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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마신-121화 (121/226)

< 50, 광야제(狂夜帝). >

50, 광야제(狂夜帝).

매담자(賣談者)란 말 그대로 이야기를 파는 사람이다.

그들이 파는 이야기란 무궁무진했다.

돈이 된다 싶으면 황궁과 관부, 구파오가는 물론이고, 남녀의 상열지사까지 맛깔나게 포장해서 팔아먹었다. 애초에 정해진 장소나 가격이 없으니 화자의 구공이 얼마나 대단하느냐에 따라 돈벌이가 달라졌다. 결국 매담자는 작은 일을 크게 포장하고, 보지 못한 일을 눈앞에서 펼쳐지듯 설명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크아! 그래도 직접 보는 게 최고지!”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괜히 있겠는가.

이훤은 눈을 빛냈다.

구경의 양대 산맥인 불구경과 싸움구경 중 후자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기회였다. 그는 술을 마시며 타는 입술을 축였고, 초조할 때마다 육포를 씹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기분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번의 싸움으로 몇백 명의 죽음이 결정될 터였다.

한데 대치 상태만 계속될 뿐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무림맹 쪽에서 극양도군이 외쳤다.

“저 미친놈이 뭐라는 것이야?”

극양도군으로서는 무림맹의 힘을 보여주려는 찰나에 이목을 집중시킨 이훤이 마뜩찮을 리 만무했다.

반면 이훤은 기껏 좋은 자리까지 잡았거늘 싸움이 벌어지지 않았기에 심통이 난 상태였다. 어차피 이제 와서 정파의 협객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천룡전만 없앨 수 있다면 저들의 싸움 따위는 어찌되어도 좋았다.

“아! 내가 신호를 주지 않아서 그런 건가?”

이훤이 술병을 내려놓고, 바위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극양도군은 그 모습에 미간을 좁히고는 수하들을 향해 짜증 섞인 일갈을 내질렀다.

“맹의 위업을 달성해야 할 상황이다. 가서 정리해라.”

다섯 명의 무인은 극양도군의 목소리에 담긴 살기를 인지하고는 경공까지 펼치며 내달렸다.

파파파팟!

이훤은 다섯 명이 접근하는 것을 알면서도 무림맹과 산동악가를 향해 외쳤다.

“시작!”

하나 저들이 움직일 리 만무했다.

오히려 이훤을 광인처럼 쳐다봤다.

그리고 곧 무인들의 칼날 아래 쓰러질 것이라 확신했다.

쉬이이익-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자가 사적인 대화나 속내를 털어놓을 리 없다. 그렇기에 경고도 없이 무기를 뽑았고, 사방에서 찔러 넣었다. 한순간 다섯 자루의 검이 이훤의 몸을 꿰뚫는 듯했다.

모두가 죽었다고 여겼다.

그도 그럴 것이 검을 찔를 때 핏빛이 일렁였기 때문이다. 하나 그것이 핏빛 안개임을 인식했을 때에는 무인 다섯 명을 모두 감싼 후였다. 먼지가 쌓인 부대를 걷어찼을 때처럼 퍼져나온 안개는 시간을 역행하듯 뿜어져 나온 것보다 빠르게 회수됐다.

촤아아아아악!

수십 자루의 칼날이 맞부딪치는 기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이훤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 무인들은 하나둘 씩 허물어졌다.

“허!”

“저게 무슨 무공인가?”

이훤이 경천동지할 무공을 선보인 건 아니다.

하나 천오백에 이르는 군중의 이목이 집중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핏빛 안개가 일렁이며 삽시간에 다섯 명을 쓰러트렸으니 효과는 배가됐다.

“뭐하는 놈이냐?”

극양도군은 혀를 차며 외쳤다.

예상 외의 상황에 짜증이 치밀었을 뿐 두려워하거나, 경계하는 모양새가 아니다.

“이훤.”

어디선가 매화군자라는 별호가 흘러나왔다.

하나 이훤은 그 말에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이제 버리기로 했어.”

“하는 짓을 보아히니 제정신이 아니로구나.”

“그러는 너는 누군데?”

극양도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는 본래부터 수양이 깊은 사람이 아니었다.

평소의 그였다면 이훤이 나타나서 심판을 운운하는 순간 직접 도를 뽑았으리라. 하나 지금은 주작의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처지가 아니던가. 그렇기에 명령과 본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상태였다.

“지부장. 처리하게.”

결국 그는 주작의 명령을 선택했다.

산동지부장은 혈전에서 빠질 수 있게 되어서인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하겠습니다!”

지부장을 필두로 백여 명의 무인이 무리에서 갈라져 나왔다. 그들은 이훤을 포위한 채 서서히 거리를 좁혔다. 그 와중에도 지부장은 대화를 시도했다.

“매화군자.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이오?”

“나를 아는가?”

“보는 건 처음이지만, 명색이 산동지부장이외다. 그렇기에 당신의 협행을 멀리서나마 응원하고 있었소. 한데 소룡대연에 참석한 걸로 알고 있거늘 어째서 여기서 이렇게 난장을 부리는 것인가?”

이훤은 지부장의 물음에 입꼬리를 올렸다.

“당신은 몰라도 돼.”

지부장의 얼굴이 잠시 일그러졌지만, 금세 신색을 회복했다. 그는 수백 명이 죽어나갈 혈전에 끼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훤의 도발을 억지로 참아내면서 의미 없는 대화를 이어가고자 했다. 가능하다면 싸움이 모두 끝날 때까지 평행선을 그리고 싶었다.

“허허, 그러지 마시오. 행여 서운한 게 있다면······.”

퍽!

이훤의 주먹질에 산동지부의 무인이 피를 토하며 튕겨나갔다. 그리고 포위망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었다. 그 와중에 길을 막는 자는 모조리 때려눕혔다.

“자격이 되지 않으면 빠져라.”

서늘한 한 마디와 함께 전신에서 불같은 기세가 터져 나왔다. 그것을 절정에도 미치지도 못하는 일반 무인들이 견뎌낼 리 없다. 그들은 눈치를 보며 길을 내줬고, 결국 지부장과 마주하게 됐다.

지부장은 호흡을 가늘게 하면서 마음을 다스리려 했다.

그렇기에 표정은 제법 안정이 된 상태였다.

하나 속내는 달랐다.

‘검을 뽑았어야 하나? 내가 마지막으로 수련을 했던 게 언제였더라? 누가 도와주지는 않을까? 빌어먹을! 말년에 이게 무슨 개고생이란 말인가. 나도 못이기는 척 비켜설까?’

온갖 잡념이 개밥처럼 뒤섞인 채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 사이 이훤이 산동지부장 앞에 섰다.

“아.”

평소였다면 그냥 후려친 후 갈 길을 갔으리라.

한데 무림맹의 지부장이라는 자가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 앓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씁쓸했다.

“이봐.”

이훤은 산동지부장의 눈을 마주보며 물었다.

“처음 검을 들 때도 그런 마음이었어?”

“······.”

“아니잖아. 나도 그랬어. 뭐라도 해보고 싶어서 시작했었지. 물론 초심을 지키는 건 어려워. 불가능하지. 나도 매 순간 선택을 해야 할 때 망설였고, 대부분 잘못된 선택을 했어. 하지만 말이야. 결국은 때가 와.”

지부장은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의 아들보다도 어린 청년의 눈빛이 어찌 저리 깊단 말인가. 자신보다 더 오랜 세월 강호를 떠돈 사람처럼 온갖 감정이 느껴졌다. 그리고 마치 먼저 걸어본 사람처럼 후인에게 조언하는 듯한 모양새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다.

“무슨 때가 온단 말이오?”

이훤은 입꼬리를 올렸다.

“내 몸값이 가장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흔히 논하는 협의지심이 아닌 몸값이라는 말에 오히려 더욱 집중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훤의 뒤이은 말에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과오를 모두 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단 말이지.”

“아아.”

“공으로 과를 덮지 못한다는 말이 있잖아. 하지만 공이라도 있어야 과를 모른 척 해줄 수 있는 거야. 마치 우리가 서로의 단점을 알고 있지만, 굳이 거론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야.”

지부장은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내게 이러는 이유가 뭐요?”

“당신도 느낄 텐데. 나도 그랬던 적이 있어서 그래.”

“······.”

아들 뻘의 무인에게 감화되고 있음을 알고 있지만, 조금도 기분이 나쁘거나, 어색하지 않았다.

“나는 내 할 일을 할 테니. 당신은 당신의 일을 해.”

이훤은 지부장을 지나치며 히죽 웃었다.

“일을 해결할 능력은 없어도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도는 판단할 수 있는 나이잖아. 당신에게 득이 되는 쪽으로 행동해. 눈앞의 작은 이득이 아니라 진짜 당신의 몸값을 최대치로 끌어올 릴 수 있는 이득을 노리라고.”

지부장은 이훤의 등이 훤히 보였음에도 검을 뽑지 않았다. 오히려 검배에 올려놓았던 손을 서서히 늘어트린 후 발작적으로 외쳤다.

“내 이름은 추여춘이오!”

이훤은 대꾸하지도, 돌아보지도 않았다.

하나 지부장은 그 순간 무언가 자신을 억누르고 있던 돌더미 중에서 한 개 정도는 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얘들아.”

“예, 지부장.”

추여춘은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한 후 말했다.

“우리가 제일 잘하는 걸 하자.”

*

이훤은 등 뒤가 시끌벅적했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모든 건 계획대로네.’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가 지금부터 하려는 건 악재를 만나기 전까지는 생각지도 않았던 방법이다. 하나 그를 만나서 구궁벽력공의 오의를 전해 듣는 순간 결심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적이 유언으로 남긴 단편적인 정보로 유추했을 때 감각사도는 모두 열여섯 명이다. 실제로는 얼마나 더 많을지, 적을지 추측조차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비록 그가 지금까지 다섯 명의 감각사도를 죽였다지만, 어느 세월에 천하를 떠돌며 모두를 정리하겠는가.

판을 뒤집어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당연하게도 그림은 그가 그릴 것이다.

‘아주 엉망진창으로 말이야.’

그러기 위해서는 선행되어야 할 조건이 있다.

이훤의 발걸음이 점점 속도를 더했다.

보폭이 점차 늘어나더니 한 달음에 삼 장을 뛰었다.

팟!

마치 불덩이가 호선을 그리듯 십여 명의 머리 위를 날아들었고, 적진의 한복판에 내리꽂혔다.

이훤과 마주한 자가 대경실색하여 신음을 내뱉었다.

“헙!”

황보세가의 복장을 한 것으로 보아 소속은 확인됐다.

자식을 죽여 죄를 뒤집어씌우고, 그로 인해 산동성의 이권을 독차지하려 한 악당이 아닌가. 하나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니 도구로서 충분히 쓸만했다.

이훤은 땅에 내려서는 순간 그대로 허리를 비틀었다.

오른 발이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는 순간 황보세가의 가주인 황보태의 왼 다리가 걸렸다.

콰직!

걸려서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리 뼈 자체가 두 동강 났다. 고통이 입으로 전달되기 전 두 번째 공격이 시작됐다. 허공으로 치솟은 황보태의 다리를 붙잡고 그대로 몸을 뒤집었다. 그 순간 황보태의 신형이 장대처럼 허공을 날더니 땅바닥에 처박혔다.

콰직!

“으아아아아아!”

개구리를 바위에 던진 것처럼 대자로 쑤셔 박힌 황보태는 수치스러움과 고통 속에서 비명만 내질렀다.

무림맹 수뇌부의 이목이 집중됐다.

맹과 산동악가의 혈전은 뒷골목의 막싸움과 달랐다. 그렇기에 양측은 전력으로 부딪치는 것이 아니라 하급 무사들부터 내보내 서서히 열기를 끌어올리려고 했다.

그러니 수뇌부들은 갑작스럽게 날벼락을 맞은 황보태를 보며 눈을 부릅 떴다.

“이 놈!”

청성파의 천풍삼군이 빠르게 발검했다.

하나 이훤은 그들이 지척에 이르기 전 황보태의 뒷목을 움켜쥔 채 대지를 박찼다.

파팟!

암천군림보를 펼치는 순간 그의 신형은 눈을 두어 번 깜빡할 사이에 산동악가 쪽에 이르렀다.

산동악가의 소가주는 입꼬리를 올렸다.

악오춘을 대신해 가솔들을 이끌던 그로서는 이훤의 접근이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보아라! 강호의 신성인 후기지수도 무림맹의 모략질에 반발하고 있다! 매화군자 이훤 또한 본가의 조력자를 자처하니 구파 또한 우리와 함께 하고 있는 셈이다!”

이훤은 헛웃음을 흘렸다.

매화군자라는 별호 때문에 화산까지 끌어들여서 선동을 하는 셈이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악운의 언행으로 인해 한결 죄책감을 덜 수 있었다.

“어서 오게! 우군을 환영하네!”

이훤은 포권을 하려는 악운을 향해 일격을 날렸다.

“우군 같은 소리 하네.”

“흡!”

악운이 황급히 두 다리를 놀리며 물러서려 했다.

하나 이훤이 마음먹고 펼친 일격이 아닌가. 결국 멱살을 잡힌 악운이 신음을 흘렸다.

“소가주!”

악가의 가솔들이 개미떼처럼 몰려들었다.

하나 이훤은 이미 암천군림보를 펼쳐 무림맹과 산동악가의 대치 지점에 내려선 후였다. 그리고 양 측을 향해 내력을 담아 일갈을 내질렀다.

“지금부터 내 말이 끝나기 전에 움직이는 자가 있다면 인질의 목숨은 장담할 수 없다!”

< 50, 광야제(狂夜帝).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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