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 월하쟁패(月下爭覇). >
53, 월하쟁패(月下爭覇).
사객(士客)은 경공을 펼쳤다.
석가장의 임무가 해결된 이상 더 이상 실력을 숨길 필요가 없다. 전력으로 내달리는 그가 발을 뻗을 때마다 삼 장씩 나아갔다.
잠시 후 숲이 보였다.
하나 정신을 차리니 어느 순간 안개가 자욱했다.
그러나 흑의인의 명령에 따라 의심하지 않고 나아갔다.
그 순간 거대한 분지가 등장했다.
사객은 언덕의 중턱에서 분지를 내려다보며 탄성을 흘렸다.
“이런 곳에 숲이 있다니······.”
하나 높다란 절벽 사이로 나 있는 소로에 들어서는 순간 탄성은 탄식이 됐다. 협곡의 좌우로 치솟은 절벽의 중앙 부분에 현판이 매달린 채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렸다.
하나 현판의 내용을 읽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 자. 림.”
사객은 흑의인의 심복이자, 오좌의 차석이다.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어야 하는 그로서도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사자림(獅子林)은 그런 장소였다.
“주군께서 쉬시는 곳이 오대금지였다니.”
오대금지(五大禁地)는 구파오가만큼 유명하거나, 오래되지 않았다. 그러나 호사가들의 안주 거리로는 구파오가를 뛰어넘을 만큼 소문이 자자했다.
- 오대금지에 가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
밑도 끝도 없는 소문이다.
하나 백 년 넘게 사라지지 않는 소문이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은 존재하는 것만 알려졌을 뿐 위치와 구성이 장막에 가려진 상태였다. 게다가 강호의 안위나 명예, 이권을 멀리 했기에 출도 하는 일도 드물었다.
그 중 사자림이라면 동해 보타암과 더불어 신공절학으로 추앙받는 금지가 아니던가.
“주군.”
사객은 사자림에 들어서자마자 흑의인에게 안내됐다.
흑의인은 언제나 그렇듯 밝은 미소로 사객을 맞았다.
“고생하셨어요.”
“보고부터 하겠습니다.”
“좋아요.”
사객은 부복한 채 말을 이었다.
“태륭삼노와 비천칠복, 그리고 비마대주의 시신을 확인했습니다. 석가장의 가솔은 총 삼백이십 명이 참전하여 백여던일곱 명이 죽었습니다.”
흑의인은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다면 대부인의 행세를 하던 애난의 수족들은 모두 사라졌군요.”
사객이 황보철조에게 만매만전을 노리는 자들로 소개한 이들 중 대다수는 애난이 몰래 키우던 비밀 세력이었다. 한데 그들 모두가 죽었으니 석가장은 주인 없이 잘 익은 밥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제 석가장을 품으셔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겁니다.”
“좋아요.”
흑의인은 웃었다.
그가 색마의 유인책에 기꺼이 걸려든 이유는 하나였다.
화산의 선인봉에서 사군사도 중 한 명인 애난이 죽었으니 그녀의 본거지를 차지하기 위함이었다. 결국 뜻대로 이뤄져 애난의 심복이 모두 죽었으니 꽤 유명한 세력인 석가장을 차지하는 건 어렵지 않으리라.
그때 오척 단구의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들어섰다.
사객은 노인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노인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사객에게 예를 표했다.
만리투안(萬里透眼)이라 불리는 노인은 오좌의 세 번째였다. 결국 애난이 이훤에게 전한 것처럼 밀법대종사나 다른 이들은 다른 사도들에게 보여주는 가짜 오좌에 불과했다.
앉아서 만 리를 본다는 지자(智者).
곧 흑의인의 머리를 자처하는 자였다.
만리투안은 흑의인에게 말을 건넸다.
“석가장을 차지하면 배후의 청암산 또한 수중에 넣을 수 있습니다.”
세상은 알지 못하나 청암산 자체가 석가장의 사유지였다.
“청암산 내부의 안제교를 장악한다면 정상의 비처는 주군의 것이 되겠지요. 이로서 사군사도의 모든 걸 얻으셨으니 미리 감축 드립니다.”
아직 사군사도에는 애죽과 애국이 살아남았다.
하지만 만리투안은 청암산으로 인해 두 여인을 장악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그 일은 사객에게 맡기도록 할 게요.”
사객은 고개를 조아려 감사를 표한 후 한쪽으로 물러났다.
“삼금천은 어찌 되었습니까?”
만리투안은 난색을 표하며 말을 아꼈다.
“흐음.”
삼금천(三禁天)은 중원의 오대금지와 버금갈 만큼 유명한 새외의 삼대 세력을 뜻했다.
이훤과 청천빙화주로 얽혔던 북해빙궁(北海氷宮)과 밀법대종사의 밀천동을 무너트린 서장의 혈불사(血佛寺), 그리고 해남도에 존재한다는 진위검총(眞衛劍塚)이다.
“혈불사는 밀법대종사의 시신으로 거래를 하고 있으나, 북해빙궁과 진위검총은 쉽지 않습니다. 빙궁은 궁주가 바뀐지 얼마 되지 않았고, 진위검총은 접근 자체가 어렵지요.”
흑의인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방실방실 웃었다.
하나 오좌에 속한 이들은 흑의인의 속내를 알아차렸다. 강림혼요술로 인해 웃고 있을 뿐 분노하고 있음을 말이다.
“이훤이 생각보다 빠르게 성장했고, 생각지도 못한 일을 벌였어요. 이쯤 되면 수거를 해야 할 듯한데······.”
만리투안은 해결책을 궁리했다.
하나 그가 답을 내기 전 대전 밖에서 일갈이 들려왔다.
“사자림주께서 드십니다!”
문이 열리고 들어선 이는 흑의인을 업고 천하를 종횡하던 노인이었다. 그는 평소와 달리 금의를 걸쳤으나, 사방팔방을 뻗친 머리카락은 그대로였다. 그 모습이 마치 맹수의 제왕인 사자를 연상케 했다.
사자림주 광무제(廣武帝).
오좌의 수장인 그는 잠시 흑의인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회한이 가득했다.
하나 금세 눈빛을 지우고 우렁찬 일갈을 내질렀다.
“더 이상 시간을 끌지 마십시오. 이훤의 사지를 자르고, 당장 데리고 와서 신마의 깨달음을 토해내게 해야 합니다.”
만리투안이 한 숨을 흘렸다.
“그러면 좋겠지만, 잡아온다고 해서 토설하겠습니까?”
광무제는 만리투안을 보지 않은 채 흑의인만 응시했다.
“지난 번 화산의 낙안봉에서 드렸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흑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매진하는 자는 위험하나, 미련이 남은 자는 잡기 쉽다고 하셨지요. 그래서 그 때 목표를 눈앞에 두고 물러선 것이 아닙니까?”
사자림주가 살기를 드러냈다.
“그건 모두에게 해당하는 사안입니다. 이훤이 칠대괴마를 운운하며 세력을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그 중 탈마와 색마는 지근거리에서 보필 중이고, 다른 이들은 따로 떨어져 있지요.”
흑의인은 호기심을 보였다.
그는 사객에게 물었다.
“이훤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화산으로 돌아갔습니다.”
만리투안이 묘책을 찾아낸 듯 히죽거렸다.
“잘 됐군요. 악마는 벽력창 악재의 제자이니 쓸모가 있을 겁니다. 그러니 전마라고 불리는 예영영을 죽인 후 악마만 잡아오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사좌와 오좌를 보내서.”
흑의인은 은은한 살기를 드러내며 말을 이었다.
“전마의 목과 악마를 가져오세요.”
*
“형님, 우리 도망친 거지요?”
“아닌데.”
“아무리 봐도 도망친 건데요.”
이훤은 탈마의 투덜거림에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야. 산동성의 일이 끝났으니 집으로 돌아가는 거다. 그런데 이게 왜 도망치는 거야?”
하나 탈마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귀찮은 일을 미연에 방지하는 방법이라더니 술만 챙겨서 빠져나왔잖아요. 이게 도망친 게 아니면 뭡니까?”
이훤은 탈마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빠각!
“석가장하고 얽히면 관부와 유림이 개지랄을 떨 것이다. 이럴 때에는 슬쩍 빠져서 흥분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게 상책이야.”
탈마는 뒤통수를 만지작거리며 혼잣말을 했다.
“형님이 언제부터 그런 걸 생각했다고요.”
“그냥 만사가 귀찮아졌다. 그래서 집에 가고 싶을 뿐이야.”
그 말도 옳다.
매화군자라는 이름으로 협행을 할 때부터 산동성을 쑥대밭으로 만들 때까지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다.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중추절이 되면 무림맹도 강호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잠깐이라도 휴식을 취하려면 지금이 적기였다.
하나 한 번 시작된 탈마의 투덜거림을 멈출 줄을 몰랐다.
“그런데 왜 이렇게 느긋한 건데요?”
이번에는 이훤도 대꾸할 말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색마에게 뒷일을 맡기고, 헤어진 것이 벌써 이십 일 전이다. 그러니 지금쯤 화산에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 아닌가.
하나 두 사람은 여전히 식도락을 즐기듯 객잔과 주루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산동성으로 떠날 때의 술과 산동성에서 돌아올 때의 술이 다른 법이다.”
“무서운 거죠?”
탈마는 몸을 웅크리며 뒤통수를 보호했지만, 이훤의 손길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예기치 못한 대답이 들려왔기에 눈을 끔뻑였다.
“조금.”
“망아취자 어르신요?”
이훤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흔들었다.
“어찌됐든 그 분이 나를 믿고 해준 말을 멋대로 써먹은 건 사살이니까.”
그래서 발길이 무거웠다.
이훤은 더 이상 천룡전의 음모를 분쇄하면서 끌려 다니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공을 절명곡의 생존자들에게 넘겼다. 그리고 그 공은 자연스레 무림맹까지 넘어간 상황이다. 다른 생존자들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이 없다.
하나 망아취자는 달랐다.
사부였고, 아버지였고, 친구였다.
자신이 수십 년 동안 머물렀던 주원경마저 흔쾌히 내어준 사람이기도 했다. 혹시나 그런 사람을 실망시키지는 않았을까 우려가 됐다.
“그럴 거면 그냥 떠나던가요.”
“취선관을 두고 어디를 가?”
“땅문서도 없고, 관아에 등록한 것도 아니잖아요. 정 신경이 쓰이면 취선관이라고 새겨놓은 비석만 제가 훔쳐 와도 되고요.”
이훤은 연방 투덜거리는 탈마를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신의 심경을 읽고, 저만의 방식으로 위로를 해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낙안봉 정상이 곧 취선관이다.”
한참동안 생각에 잠겼던 이훤의 혼잣말이다.
탈마는 그제야 이훤이 심마를 떨쳐냈음을 알아차리고 소매를 잡아 끌었다.
“그럼 갑시다! 사실 나도 노군동이 제일 편해요.”
“야! 거기는 네 집이 아니잖아?”
두 사람은 내 집과 네 집의 경계에 관해서 싸우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하나 어느새 느릿하던 걸음은 경공을 펼치고 있었고, 머지않아 화산의 수려한 산세가 두 사람을 기쁘게 맞이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딱 술 한 잔만 더 하고 가자!”
술주정뱅이의 미련은 언제든 숨을 쉬듯 찾아오는 법이다.
*
결국 화산 아래 회음현으로 향했다.
회음현은 섬서성에서도 손꼽힐 만큼 큰 도시였다.
화산으로 인해 만들어졌고, 화산으로 인해 명맥을 유지할 만큼 관계가 깊었다. 하나 화산파가 쇠락한 이후 문파의 색채를 지우기 위해 애쓴 것도 사실이다.
“이거 뭐냐?”
이훤은 눈을 끔뻑였다.
떠날 때만 해도 회음현은 그저 마을이었다.
한데 곳곳에 나부끼는 깃발에는 화산의 상징인 매화를 수놓았고, 먹을 것을 파는 좌판에서는 매화 향이 가득했다. 매화전, 매화수, 매화술, 매화 당과를 비롯해 생전 처음 보는 음식이 즐비하지 않은가. 마치 회귀 전 초도각에서 화산파가 한 때 잘나갔던 시절을 추억하던 노고수의 연설을 들을 때와 같았다.
“화산파가 화산연맹으로 새로 태어난 덕인가요?”
그렇다고 하기에는 성장세가 너무 가파르지 않은가.
한데 길을 지나던 상인이 잠시 이훤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손을 모으며 포권을 했다.
“취선관의 관주이신 매화군자 이 대협이시군요! 저는 청풍표국의 표사로······.”
마치 전쟁을 승리로 이끈 개선장군을 대하듯 경외심이 가득한 인사였다. 그리고 표사를 시작으로 사방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다가와 인사를 했다.
‘이거 설마?’
아무래도 산동성의 위명이 여기까지 퍼진 듯보였다.
그리고 예상은 확신이 되었다.
화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에는 보지 못했던 전각군이 즐비했다. 현판을 살피니 섬서성에서 헛기침 좀 한다는 방파와 무관, 표국은 물론이고, 상단마저 지부를 낸 듯보였다. 그 말인즉슨 저들이 화산연맹을 숭상하여 기꺼이 화산의 그림자 안으로 들어왔음을 의미했다.
“크큭, 돈 냄새를 맡았구만.”
탈마의 현실적인 한 마디에 부풀었던 기분이 물 맞은 눈처럼 녹아내렸다.
하나 이훤은 기세등등하게 화산을 올랐다.
망아취자의 유일한 소망은 화산파가 옛 성세를 되찾아 강호의 명문으로 우뚝 서는 일이 아니던가. 한데 오늘의 회음현만 봐도 섬서성 내에서 화산을 거스를 곳은 보이지 않았다.
“하하! 이러다 칭찬 받는 건 아니겠지?”
이훤의 웃음은 장공잔도를 건너는 순간 산산히 부서졌다.
노군의 말을 전해들은 망아취자가 맨발로 뛰쳐나와 반겼기 때문이다.
“검강은 왜?”
망아취자는 벌개진 얼굴로 이훤을 향해 호통을 쳤다.
“대가리에 뚜껑이 열렸으면 개념이라도 좀 넣었어야지!”
그 말을 끝으로 강기가 날아왔다.
< 53, 월하쟁패(月下爭覇).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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