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 광야제(狂夜帝). (2) >
마른하늘의 날벼락.
산동악가의 앞마당인 충암평(充巖平)에 모인 무인들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다. 충암평은 이름처럼 바위로 가득한 들판이기에 두 발로 서 있기에 수월한 장소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이훤의 협박이 터져 나오는 순간 몇몇은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을 정도였다.
“저런 미친놈이 있나?”
극양도군은 솔직히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오죽 했으면 평소의 근엄한 표정마저 버린 채 탄식을 내뱉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은 짐승과 달랐다.
옛 성현이 말하길 사람과 짐승의 가장 큰 차이점은 머리를 쓸 줄 안다는 것이다. 그 말처럼 사람은 생각을 하고, 그로 인해 행동을 하게 된다. 이러한 것이 오랜 세월 지속되면 습성이 되고, 성향이 되는 게다. 오래 살았거나, 경험이 많은 이들은 상대방의 성향을 통해 언행의 속뜻을 찾아내려 했다.
한데 이훤을 보고 있자니 머리가 어질할 뿐 무엇 하나 예측할 수가 없었다. 마치 미꾸라지를 땅에 내려놓은 것처럼 제멋대로 날뛰고 있지 않은가.
“고래로 중원의 물줄기는 서쪽으로 흐른다! 회하가 그렇고, 장강이 그렇다. 그 강에 배를 한 척 띄워놓으면 천하절경을 앉아서 구경할 수 있게 된다. 절경을 보면 어떤 기분이 들겠는가?”
이훤이 한껏 장황하게 외쳤으나, 영문 모를 소리에 누구 한 명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심지어 궁금하지도 않았기에 반문하는 이도 없다. 하나 이훤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자문자답을 이어갔다.
“당연히 좋은 기분이 들겠지! 탄성이 절로 나오지. 그 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그렇다. 술이다! 이처럼 술 주(酒)라는 글자는 물 수(氵) 변에 서쪽을 의미하는 서(西)와 배를 의미하는 한 일(一)이 뭉쳐서 만들어졌다. 즉! 술이란 응당 즐겁고, 흥분이 될 때 마셔야 한다는 것이 선조의 가르침인 셈이다!”
개소리다.
고양이나 쥐가 짖어도 저 말보다는 의미가 있을 터였다.
극양도군은 화도 나지 않았다.
그저 이해가 되지 않을 뿐이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건데?’
황보세가의 가주인 황보태와 산동악가의 소가주인 악운을 인질로 잡은 후 기껏 한다는 것이 술이라는 글자의 해석이다. 심지어 진위조차 파악할 수 없는 개소리로 군중의 이목을 현혹하려 했다.
‘도대체 원하는 게 뭐냐고?’
이훤은 소룡대연에서 황보세가의 흉수에 목숨을 잃을 뻔 했으리라. 그러니 황보세가의 죄업에 대해서 모르지 않을 터였다.
‘그래서 황보태를 납치한 후 황보세가의 악행을 만천하에 고할 줄 알았거늘······.’
이게 상식이다.
정파의 무인이라면 기회와 힘이 주어졌을 때 열이면 열, 모두 그렇게 행동했으리라. 황보세가의 악행을 주지시킨 후 무림맹의 명분을 약화시키고, 산동악가의 혐의를 풀려고 할 터였다.
극양도군은 그런 경우를 대비하여 계책까지 만들어 놨다.
아니, 위에서 알려줬다.
한데 이훤은 그와 주작, 그리고 천룡전이 준비한 모든 걸 무용지물로 만들고 있었다. 그저 참신한 개소리로 시간을 끄는 것만으로 말이다.
“쉬엄쉬엄 갈 착(辶)에 머리를 의미하는 수(首)가 붙으니 술을 마실 때에는 곧 수장을 모시고 쉬엄쉬엄 가듯 여유로워야 한다는 게다. 이것이 도(道)의 진정한 의미이니 사내라면 응당 좇아야 할 주도인 것이다!”
무림대회급 개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졌다.
하나 무인들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웅성거릴 뿐이다.
그 사이 천풍삼군이 극양도군을 재촉했다.
“도군.”
그들 역시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극양도군의 안색을 살폈다. 그들은 저간의 사정을 알고 있기에 다시 검을 거두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황보세가는 산동성의 후기지수들을 학살한 장본인이 아닌가. 어차피 황보세가는 산동악가를 정리한 후 자연스럽게 멸문의 절차를 거칠 예정이었다.
[어차피 인질이라고 해봤자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놈이 의기양양하고 있을 때 치시지요.]
하나 극양도군은 움직이지 못했다.
상대는 미친놈처럼 횡설수설하고 있지만, 일관된 목적을 지닌 채 움직일 터였다. 한데 적의 속내도 알지 못한 채 달려들었다가는 기껏 쟁여놓은 명분마저 잃게 될 공산이 컸다.
생각해 보라.
황보태가 때려죽일 놈이라는 건 몇몇만 아는 사실이다.
한데 극양도군이 공격을 명령하기 위해 황보태의 면모를 까발린다면 한 가지가 문제가 생긴다. 산동악가를 악의 축으로 몰아넣은 게 불과 반 시진 전의 일이 아닌가. 한데 이제 와서 또 황보세가의 가주가 악인이라고 주장한다면 몇이나 믿겠는가. 무엇보다 악인임을 알면서도 함께 산동악가를 공격했다는 비난을 금치 못할 터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산동악가에 대한 혐의에도 의심을 하기 시작하겠지.
그야말로 스스로 물타기를 하는 꼴이다.
‘이렇게 된 이상 저 놈이 황보태의 악행을 까발리는 편이 가장 좋을 해결책이기는 한데······.’
이훤은 극양도군의 서늘한 눈빛을 가볍게 무시했다.
오히려 산동성의 명주(名酒)인 망태주와 즉묵노주의 제조 비법을 알려주느라 여념이 없었다.
“주도는 좋은 분위기, 좋은 사람, 그리고 좋은 술에서 나온다! 내가 기왕 산동성에 왔으니 이곳의 명물로 나눠 마시기 좋은 즉묵노주에 대해서 논해보겠다!”
“저 빌어먹을 새끼가 아주 끝을 모르는구나!”
극양도군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이를 갈았다.
상부에서도 따로 전음을 보내지 않으니 고민만 할 뿐 쉬이 움직일 수 없었다.
그 때 지금껏 잠자코 있던 이가 말을 건넸다.
“저 아이는 이 정도 군웅들로는 성에 차지 않는가 보오.”
창무검제 남궁채린의 나직한 읊조림이다.
그는 이곳에 올라온 후 옅은 미소를 지은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한데 그런 그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더욱 진득한 미소를 흘렸다.
극양도군은 미간을 좁힌 채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 때 수하가 황급히 달려와 부복했다.
“사람들이 옵니다!”
극양도군은 그제야 창무검제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저 새끼가 시간을 끌고 있었구나. 그런데 왜?’
누군가 온다고 해봤자 유명한 사람이 있을 리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산동지부에 도착한 이후 산동성에 거주하거나 지나고 있는 명사들을 모조리 수색하지 않았던가. 반나절 만에 성을 건너뛸 수 있는 능력이 있지 않는 한 도움이 될 만한 자가 있을 리 만무했다.
“누구냐? 지원군이냐?”
“그것이······.”
수하는 말끝을 흐렸다.
극양도군은 짜증 섞인 일갈을 내질렀다.
“누가 오고 있단 말이냐?”
“그것이······.”
*
청라표국은 산동성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만큼 큰 표국이다. 그런 곳에 갓 스무 살이나 됐을 법한 어린 무인이 뛰어 들어왔다.
“인편! 초지급!”
접수원은 어린 무인의 명령조에 미간을 좁혔다.
하나 그가 무림맹 산동지부의 명패를 내밀자, 넙죽 고개를 숙이며 안채로 인도했다.
“총표두인 우삭이라 합니다.”
“어디서 왔는지는 눈치 챘을 테고, 숭산에 이걸 보내야겠소.”
무인은 급히 준비한 듯 제대로 밀봉도 되지 않은 쪽지를 건넸다. 총표두가 목합을 내밀자, 그 안에 던져 넣은 후 말을 덧붙였다.
“돈은 얼마가 들어도 좋소!”
“역참의 말까지 모두 동원한 후 경공을 펼친다면 가장 빠른 게 하루입니다.”
“좋소.”
무인은 은자 열 냥짜리 열 묶음을 던지며 말했다.
“지금 당장 출발하시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표국을 떠나는 것이 아닌가.
“쯧, 버릇 없는 새끼!”
총표두는 목합을 봉인하려다 멈칫했다.
표국주가 황급히 들어섰기 때문이다.
“잠깐!”
“예, 국주.”
“아직 밀봉 안 했지?”
“예, 무슨 급한 일이 있었는지 확인도 안하고 시세의 두 배를 던져놓고 떠났습니다.”
“우리가 잠깐 보세.
총표두는 표국주의 말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표국은 신뢰를 목숨처럼 여겼다.
그런데 표국주가 표물을 열어보자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 이야기를 들어 보게. 태산에서 일이 터진 건 알고 있지? 무림맹이 산동악가를 노린다는 이야기 말이야.”
“알고 있습니다. 무슨 보물 창고가 나왔다면서요? 한데 우리와 무슨 상관입니까? 괜히 끼었다가는 칼받이가 될 뿐이잖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했네. 한데 한 식경 전부터 태산에서 몰래 한 사람씩 내려오기 시작했어. 그들이 뭘 했는지 아는가?”
총표두는 조금씩 표국주의 말에 빠져들었다.
표국주는 목소리를 더욱 낮췄다.
“무언가를 급히 적은 후 자신의 사문, 또는 동료들에게 인편이나 전서구를 보내기 시작했어. 내가 방금까지 청무상단에서 계약하고 있었잖아. 한데 어떤 중년인이 뛰어 들어오더니 오죽 급했는지 상행에 서찰을 부탁하기도 하더군.”
“그렇다면 지금······.”
“그래! 이런 표행을 의뢰받은 게 우리만이 아니야. 이미 하오문과 개방은 물론이고, 놀고먹는 자들에게는 죄다 사람이 붙어서 부탁을 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총표두는 침음을 흘렸다.
표국주는 재촉을 하듯 말을 건넸다.
“이게 잘못됐다는 건 나도 알지. 하지만 아까 그 표행을 맡긴 청년의 행색이 어떻던가?”
“땀이 가득하고, 뛸 때 균형이 맞지 않는 걸로 봐서는 하급 무사처럼 보였습니다.”
“다른 곳도 비슷했어.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 하급 놈들도 욕심을 낼 무언가가 나왔다는 뜻이야. 그리고 가능성이 있어보이니까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한 거고.”
총표두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목합을 열었다.
보물은 양날의 검이다.
자격이 있다면 검을 쥘 것이고, 자격이 없다면 검에 찔릴 터였다. 한데 생각보다 위험하지 않다면 굳이 보물에 대한 욕심을 멀리할 자가 몇이나 될까.
총표두는 지극히 평범한 사내였다.
그는 목합을 열었고, 표국주는 황급히 서찰을 꺼내서 읽었다. 급하게 적은 것처럼 몇 줄의 글귀가 전부였지만, 두 사람의 두 눈은 점차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이거 진짜일까요?”
“진짜면 우리 삶이 달라진다.”
청라표국과 같은 일이 태산 아래 위치한 마을 곳곳에서 일어났다. 원륜표국주는 방금 의뢰받은 은자 삼백 냥 짜리 표행을 직접 나서기로 했다.
“허허, 산서성 태원이야 코앞이니 금방 다녀옴세!”
총관이 배웅을 하며 돌아올 때 사와야 할 물품 목록을 건넸다.
“관도만 따라 달리셔도 충분하니 걱정하지 않습니다.”
하나 원륜표국주는 표국을 나서지 못했다.
평소 왕래가 잦아 의형제를 맺은 천야무관의 관주가 찾아온 게다.
“형님! 이런 시기에 어디를 가는 거요?”
“나야 의뢰를 받고 가는 거지.”
“혹시 얼마가 됐든 좋으니 최대한 빠르게 서찰을 전해달란 의뢰였소?”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지금 그 의뢰를 받은 무관, 상단, 표국, 하오문을 비롯한 모든 강호방파만 해도 백여 곳에 이릅니다. 그리고 의뢰인은 전부 태산에서 내려왔고요.”
“그게 무슨 소리야?”
“형님! 그 서찰 보셨소?”
원륜표국주는 노호성을 내질렀다.
“의제!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할 말과 못 할 말이 있는 게야.”
“역시 고지식하시군!”
천야무관주는 원륜표국주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제 아셨소? 어차피 의뢰를 받았으니 아무에게나 맡겨서 보내시오. 그리고 형님은 나와 함께 갑시다!”
원륜표국주는 의제에게 들은 이야기가 믿기지 않는 듯 더듬거리며 물었다.
“어, 어디를 가는데?”
“어디긴 어디요! 당연히 충암평이지!”
“산동악가의 앞마당? 거기는 지금 무림맹과 산동악가가 일대혈전을 벌이는 장소가 아닌가. 위험할 것이야.”
천야무관주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흥! 이미 충암평으로 향한 무인만 해도 오백 명이 넘소. 우리는 이미 늦었단 말이오! 어서 갑시다!”
원륜표국주는 잠시 머뭇거리다 총관에게 외쳤다.
“후우! 어쩔 수 없지. 총관! 표사들을 모두 모으게! 저건 대충 아무에게나 맡겨서 보내고, 나머지 인원은 모두 나를 따라오라고 이르게.”
갈 날이 머지 않은 총관은 영문 모를 상황에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정말 충암평에 가시려고 합니까?”
원륜표국주는 어느덧 핏발 선 눈으로 외쳤다.
“당연하지! 신마의 후예가 절대무공의 구결을 알려준다잖아!
두 사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표국을 떠났다.
“벌써 사람들이 많이 몰린 것 같은데?”
“아직 도착은 안했을 거요. 모두 비슷한 시기에 정보를 확인한 것 같소.”
“그럼 경공을 펼치자!”
백주대낮에 그것도 저자에서 경공을 펼쳤다가는 좋지 못한 소리를 듣기 마련이다. 하나 두 사람은 그것과 상관없이 내공을 있는 대로 뽑아 올렸다. 그리고 꽉 막힌 관도를 피해 나무 위로 뛰어올랐다.
“쳇! 여기도 바글바글 하군.”
위에서 보니 이미 나무나 지붕을 밟고 뛰는 이들이 상당했다. 그리고 높은 곳에서 확인하니 이미 태산으로 향하는 길목은 무인들로 빼곡하게 들어찬 상태였다.
“그래도 충암평에 도달한 이는 몇 되지 않을 게요. 어서 갑시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빠르게 가기 위해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섰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 품 안에서 전낭을 낚아채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흐음.”
소매치기는 두 개의 전낭을 던졌다가 받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자! 이제 또 어디에 가서 의뢰를 맡길까?”
< 50, 광야제(狂夜帝).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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