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 새 강호가 열렸다. >
51, 새 강호가 열렸다.
이것은 비사(秘事)였다.
신마가 죽었으니 절명곡에서 살아남은 여섯 명만의 비밀스런 이야기가 됐어야 했다. 한데 팔황무극존이 엿들었고, 천룡전의 주인인 천룡이 숨어 있었다.
그러니 얼추 여덟 명만이 기억하고 있을 과거였다.
이훤은 지금도 낙안봉 절벽 밖으로 다리를 내놓고 술잔을 기울이던 순간이 잊히지 않았다. 망아취자는 이훤을 신뢰함에도 몇 번이나 신신당부를 했다. 지금부터 그가 하는 이야기로 인해 오십 년 동안 하산하지 못했다고 말이다.
‘절대로 알려져서는 안 될 이야기라고?’
그렇기에 생존자들이 모두 숨어서 살아야 했던 이야기다. 혹시나 신마의 깨달음이 강호에 퍼질 것을 무공 수련도 조심했어야 했던 이야기다. 그러니 술을 마시며 허송세월을 보냈다는 이야기다. 어쩌면 수십 년 후쯤 누군가의 기록으로 인해 세상에 알려져서 후세의 모범이 되었어야 할 이야기다.
하나 세상은 그리 아름답지 않았다.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불특정 다수를 위해 오랜 세월을 바치는 사람을 가리켜 정파인이라 하지 않았다.
영웅이라 했고, 의인이라 했다.
한데 언제나 그렇듯 세상에 영웅과 의인이 여럿일 리 없지 않은가.
‘그러니 몽상이었고, 망상이었다.’
물론 이훤도 그 당시에는 공감했다.
보검 한 자루, 비급 한 장이 강호에 흘러나왔을 때 얼마나 많은 혈사가 있었던가. 그러니 신마의 깨달음이 밖으로 새어나가는 걸 막아야 한다고 여겼다.
하나 그것이 잘못됐음을 깨닫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정작 세상을 나와 보니 뼈저리게 느껴졌다. 천룡전은 구파오가를 가리지 않고 쥐새끼처럼 돌아다녔고, 은거하기로 약조했던 생존자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배신을 일삼았다.
그렇기에 노선을 바꿨다.
기껏 고금에 기록이 없을 만큼 희귀한 경험, 회귀를 한 상태였다. 그런 귀한 삶을 천룡전을 찾아다니며, 생존자들에게게 매달리며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악재를 만났을 때 그런 마음이 극에 달했다.
그리고 방법을 찾았다.
- 신마는 모두에게 같은 깨달음을 남겼다.
- 각자 능력과 성향에 따라 체득했다.
- 천룡전은 어디에나 있고, 지금도 움직인다.
- 생존자가 천룡전과 얽혀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과거의 비사가 명확하게 드러날수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럴 바에는 숨기지 말고, 모두 까발리자.
비밀은 숨겼을 때 활용도가 있는 법이다.
한데 그것을 까발리면 누가 이득을 보고, 누가 손해를 볼 것인가.
이훤은 웃었다.
‘나는 아니지.’
이미 팔황무극존의 무공에 망아취자와 악재의 깨달음을 더했다. 팔 성에 이른 천공혈륜겁은 때가 되면 알아서 구 성에 진입할 터였다.
반면 일생의 숙적이라 할 수 있는 천룡전은 어떠한가.
천룡이 몇 개의 깨달음을 얻었고, 어느 정도 강한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저들이 지금까지도 암암리에 활동하는 걸 보면 아직까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터였다. 놈들이 지금껏 은밀하게 행동했던 것을 보면 절명곡의 비사가 밝혀지는 걸 원할 리가 없다.
‘너희들은 닭 좇던 개꼴이고.’
더불어 다른 생존자들도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다.
망아취자처럼 은인자중 했던 자라면 하던 대로 몸을 숨기고 있으면 된다. 하나 그렇지 않다면 눈앞의 존재와 같은 반응을 보일 터였다.
“이 놈!”
이훤의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갈에 가장 먼저 반응한 사람은 우습게도 악오춘이다. 산동악가의 가주이자, 악재의 가르침으로 승승장구하던 자였다. 대대로 신마의 깨달음만 연구해도 오대세가의 자리는 반석과도 같았다. 어쩌면 오대세가의 으뜸이 될 수도 있고, 천하제일방파도 꿈꿨으리라.
한데 그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됐을 터였다.
‘산동악가는 다시 촌구석 시골뜨기로 돌아가겠고.’
이훤이 도발을 하듯 히죽거리자, 악오춘은 분노를 가감 없이 표출했다.
“감히 본 가의 이름을 함부로 거론해!”
어쩌고저쩌고는 모두 핑계였다.
단지 몰래 숨겨두고 핥아먹으려 했던 당과를 빼앗겼으니 화를 참지 못한 것이리라.
“가만 두지 않겠다!”
초절정을 넘어선 진짜 고수의 일격이 내리꽂혔다.
녹빛 강기(罡氣)가 넘실거리는 순간 주변 공간에 아지랑이가 퍼져나갔다.
이훤은 강기가 지척에 이를 때까지 기다렸다.
‘확실히 다르다.’
강호에 알려진 바가 없는 악오춘의 일수는 지금껏 상대했던 누구보다 강했다. 단순히 강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이야 초절정에 오른다면 누구나 가능할 터였다. 그러나 기를 외부로 발현하여 응집시킨 후 자유자재로 다룬다는 건 수많은 과정을 필요로 했다.
악오춘의 강기는 끈끈했고, 정순했고, 탄력적이다.
그 증거로 철창을 내리치는데 창대가 버드나무처럼 부드럽게 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수천 명의 이목이 집중된 상태였다.
피한 후 반격하는 것이 상식이지만, 일부러 받아치기 위해 주먹을 내질렀다.
신마의 깨달음이 대단하다는 걸 증명해야 했다.
오른 손목에 매달려 있던 팔황이 혈륜에 반응하여 저절로 주먹을 감쌌다. 그리고 녹빛 강기와 정면으로 부딪쳤다.
쩡!
주먹과 창끝이 부딪치는 지점을 경계로 광풍이 일었다.
이훤의 뒤로 악오춘의 기운이 흩어지며 비산했고, 반대로 이훤의 기는 악오춘의 창에 갈라진 것처럼 좌우로 흩어졌다. 공간 자체가 일렁일 정도의 격돌에 군중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산동악가도 신마의 무공을 얻었다더니.”
“저것이 신마의 무공!”
경악이라는 감정은 금세 희열로 바뀌었고, 종극에 이르러 희망이 되었다. 자신도 잘 만 하면 저렇게 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희망일 터였다.
이훤이 바라는 대로다.
‘모두 욕심을 내라고! 신마의 무공은 멀리 있지 않아!’
양 손을 쥐락펴락하며 휘돌리는 순간 혈륜은 피의 수레바퀴처럼 원을 그리며 휘몰아쳤다. 기의 시작과 끝이 뒤엉키는 순간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수레바퀴의 중심부에서 핏빛 기운이 일직선으로 번뜩였다.
마치 혈창과 같은 기운이 악오춘을 향해 쇄도했다.
“흥! 구궁은 서로를 채우니 뇌진과 같고! 구궁은 빈틈이 없으니 벼락이라!”
악오춘은 이훤의 기세가 심상치 않자, 손에서 창을 놓았다. 하나 창은 손바닥에서 두 치 정도 떨어진 채 고정됐다. 손바닥과 창 사이로 뇌기가 일어났다. 그리고 푸르스름한 기운이 번뜩이는 순간 창이 스스로 회전했다.
촤라라라라라락!
그는 혈창(血槍)이 지척에 이르는 순간 놓고 있던 창을 쥐었다. 그리고 창을 내지르는 순간 공간을 찢어발길 듯한 뇌전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지지지지지지직!
혈창은 뇌기에 휘말리는 순간 끝이 비틀렸다.
하나 그 또한 예정되었던 일처럼 악오춘의 창을 타고 휘감기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악오춘의 창 또한 원형을 잃은 채 혈창과 뒤엉켰다. 새끼를 꼬듯 두 개의 창이 엇갈린 후에야 혈륜과 뇌기가 자취를 감췄다. 그 자리에 엿가락처럼 비틀린 창과 금빛으로 번들거리는 팔황만이 남았다.
“그 창은 못 쓰겠군.”
이훤이 피식 웃으며 팔황을 회수했다.
처음 수레바퀴에서 솟구친 것부터가 팔목에 차고 있던 팔황인 셈이다. 악오춘은 팔황이 회수되자 볼품없이 비틀린 채로 남아 있던 자신의 애병을 내던졌다.
“흥! 창을 다오!”
악가 쪽을 향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일갈을 내질렀다. 한데 돌아온 것은 창이 아니라 소가주 악운의 다급한 경고였다.
“가주!”
악오춘은 이훤을 노려보던 눈빛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가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수천 명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들의 생김새는 각기 달랐으니 비슷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반짝이면서도 끈적거리는 눈빛.
그가 악재의 무공을 처음 견식 했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놈! 나를 이용했구나!”
이훤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악오춘으로서는 땅을 치고 후회가 됐다.
그도 그럴 것이 일격에 죽여 버리려고 나섰으나, 이훤의 선동에 신뢰만 부여한 꼴이 아닌가. 내일의 산동악가는 어제와 다를 터였다. 이제 매일 같이 누군가 숨어들 것을 우려해야 했고, 가솔을 믿지 못하게 됐으며, 외부인을 경계해야 했다.
“가만 두지 않겠다!”
악오춘이 씹어뱉듯이 읊조렸다.
하나 이훤은 개의치 않았다.
산동악가의 가주인 악오춘이 무슨 원한을 품든 악재가 출동하는 순간 상황 정리였다. 그렇기에 그는 오연한 자세로 군중을 향해 일갈을 내질렀다.
“시간이 지났으니 이제는 말 할 수 있지 않은가? 신마는 과연 공적이었던가? 그게 아니라면 지도층의 입맛에 맞지 않는 독불장군이었던가? 하나 세월이 흘렀으니 그 또한 의미가 없다. 생각해 보라. 나는 신마의 무공을 익혔으나, 여전히 화산에 있다! 내 스승과 사형들도 화산에 있다! 우리는 화산이다!”
그는 악오춘을 가리키며 외쳤다.
“산동악가의 가주가 신마의 무공을 익혔다고 해서 신마의 후예인가? 그게 아니라면 악가의 가주인가? 또한 저 곳을 보라!”
군중의 시선은 이훤의 손짓에 이리 저리 오갔다.
그들은 무림맹의 수장인 극양도군을 응시했다.
극양도군이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슬쩍 자리를 옮기자, 낯선 이가 보였다.
목석처럼 굳은 얼굴만 봐서는 누구인지 알 수 없다.
하나 그가 입은 무복과 그가 품고 있는 검을 보면 한 곳이 떠올랐다.
창궁제일가, 천하제일가, 속세일문.
그렇다 남궁세가였다.
“남궁세가의 무인이다.”
여기서 또 탈마가 슬쩍 정보를 퍼트리며 분위기를 조성했다.
“창무검제! 남궁 대협이다!”
남궁세가의 위치는 산동성에서 이천 리 이상 떨어진 곳에 위치하지 않았던가. 비록 남궁채린이 산동성을 지나는 길이었지만, 군중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늘의 일 때문에 남궁세가도 주요 인물을 급파한 것이라 여겼다.
이훤은 평소와 달리 예의를 갖춰 말을 걸었다.
“남궁세가의 고인께도 여쭙겠소! 신마의 무공은 누구의 것이오?”
창무검제 남궁채린은 대꾸하지 않았다.
이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빙긋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신마의 무공은 강호의 것! 모두가 함께 보고, 깨우쳐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하외다. 그러니 나 취선관주 이훤은 무림맹에서 신마의 무공을 취합할 조직을 만들고, 공정하게 조사해줄 것을 정식으로 건의합니다!”
잠시 고요했던 충암평 전체가 뒤흔들릴 정도의 함성이 터져나왔다.
“와아아아아아아!”
“무림맹은 신마의 무공을 공개하라!”
이훤은 이 모든 난장판의 정리를 무림맹에 전가한 후 뭐라도 되는 양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조사하라!”
그러자 수천 명이 이훤의 말을 연호했다.
“조사하라! 공개하라!”
창무검제 남궁채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갑시다.”
극양도군은 예기치 못한 한 마디에 눈을 끔뻑였다.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남궁채린은 짜증이 담긴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대가 책임질 수 있는 사안이 아니지 않소? 나 또한 그렇소이다. 그러니 돌아가서 책임자에게 이 일을 전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극양도군은 입맛을 다셨다.
산동악가를 사마외도로 몰아붙이기 위해 이 모든 사달을 벌이지 않았던가. 한데 그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으니 맹에서는 책임의 소재를 찾으려 할 터였다. 그리고 높은 확률로 극양도군이 덤터기를 써야 하리라.
‘주작은 나를 지켜주지 않을 텐데······.’
잠깐의 우려는 전음으로 허락이 떨어지는 순간 사라졌다.
창무검제와 극양도군이 돌아서고, 무림맹이 충암평을 떠나는데 걸린 시간은 반각도 채 되지 않았다.
“아!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누군가의 외침을 시작으로 충암평에 모인 군중도 하나둘 씩 자리를 떴다. 이훤이 전해준 깨달음을 복기하려면 한 시가 아까웠다. 이 또한 탈마가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주의를 환기시킨 덕분에 이뤄진 움직임이었다.
“하루이틀에 끝날 일이 아니야!”
탈마는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충암평 외곽으로 데려갔다.
그곳에는 이미 수많은 막사와 간이 주루가 설치된 상태였다. 충암평에 수천 명이 모였으니 먹고 마실 것을 팔기 위해 곳곳에서 모여든 장사치들이다.
탈마는 군중들이 자연스럽게 섞여드는 걸 보고 입꼬리를 올렸다.
“참 순수한 사람들이야.”
< 51, 새 강호가 열렸다.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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