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 열혈(熱血) 취마. >
55, 열혈(熱血) 취마.
이훤은 경공을 펼쳤다.
화산파 경내에서 뭉그적거리다가는 만매만전을 논하고 싶은 도인들에게 둘러싸일 것이 뻔했다. 연화봉을 내려와 소로에 접어들자, 숲에서 탈마가 튀어나왔다.
“녹홍주에요.”
이훤은 비취색으로 반짝이는 술을 보며 탄성을 흘렸다.
“입안이 텁텁해서 깔끔한 술을 마시고 싶었는데 어떻게 알았냐?”
탈마는 품에서 육포를 건네며 한 숨을 내쉬었다.
“형님하고 다니다보니 도둑질하는 실력은 그대로고, 주량만 늘었소이다.”
“그건 곤란한데.”
이훤의 말에 탈마는 입꼬리를 올렸다.
“형님 혼자 마실 술이 줄어서 그렇소? 아니면 술을 훔쳐올 사람이 없어서 그런 거요?”
“첫 눈의 기쁨은 잊은 채 진창만 보며 한 숨을 쉬는구나. 눈이 좋다면 눈이 만든 세상도 좋아해야 하건만, 하늘만 원망하는구나.”
“후훗, 할 말이 없군요. 그나저나 무슨 일을 그리 복잡하게 한데요.”
이훤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걸 고새 엿들었냐?”
“대도의 본능이 꿈틀거렸다고나 할까요. 어쨌든 형님이 나서서 오라고 하면 죄다 개떼처럼 몰려올 텐데 뭣 하러 연맹에 일을 시킨 거예요?”
탈마의 질문에 불현 듯 회귀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때의 이훤은 밑바닥을 전전하던 인생이다.
천공혈륜겁이 아니었다면 죽을 자리도 선택하지 못한 채 비참하게 사라졌으리라. 한데 천공혈륜겁으로 고수가 됐음에도 비참했던 시절의 기억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용기를 내지 못했고, 주눅 들었고, 양보 했으며, 도망쳤다.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지 못한 탓이다.
이훤이 보았을 때 화산도 그러했다.
“내 덕이기는 하지만, 당금 강호에서 화산의 위신은 불과 일 년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격상됐어. 하나 연맹의 수뇌부는 아직 모른다. 화산 아래로 내려가지 않고, 내부만 정비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 그렇기에 연맹의 의미를 스스로 좁게 정의했어.”
“아! 형님이 나서면 종남파는 두 말할 것도 없이 달려올 것이고, 산동성의 청도대상단도 움직이겠네요. 장강 이북의 방파 중 절반 이상이 참석할 수도 있을 걸요?”
다소 허황된 이야기처럼 들렸다.
하나 이미 섬서성과 산동성만 해도 이훤을 대놓고 적대시할 수 있는 자가 없지 않은가.
“어차피 내가 나서지 않아도 알아서 모일 거다. 강호인들에게 나와 연맹은 한 몸처럼 알려졌으니까. 연맹의 수뇌부도 직접 발로 뛰면 알겠지. 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연맹이 주목받고 있음을 말이야.”
“자식을 키우는 것도 아니고······.”
이훤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쩔 수 없지. 화산연맹은 화산을 지키는 방벽이 되어줄 것이야. 부채질 좀 해주고, 물 좀 뿌려주면 알아서 잘 클 텐데 못할 것도 없지.”
탈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무림맹은 어쩌려고요? 그냥 아무 생각없이 밀어붙이는 건 아니지요?”
다른 것도 아니고 무림대회를 연기하라고 요청할 생각이다. 심지어 무림맹의 대회의에 이목이 쏠린 건 이훤이 절명곡의 비사를 공개했기 때문이 아닌가. 제아무리 이훤의 무위가 대단하고, 위명을 떨쳐도 무림맹이 순순히 말을 들을 리 만무했다.
“네가 종초홍에게 서찰 한 통을 써라. 연맹의 뜻을 따라주면 무림대회의가 열릴 때 절명곡의 생존자를 데리고 가겠다고 말이야.”
탈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망아취자 할아버지를 내세우게요?”
“응! 스승님도 언제까지 숨어살 수는 없잖아. 기왕 재출도하실 거면 무림대회의만큼 성대한 자리도 없지. 어차피 절명곡의 생존자가 아직까지 남아 있어도 무림대회의에 알아서 나타날 리가 없잖아. 무림맹으로서는 구색을 맞추기 위해서라도 생존자가 필수다.”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네요.”
이훤은 입꼬리를 올렸다.
“현재 강호의 관심사는 마교의 발호도, 사파의 악행도, 정파의 후기지수도 아니야. 신마의 깨달음! 이건 무소불위의 무기야. 써먹을 수 있을 때마다 써 먹어야지.”
탈마가 헛웃음을 지었다.
“크큭! 신마가 지옥에서 한탄을 하겠네요. 자기 무공을 아무렇게나 써먹는다고요.”
이훤은 쓴웃음을 흘렸다.
‘그래, 정말 지옥에 있으면 좋겠다.’
*
취선관으로 돌아온 이훤은 느긋했다.
그는 절벽에서 가을바람을 맞으며 몸을 뉘였다.
망아취자가 주원경을 꾸렸을 때에는 작은 초옥과 매화 숲이 전부였지만, 지금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었다. 종남파와 화산에서 가져온 자재와 물품으로 꾸미기 시작하니 작은 장원이 만들어졌다.
이훤이 누워있는 외부 침상과 보료 또한 그렇게 마련한 것이다. 해질 무렵 잔을 기울이니 호박색의 술과 노을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화산의 고인이신 검신께서 저녁노을을 보며 자하심결을 창안하셨거늘······.”
망아취자가 오수를 끝내고 다가왔다.
이미 두 사람 몫의 침상이 준비된 상태였다.
망아취자는 구도자라고 볼 수 없을 만큼 편안한 상태로 누워서 말을 이었다.
“네 놈은 술이나 마시고 있으니 낙안봉의 격이 어디까지 떨어질는지 모르겠구나.”
“제 집에서 제가 누워 있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이훤은 히죽 웃으며 술병을 건넸다.
망아취자는 술병을 건네받은 후 갑작스레 생각이 났다는 듯 물었다.
“아! 악재, 그 친구는 편하게 갔느냐?”
벽력창 악재는 자신의 생존을 누구에게도 알리려 하지 않았다. 맹약을 어긴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인해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속죄하면서 살겠다는 뜻을 전했다.
‘노인네들하고 어울리고 싶지 않은 것뿐이겠지만.’
어찌됐든 악마로 새 삶을 살고 있으며 칠대괴마의 한 사람이 아닌가.
이훤은 악마의 의사를 존중했다.
“제자의 말에 의하면 잠을 자다가 가셨답니다.”
“술을 좋아하는 친구였으니 마지막 술 한 잔 정도는 나눴으면 좋았으련만. 최후를 지켜보지 못한 것이 아쉽구나. 어찌됐든 좋은 술친구였는데 말이야.”
망아취자가 노을을 보며 옛 친우를 회상하는 사이 이훤은 혀를 빼물었다.
‘마지막을 지켜봤다가는 살아 있는 걸 속일 수······.’
이훤은 눈을 끔뻑였다.
망아취자는 악재의 죽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한데 악재는 악마가 되어 살아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다른 사람도 그럴 수 있으리라.
‘천문자의 시신은 누가 확인했지?’
절명곡의 생존자 중 악재는 배신을 택했고, 무당파의 천문진인은 죽은 후 비급을 남겼다. 하나 비급을 확인했을 뿐 시신을 확인한 건 아니지 않은가.
이훤은 기억을 더듬었다.
무당쌍선이라 불린 천양검선 백암과 풍음검선 청암이 죽음을 거론했고, 무림맹의 외단에 속한 위태교도 그렇다고 했다. 그리고 천문진인의 비급을 훔쳤다는 무암자가 인왕에게 죽음을 알렸다.
‘그리고 종초홍이 있었지.’
하나 종초홍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훗날 불사검협이라 불리는 무당파의 차기 장문인이었기에 자세히 살피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종초홍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천문진인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하나 종초홍은 무림맹 비선각으로 파견을 나가 있었으니 무당산에 있지 않았어.’
이훤의 미간은 점점 주름을 늘려갔다.
‘결국 천문진인의 죽음은 무당파에서 말하는 것이 전부잖아.’
죽기 직전에 비급을 남겼다면 배신을 한 악재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런 자가 살아 있을 때 고결함을 지키다가 죽기 전 날 비급을 만들었을 리 만무했다. 악재가 그랬듯 그 또한 오랜 세월 신마의 심득을 파헤쳤으리라.
그 결과가 비급으로 등장했을 뿐이다.
이훤은 한 숨을 내쉬었다.
‘믿을 놈이 한 명도 없구나.’
망아취자가 그런 이훤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봤다.
“또 무슨 수작을 꾸미는 게냐?”
“무슨 소리세요?”
“네 놈의 표정이 주원경을 빼앗아 가던 때와 똑같아.”
이훤은 피식 웃으며 화산연맹의 발족식에 대하여 설명했다. 그리고 망아취자의 재출도를 무림맹이 주최하는 무림대회로 잡았다는 것도 알렸다.
“네 마음대로 내 행보를 정해?”
망아취자가 화난 척 인상을 썼다.
하나 이훤에게는 조부의 투정처럼 보일 뿐이다.
“안 그러면 평생 이곳에 계실 거잖아요. 제가 꽃을 깔아드릴 테니 떵떵거리면서 강호행도 하고 그러십시오.”
“천룡전은 어쩌고?”
“비밀은 숨겨야 비밀인 겁니다. 모두 까발렸으니 저들도 이제 대놓고 움직이지 못할 거예요. 그냥 편하게 옛 친구도 찾아보시고 그러십시오.”
망아취자는 아닌 척하지만, 벌써부터 강호행을 떠올렸는지 애써 웃음을 참았다.
“한데 화산연맹이 발족할 때 나서면 화산의 면이 더 서지 않겠느냐?”
이훤은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나의 산에 호랑이가 두 마리일 수 없고, 하늘에 태양은 하나여만 하지요.”
“에라이! 네 놈이 돋보이려고 나를 뒤로 미뤄?”
“만매만전의 저자가 누구지요?”
망아취자는 이훤의 너스레에 인상을 쓰며 시선을 돌렸다.
“에잉!”
“매화의 계절이 다가옵니다. 조매는 제가 될 터이니 만매는 스승님이 하세요.”
이훤이 아껴뒀던 술을 뇌물처럼 내밀자, 망아취자는 못이기는 척 받아들었다.
“네 뜻대로 하여라.”
“그럼 저는 잠시 산을 내려갔다 오겠습니다.”
“또 어디를 싸돌아다니려고?”
“종남파에 심어놓은 매화가 잘 자라나 보려고요.”
이훤은 종남파가 위치한 서쪽이 아니라 남쪽으로 향했다.
이미 하오문을 통해 종초홍의 위치를 확인한 상태였다.
‘지금 당장 무당산에 가서 난장을 피워도 누구 한 명 제대로 대답할 리가 없다.’
그렇다면 외부로 나와 있는 종초홍을 통해 단서를 추적하는 것이 옳으리라. 다만 종초홍의 위치가 생각보다 멀었기에 삼 일에 걸쳐 경공을 펼쳐야 했다.
- 하오문 중경 지부에서 비선각의 부각주의 행적이 올라온 적이 있습니다.
하여 이훤은 섬서성 남단의 중경시로 향하는 중이다
중경은 장강이 관통하는 지역으로 중원이라고 보기에 애매한 장소였다. 하나 장강이 지나가는 탓에 제법 물산이 모여 성세를 이뤘다. 강호에서 중경의 중요도는 마교로 정리된다. 신강의 마교가 발호할 때 일차 저지선은 청해성의 곤륜파와 사천성의 청성파였다. 마교가 발호하면 두 방파가 몸으로 막는 사이 중경의 지부에서 강호 전역에 정보를 전달했다. 그러니 이훤의 목적지는 당연하게도 무림맹 중경 지부였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변경이나 다름없지만, 지부의 문지기는 제법 예의를 갖췄다. 하나 촌각을 다투는 이훤이 문지기에게 시간을 낭비할 리 만무했다.
“비켜봐!”
이훤은 달리던 기세 그대로 담을 넘었고, 문지기가 호각을 불어 경종을 울렸다.
“적이 침입했다!”
사방에서 수십 명의 무인들이 몰려들었다.
하나 고만고만한 무위에 눈에 띄는 자가 전무했다.
그도 그럴 것이 중경 지부의 목적은 정보 전달이다. 그렇기에 무인들보다 전서구를 관리하는 이들이 더 많았다. 이훤은 드잡이 질을 할 필요도 없어 가장 큰 건물로 뛰어들었다.
“나 이훤이다.”
지부장은 업무를 보던 중 검을 뽑았다.
“웬 놈이냐?”
이훤이 이내 취선관주와 만매만전을 연이어 거론했지만, 지부장은 모르는 눈치였다. 무사통과를 예상했던 이훤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비선각 부각주인 종초홍의 의형이다. 지금 당장 종초홍을 만나야겠어.”
“무림맹 인사의 동향은 외부로 발설할 수 없소.”
이쯤 되면 대화로 해결할 상황이 아니었다.
술 한 잔 마시지 않고, 삼 일을 달려온 상태가 아닌가.
지금까지 참은 것도 용했다.
퍽!
일격에 지부장을 기절시키고, 서류를 살폈다.
“지부장이 공격당했다!”
“인근 방파에 지원을 요청해!”
수십 명의 무인들이 지부장의 안위를 걱정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하나 이미 이훤의 신위를 목도했고, 지부장이 기절한 상태였기에 누구 한 명 멋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건 뭐야?”
이훤은 미간을 좁혔다.
종초홍은 무당파의 직전제자이면서 무림맹의 정보조직인 비선각의 부각주다. 그런 그의 행적이 시진 단위로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감시당하고 있는 거야?”
아무래도 이훤과 공조하는 과정에서 무림맹의 정보를 허락 없이 알려준 벌을 받는 듯했다.
‘그래서 중원이 아니라 산서성이나 중경과 같은 변경만 돌아다니고 있었군.’
이훤은 일말의 책임을 느끼며 종초홍의 마지막 위치를 찾았다.
“봉황회의 자료를 확인했다고?”
그는 고개를 돌려 중경 지부의 무인들에게 물었다.
“봉황회가 뭐하는 곳이야?”
“놈! 무림맹 중경 지부를 기습하고도 무사할 성 싶으냐!”
아직 강호 돌아가는 꼴을 모르는 자들이 너무 많았다.
이훤은 혀를 찼다.
“이왕 악당이 됐으니······.”
그는 지부장의 멱살을 쥔 채 다시 물었다.
“대답하지 않으면 지부장의 생사는 장담할 수 없다! 너! 그래, 너! 대답하지 않으면 네가 지부장을 죽이는 거야!”
< 55, 열혈(熱血) 취마.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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