 뛰쳐나갔다. 암천군림보를 펼치는 순간 한 걸음에 삼 장씩 내달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부의 무인들은 눈만 끔뻑일 뿐 말을 잇지 못했다.

“죽다 살아났구나.”

*

이훤은 달리는 와중에 외쳤다.

“봉황회!”

그러자 허공에서 탈마가 내려섰다. 중경에 도착했을 때부터 분업을 시작했다. 이훤은 지부로, 탈마는 하오문에서 정보를 모았다. 새로운 지역에 갔다면 가장 먼저 조사해야 할 것이 유력 방파의 정보와 관계였다.

“다행이네요.”

“뭐가?”

탈마는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하오문에서 중경에 자리잡은 방파를 조사하니까 봉황회가 빠지지 않더라고요.”

“그 정도야?”

“거대 방파라고 할 만한 곳은 봉황회와 청룡교, 그리고 역도방인데요. 이들이 봉황회를 중심으로 얽혀 있어요.”

이훤은 하곡평야를 내달리면서 탈마의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중경의 명승지는 옥화산과 봉황호, 그리고 서림이다.

공교롭게도 청룡교의 위치가 옥화산(玉化山)이었고, 역도방은 서림(西林)에 위치했다. 청룡교는 이름에서부터 느껴지듯 사교도의 한 갈래였다. 본래 중경은 사천성으로 향하는 촉도의 입구로 유명했다. 상업과 농업이 동시에 발전한 곳이니 재화가 끊이지 않았다.

‘한 마디로 돈을 뜯어먹기에 좋은 장소지.’

이런 곳에 청룡교가 자리를 잡은 건 우연이 아닐 터였다.

청룡교는 불가의 한 갈래를 자처하며 청룡을 우상시 했고, 관과 무림에 걸쳐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용이라 이 말이지?’

이훤은 용(龍)이라는 글자만 봐도 천룡전을 떠올렸다.

그러니 이미 청룡교에 대한 처우는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천룡전과 관련이 있다면 주춧돌까지 부숴버릴 것이고, 그저 단순한 사교(邪敎)라면 교도들을 모조리 정리할 생각이다.

이처럼 청룡교가 양지에서 활동한다면 서림에 자리잡은 역도방은 철저하게 음지를 지향했다. 도를 거꾸로 쥔다는 역도방(逆刀幇)은 낭인 시장인 낭시(浪市)의 일종으로 수많은 낭인들을 거느렸다.

“봉황회는?”

“돈 많고, 아는 사람 많고, 그냥 사람도 많아요. 한 마디로 이 지역 왕입니다. 아무도 못 건드려요. 하곡평야의 절반을 소유했다는 말이 진짜더라고요. 대부분의 양민이 소작을 하고, 아무래도 역도방에서 소작농을 관리하는 듯해요.”

“청룡교와는 무슨 관계인데?”

“봉황회주의 아들과 청룡교주의 딸이 혼인을 했답니다.”

이훤은 탈마의 말에 헛웃음을 지었다.

“하! 불가라면서 자식을 낳고, 혼인까지 시켰어?”

“왕이라니까요? 봉황회가 하겠다면 그냥 하는 거예요. 그 외에 중소 규모의 방파가 백여 곳 정도 있는데 봉황회의 하수인이라고 보면 됩니다.”

“생각보다 덩어리가 크네.”

탈마는 덩어리 운운 한 후 발길을 돌린 이훤을 보며 눈을 끔뻑였다.

“어디 가요?”

“쉬운 상대가 아니야. 술 한 잔 하면서 머리 좀 식히자.”

이훤이 황금빛으로 빛나는 전답 사이를 질주하자, 탈마는 혀를 차면서 뒤따랐다.

“쯧쯧, 추수할 곡식을 보니까 곡주가 생각났나 보네.”

이훤은 회귀 이후 가장 잘 한 일 중 하나로 탈마와의 만남을 손꼽았다. 그도 그럴 것이 녀석과 함께 다닌 이후로 돈 걱정을 해본 기억이 없다.

밥도, 술도, 잠자리도 언제나 최상급이다.

그렇기에 이훤은 자연스럽게 시내에서 가장 화려하고, 큰 주루로 향했다.

“옥화주루를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디로 모실까요?”

옥화주루는 마을에서 가장 큰 주루답게 삼 층 높이에 중앙이 개방된 구조였다. 게다가 평범한 객잔이나 주루와 달리 잘 차려입은 중년 여인이 접객을 했다.

“어떤 방식이지?”

이훤과 다니며 돈 쓰는 재미를 붙인 탈마가 자연스럽게 되물었다.

“주루 뒤쪽에 별채가 있고, 삼층에 특실이 있습니다. 가격은······.”

중년 여인은 이훤이 밀고 들어와 일층 창가에 자리를 잡자 말끝을 흐렸다. 무시당한 듯하여 잠시 표정을 구겼으나, 주문을 받는 내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술과 요리를 무한정 내오라는 말에 누군들 즐겁지 않으랴.

“높은 곳에서 마시는 걸 좋아하시는 분이 어인 일로?”

이훤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기껏 해야 옥화산이나 보이겠지. 그리고 우리가 여기 놀러온 줄 알아? 일층은 사람들로 붐비니 정보를 수집하기에 제격이다. 대도가 되겠다는 놈이 그것도 모르고 말이야.”

“단순히 올라가기가 귀찮았던 건 아니고요?”

“됐다. 술이나 마시자.”

두 사람은 술을 마시는 방식이 달랐다.

이훤은 망아취자로 인해 술을 음미하고, 안주를 곁들이는 쪽이다. 탈마는 술을 더 많이 마시기 위해 안주를 덜 먹는 것이라고 의심했지만 말이다.

반면 탈마는 술보다 안주를 즐겼다.

그렇기에 요리가 나오는 족족 탈마의 입안으로 사라졌고, 이훤은 느긋하게 술병을 차지했다.

“초홍을 빨리 찾아서 천문진인의 생사를 물어봐야 해.”

“종초홍이 얘기하겠어요? 무림맹의 일도 아니고, 사문의 어른에 대한 비사잖아요.”

이훤은 확신했다.

“해줄 거다. 그 녀석은 협골이야. 지금이야 경박해 보이지만, 힘든 시기가 왔을 때 분연히 떨치고 일어날 만큼 강단이 있지.”

“그걸 형님이 어떻게 알아요?”

회귀 전의 불사검협 종초홍이 그러했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봉황회 자체는 어때?”

“확실한 정보는 아까 이야기 했고,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신빙성이 없어요. 풍문으로 들리는 바에 의하면 본래 장강수로채의 산적 출신이라는 이야기가 있어요. 장강에서 큰돈을 벌고, 운 좋게 무공을 익혔데요.”

이훤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운이 좋아도 너무 좋네.”

“어쨌든 출신에 대한 소문이 도는 것도 당연하죠. 염왕채에 밀염에 인신매매에 살인까지 돈이 되는 건 모조리 다 취급한데요.”

“한데 어떻게 이름도 알려지지 않았지?”

“중경 자체가 중원과 새외의 경계잖아요. 감시할 사람도 없고, 탓하는 사람도 없죠. 게다가 이런 곳이면 유지가 왕이라고요. 아마 현청에서도 돈 받아먹고 입에 자물쇠를 채웠을 걸요.”

이훤은 술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침음을 흘렸다.

“흐음, 그런데 왜 종초홍이 관심을 둔 거지? 녀석이 요청한 자료만 봐도 무언가를 의심하고 있었어. 고작 봉황회의 비리를 밝히기에는 너무 시골이잖아.”

탈마가 비웃듯 말했다.

“협골이라면서요. 식은 만두 한 개에 정의감이라도 불타올랐나 보지요.”

이훤은 고개를 내저었다.

“협골이라고 했지. 협객이라고는 안 했다. 아직은 그렇게까지 뜨거운 놈이 아니야.”

“형님은 그러고 보면 종초홍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 같네요. 그럴 거면 녀석한테도 이름 붙여주고, 칠대괴마로 받아들이지 그래요.”

이번에는 대꾸하지 않았다.

종초홍과의 인연은 대부분 회귀 전의 기억으로 만들어졌다. 몇 번이나 중요한 일을 논의했지만, 짧은 순간의 만남일 뿐이다. 최소한 악재나 예영영처럼 속을 들여다볼 기회가 없었다.

“할 수 없지.”

“뭐가요?”

“그냥 가자. 가서 종초홍이 왔었냐고 물어보면 되겠지.”

탈마는 이훤의 결정에 키득거렸다.

“거봐. 그냥 술이 마시고 싶었던 거였어.”

*

두 명의 노인과 한 명의 여인.

일견하기에는 여인이 연로한 윗사람을 봉양하는 듯보였다. 하나 노파와 노인은 여인을 지키기 위해 삶은 바친 자들이었다. 세 사람은 옥화주루에 들어서자마자 구석 자리를 차지했다.

“파파, 미행은 없었지?”

노인의 물음에 노파가 주름진 얼굴을 쓸어내렸다.

“있어. 아무래도 봉황회까지 쫓아올 모양이야.”

“차라리 봉황회까지 쫓아오면 다행이지. 괜스레 흉악한 짓이나 벌이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는군.”

여인은 초췌한 얼굴에 억지웃음을 띄운 후 말했다.

“공공, 파파. 다 잘 될 거예요. 묘족의 내일이 우리에게 달렸어요. 그러니 빨리 요기를 하고 봉황회로 가요.”

공공(公公)과 파파(婆婆)는 고개를 조아렸다.

“일단 요기부터 채우시지요.”

노인은 손을 들어 가벼운 요리를 주문했다.

여인은 그제야 창밖을 응시하며 등걸이에 몸을 기댔다.

‘여홍아, 힘을 내자. 나를 믿고, 버티는 이들을 위해서라도 지치면 안 돼.’

애써 마음을 다잡자, 까무잡잡한 피부에 홍조가 일었다.

그녀는 묘족 출신으로 중경 북부의 묘아산(猫兒山) 태생이다. 묘아산은 중경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아기 고양이를 닮은 산세로 유명했다. 하나 묘아산의 이름이 암암리에 알려진 까닭은 특산품 때문이다.

묘아산의 흑송림은 중원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특별했다. 흑송을 깎아서 가구를 만들면 냄새가 나지 않고, 벌레가 꼬이지 않았다. 거기에 더하여 돌을 던져도 흠집이 나지 않을 만큼 단단했다. 하여 묘아산의 묘족들은 운남이나 광서의 동족들과 달리 벌목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흑송으로 병장기를 만들 생각이라니······.’

여홍은 표정을 굳혔다.

어느 순간부터 묘아산을 찾아온 강호인들은 흑송림의 팔라고 강권하기 시작했다. 흑송으로 활과 화살은 물론이고, 창을 만들어 팔겠단다.

묘족의 대표인 여홍이 수락할 리 만무했다.

거절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 여겼다.

하나 강호인들은 여홍이 아니라 부족민을 회유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장로랍시고 떵떵 거리던 몇몇이 돈을 받고, 권리를 넘겼다.

“그런데 봉황회가 우리에게 권리를 넘길까?”

공공의 말에 파파는 울분을 토했다.

“협잡으로 이뤄진 거래는 사기나 마찬가지야. 아가씨께서 허락하지 않는 한 흑송림은 누구도 건드릴 수 없어.”

“하지만 봉황회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너무 많아.”

여홍은 두 노인을 달래기 위해 말을 건넸다.

“봉황회는 무림맹에 속했잖아요. 중경 지부에 들러서 사정을 설명하면 무인들이 우리와 함께 봉황회를 설득해 줄 거예요.”

잠시 후 술과 음식이 나왔다.

여홍은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애써 밝은 목소리로 건배를 제의했다.

“묘아산을 위해 건배하죠!”

공공과 파파가 여홍의 마음 씀씀이를 모를 리 없다.

두 사람도 밝은 표정으로 말을 덧붙였다.

“태산의 웅위함과 숭산의 우아함을 갖추고!”

공공의 말에 파파가 말을 받았다.

“형산의 매혹적인 풍광에 뒤지지 않으며!”

여홍은 묘족의 건배사를 기분 좋게 받아쳤다.

“화산의 험준함을 뛰어넘는 화남 아래의 최고 명산인 묘아산의 ······.”

그 때 짜증 섞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게 무슨 개소리지?”

< 55, 열혈(熱血) 취마.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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