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마신-128화 (128/226)

< 52, 잔당(殘黨). (3) >

*

인(人)이란 사람과 사람이 기대고 있는 형상이라 한다.

그 말처럼 인간은 모일수록 용기를 내게 되고, 그럴수록 남에게 의지하기 마련이다. 하나 집단이 모여 지성을 발휘하면 좋으련만, 대부분 광기에 휘말리기 일쑤였다.

장원을 쳐들어온 적도들도 그러했다.

제대로 인 이름도 없이 그저 이곳저곳에서 뭉친 이들은 집단이 되는 순간 이유를 알 수 없는 신뢰 관계가 되었다. 그렇기에 누군가의 외침을 따라 이리저리 날뛰면서도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누구보다 빠르게 이훤을 찾아서 무릎 꿇리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없어. 아무도 없잖아!”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이들은 대장이 없다.

그렇기에 문제가 생겼을 때 우왕좌왕했다.

그 때 그들이 왔던 길목에서 화시가 솟구쳤다.

동시에 이훤의 일갈이 터져 나왔다.

“나를 찾느냐?”

적도의 이목이 집중됐다.

반면 이훤은 마뜩찮은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이것은 색마의 요청이었다.

이훤이 신위를 드러내고, 탈마와 색마가 호응한다고 해도 모든 적을 죽이는 건 불가능했다. 어차피 몇몇이 살아서 도망친다면 그들을 이용한다고 하더라. 그들의 입을 통해 이훤의 신위를 널리 알리는 게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이야기 속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멋있게 보여야 했다.

[형님! 최대한 화려하고, 큰 동작으로 죽여 버리세요.]

색마가 기껏 만들어준 판이 아닌가.

녀석의 노고를 생각해서라도 이 정도는 들어줄 만했다.

그렇기에 이훤의 목소리에는 평소와 달리 위험이 한껏 담겨 있었다.

“만매만전은 만인의 것이라고 선포했음에도 사사로이 욕심을 부린 죄! 황보세가의 가주가 죄를 인정했음에도 뉘우치지 않고 살육을 참지 않은 죄! 그 모든 죄를 물어 너희들을 용서하지 않겠다!”

회귀 전 정파의 대협들이 육대괴마를 향해 지껄였던 말을 응용해보았다. 그리고 적도들은 당시 육대괴마가 그랬던 것처럼 길길이 날뛰며 살기를 드러냈다.

“죽여!”

적대감과 살의, 고성과 욕설이 화살비처럼 쏟아졌다.

이훤은 두 팔을 늘어트린 채 적도의 접근을 지켜봤다.

그런 그가 술병을 높이 들고 기울였다. 입구를 통해 맑은 술이 쏟아졌다. 형형한 달빛을 튕겨내며 흘러내린 술이 입주변을 적시기 시작했다.

콸콸콸!

생각보다 멋진 모습은 아니었다.

하나 술을 모조리 마신 후 빈 병을 내던져서 만들어낸 광경은 꽤 멋졌다.

쇄애애애액!

빛살처럼 날아간 술병에 얻어맞은 놈의 머리통에서 핏물이 비산했다. 깨진 병의 파편과 핏물이 뒤섞여 좌우로 흩어지는 순간 비명은 전염병처럼 늘어났다.

십여 명이 외마디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괴, 괴물!”

하나 이훤은 저들과 말을 섞지 않았다.

비록 색마의 유인책에 걸렸다고는 하나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런 일에 합류할 리가 없지 않은가. 잠깐의 실수나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사람은 오늘이 아니더라도 오래 살지 못했다.

‘무엇보다 개개인의 사정을 감안하면 이 세상에 죽을 놈이 어디 있어?’

그렇기에 비조처럼 양 팔을 벌린 채 적진에 뛰어드는 순간 팔황과 무극을 움직였다. 천공혈륜겁의 팔 성은 팔황과 무극을 몸처럼 다룰 수 있게 만들어줬다. 패검이 손끝에 붙은 것처럼 길게 늘어나면서 금빛으로 번뜩였다.

이 정도면 색마도 만족하리라.

그렇기에 이훤은 이제 자신의 만족을 위해 팔황과 무극을 휘둘렀다.

악인은 지옥으로!

대협이나 영웅이기 때문이 아니다.

인간으로서 그저 악인이 꼴 보기 싫을 뿐이다.

“그러니 죽어라.”

나직한 한 마디가 흘러나오는 순간 금빛에 핏빛이 섞여들었다. 혈륜이 활성화되어 흩뿌려지는 순간 그걸 막을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될까. 저마다 십 수 년에 걸쳐 칼밥을 먹은 자들이 초 단위로 쓰러졌다.

절초를 펼치거나, 반격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저 짚단처럼 허물어졌다.

범인의 평정심이라면 살육이 이어질수록 망가졌으리라.

정파의 기재와 협객이 피의 굴레를 이겨내지 못하고 주화입마에 빠진 게 어디 한둘 이랴.

하나 이훤은 두 번의 삶을 살고 있다.

혈륜으로 인한 평정심이 아니라 회귀 전부터 단련한 마음가짐으로 인해 흔들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죽고, 또 죽여도 머뭇거림이 없다.

몸과 마음이 굳건한 상태로 온전한 실력을 펼치니 절대고수나 보일 법한 기세가 사방을 짓눌렀다.

그것은 집단이라는 광기에 휩싸인 자들에게 새로운 감정을 불어넣었다.

바로 두려움이다.

핏빛으로 뒤엉킨 채 날뛸 때마다 사람의 머리통과 사지가 찢겨서 비산했다. 강호의 싸움이 아니라 짐승의 싸움이고, 나아가 지옥도가 이렇지 않을까 주춤거렸다.

두려움이 섞이는 순간 머리가 맑아졌고, 손이 느려졌으며, 두 발은 땅에 박힌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아, 아아!”

누군가 칼을 던지고 돌아섰다.

애초에 사명감이나 동질감 따위는 전무한 관계였다.

그러니 누군가 첫 발을 떼는 순간 약자들은 본성을 드러냈다.

도주였다.

“여기서 나가야겠어!”

“살, 살려줘!”

다행히 이훤은 그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장원의 심처 쪽으로 거침없이 나아갈 뿐이다.

‘뒷일은······.’

‘내게 맡기라고요!’

하천은 넓지도 않았고, 깊지도 않았다.

절정의 무인이라면 용을 써서 넘어갈 정도는 됐다.

그러니 도주를 택한 적도들은 하천을 앞두고 있는 힘껏 내력을 끌어올렸다.

파팟!

그 순간 무너진 다리 근처에서 화살이 솟구쳤다.

갑작스런 화살 세례에 적도들은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몇몇은 화살을 맞고 허우적거리며 떨어졌지만, 어느 정도는 화살을 피하기 위해 몸을 비틀었다.

서걱- 서걱-

탈마가 등장한 건 그 때였다.

어둠 속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던 그가 살수처럼 균형을 잃은 적도들의 요혈을 베었다.

한 푼의 힘으로 한 치만 찔러도 사람은 죽는다.

그것을 증명하듯 허공에서 베고, 찔러서 죽인 자만 한순간에 다섯 명이다. 화살을 맞고 떨어진 자들의 최후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색마가 대나무를 잘라 놓은 듯한 통을 흔드는 순간 비침이 쇄도했다.

“아! 진싸 세상 많이 좋아졌네.”

청도대상단에서 취급하는 품목에는 간이 설치가 가능한 연노와 휴대가 용이한 암기도 포함됐다. 색마는 탄성을 흘린 후 대뜸 몸을 날려 박도를 휘둘렀다. 화살에 맞고, 암기에 맞은 자들이 비명과 함께 절명했다.

[다 죽이지 마!]

색마의 전음에 탈마가 코웃음을 쳤다.

[개소리! 우리가 대형인 줄 알아? 있는 힘껏 막아도 다 못 막는다!]

그 말은 곧 이훤은 다 죽일 수 있다는 소리다.

색마는 무인지경으로 적도들을 쳐내고 있는 이훤을 보며 탄성을 흘렸다.

“만인적이 따로 없구나!”

이훤은 탄성을 내뱉었다.

“옷이 바뀌었네!”

지금껏 그가 상대했던 건 대부분 낭인이다.

그들 사이에 간간히 색목인과 파계승, 또는 새외의 무인으로 보이는 자들이 섞였다. 한데 눈이 보이는 족족 때려잡다 보니 동일한 복장을 입은 자들이 확인됐다.

심지어 익숙한 무복이다.

황보세가였다.

이훤은 색마의 당부를 잊지 않았다.

- 형님, 외단주와 소가주는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그러지 않아도 죽인다!’

소룡대연에 소천뢰 수십 개를 집어던진 놈들이다.

심지어 가족인 황보태웅마저 개의치 않았다.

회귀 전부터 가족과 집에 대한 애착이 존재했던 이훤에게는 때려죽일 놈들이 아닐 수 없다.

“후우.”

숨을 내뱉고, 다시 들이마시는 순간.

이훤의 신형이 여덟로 갈라졌다.

지금까지는 그저 죽이는 행위였지만, 지금부터는 단죄를 위한 공격이다.

암천군림보를 극성으로 펼치는 순간 잔영이 흩뿌려졌고, 그들은 제각기 양 손에 금빛과 핏빛이 뒤섞인 강기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것이 황보세가의 중심부에 낙뢰처럼 내리꽂혔다.

콰콰콰콰콰쾅!

회귀 전 열다섯 명의 고수들을 상대로 대지를 뒤집었던 일격의 재현이었다. 그들도 배겨내지 못한 걸 황보세가의 무인들이 감당할 리 만무했다.

피와 살이 튀는 가운데 이훤의 신형이 섞여들었다.

푹푹푹푹푹푹!

그러던 중 등 뒤에서 제법 매서운 일격이 쇄도했다.

“가문의 원수!”

황보태룡이 전신으로 투기를 발산하며 덤벼들었다.

그가 내뻗은 주먹에는 녹빛 기운이 달빛을 밀어낼 만큼 휘황찬란하게 맺혔다.

“느려.”

이훤은 혀를 찬 후 빠르게 무극을 내리쳤고, 그 순간 강기의 물결이 공간을 좌우로 갈랐다.

촤아아아아악!

머리부터 사타구니까지 잘린 황보태룡의 시신이 폭사하듯 좌우로 튕겨졌다.

“태룡아! 이 잔악무도한 놈! 하늘이 네 놈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황보세가의 외단주 황보철조가 대노하여 달려들었다.

“네가 많이 듣던 소리 아니냐?”

적반하장도 유분수였다.

이훤은 황보철조의 공세를 가볍게 흘려냈다.

서너 합을 주고받던 중 이훤의 좌수가 벼락 같이 황보철조의 수염을 잡았다.

“요놈!”

황보철조는 한순간 균형을 잃고,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이훤은 좌수로 수염을 잡아당긴 상태로 우수를 놈의 얼굴에 꽂아넣었다.

빠각!

일권에 황보철조의 내력이 흩어졌다.

살이 찢기고, 코뼈가 으스러졌으며, 안면이 뭉개지는 순간 주먹이 연이어 꽂혀들었다.

퍽퍽퍽퍽퍽!

“황보세가의 악행이 만천하에 알려졌으니 죽어서도 죄를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이훤이 황보철조의 시신을 한 손에 잡은 채 대갈일성을 내지르는 순간 황보세가의 무인들은 전의를 상실했다. 그리고 그들 사이로 섞여드는 무인들이 있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색마가 말했던 방수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똑같은 놈들이다.

“대부인의 원수를 갚아라!”

“본 장의 생사대적을 결코 놓치지 마라!”

대부인은 누구고, 장원은 어디일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응당 궁금해 했으리라.

하나 이훤은 개의치 않았다.

죽이겠다고 칼을 겨눴거늘 이유를 물어볼 만큼 느긋한 삶을 살지 못했다.

“오냐! 오늘 칠대괴마의 수장이 어째서 광야제라 불렸는지 보여주마!”

이훤의 두 눈에서 불덩이가 솟구쳤다.

그는 단 한 번도 괴마(怪魔)임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살기 위해서 발버둥을 쳤을 뿐이다.

그것을 괴마라 한다면 받아들였다.

이훤이 살던 강호, 그리고 지금 살아가는 강호에서 괴마로 천하를 종횡할 것이다.

혈륜의 영역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그 순간 이훤의 온 몸은 무기였다.

부딪치는 족족 적도가 입은 잿빛 무복은 피로 물들었다.

“태륭삼노가 여기 있다!”

이훤은 칠순에 이른 노고수가 세 명이나 등장했지만, 입꼬리를 올렸다.

강호는 참 넓은 곳임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회귀 전과 후를 통틀어 들어본 적이 없거늘 천하제일인이라도 되는 양 기세등등하게 달려드는 꼴을 보라.

“어차피 알려지지 않을 이름!”

이훤은 세 명의 연수합격을 몸으로 받아냈다.

터터터터터터터텅!

태륭삼노의 합격술은 수십 년에 걸친 수련의 깊이가 물씬 느껴졌다. 하나 수십 년 간 공부를 하고, 수십 년 간 무공을 익혔다고 해서 모두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는 없는 법이다. 하늘 위에 하늘이 있듯 저들에게 있어서 이훤이란 곧 천외천의 존재였다.

“내가 직접 지워주마!”

이훤은 강기가 맺힌 검을 맨손으로 잡았다.

힘을 주는 순간 강기가 흩어지며 검이 우그러들었다. 검을 통해 전해진 혈륜으로 인해 상대는 검을 놓쳤다. 인상을 쓰며 물러나는 적을 쫓아가 목을 베었다. 세 명으로도 안 되던 자들이 둘만 남았다. 호흡을 내뱉을 필요도 없이 두 노인을 자르고, 베었다. 태륭삼노가 쓰러지자, 몇 남지 않은 잿빛 무복의 무인들마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주했다.

“하아.”

이훤은 그제야 장탄식을 하며 피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지친 것도 아니고, 흔들리는 것도 아니며 그저 귀찮았을 뿐이다.

“언제까지 날파리 같은 것들이 달려드는 거지?”

회귀 전의 절대고수들을 떠올려봤다.

그들이 이름을 밝히는 순간 대부분의 적은 꼬리를 말고 도망치지 않았던가. 한데 이훤에게는 자격도 없이 달려드는 하수들이 너무 많았다.

이래서야 술을 마실 시간이 부족할 지경이다.

“안 되겠어. 무림맹에 가서 제대로 난리를······.”

이훤은 말끝을 흐렸다.

잔당을 정리한 색마와 탈마가 다가왔다.

“형님.”

탈마가 건네는 술을 마시는 사이 색마가 탄식을 흘렸다.

“아! 석가장이잖아. 이 새끼들이 왜 여기까지 왔지?”

이훤은 술을 마시며 죽은 석가장의 무인들을 힐끔 쳐다봤다.

“무슨 대부인의 원수를 갚겠다더라.”

“대부인요?”

색마는 미간을 좁혔다.

“왜?”

“석가장은 유가와 관부에 꽤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신공부처럼 공부만 한 곳이 아니라 실리를 추구해서 꽤 인지도가 있지요. 이 새끼들이 왜 왔는지는 모르겠는데 귀찮게 되었네요.”

이훤은 피식 웃었다.

개방도라는 녀석이 뒷골목 왈패처럼 건들거리는 모양새가 재밌기만 했다.

“귀찮은 일을 미연에 방지하는 방법이 있지.”

< 52, 잔당(殘黨). (3)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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