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마신-125화 (125/226)

< 51, 새 강호가 열렸다. (2) >

*

그 사이 산동악가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세가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가솔들이 모조리 포위망을 구성했다.

“이 사달을 벌이고, 그냥 빠져나갈 생각은 아니겠지?”

악오춘의 원한 가득한 한 마디였다.

“네 놈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아느냐?”

그는 수십 년 동안 고이 지켜온 비밀이 들통 난 것에 대한 원망을 모조리 쏟아 부었다.

이훤은 입꼬리를 올렸다.

“아까부터 계속 아느냐고 묻는데 말이야.”

입꼬리부터 퍼져나간 붉은 기운이 안개처럼 몸을 휘감았다.

“너야 말로 알고 있는가?”

꽈드득-

주먹을 말아 쥐는 순간 팔황과 무극이 저절로 감겨들었다. 응축된 기운이 악오춘을 향해 뻗어 나오며 태산과 같은 기세로 짓누르기 시작했다.

“누가 더 강할까?”

“으으.”

악오춘은 미간을 좁힌 채 버텼다.

어찌됐든 두 사람 모두 절명곡의 생존자들에게 신마의 깨달음을 전수받은 상태가 아닌가. 그렇기에 악오춘은 지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제대로 붙으면 자신이 이길 것이라 믿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악재는 세가로 복귀하자마자 깨달음을 파고들지 않았던가. 그리고 자신은 그렇게 만들어진 구궁벽력공을 이십 년 이상 수련했다.

‘저 기형병기만 없다면 내가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을 텐데······.’

소가주 악운이 나섰다.

“놈! 가주께서 무슨 무례한 짓이더냐?”

이훤은 헛웃음을 흘렸다.

평화가 길어도 너무 길었던 듯싶다.

이런 상황에서도 가문의 위세를 빌리려하는 걸 보면 영락없는 철부지가 아닌가. 그러니 마흔을 넘겼음에도 소가주에서 벗어나지 못할 터였다.

악운은 이훤의 조소에 창을 고쳐 잡았다.

그러자 포위망을 구성하고 있던 산동악가의 가솔들이 창끝으로 이훤을 겨눴다.

‘이걸 다 죽이면 악재가 삐칠 것 같은데?’

이훤이 고민하는 사이 악오춘이 외쳤다.

“모두 물러서라! 너희들이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정답이었다.

아직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심지어 오늘 이훤의 선동에 휘말려 동조했던 이들도 알지 못했다. 이제 이훤으로 인해 절명곡의 생존자들은 숨어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들의 무공이 세상 밖으로 나온다면 사람들은 그 때야 알게 될 터였다. 신마의 무공은 신마의 무공으로만 상대할 수 있음을 말이다.

눈으로 보는 것과 직접 마주하는 것.

천양지차였다.

이훤이 그것을 알 듯 악오춘도 알았다.

자신을 제외하면 이곳의 누구도 이훤을 상대할 수 없다는 점을 말이다.

‘운아나 가솔들은 구궁벽력공을 제대로 익히지 못했다. 십 년의 시간만 주어졌다면 나와 같은 고수를 백여 명 이상 키워내 천하를 주름잡을 수 있었을 텐데!’

그 사이 이훤의 기세는 힘을 더했다.

악오춘의 입술을 비집고 신음이 흘러나오려 할 때였다.

콰콰콰쾅!

산동악가 내부에서 폭음이 일었다.

잠시 후 악재와 악설이 경공을 펼치며 달려 나왔다.

“설아!”

“아버지.”

악오춘은 악설의 곁에 있는 악재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과년한 딸이 생면부지의 청년과 함께 나타났으니 경계하는 건 당연했다. 비록 청년이 악운의 젊은 시절을 빼다 박았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너는 누구냐? 그리고 안에서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

악재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태환노를 부수고, 홍천동을 무너트렸다.”

말투로 미뤄봤을 때 아마도 구궁벽력공을 통해 강제로 탈태환골을 시키는 장소인 듯보였다.

악오춘은 눈을 부릅떴다.

“뭐라고?”

악재는 대답 대신 이훤을 보며 포권을 했다.

“대형! 제가 훈육을 해도 되겠습니까?”

이훤은 헛웃음을 흘렸다.

말만 대형이라고 하면 무엇 하나.

훈육이라는 것 자체가 집안의 아이를 가르칠 때 쓰는 말이 아니던가. 이훤은 악오춘을 압박하던 기세를 갈무리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래, 집안일이니 너희들끼리 해결해라.”

악재는 눈짓으로 감사를 표했다.

반면 악오춘은 이훤에게서 벗어난 것보다 집안일이라는 말에 관심을 뒀다. 그러고 보면 자신의 아들인 악운의 젊은 시절을 빼다 박은 악재가 범상치 않아 보였다.

“넌 누구냐?”

악재는 훈육을 논할 만큼 굳은 결의로 이 자리에 섰다.

한데 누구냐는 물음에 한순간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벽력창 악재임을 밝힐 수 없고, 이미 악재의 제자가 되기로 하지 않았던가.

“나는······.”

악재는 말끝을 흐리다가 이훤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이훤은 어느새 다가온 탈마와 술병을 하나씩 쥔 채 경극을 구경하듯 웃고 있지 않은가.

“후우. 나는 악마다.”

결국 악가의 성을 버리지 못하고, 큰 산을 의미하는 악(岳)을 선택했다. 악마는 이훤과 탈마가 비웃을 것을 우려하여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벽력대제께서 태산의 옥황묘에서 마지막으로 거둔 제자이며, 그분의 구궁벽력공을 모조리 전수받았다.”

악오춘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악운과 가솔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갑작스레 악재의 제자가 나타난 것도 놀랍지만, 그가 태환노와 홍천동을 망가트렸다는 것에 더 놀랐다.

하나 이훤과 탈마는 악마를 놀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스스로 벽력대제라니.]

[우리 악마 동생은 자기 얼굴에 금칠을 아주 잘하시네. 금마라고 부를 걸 그랬어.]

악마는 진저리를 쳤다.

‘저 때려죽일 형제놈들!’

그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두 사람과 불과 하루 정도 함께 했지만, 저들의 언행에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을 깨우친 상태였다.

하나 악오춘은 달랐다.

“취선관주와 무슨 사이더냐? 나는 아버님께 제자가 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리고 아버님은 내게 더 이상 구궁벽력공에 관하여 전할 것이 없다고 하셨다!”

악마는 이훤을 힐끔 보며 말했다.

“태산의 진법은 신마의 무공으로 경지에 올랐다면 의미가 없다. 한데 대형이 옥황묘로 찾아왔다. 화산의 생존자께서 사부님께 전할 말이 있었지. 한데 이미 귀천하셨기에 내가 전해들었다.”

악오춘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악마는 자신을 부외자처럼 대했다. 자신을 제외하고 이훤과 이미 이야기를 끝냈다는 말에 부아가 치밀었다. 그도 그러 것이 악재의 후계자는 그가 되어야 했다. 악오춘과 산동세가가 악재의 모든 것을 이어받았어야 마땅하다고 여겼다.

“닥쳐라! 구궁벽력공의 진정한 후계자는 나다!”

악마는 악귀처럼 일그러진 자신의 아들을 보며 침음을 내뱉었다.

“사부께서 예상했던 것보다 많이 노력했구나. 눈빛만 보아도 어떠한 수련을 거쳤는지 알겠다. 예상보다 강해졌어.  하나 그로 인해 주위를 살피지 못하게 되었구나.”

그에게는 쉽게 발끈하고, 악을 쓰는 악오춘이 마치 거울처럼 여겨졌다. 그가 가볍게 발을 내딛는 순간 산동악가의 가솔이 비명을 질렀다. 하나 그가 지녔던 창은 이미 악마의 손에 들어간 후였다.

그는 창을 휘휘 돌린 후 악오춘을 향해 가타부타 없이 달려들었다.

“너무 강해졌기에······.”

회한 가득한 한 마디였다.

창끝이 심하게 요동을 치는 순간 마치 사천당가의 만천화우처럼 창영(槍影)이 백여 개로 늘어났다.

“고칠 수 없으니 새로 시작하려무나.”

악오춘은 곧장 맞상대했다.

그의 창끝이 흔들리는 순간 악마에 버금갈 만큼 거대한 기운이 일어났다.

‘쯧, 공방 모두를 완벽하게 만들겠다는 욕심을 버리지 못했구나.’

악마는 구궁벽력공으로 몸안에 완벽한 방어진을 새겨 넣었다. 지금도 매일 아침 투로를 궁리하여 빈 곳을 채워 넣고 있지 않던가. 그런 그조차 방어에 매진할 뿐 공격은 욕심내지 못했다. 하나 악오춘은 공과 방을 모두 욕심냈기에 어느 하나 완벽하지 않았다.

터터터터터터터터터터텅!

수천 개의 우박이 충암평을 두들기는 듯했다.

그리고 굉음이 사라졌을 때 악오춘은 자신의 아랫배에 꽂힌 창을 보며 피를 쏟았다.

“크어억!”

악마는 여전히 회한 가득한 눈빛을 숨기지 못했다.

하나뿐인 아들의 단전에 창을 박아 넣는 심경이 어떻겠는가. 하나 살리기 위해 부수고, 만들기 위해 죽인다는 심정으로 감정을 정리했다.

‘다시 시작한다면 최소한 나처럼 되지는 않으리라.’

그러나 상황을 알 리 없는 산동악가의 가솔들이 악마의 속내를 짐작할 리 없었다.

“아버님!”

“가주!”

가솔들은 눈에 핏발이 선 채로 창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천침대전을 펼쳐라! 아버님의 원수를 갚아라!”

백여 명의 창수가 소림의 십팔나한진을 흉내 내듯 쉼 없이 교차하며 창을 찔렀다.

“여전히 한 곳에 심력을 쏟지 못하고, 두 가지를 노리는구나. 진법의 위력은 목적에서 나타난다. 애초에 천침대전은 단병기를 쓰는 고수를 잡기 위해 만든 진법이 아닌가. 장병기를 사용하는 고수에게는 천침대전보다 백팔단혼진이 효과적이다.”

악마는 자신의 말을 증명하듯 진법 내부를 날뛰었다.

호랑이가 양떼를 학살하듯 창이 번뜩일 때마다 십여 명의 창수가 무기를 놓쳤다. 죽은 자는 없었지만, 가솔들은 가문이 망하기로 한 것처럼 목을 놓아 울었다.

“할아버지!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시는 건가요?”

악설이 눈물을 펑펑 흘리며 외치다가 탈마의 손짓 한 번에 혼절했다.

악마는 악설의 외침을 뒤로 한 채 눈에 보이는 족족 산동악가의 가솔을 때려눕혔다. 이미 구궁벽력공에 입문한 이상 주화입마의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할 것이다. 그렇기에 미연에 방지한다는 마음으로 한 명의 가솔도 그냥 두지 않았다.

잠시 후 그가 악설 앞에 섰다.

“하아.”

이훤은 혼절한 악설을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가주 다음으로 강한 게 이 녀석이야?”

악마는 고개를 내저었다.

“강함의 문제가 아니라 심취의 문제지. 이 녀석은 이미 구궁벽력공의 오의를 받아들였어.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받아들인 것을 체득하겠지. 그렇게 되면 오춘이와 다를 바가 없게 돼.”

이훤은 악설의 뒷목을 잡고 일으켜세웠다.

“그럼 해. 손녀라서 못하겠나?”

“하아.”

악마는 장탄식을 흘린 후 악설의 아랫배에 일장을 내질렀다. 타격음은 들리지 않았으나, 단전이 으깨진 여파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결국 악마는 눈물을 흘리며 한 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

산동악가는 그 날 이후 문을 닫았다.

봉문을 한 것은 아니지만, 활동할 수 있는 무인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렇기에 군중이 매일 같이 몰려와 신마의 깨달음을 내어놓으라고 외쳐도 막을 수가 없었다.

결국 이훤이 나서서 만매만전을 몇 번이나 읊조려야 했다.

“이거 진짜 맞는 거요?”

누군가 외쳤다.

그럴 만도 하다.

고금을 통틀어 손에 꼽히는 강자가 신마였다.

그런 자의 무공을 아무 대가 없이 떠들어댄다면 믿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훤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은 그가 아닌 다른 이들에게서 흘러나왔다.

만매만전은 사람의 거울과 같아서 성향과 무위, 신념을 통틀어 모든 것을 비춰준다. 그렇기에 같은 것을 보아도 깨우침이 달랐다.

신공부의 누군가는 지금껏 막혔던 관념을 해소하고, 천안을 얻은 것처럼 지식을 뽐냈다. 표국의 어떤 표사는 십수 년 전 우연히 얻은 비급의 마지막 부분을 풀어서 한순간 절정의 반열에 올랐다. 이와 같이 하루가 멀다하고 만매만전을 통해 변화가 시작됐다.

“화산의 깨우침은 나와 맞지 않는 건가?”

깨달음의 여부를 자신이 아닌 남에게서 찾는 자들은 절명곡의 생존자들을 찾아 떠났다. 화산이 안 된다면 무당을, 무당이 안 된다면 다른 곳을 찾아가 배우려는 게다. 그 사이 무림맹 산동지부에서는 뻔질나게 산동악가를 드나들었다.

천하는 넓고, 강호는 깊다고 한다.

하여 누군가의 명성이 다른 성으로 전해지는 건 긴 시간을 필요로 했다. 심지어 개방이나 하오문의 특별한 조력이 있어야 가능했을 정도였다. 한데 이훤의 선동은 발 없는 말이 천 리가 아니라 만 리를 간 것처럼 효과적이었다. 충암평의 혈사 이후 달포가 지났을 무렵 강호 곳곳에서는 절명곡의 생존자들에 관한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이훤의 뜻대로 공론화가 된 셈이다.

“대형은 어디에 간 거지?”

예영영이 어색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청도에 가셨어요.”

“청도대상단에 갔군. 하긴 이만한 공을 세웠으면 뭐라도 얻어먹어야 손해가 아니지.”

악재는 혀를 찼다.

그는 잠까지 줄여가며 구궁벽력공을 손보고 있었다. 더불어 악오춘과 가솔들까지 간호하며 새롭게 탈태환골을 준비 중이다. 그렇기에 자신만 빼놓고 놀러 다니는 이훤이 마뜩찮을 리 없다.

하나 예영영의 대꾸에는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왜구를 잡으러 갔다고?”

악마의 짜증에 예영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왜구들의 술이 그렇게 맛있다면서······.”

“이 미친 술 귀신! 강호를 통째로 뒤집어 놓고 뭐가 어쩌고 어째?”

< 51, 새 강호가 열렸다.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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