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마신-127화 (127/226)

< 52, 잔당(殘黨). (2) >

잔당(殘黨)의 사전적 의미를 논하자면 간단했다.

쳐 없애고 남은 도둑이나 악당의 무리였다.

그러니 양심의 가책도, 남의 시선도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저 곡식을 갉아먹는 쥐새끼를 박멸하듯, 며칠 전처럼 왜구를 아귀처럼 짓밟으면 되는 게다.

“빨리 왔으면 좋겠다.”

탈마의 말에 색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형님은 몸을 풀수록 피가 뜨거워지는 양반이잖아. 지금 마시는 술이 차게 식혀서 마시는 계열이니 한바탕 날뛰고 돌아오면 주향은 배가 될 걸?”

“아! 그렇구나.”

색마는 탈마의 혜안에 다시 한 번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잔당을 소탕하는 걸로 큰일을 했다는 자부심을 버렸다. 그는 아직 탈마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이훤에 대한 영향력이 적었다.

‘더 분발해야지!’

이훤은 보료에 반쯤 기댄 채 술 병을 기울였다.

“크하! 그런데 우리에게 잠자리를 내어준 장주는 어떻게 하려고?”

“시세의 세 배 주고 장원을 샀습니다.”

색마는 은자 사천 냥을 쓰고도 당당했다.

그의 곁에는 마르지 않는 돈주머니를 지닌 탈마가 있지 않은가.

“아까 돈 필요하다고 하더니 이걸 한 거야? 잘 했네.”

“꼭 필요했거든요. 이 장원의 배후는 산이며 좌우로 산등성이가 감싼 지형입니다. 게다가 산등성이가 끝나는 부분부터 물줄기가 이어지거든요. 하천을 건너는 돌다리가 하나 있습니다.”

탈마가 키득거렸다.

“다리를 무너트리면······.”

색마는 탈마를 흉내 내듯 검지로 콧잔등을 훔치며 대꾸했다.

“독 안에 든 쥐가 되지요.”

이훤은 히죽 웃으며 작전의 방점을 찍었다.

“건물 어귀마다 술 좀 쟁여둬라.”

탈마와 색마가 술병을 한 아름씩 안고, 사라졌다.

*

산동성 청도는 반도의 끝에 위치했다.

그렇기에 태산으로 향하려면 해안가를 끼고 돌아서 고밀현까지 나아가는 것이 최단 거리였다. 고밀현 외곽에 이름 없는 돌산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곳은 유례가 없을 만큼 수많은 자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많이 모였군.”

황보세가의 외단주인 황보철조는 수십 일 사이 십 년은 늙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소룡대연의 참석자들을 잡아 죽이겠다고 태산을 헤매는 사이 본가가 멸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

“놈을 죽여야 한다.”

가주는 충암평에서 당한 부상과 모욕으로 인해 앓아 누운 지 오래였다. 그리고 외단이 출격한 상태에서 내단이 전멸했다. 황보세가의 가솔들은 돈이 될 만한 것을 훔쳐서 도망쳤고, 빈객들은 야밤에 짐을 챙겨 떠났다. 한 마디로 황보세가는 현재 껍데기만 남은 상태로 멸문하는 과정이다.

‘그러니 모든 걸 바로잡기 위해서는 놈을 잡아야 한다.’

황보철조는 자신의 곁에서 운기조식을 하고 있는 황보태룡을 응시했다.

‘네가 해야 한다.’

황보태룡은 황보세가의 소가주로서 성정이 잔혹한 건 안타까웠지만, 무재(武才)가 남달랐다. 그렇기에 만매만전을 전해 듣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 하나 황보태룡이 강해졌다고 해서 산동 강호를 쥐락펴락 한 이훤을 홀로 감당하는 건 불가능했다.

‘우리가 돕겠다.’

그는 돌산을 가득 채운 무인들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황보세가의 외단에 소속된 무인들은 여전히 사백 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만매만전을 욕심내는 자들이 백여 명 정도 모였다.

‘저들을 부릴 수 있다면 황보세가는 이전보다 강해질 텐데······.’

황보철조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들 중 일 할만 나서도 황보세가의 외단은 전멸하지 않을까 싶었다. 하나 대부분 독보강호하는 자들이고, 흉성이 들끓었으니 감당할 수 없으리라.

그저 이용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했다.

그리고 감사의 대상이 다가왔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소.”

황보철조는 자신의 곁으로 다가온 학사를 보며 포권을 했다.

학사는 검을 제외하면 평범한 문인으로 보였다.

하나 그야말로 흑의인의 심복인 오좌(五座) 중 두 번째 자리를 차지한 사객(士客)이다. 화산을 공격할 당시 사군사도 중 애난의 수하였지만, 실상 흑의인이 심어놓은 간자였다.

그랬던 그가 천 리 밖 돌산에 모습을 드러낸 게다.

사객은 황보철조를 향해 거친 숨을 토해냈다.

“놈이 대부인을 죽였소이다. 나는 놈을 없애기 전에는 석가장으로 돌아갈 수 없는 몸이외다.”

황보철조는 격정적인 사객의 한 마디에 한 가닥 의구심마저 지웠다. 하북에 위치한 석가장(石家莊)은 무가와 유가, 그리고 관부가 결합된 특이한 형태의 방파였다.

무가의 역사로는 구파에 비견됐다

유가의 상징으로는 신공부의 후예를 자처했다.

그리고 관부의 인맥은 황보세가보다 윗줄이 아닌가.

그런 곳의 대부인이라면 당대 장주의 부인일 것이며, 소장주의 어미일 터였다. 호위인 사객이 분루를 흘리는 것도 이해못할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저들이 격렬하게 화를 낼수록 기분이 좋았다.

황보철조는 황급히 맞장구를 쳤다.

“석가장의 대부인을 죽이다니! 놈에게는 인륜도 도의도 없군요.”

사객은 대부인의 죽음을 애도하듯 한탄을 하려 했다.

하나 사군사도 중 애난이 죽던 순간을 떠올리자, 코웃음 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렇기에 억지로 감정을 짜내며 말을 덧붙였다.

“이훤이라는 놈은 제멋대로 날뛰는 망종입니다. 우리 석가장은 만매만전 따위는 관심 없소이다. 다만 놈의 팔다리를 끊어 석가장으로 끌고 갈 수만 있으면 족합니다!”

황보철조는 손을 모았다.

“정의가 살아 있다면 응당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나저나 저들은 어찌 모으신 겁니까?”

만매만전을 노리는 백여 명의 불명인들은 모두 사객이 모아왔다. 낭인과 파계승, 색목인을 비롯해 각양각색의 무리였다.

“놈이 만매만전으로 강호 동도를 현혹했듯 저 또한 그랬을 뿐입니다.”

황보철조는 미소를 지었다.

그 또한 이훤을 목표로 했지만, 거사를 앞둔 지금 밝힐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렇군요. 우리도 황보세가의 복수만 하면 됩니다. 만매만전은 인연이 닿는 누군가가 얻겠지요. 하나 놈의 기고만장함은 오늘 끝날 겁니다!”

그렇기에 애매모호한 결의를 밝히는 것이 전부였다.

“그럼 계획대로 진행합시다!”

석가장의 무인 이백 명까지 더해지니 돌산 전체가 복면인들로 가득했다.

“가자!”

누군가의 나직한 한 마디에 수백 명의 무인들이 발소리를 죽인 채 경공을 펼쳤다.

*

이훤은 지붕 위에서 정좌를 했다.

어차피 사람들은 모두 빠져나갔고, 장원에 남은 건 탈마와 색마뿐이다. 그렇기에 개미떼처럼 복면인들이 몰려오는 게 훤히 보여도 아무렇지 않았다.

“아! 안주도 가져올 걸.”

오히려 적도가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모습에 지루함을 느껴야 했다. 이훤은 하품을 한 후 술 한 모금을 머금고, 색마의 말을 떠올렸다.

‘현재 황보세가의 둘째만 생존한 상태인데 외단주와 장자가 남아 있어서 아무 것도 못한다고 했지. 그러니 저것들을 싹 쓸어버리고 증거를 가져다주면······.’

색마는 장담했다.

황보세가의 차남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전각군의 소유권을 인정받고, 산동성 서부의 패자(覇者)로 자처할 수 있다고 말이다.

그 말인즉슨 청도대상단과 황보세가는 물론이고, 산동성 전체가 이훤의 손아귀에 떨어진다는 의미였다.

“하여간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는 놈이었지.”

이훤은 회귀 전 색마를 떠올리며 히죽 웃었다.

벌써부터 싹수가 노란 것을 보니 기특하기만 했다.

그 때 적도의 선두가 장원 앞의 하천을 건넜다.

저들의 계획은 단순했다.

하천을 넘는 순간 함성을 지르며 몰려들었다.

힘으로 밀어붙이려는 속셈이리라.

“단순하다. 단순해. 너무 단순해서 의심이 들 정도로 하찮구나.”

이훤은 혀를 찼다.

범인이라면 멀리서 지켜봤어도 오금이 저릴 상황이다. 하나 이훤에게는 범람하는 하천을 피해 무리를 이룬 개미떼처럼 보일 뿐이다.

“응?”

이훤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그가 의식하지 않아도 배후의 산에서 기척이 전해지는 순간 혈륜이 저절로 발동했다. 수십 장을 격하고 적의 다급한 발소리가 전해졌다.

이것이 천공혈륜겁 팔 성의 위력이다.

혈륜이 주인을 스스로 보호하는 경지.

구 성과 십 성, 나아가 십이 성에 오르면 반신의 경지에 오르지 못할 까닭이 없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그리고 이러한 기대에 부풀수록 신마의 죽음은 의아했다.

‘내가 팔 성으로 회귀를 했으면, 그 양반 정도면 뭘 할 수 있었던 걸까?’

신마와 같은 절대자가 지쳐서 죽었다는 건 믿을 수 없었다. 그것도 평화에 젖어 안주하는 정파인들에게 당했다는 건 어불성설이 아닌가.

‘설마 어디 살아서 키득거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 생각을 하는 순간 등허리에 소름이 돋았다.

어쩌면 이훤은 현재 강호에서 신마를 가장 높이 평가하는 사람이다. 만에 하나 신마가 돌아와서 사람을 죽이기 시작한다면 누구도 막을 수 없으리라.

‘으으, 설마!’

잡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적이 다리를 건넜다.

저들은 속도를 더욱 올렸다.

이제 들켰다고 여겼을 테니 조심할 이유가 없었으리라.

“와아아아아아!”

누군가 소리를 지르자, 전염병처럼 퍼져나갔다.

실전으로 인한 흥분과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한 본능적인 외침이리라.

하나 이훤에게는 시끄럽기만 했다.

그리고 이내 저들의 함성을 묻어버릴 만큼 거대한 폭음이 들려왔다.

콰콰쾅!

탈마가 소천뢰로 다리를 무너트린 게다.

‘저 새끼는 저걸 얼마나 훔친 거야?’

이훤은 헛웃음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제 그가 나설 차례였다.

*

다리가 무너졌다.

분명 인위적인 손길에 의한 폭발이다.

하나 무인들은 개의치 않았다.

이미 호랑이 등에 올라탄 셈이 아니던가.

그렇기에 앞으로,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돌아서고 싶었지만, 집단이 만들어낸 기세와 광기는 개인의 독단적인 행위를 용납하지 않았다. 몇몇이 멈칫하거나, 돌아섰다가 그대로 깔려서 시신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했다.

“매화군자를 찾아라!”

“취선관주를 잡아!”

“염제는 어디 있나?”

“비급을 확보해!”

버린 별호와 허울뿐인 집, 그리고 허황된 소리에 사람을 물건 취급하는 외침까지 뒤섞였다. 그렇기에 해당사항이 없는 취마는 나서지 않고 은밀하게 이동했다.

파팟!

이훤이 암천군림보를 펼치는 순간 그 누구도 행적을 쫓을 수 없었다.

“흐음.”

오직 장원 뒤의 야산에서 내려오던 사객만이 미간을 좁혔다. 오좌의 차석이지만, 현재는 석가장의 대부인을 호위하는 무사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석가장의 무인을 이끄는 이들은 따로 있었다.

대륭삼노(大隆三老)는 석가장에서 은밀하게 운영하는 장로원의 핵심 고수였다. 그리고 이미 죽은 애난의 심복이기도 했다. 주인은 죽었지만, 그녀가 남긴 명령은 여전히 그들의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 신마의 깨달음을 구하라.

사객은 대륭삼노에게 황급히 외쳤다.

“놈이 장원의 심처로 향했습니다.”

그는 거짓 정보를 전했다.

하지만 대륭삼노는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사객 또한 대부인으로 가장한 애난의 심복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먼저 잡아야 한다!”

사객은 대륭삼노가 투기를 발산하자, 입꼬리를 올렸다.

“제가 황보가에 거짓 정보를 전해 이목을 흐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전방에서 합류할 석가장의 무인들을 따로 빼내 심처로 향하겠습니다. 그 사이에 삼노께서 이훤을 확보하시면 될 듯합니다.”

“지금 당장 실행하게.”

대륭삼노는 경공의 속도를 올리며 그대로 사객을 지나쳤고, 백여 명의 수하들과 장원을 향해 내려갔다. 홀로 남은 사객은 그제야 느긋한 표정을 보였고, 석가장의 무인들과는 달리 야산의 정상으로 향했다.

그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히죽 웃었다.

이훤과 황보세가, 그리고 석가장까지 흑의인의 손바닥 위에서 춤을 추는 듯했다. 사객의 나직한 한 마디를 끝으로 그의 신형이 안개처럼 흩어졌다.

“결국 주군만 남아서 군림하리라.”

< 52, 잔당(殘黨).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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