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 잔당(殘黨). >
52, 잔당(殘黨).
산동성은 동쪽이 바다다.
황도와 인접했기에 산동성 동쪽의 바다를 통해 수많은 장사치가 드나들었다. 오죽 했으면 비단 장사를 하던 청도상단이 장사치들을 규합한 후 십년 만에 대상단이 되었겠는가.
돈과 사람이 모여드니 응당 강호방파가 생겼다.
처음에는 청도대상단도 그들의 도움을 받아 표물을 운송하고, 상행을 완수했다. 한데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하던가. 강호인의 욕심은 범인보다 몇 배나 강했다.
결국 칼잡이들끼리 뭉쳐 자릿세와 보호비를 걷었다.
그대로 시간이 흘렀다면 강호의 다른 지역과 다를 것이 없었으리라. 하나 청도대상단의 단주는 포기하지 않았고, 자체적인 무력을 갖추는데 성공했다. 그렇게 산동성 동부의 무인들을 모조리 밀어냈고, 상인들의 왕국을 건설했으니 누대에 걸쳐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라 여겼다.
다시 장사치들이 모여들었고, 온갖 재화가 넘쳐났다.
한데 다른 게 생겼다.
해적이다.
가깝게는 절강성, 멀게는 복건까지 이어진 해로였다.
그러니 온갖 해적이 들끓었다.
나라도 손을 놓은 지 오래였으니 이제는 왜구까지 난립하여 물건의 절반을 통행비로 낼 정도였다.
청도대상단도 포기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남해의 왜구와 동해의 왜구는 성향이 구분됐다. 남해는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왜구였으나, 동해는 낮밤이 달랐다.
낮에는 상행을 하고, 밤에는 노략질을 했다.
“그러니 우리가 가서 다 때려잡아야 되겠어? 안 되겠어?”
탈마의 호언장담에 지역 유지들은 허리를 버드나무로 만든 것처럼 접었다 폈다.
“당금 강호에서 가장 바쁘신 분이 왜구를 잡아주신다니 그저 황송하기만 합니다!”
“강호의 위명이 자자하신 취선관주께서 장사치들의 앞길까지 헤아려주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대협께서 신마의 무공을 전해주셨기에 강호에서는 신농의 후예라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신농(神農)은 삼황오제 중 삼황에 속한다.
인간에게 농사를 가르치고, 먹을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걸 구분했다. 그러니 장사치들은 신마의 무공을 전한 이훤에게 신농의 후예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어허! 강호를 호령하시는 대영웅께 신농이라니. 염제라는 표현이 더 옳지 않겠는가?”
상석에 앉아 있던 이훤이 폭소를 터트렸다.
“크하하! 염제라니. 이러다 제가 입에서 불이라도 뿜어야 하는 겁니까?”
술잔을 기울이며 내뱉는 농에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신마의 무공을 익히셨으니 손에서 불을 뿜으신다고 해도 누가 의심하겠습니까.”
“하하하!”
이훤이 술자리를 즐기는 사이 탈마는 유지들과 어울리며 돈을 걷었다.
“대형께서 전하신 만매만전은 사람마다 다르게 적응되지요. 하나 단지 듣기만 하는 것과 직접 배우는 건 다르겠지요. 성의를 보이시면 우리 형님이! 크흠.”
탈마가 말끝을 흐릴 때마다 돈이 모였다.
색마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훤이 좋아서 따라나선 길이 아니던가.
하여 색마라는 별칭도 받았고, 칠대괴마에 묶여서 불리게 되었다. 한데 자신과 함께 묶인 탈마와 악마, 그리고 전마만 봐도 특별한 재주를 지녔다. 반면 그는 내세울 것이 그리 많지 않았다. 개방의 제자로서 엄청난 정보력을 지녔다고는 하지만, 매순간 쓸모가 있는 탈마와의 격은 천양지차였다.
오늘만 봐도 그렇다.
탈마는 상대방의 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처럼 상인들을 쥐락펴락 했다. 이렇게 몇 년 만 보내도 만금의 재산을 모으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그래서 부러웠다.
‘나도 뭔가 쓸모 있는 일을 해야 하는데······.’
이훤이 탈마의 정수리를 쓰다듬으며 칭찬을 할 때마다 의욕은 배가됐다. 그렇기에 색마는 새로운 마을에 들어설 때마다 유지의 재산 형성 과정과 현재 재산을 확인했고, 그들의 성향까지 파악해서 알려줬다.
“역시 모르는 건 색마에게 물어봐야 해!”
“하하! 제가 대형을 위해서라면 개방의 비고도 털어올 수 있는 놈입니다.”
기사멸조에 해당하는 발언마저 쉬이 내뱉을 만큼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염제라는 별호, 진짜 돌고 있어?”
“그, 그렇습니다.”
색마는 어색하게 대꾸한 후 결의했다.
다음 개방 분타를 지날 때 이훤에게 염제라는 별호가 붙을 수 있도록 풍문을 내야겠다고 말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 많은 정보를 수집하여 이훤의 앞길을 열어줘야겠다고 다짐했다.
그 사이 이훤이 탄성을 흘렸다.
탈마가 얻어낸 여행 자금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야! 너 이제 훔치지 않아도 뭐든 할 수 있잖아. 충암평에서 사람들 선동하는 것도 그렇고, 분위기 띄우는 것도 최고였어.”
이훤의 칭찬에 탈마는 가감 없이 으스댔다.
“후훗, 홍천기공을 얻고 깨달았어요. 단순히 물건을 훔치는 건 하수에 불과하다는 것을요. 진정한 대도라면 사람의 마음을 훔쳐야 하지 않을까요? 일단 발상의 전환을 하고 나니 도둑질에도 급이 있다는 것을 깨우쳤다고나 할까요.”
“이야! 이제는 어디든 가지 못할 곳이 없겠다.”
탈마는 검지로 콧등을 훔쳤다.
“훗! 이 세상의 기물들이 제자리에 있는 건 제가 아직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크큭! 자랑이다. 이 놈아.”
색마는 의욕이 넘치는 상태답게 조급함을 숨기지 못했다.
“이제 곧 청도대상단입니다. 제가 먼저 가서 좀 살펴보고 있을 게요.”
“응, 부탁한다.”
*
청도대상단의 상단주는 입지전적인 사내답게 수완이 좋았다. 이미 예영영의 전서응을 통해 저간의 상황을 전해들은 상태였다. 딸을 구해준 것도 모자라 상단의 판로까지 넓힐 수 있게 되었단다.
이훤은 한마디로 청도대상단의 은인이었다.
- 술을 과하게 좋아하니까 주의하세요.
상단주는 딸의 염려에 입꼬리를 올렸다.
‘다 큰 줄 알았더니 아직 사람 보는 눈이 부족하구나. 장점을 적어놓고, 단점이라고 걱정을 하다니.’
사람을 대할 때 가장 편한 사람은 튀는 사람이다.
속내를 숨기거나, 우유부단한 사람은 상대하기가 어려웠다. 한데 이훤처럼 술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보다 쉬울 수가 없다.
“창고에 있는 모든 술을 꺼내라! 그리고 저자의 상단과 포구에 들어온 배를 다 뒤져서라도 좋은 술을 구해 와. 특히 동영에서 온 자들이 마시는 술은 천금을 줘서라도 구입해! 본 상단의 명운이 걸린 일이다!”
상단주는 수하들이 숨을 돌릴 사이도 없을 만큼 바삐 움직였으나, 거듭 재촉을 했다.
“어지간한 거래는 뒤로 미뤄. 취소해도 좋다. 그를 대접하는데 총력을 기울여라!”
그 결과 지상낙원이 펼쳐졌다.
이훤은 하루에 만금을 벌어들인다는 청도대상단주가 주최하는 연회에서 원업이 술을 맛봤다.
“왜구들이 마시는 술은 뭔가 다를 줄 알았는데······.”
“아마 동영에서 직접 마시는 것과는 다를 겁니다. 게다가 아직 미개한 자들이지요. 중원의 술을 따라잡기는 역부족입니다. 오죽 했으면 그들의 구입 품목 중 중원의 술이 상위권에서 빠지지 않는다니까요.”
“하하하! 상단주의 이야기는 참 재밌습니다.”
이훤은 진심으로 즐거웠다.
산동성의 동부는 중원에서도 변방 취급을 받는다.
그렇기에 생소한 과정이 많았고, 강호인들이 알지 못하는 세계의 뒷이야기 또한 흥미로웠다.
“시큼한 맛이 너무 강하니 이걸 드셔 보십시오.”
상단주는 본래 술을 즐겼고, 주당들에게 따로 교육까지 받았다. 그렇기에 이훤과 주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자격까지 갖춘 상태였다.
“며칠 조용했으니 내일은 배를 타야겠네요.”
이훤의 말에 상단주는 감사를 표했다.
“대협께서 힘을 써주시면 상인과 양민들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저는 그럼 포구 사용료를 조금 깎아주겠습니다. 그리고 왜구들의 노략질로 피해를 입은 마을의 복구를 돕도록 하지요.”
그는 애써 빈 말을 하거나, 이용을 하려는 대신 순수하게 이훤의 협행에 동참했다.
그 날부터 매일 같은 일이 반복됐다.
낮에는 바닷가에서 술을 마셨고, 저녁이 되면 바다에 나가서 술을 마시곤 했다. 그러다 바닷가로 노략질을 하러 온 왜구를 만나면 자비를 베풀지 않았고, 바다에 나가서는 해적들을 배와 함께 수장시켰다.
그렇게 한 달을 보냈다.
“왜구들이 그렇게 끈질기고, 잔인하다며? 며칠이나 싸웠다고 코빼기도 보이지 않냐?”
탈마는 헛웃음을 지었다.
“형님이 보이는 족족 때려죽이니 저들이라고 별 수 있겠어요. 그나저나 산동악가도 슬슬 정리됐을 텐데 돌아갈 준비나 하지요.”
“색마야, 요즘 분위기가 어때?”
색마가 빙긋 웃으며 말을 받았다.
“네. 예 소저, 아니 전마의 전언에 따르자면 가솔들을 설득하는 일도 끝났고, 새로이 보완한 구궁벽력공의 수련도 시작했답니다.”
“무림맹 쪽은?”
산동성 청도에도 개방의 분타가 존재했다.
색마는 사결 제자라는 권한을 이용하여 알아낸 정보를 아낌없이 알려줬다.
“난리가 났지요. 생존자들과 얽히지 않은 장로들은 당장 정보 공개를 요구했고, 조금이라도 얽힌 자들은 강호의 도의 상 강제력을 발휘할 수 없다고 대립했답니다.”
이훤은 입꼬리를 올렸다.
강호의 상리 상 주인 있는 무공이라고 해도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과분한 보물이 피를 부르고, 자격 없는 무기로 인해 멸망에 이르지 않던가. 하나 생존자들은 제각기 강호의 전통명가에 속했다. 그러니 힘으로 빼앗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고, 명분에 의지하는 것이 전부였으리라.
하나 신마의 깨달음은 궤가 달랐다.
“공적의 무공이니 그냥 둘 수 없다는 의견이 대다수겠지?”
“역시 형님이십니다. 속으로는 무공을 욕심내는 거지만, 겉으로는 대의명분을 부르짖고 있지요. 자격을 갖추고, 명망이 높은 명사들에게 깨달음을 알려서 진위 여부와 사마외도의 무공이 아닌지 밝혀야 한다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이훤은 어느덧 선선해지는 날씨를 만끽하며 말했다.
“결국 중추절에 답이 나오겠네.”
“네. 아무래도 이미 개최가 정해져 있던 중추절 무림대회에서 논하게 될 것이 뻔하지요.”
날짜를 헤아려 봤다.
“화산에 다녀와도 충분한 시간이네.”
“그 전에 청도대상단주를 한 번 만나 보시지요.”
색마는 그 사이 상단주와 밀담이라도 나눈 듯했다.
그가 이훤에게 해가 될 일을 했을 리 만무하니 두 사람의 만남은 빠르게 이뤄졌다.
“대협께서는 범인의 성정과 다르시고, 보통의 협자의 언행과 궤를 달리 하십니다. 하여 조심스럽게 제안을 하나 드릴까 합니다.”
“무엇인가요?”
상단주는 산동성의 지도를 펼치며 말했다.
“대협의 도움으로 본 상단은 여기까지 진출하는 게 가능해졌습니다.”
이훤은 상단주가 청도에서 태산까지 선을 긋자, 호기심을 보였다.
“그래서요.”
“한데 제 딸과 대협, 그리고 산동악가의 악마 소협이 의형제를 맺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보니 욕심이 생겼습니다. 본래 산동악가가 멀쩡했다면 상관없겠지만, 그들은 반쯤 봉문한 상태입니다.”
“흐음, 어중이떠중이가 달라붙어서 청도대상단을 귀찮게 할 것을 우려하시는군요.”
“옳습니다. 본 상단은 다른 방파에게 통행비나 보호세를 내지 않습니다. 다행히 청도가 외진 곳이어서 이곳을 탐내는 자도 없었지요. 하나 중원으로 나아가면 이름 있는 방파들이 욕심을 낼 겁니다.”
“핵심만 들어봅시다.”
상단주가 눈을 빛냈다.
“대협의 이름을 빌어 황보세가와 산동악가 중간 지점에 방파를 하나 세울까 합니다. 낭인들을 모으고, 무인을 받아들이면 제법 모양새가 나오겠지요.”
“내 이름을 빌리는 대가로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이훤의 눈빛에서 흥미로움을 발견한 상단주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딸아이가 대협께 의탁했으니, 저 또한 그러고자 합니다. 청도대상단을 마음껏 부리실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제안이다.
청도대상단의 재화는 백만금을 넘어선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하나 이훤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제가 돈 욕심이 없어 보이시나 봅니다.”
“헛되이 쓰실 분이 아니라는 걸 압니다. 대협께서 평범한 영웅호협이거나, 구파오가의 진산제자였다면 이런 제안은 생각지도 않았을 겁니다. 청도대상단은 제 모든 것이니까요. 하나 한 달 동안 대협을 지켜본 결과 저는 이 또한 거래가 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천하제일상단이라도 만드시려고요?”
상단주는 고개를 내저었다.
“천하제일인은 될 수 없지만, 천하제일거부는 노려봐도 되지 않겠습니까.”
이훤은 한참동안 상단주의 맑은 눈을 바라봤다.
회귀 전의 기억을 떠올려 봐도 청도대상단에 대한 정보는 없다시피 했다. 그러니 자신으로 인해 상대방의 운명도 바뀐 것이 아닐까 싶다.
“전마의 아버지면 내 아버지와 같습니다. 물론 아버지로 대할 생각은 없지만요.”
“하하하하! 대협은 대협으로 남아주십시오.”
이훤은 떠나면서 마시려고 아껴뒀던 술병을 챙기며 말을 남겼다.
“그림 한 번 그려보세요.”
상단주는 포권을 하며 이훤을 배웅했다.
“언제고 대협께 큰 도움이 될 겁니다.”
*
“대형, 청도대상단주가 제안하신 위치보다 더 좋은 곳이 있습니다.”
청도를 떠나고 삼일 째 되는 날이었다.
색마는 하루 종일 밖으로 나돌더니 늦은 밤 돌아왔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태산과 황보세가 사이에 문파를 세운다고 했잖아요. 그냥 황보세가에 세우시지요.”
이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날 태산의 정상에서 내려오던 황보가의 장남과 외단주, 그리고 수백 명의 무인들이 사라졌어. 그 놈들을 두고 굳이 황보가를 장악할 필요가 있을까?”
색마는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들이 모두 정리되면 상관없지 않습니까.”
“그거야 그렇지. 한데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놈들을 언제 찾을 건데?”
그 때 한적한 장원을 빌려놓고 술을 마시던 탈마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이내 흙바닥에 얼굴을 대더니 침음을 흘렸다.
“형님, 누가 오는데요. 아주 많이.”
색마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받았다.
“찾으러 갈 필요가 있을까요? 알아서 와주는데요.”
이훤은 헛웃음을 지었다.
“네가 불렀냐?”
“소문을 좀 냈지요.”
“아무리 멍청해도 그 전력으로 덤비지는 않을 텐데?”
색마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방수가 잔뜩 붙었답니다. 어찌됐든 형님은 살아 있는 만매만전이잖아요. 붙잡아서 캐내면 뭐라도 더 나올거라고 믿는 놈들이 어디 한둘이겠습니까?”
이훤은 박장대소를 했다.
“하하하하! 너, 내가 진다는 생각 자체를 안 하는구나?”
“그것만큼 무의미한 생각이 또 있을까요?”
뽕-
이훤은 새 술병의 마개를 뽑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정답.”
< 52, 잔당(殘黨).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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