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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마신-131화 (131/226)

< 54, 매화의 계절. >

54, 매화의 계절.

이훤이 삼일 후 낙안봉에서 내려왔다.

삼 일 내내 술을 퍼마셨다는 의미였다.

한데 그가 하산하는 순간 사방에서 도인들이 몰려왔다.

“취선관의 이 대협을 뵙소이다.”

“취선관주께서 돌아오셨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오히려 이훤은 어리둥절해하며 도인들의 환대를 받아야 했다.

‘그 동안 용모파기를 얼마나 퍼트린 거야?’

하나 그들로 인해 몇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새롭게 태어난 화산연맹의 수뇌부는 현재 광녕화산이 된 화산파의 진무궁에서 업무를 처리했다. 한데 섬서성 곳곳에서 기부금이 쏟아져 들어오는 통에 새롭게 전각군을 건설 중이란다. 수뇌부는 화산의 삼대 봉우리 중 유일하게 인적이 드물었던 선인봉을 화산연맹의 근거지로 삼았다. 그러니 전각군이 완성되면 연맹의 수뇌부는 물론이고, 화산의 비처는 연화봉이 아니라 선인봉으로 바뀔 터였다.

‘서 장문인이 잘도 수락을 했군.’

이훤은 화산파의 장문인이었던 서화종을 떠올리며 탄성을 내뱉었다. 서화종은 무공과 인품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뤄서 수성에 최적화된 도인이다. 그렇기에 변수에 취약했고, 압박에 쉬이 무너지는 경향이 도드라졌다. 한데 수백 년에 걸친 화산파의 역사를 뒤로 한 채 화산연맹을 만들었으니 역사에 이름을 새겨 넣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훤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라더니.’

회귀 전 서화종은 화산파의 몰락과 함께 시신도 남기지 못한 사라졌다. 한데 지금에 와서는 연맹의 한 축이 되어 화산파의 명맥을 잇지 않았는가.

‘잘 할 것이야.’

수뇌부가 공평하게 권력을 나눴다고 해도 머릿수가 가장 많은 화산파에 힘이 실릴 것은 자명했다. 하나 이훤이 보았던 서화종이라면 권세를 누리거나, 이권을 탐하지 않으리라.  그 또한 화산에 대한 사랑과 존경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터였다.

그래서 만나러 왔다.

“다녀오마.”

이훤의 혼잣말에 은밀하게 뒤를 따르던 탈마가 술병 한 개를 던지며 사라졌다. 술 병의 찰랑거림을 즐기며 연화봉에 올랐다. 어느덧 무더위가 맹위를 떨치던 계절이 지나고, 솜털을 흔드는 선선한 날씨가 이어졌다.

이훤은 콧노래를 부르며 진무궁으로 들어섰다.

망아취자는 취중에 화산연맹의 수뇌부가 목이 빠져라 기다린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하나 스스로 내키지 않았다면 나서지 않았으리라. 그리고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을 할 때의 이훤은 매우 정중했다.

“취선관의 이훤입니다.”

대전의 팔선탁에는 몇몇이 이훤을 기다렸다.

광녕화산의 대표인 서화종과 관윤화산의 서평이 중심이다.

회귀 전 쇠락했을 때의 장문인과 멸문 후의 장문인이 한 자리에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도 죽지 않았고, 화산도 건재했다.

“이제야 제대로 취선관주께 인사를 드립니다. 만매만전을 공유하시려는 마음은 아직도 제대로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 흉중의 큰 뜻만은 감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서평의 인사였다.

“화산의 은인이신 취선관주께서 무사히 귀환하심을 환영합니다. 화산은 언제나 취선관주의 뒤를 따를 준비가 되었으니 이 자리를 편하게 여기소서.”

서화종의 감사였다.

이훤과 안면이 없는 진박화산의 태극관주와 만류화산의 각상동주가 눈인사를 했다. 하나 두 사람은 시간만 허락된다면 이훤을 붙잡고 만매만전을 논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기색이다.

‘노인네들에게 낭비할 시간은 없다고.’

좋은 술이라도 싸들고 온다면 모를까.

이훤은 덕담을 건넸다.

“연맹의 신뢰가 공고하여 화산의 모든 도인이 한 마음이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편제는 정리가 되었나요?”

서화종이 눈짓을 하자, 서평이 입을 열었다.

그것만 봐도 초대 화산연맹의 맹주는 서평이 분명했다.

“이미 내부적으로 연맹의 편제가 정리됐고, 발표만 남았습니다. 하나 아무래도 선인봉의 공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더군요. 하여 근 시일 내에 좋은 날을 잡아서 강호에 화산의 건재함을 알릴까 합니다.”

이훤은 알고 있지만, 애써 물었다.

“어떤 분이 연맹의 수장을 맡게 되셨습니까?”

세 사람의 시선이 집중됐다.

서평은 의관을 정제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하며 말을 이었다.

“부족하나마 제가 맡게 되었습니다.”

그는 혹시나 이훤이 반대하지는 않을까 우려하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출신부터가 화산파였고, 매화검주와 돈독한 사이가 아니던가.

하나 이훤은 빙긋 웃으며 술병을 내밀었다.

“술 한 잔 정도는 괜찮으시겠지요.”

서평은 눈을 끔뻑이며 좌우를 살폈다.

서화종은 이미 노군을 통해 이훤의 주량을 알고 있었다.

그는 빙긋 웃으며 술병을 잡았다.

“연맹의 수장과 화산의 은인에게 제가 먼저 한 잔 따르겠습니다.”

그 순간 술병의 주둥이가 허공을 향했다.

서화종이 실수라도 한 것처럼 병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서평은 엄지와 검지로 술잔을 튕겼다. 핑그르르 돌던 빈 잔이 저절로 떠오르더니 허공에 흩뿌려진 술을 한 방울도 빼놓지 않고 담았다.

이훤은 탄성을 흘렸다.

“호오.”

지난 번 적도의 침입 때 서평의 무위를 견식하지 않았던가. 노군과 동수 내지는 반 수 위로 여겼다. 그 정도만 해도 당금 화산파에서는 따를 자가 없었다. 한데 몇 달 사이 서평의 실력은 한 단계 더 상승한 상태였다.

서평은 부끄러운 듯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이 또한 취선관주께서 베풀어주신 만매만전의 덕입니다.”

“네, 그 훌륭한 비급을 제가 만들었지요.”

이훤은 지금쯤 배를 잡고 아파할 망아취자를 떠올리며 자화자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가 절명곡의 비사를 널리 알린 탓에 망아취자는 더 이상 숨을 필요가 없다. 그렇기에 날을 잡아 화산에 생존 소식을 알리려는 중이다. 하나 망아취자는 이제 와서 만매만전의 저자임을 알릴만큼 욕심 많은 자가 아니었다.

공짜로 비급을 얻은 기분으로 호기롭게 외쳤다.

“저도 한 잔 주시지요.”

서화종은 이미 몇 번이나 이훤의 무공을 견식하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서평에게 따를 때보다 더욱 격렬하게 술병을 휘저었다.

“어!”

태극관주는 경악으로 물든 신음을 흘렸다.

“아.”

각상동주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도 그럴 것이 허공으로 흩뿌려진 술이 저절로 뭉쳐들더니 만개한 매화의 모양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이내 환영처럼 흩어지며 빈잔에 담겼다.

이번 일을 기획한 서화종조차 경외심을 숨기지 못했다.

화산연맹의 수뇌부인 네 명의 도인이 스스로 일어나 손을 모았다.

“오늘 취선관주로 인해 개안을 했습니다.”

이훤은 너스레를 떨었다.

“하하하! 별 것 아닙니다. 만매만전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지요.”

몇 순배가 돌고 난 후에야 본론을 꺼냈다.

“화산파의 이름을 지우고, 연맹으로 태어나면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이가 많을 겁니다. 시류에 영합하느라 전통을 버렸다고 모함을 하겠지요. 대비책이 있습니까?”

이훤의 물음에 네 명은 말을 아꼈다.

알고는 있으나, 해결책이 없기 때문이다.

그럴 줄 알았다.

구습을 타파하고, 새 편제에 대한 논란을 저들이 모를 리 없다. 하나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했기에 저들끼리 추켜세우기 급급했으리라.

- 열심히 하면 알아주겠지.

-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 될 수도 있다.

하나 이훤은 매화가 만개한 화산에 그런 오명이 덧씌워지는 걸 용납하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화산연맹이란 화산의 수려한 풍광을 지키는 방벽이나 마찬가지였다.

“각지에서 기부금이 들어오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돈을 모조리 사용해서라도 연맹의 발족은 만천하에 알리세요. 없으면 고리 사채라도 끌어다 쓰셔야 합니다. 그리고 종남파를 비롯한 섬서성의 모든 방파를 참석하게 만드세요. 또한 인접한 산서, 하남, 호북, 감숙의 방파에도 초청장을 보내도록 하세요. 첫 단추를 잘못 꿰면 끊임없이 연맹의 존재를 부정당할 겁니다. 내일은 없다고 생각하시면서 진행하세요.”

“시간이 부족합니다.”

이훤은 빙긋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중추절까지는 될 겁니다.”

서평은 난색을 표하며 입을 열었다.

“아시다시피 중추절은 매해 무림맹의 대회의가 열리는 기간입니다. 그리고 이번 중추절에는 대협의 선포로 인해 무림대회까지 개최한다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면 대협의 계획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그 때 서화종이 더듬거렸다.

“설마?”

이훤은 헤죽거리며 말했다.

“서 장문인께서는 그래도 저와 몇 번 손발을 맞춰보셨으니 눈치를 채셨나 보군요.”

“제가 생각하는 그겁니까?”

“그겁니다.”

서화종은 수뇌부의 시선을 받으며 한 숨을 흘렸다.

“무림맹에 인편을 보내 대회를 중추절 이후로 미뤄달라고 요청을 해야겠습니다.”

좌중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당금 강호는 오랫동안 정파의 세상이었고, 무림맹은 대표로서 군림하지 않았던가. 지금껏 소림이나 무당, 남궁세가라고 해도 중추절에는 무림맹으로 모이는 것이 관례였다.

태극관주가 눈을 끔뻑이며 말했다.

“아니 그게 무슨······.”

망발이라고 하기에는 눈앞의 이훤이 너무 해맑았다.

이훤은 박수를 치며 주위를 환기시켰다.

“중추절 화산연맹의 개최를 널리 알립시다. 아! 그리고 이 기회에 화산연맹의 개념을 좀 더 넓혀보는 건 어떻습니까?”

“그건 또 무슨······.”

이번에도 태극관주가 말끝을 흐리며 눈치를 봤다.

곱게 빗어 넘긴 머리카락이 산발이 된 것으로 보아 정수리에 땀이 좀 샘솟은 듯했다.

“섬서무림 전체를 연맹에 포함합시다. 대표는 화산이니 응당 화산연맹이 되어야겠지요.”

태극관주는 아예 말을 꺼내지 않았다.

‘누가 봐도 섬서연맹이라고 해야 하잖아!’

하나 그가 결연한 이훤의 눈빛을 마주하니 울분은 입안에서만 맴돌다가 사그라졌다. 아예 한 쪽 귀로 듣고, 한 쪽 귀로 흘려야 장수하지 않을까 싶었다.

이훤은 울상이 된 태극관주를 다독이듯 말을 이었다.

“곧 산동성에서도 연맹이 탄생할 겁니다.”

“아니! 그건 또 무슨······.”

태극관주는 방금 전의 결의를 잊고, 또 반문했다.

“합니다. 그러니 화산연맹은 선배로서 부끄럽지 않게 대규모로 발족식을 열어야겠지요.”

서화종은 서평과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는 이미 이훤으로 인해 종남파의 상황이 어찌 변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종남파의 속내가 어떻듯 그들은 거절할 수 없으리라.

“취선관주께서 만들어주신 판입니다.”

서평은 결심한 듯 단호하게 말했다.

“최선을 다해 이행해보겠습니다.”

이훤은 빈 병을 흔들며 아쉬움을 달랬다.

“그럼 초청장이 돌아올 즈음 다시 봅시다.”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섰다.

태극관주는 뒤늦게 진무관의 바닥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취선관주의 강호는 자신을 중심으로 도는 듯하군요.”

“허허, 실상이 그렇지 않습니까.”

서화종이 말을 받았고, 서평이 탄성을 흘렸다.

“제법 성취를 이뤘고, 연맹의 선봉이 되어 정진하려 했거늘······. 취선관주는 이미 닿지 못할 곳에 오르셨군요.”

각상도주는 창문을 넘어 가지를 뻗은 나무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중추절이면 얼추 이른 매화가 피겠군요.”

수뇌부는 조매(早梅)를 떠올렸다.

조매가 의미하는 건 한 가지다.

서화종이 빙긋 웃으며 말을 받았다.

“이제 곧 매화의 계절이로군요.”

< 54, 매화의 계절.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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