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 월하쟁패(月下爭覇). (2) >
검강(劍罡)이 날아드는 순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죄책감이 아니었다. 호기심과 호승심이 뒤섞인 채 절로 혈륜을 끌어냈다.
이훤의 눈이 번쩍였다.
벽력창 악재의 심득마저 얻어낸 상태가 아닌가.
‘한 가지 길만 정진했던 망아취자와의 싸움이라면······.’
뒷일을 생각하지 않을 가치가 충분했다.
솨아아아아아-
이훤은 미안한 척을 하려고 축 늘어트렸던 어깨에 힘을 줬다. 그 순간 손 끝을 타고 흐르는 기운이 팔황과 무극에 맺혔다.
그것은 불길이 되어 망아취자의 검강을 방어했다.
쩡-
절대지경에 발을 들인 고수와 경지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고수가 맞붙었다. 망아취자를 만류하기 위해 쫓아 나왔던 노군의 두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초절정의 벽에 막힌 그였기에 두 사람의 공방을 흐릿하게나마 엿볼 수 있었다.
‘맙소사! 더 강해졌구나.’
망아취자는 만매만전을 만든 이후 집착을 한 겹 더 벗어던진 듯했다. 이훤은 산동성에 다녀온 이후 한층 더 능수능란하게 무공을 펼쳤다.
“흥! 대가리에 열린 뚜껑을 닫아주려 했더니 이것저것 잘도 넣었구나!”
“나 없다고 혼자 술 마시면서 훌쩍거리실 줄 알았는데 건실하게 사셨네요!”
망아취자의 일갈을 이훤은 도발로 응수했다.
“에잇, 버릇없는 놈! 이거나 받아라!”
“언제까지 평범한 검으로 버티시려고요!”
강기와 강기가 쉼 없이 번뜩이며 폭음이 연이었다.
하나 낙안봉으로 올라가는 좁은 길목임에도 주변 풍광은 조금도 망가지지 않았다. 그만큼 두 사람은 기를 조율하는 능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리고 생사대적이 아닌 스승과 제자의 비무처럼 선을 넘지 않았다.
이제는 폭음도 사라졌다.
망아취자가 검을 뻗으면 이훤이 피했고, 반대로 팔황을 내리치면 망아취자가 밀어냈다. 파공음만 고막을 찢을 것처럼 울렸다.
“아.”
노군은 망아취자와 이훤의 비무를 보며 탄성을 연이었다.
‘기를 조율하여 수발하는 과정이 마치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사숙의 행보는 오랜 세월의 경험이라고 치자. 이훤의 무위는 마치 모든 상황을 예상한 것처럼 완벽하구나.’
그도 그럴 것이 폭음이 사라진 이유는 이훤으로 위함이다. 그가 기를 조율하여 망아취자와 직접 부딪치는 것을 피했고, 피해 없이 망아취자를 제압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한데 망아취자의 공세는 백 년의 고련을 통해 만들어진 최적의 투로였다.
파파파파팟!
이훤은 그런 망아취자의 공세를 모조리 무효화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예상했다는 듯, 준비된 상태로 맞받아쳤다.
‘아! 저걸 저렇게 받아서 흘리면 자연스럽게 다음 투로가 연결되는구나. 이래서야 두 사람의 공방은 마치 경연을 하듯 요철처럼 합이 맞는구나.’
이훤과 망아취자의 무공을 엿보니 깨알 같은 심득이 연이었다. 노군으로서는 두 사람을 보면서 체득하는 것만으로 힘에 부칠 정도였다. 심지어 천양지차나 다름없는 무위에 자괴감이 들어서 의욕을 잃을 뻔했다.
탈마가 보인 건 그 때였다.
그는 장공잔도를 건너지 않았기에 노군동 쪽에서 멀뚱히 서 있었다. 하나 자세히 살피니 탈마의 표정은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맙소사!’
지난 번 하산할 때만 해도 탈마는 묘한 재주를 지녔을 뿐 범인에 불과했다. 한데 이훤과 산동성에 다녀온 이후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눈을 빛내고 있지 않은가. 탈마 또한 이훤과 망아취자의 대결을 통해 무언가를 얻고 있을 터였다.
노군은 첫 대면부터 자신에게 형님이라 부르던 버릇없는 탈마를 떠올리며 호승심을 불태웠다.
‘질 수 없지!’
그는 혀끝을 깨물어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이훤과 망아취자의 신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강기와 강기가 허공에서 뒤섞였다.
각자 기의 수발과 조율에 통달했다.
그렇기에 충돌 대신 새끼를 꼬듯 뒤엉킨 채로 서로를 짓눌렀다. 하나 내력과 혈륜을 불어넣을수록 안정적이던 기의 흐름이 요동을 쳤다. 두 사람 모두 내기를 외부로 발현하면서 한계에 봉착한 게다.
이훤이 입꼬리를 올리며 눈인사를 했다.
망아취자가 화답하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 순간 장공잔도를 뒤흔들던 내력의 흐름이 자취를 감췄다. 한순간 협곡에 휘몰아치던 광풍마저 갈피를 잃고, 사그라졌을 정도였다.
“술 한 잔 하자.”
망아취자가 뒷짐을 진 채 말했다.
그리고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몸을 돌렸다.
이훤은 팔황과 무극을 해제한 후 망아취자의 뒤를 따랐다.
“벌써 술 익는 계절이네요.”
노군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낙안봉을 오르는 노소(老少)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사숙은 뚫지 못했고, 이훤은 뚫을 생각이 없었구나. 그렇다면 누가 이겼다고 보아야 할까?’
그가 침음을 흘리는 사이 장공잔도를 건너온 탈마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형님! 안주 만드셔야지요.”
*
취선관에는 예기치 못한 자들이 존재했다.
종남파의 칠대검호 중 한 명으로 무량패검이라 불린 장치결과 제자들이다.
“아직 있었어?”
이훤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장치결은 얼굴을 붉혔다.
‘네 놈을 따라갔다가 종남산에서 혈도에 잡힌 채 얼어죽을 뻔했다!’
하나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어찌됐든 종남파의 간자들을 색출하고, 문파를 바로세울 수 있었던 건 오롯이 이훤의 공이 아닌가. 장문인이 직접 매화나무를 종남파 내부에 심었고, 몇 번이나 서찰로 신신당부를 했다.
- 사제, 자네가 잡은 줄이 최고일세!
한 마디로 이훤에게 넙죽 엎드려서 만매만전에 대한 깨달음을 한 조각이라도 더 얻어오라는 의미였다.
“하하하! 취선관의 총관이자, 술을 관장하는 사람이 접니다. 제가 가면 어디를 가겠습니까? 그러지 않아도 관주께서 언제 오실지 모르기에 청소는 물론이고, 술 관리도 게을리 하지 않았지요.”
그러니 고마운 줄을 안다면 무공을 손봐달라는 뜻이다.
하나 이훤은 수염이 숭숭 난 사내와 염화시중이나 심심상인과 같은 고사를 흉내 내고 싶은 생각이 전무했다.
“아! 그럼 술 좀 내와요.”
“······.”
장치결은 이훤이 지나친 후에도 한참동안 눈을 끔뻑였다.
청관은 장치결의 눈치를 보다가 슬그머니 내뺐다.
“그럼 저는 먼저 가서 청소를 좀 해놓겠습니다.”
소연명 또한 사부를 위로하는 대신 본업에 충실하고자 했다.
“아! 노군께서 오시네요. 저는 그럼 주방으로······.”
잠시 후 취선관에 들어선 탈마가 환호성을 내질렀다.
“오늘은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 마시는 겁니다!”
그렇게 흥겨운 연회가 열렸다.
좋은 날이었기에 종남파의 제자들도 함께 했다.
일곱 명은 바위에 앉아서 술과 안주를 즐겼고, 이훤과 망아취자가 돌아가면서 검무를 췄다. 한 사람이 춤을 추면 한 사람이 시를 읊었다. 장치결이 어쭙잖게 검무를 추겠다고 나섰다가 탈마에게 엉덩이를 얻어맞았다. 술에 취한 청관이 실소를 흘렸다가 장치결에게 끌려가기도 했다. 소연명이 오늘 먹은 음식을 확인하러 사라지기도 했고, 탈마가 잽싸게 노군동에 다녀와서 술을 채워 넣었다.
탈마가 세 병의 술을 동시에 들고 입에 쏟아 부으며 외쳤다.
“오늘 취마라는 별호를 훔쳐보겠습니다!”
그렇게 무릉도원을 재현하듯 아무 생각 없이 마시고, 먹었다. 결국 백여 병의 술을 비웠고, 한껏 재워뒀던 식재료가 바닥을 드러냈다.
연회는 삼 경 즈음 끝났다.
이훤은 망아취자가 손짓을 했을 때 기다렸다는 듯 따라나섰다. 아마 노군과 탈마도 이런 자리를 위해 알아서 물러갔으리라.
“다친 곳은 없고?”
망아취자의 말에 이훤은 빙긋 웃었다.
“화부터 내셔야지요?”
“그러기에는 내 수양이 오죽 깊어야지.”
“이러다 뜬금없이 등선하고 그러시는 건 아니지요?”
이훤의 정감 어린 농에 망아취자는 엉덩이를 걷어차는 걸로 응수했다. 피하려면 충분히 피할 수 있었으나, 오히려 엉덩이를 내밀었다.
퍽!
몸뚱이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얼마 만이던가?
이훤은 화끈한 엉덩이를 매만지며 입술을 삐죽였다.
“백 년은 더 사시겠네.”
“네 놈 덕분에 십 년도 못 살게 생겼다!”
망아취자는 절명곡의 비사를 전했던 매화 숲 너머의 절벽가로 데리고 갔다. 절벽 밖으로 두 다리를 내놓고 앉아야 하는 곳이지만, 두 사람은 경공까지 펼쳐가며 엉덩이를 붙였다. 돌을 파내 만든 의자와 의자 사이에는 적당한 넓이의 바위가 존재했다. 그 아래 노군이 준비했을 안주가 가을을 알리는 서늘한 바람 속에서도 온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쪼르륵-
망아취자는 빈 잔에 술을 채운 후 말했다.
“월하독작을 기억하느냐?”
시선 이백의 작품 중에서 가장 즐겨 읊던 시가 아닌가.
이훤은 대답 대신 월하독작의 두 번째 수를 읊조렸다.
“하늘이 만약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주성이 하늘에 있지 않았을 것이고······.”
망아취자가 술잔을 기울여 목을 축인 후 시를 받았다.
“땅이 만약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주천이 땅에 있지 않았으리라.”
이훤은 망아취자의 낭랑한 목소리를 들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하아.”
첫 맛이 알싸하면서, 입안에 머금는 순간 매화향이 번지며, 입안에서 굴리니 달콤함이 배가됐다. 그리고 목에 넘기는 순간 아침 이슬이 풀잎을 구르듯 소리 없이 스며들었다. 어느덧 식도를 지나 뱃속을 가득 채운 술 향기가 단전마저 자극하는 듯했다. 달빛 아래 탁 트인 전경이 끝없이 펼쳐졌으니 호연지기가 절로 샘솟았다.
월하독작(月下獨酌)의 다음 구절이 혈륜과 함께 낙안봉 정상에서 울렸다.
“하늘과 땅이 이미 술을 좋아했고, 내 곁에 술과 같은 친우가 있으니 술을 사랑함에 있어서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구나.”
망아취자는 빙긋 웃었다.
하늘과 땅만 거론하던 시구에 은근슬쩍 자신을 끼워 넣어 추켜세우니 기쁨을 숨기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는 석 잔의 술을 연달아 들이켰다.
“크하! 술 석 잔을 마시면 대도와 통하고...”
이훤이 술을 병째 들이키며 시를 받았다.
“한 말의 술은 자연의 도리와 맞아떨어지네.”
흥취가 가득한 상태로 등 뒤에서 매화향이 전해지니 무릉도원이 따로 없었다.
하나 망아취자가 월하독작의 두 번째 수를 마무리 짓는 순간 미소를 지워야 했다.
“취중에 즐거움을 얻으면 족하지. 굳이 깨어 있는 사람에게 전하지 마라.”
이훤은 빈 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물었다.
“제가 잘못한 겁니까?”
“글쎄다.”
“스승님에 대한 염려가 부족했던 것은 맞지요. 하나 더 이상 천룡전의 음모에 끌려 다니지 않으려면 회심의 한 수가 필요했습니다.”
망아취자는 새 술을 꺼내 잔에 따랐다.
“처음에는 화가 났다. 너를 믿고 전한 말이 퍼졌으니 실망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이리라. 하나 화를 낼 사람이 앞에 없으니 다른 생각이 들더라. 이제 너는 암중의 적을 밝은 태양 아래로 끌어낸 셈이다. 거기에 더하여 무림맹까지 자극했으니 혹여 네가 다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됐다. 한데 오늘 너를 보니 그 감정마저 사라졌다.”
그는 이훤에게 술병을 내밀었다.
이훤이 공손히 술잔을 내밀자, 호박색의 술이 깊은 향을 풍기며 흘러내렸다.
“네가 하려는 일이니 응원하고 싶어졌다.”
“화산 아래 모인 자들을 보셨습니까? 저들은 언제든 적도로 변하여 화산을 침탈할 수도 있습니다.”
망아취자는 피식 웃었다.
“너로 인해 화산파의 비전을 되찾았고, 화산이 하나로 뭉쳤다. 이미 옛 영화는 되찾은 셈이고, 나아가 섬서성의 으뜸으로 칭해진다. 종남파의 장문인이 장문사질을 찾아와 그간의 결례를 사과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아느냐?”
그는 자신의 잔마저 채운 후 두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눈썹까지 잔을 들어 올린 후 말을 덧붙였다.
“화산은 취선관주에게 더없이 큰 은혜를 입었으니 취선관주의 행보에 화산의 연맹이 날개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훤은 망아취자의 감사에 말을 잇지 못했다.
무슨 일이든 자신을 응원해주겠다는 망아취자의 말에서 피를 나눈 이들에게서나 받을 법한 따스함이 전해졌다.
망아취자는 턱짓을 했다.
“술은 술이다. 그렇기에 달 아래 홀로 술 잔을 기울여도 괜찮고, 남에게 정취를 알려주지 않아도 좋다. 하나 강호는 강호다. 수많은 사람이 뒤섞여 저마다의 삶을 사는 복잡한 세상이다. 억지로 막을 수도, 막아서도 안 되는 것이 순리가 아니겠는가?”
이훤은 그제야 망아취자처럼 환하게 웃으며 술 잔을 비웠다.
“월하독작은 이백에게 맡기고.”
망아취자가 자식을 보듯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월하쟁패하여라.”
< 53, 월하쟁패(月下爭覇).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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