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마신-120화 (120/226)

< 49, 내 손으로 부수겠다. (3) >

*

고수의 싸움이란 찰나의 순간 승패가 결정된다.

하나 누구나 알 듯 정정당당하게 서로를 향해 일검을 날리는 것으로 승패를 결정하지는 않는다. 상대를 베기 위해 무수히 많은 칼질을 연습하고, 마주한 순간에도 가상의 투로를 쉼 없이 그려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패는 칼을 맞대봐야 알고, 언제나 변수는 존재하는 법이다.

한데 말이다.

변수를 없앨 수 있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예행연습을 통해 필승을 자신할 수 있지 않겠는가.

악재의 구궁벽력공은 그렇게 탄생했다.

쉬윅-

그가 허공을 향해 창을 찔렀다.

강맹한 기운이 휘감긴 것도, 무수한 변초가 숨어 있는 것도 아닌 평범한 창질이다.

“이 한 번의 창을 내지르기 위해 십 년이 걸렸네.”

이훤은 탄성을 내뱉었다.

처음에는 사기꾼이 약이나 팔기 위해 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하나 악재의 창을 쳐내고 반격을 하는 순간부터 상황이 묘하게 돌아갔다.

혈륜으로 인해 극대화된 육신.

그것을 오롯이 활용하며 사각을 노렸다.

텅!

하나 악재의 창은 이번에도 이훤의 팔황과 무극을 연이어 튕겨냈다. 그 후로도 백여 합의 공방을 이어갔지만, 조금의 이득도 볼 수 없었다.

이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마치 미래를 예견한 것처럼 모조리 막아내는 신위에 못된 성격이 튀어나왔다.

“흥! 이렇게 잘 할 수 있으면 아까 하지 그랬어?”

“크흐흐, 아까는 내가 물렀지. 후배를 대하는 마음으로 손속에 정을 뒀다고나 할까?”

“정 같은 소리하네. 친구들도 배신하고 제일 먼저 맹약을 깼으면서.”

악재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조부님, 어디 아프신 거예요?”

악설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부축을 했다.

“괜찮으세요?”

“마음이 아프다.”

탈마는 그 모습에 헛웃음을 지었다.

“본인은 저 나이에 바로 적응한 것 같은데요?”

“적응은 개뿔! 즐기고 있는데.”

오히려 악설이 당황스러워하며 물러났다.

이훤은 그런 악설을 향해 충고를 했다.

“조부라니! 말조심해라. 너도 설명을 들었듯 이 일이 잘못되면 산동악가에서만 주화입마에 빠진 마귀들이 수십 명씩 뛰쳐나올 거야. 모두 무림공적으로 몰려서 수많은 무인들이 포위를 한 후 죽이겠지. 그리고 침도 뱉을 걸? 산동악가의 현판은 천 년이 지나고도 밝은 태양 아래 내걸 수 없을 게다.”

“크흑! 무슨 말을 그렇게······.”

악설은 이훤의 악담, 아니 저주에 이를 갈았다.

하나 그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기에 한 숨만 연거푸 내쉴 뿐이다. 이훤은 어느새 멀쩡해져서 술을 병째 마시고 있는 악재에게 물었다.

“그럼 아까 말한 대로 신마의 깨달음을 그렇게 이해했다는 거야? 무기로 초식을 펼치는 게 아니라 몸에 투로 자체를 새겨버렸다는 거야?”

악재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친구들의 깨달음은 모르겠지만, 나는 그러했다. 생각해보라고. 자연환경에 돌과 나무, 바람과 비, 거기에 약간의 손질을 해서 진법을 만들잖아. 우리 몸에도 돌과 나무, 바람과 비를 대체할 것이 충분해. 필요한 건 자연환경이지.”

이훤은 애매모호한 소리에 침음을 내뱉었다.

진법은 펼칠 수 있는 곳이 한정적이다.

밝은 날 탁 트인 평지에서 제아무리 수를 써봤자, 진법에 속을 사람은 전무했다. 그러니 진법을 펼치기 위해 가장 필수적인 건 지형지물인 셈이다.

“내 몸을 지형지물로 삼으라는 건······.”

자신의 몸을 완벽하게 숙지하라는 의미가 아닌가.

그 말은 곧 천공혈륜겁의 핵심을 관통했다.

악재는 당연하게도 이훤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긴 듯 가감 없이 신마의 깨달음을 떠벌였다.

“크큭! 내 몸의 피와 영양분, 뼈와 근육, 혈도와 혈맥, 그리고 거기에 더하여 단전의 내공까지 모조리 파악한 후 지도를 그리는 거야. 그리고 그 지도에 진법을 설치하는 거지.”

그 말대로라면 한 번의 창질을 위해 십 년 동안 수련해야 했던 것도 이해가 됐다. 매순간 다른 시간, 다른 장소, 다른 상대, 다른 병기와 싸우는 것이 강호인이다. 한데 악재는 그 모든 경우의 수를 수작업으로 몸에 새겼다는 게다. 그것을 성공한다면 상대가 무슨 공격을 해도 몸이 먼저 반응해서 막는 것이 가능했다.

뚫을 수 없는 방패.

그것이 악재가 익힌 구궁벽력공의 오의일 터였다.

“하하하! 그렇게 잠깐 생각해서 구궁벽력공의 오의를 깨우친다면 내가 뭐가 되나? 물론 절대로 그런 일은 없겠지만 말이야. 나 정도나 되니까 수십 년 만에 깨우친 거야.”

악재는 이훤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했다.

이훤은 악재의 손을 슬그머니 밀어내며 입꼬리를 올렸다.

“방패.”

“뭐?”

“너 방패지. 창이 아니라 방패인 거야. 너는!”

영문 모를 소리였다.

한데 악재는 표정을 굳힌 채 풀지 못했다.

“······.”

“수십 년 동안 절대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방법만 겨우 몸에 새긴 거지?”

이훤의 확신 가득한 한 마디에 악재는 헛웃음을 지었다.

“허허, 무슨 소리지? 어디서 개가 짖나?”

“쯧, 그러니까 초옥에서는 나한테 진 거야. 방어만 했으면 내가 뚫을 수 없었겠지. 한데 나를 얕보고 이기기 위한 공세를 취했으니 구궁벽력공의 진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 거야. 그렇지 않아?”

악재는 명백하게 시선을 피했다.

“옛 성어를 모아놓은 서책이라도 보고 왔느냐? 갑자기 모순을 이야기하네. 생각보다 낭만에 잘 젖는 성격이로구만.”

이훤은 오히려 악재의 어깨에 손을 둘렀다.

“공격도 절대적이고, 수비도 절대적이면 뭐 하러 진법 안에 숨어 있어? 절명곡의 생존자나 천룡전이나 다 부숴버리면 되잖아. 아! 그게 되면 신마네.”

악재는 이훤의 놀림이 끝없이 이어지자, 이를 갈며 외쳤다.

“야! 완벽하게 방어하는 것만 해도 대단한 거야.”

“그건 인정해. 진짜 어지간해서는 못 뚫겠더라.”

이훤은 속내를 털어놓았다.

어차피 악재와는 당분간 함께 움직여야 할 사이가 아니던가. 그리고 지금 당장 그와 붙어서 우열을 가리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다. 그러지 않을 것이라면 애써 분열을 자처할 이유가 없으리라.

악재는 대놓고 성질을 드러냈다.

감정의 기복이 춘삼월 방년의 여아보다 잦았다.

“크큭! 그래? 그렇지. 너도 인정하지? 그래도 너 정도라면 언젠가 내 깨달음의 옷깃 정도는 잡을 수 있을 거야. 힘내라. 응원하마.”

이훤은 억지웃음을 지었다.

‘미안하다.’

그리고 응원하지도 마.

옷깃이 아니라 이미 옷을 벗겨서 입어버렸어.

이미 머릿속으로는 온갖 오의(奧義)가 뒤섞이고 있었다.

- 팔황무극존의 천공혈륜겁(天恐血輪劫).

- 망아취자의 만매만전(萬梅萬傳).

- 벽력창 악재의 구궁벽력공(九宮霹靂功)

하나 같이 천하를 뒤흔들 절예였다.

하나 이 또한 신마의 파편에 불과했다.

한데 이 모든 것이 생각지도 못하게 겹쳐졌다.

‘망아취자가 만매만전을 만들기 전 나는 이미 그가 내려놓은 흔적에서 암천군림보를 만들어냈다.’

‘만매만전은 내가 만들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습득이 손쉬웠다. 그 결과 팔 성에 이르지 않았던가.’

‘구궁벽력공 또한 듣는 것만으로도 정립이 된다.’

이훤의 눈동자가 아무도 모르게 번뜩였다.

한 가지는 맞고, 한 가지는 틀린 듯하다.

‘역시 신마의 깨달음을 모두 모으며 무언가 이뤄진다. 이건 확실해!’

‘그렇다면 결국 신마는 각기 다른 깨달음을 전한 게 아니라는 거잖아?’

이훤이 생각했을 때 생존자 중 심리적인 면에서 가장 신마에 근접했던 건 망아취자가 아닐까 싶다. 그는 이미 신마를 만나기 전부터 심신의 중용, 조화, 평정을 이루지 않았던가. 단지 경험이 없고, 강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 그가 만든 게 만매만전이다.

마치 거울처럼 보는 사람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달랐다.

그렇다면 신마는 한 가지를 전했지만, 생존자들의 성향이나 능력에 따라 부분을 전해 받은 게 아닐까 싶다.

한 마디로 아는 만큼 배운 게다.

그리고 이훤은 확신했다.

그들 중 신마에 심리적으로 가장 가까웠던 건 망아취자지만, 경험과 무위가 손꼽히는 건 팔황무극존일 터였다. 그렇기에 그가 가장 많은 내용을 알아듣고, 이해했으며, 받아들였다고 봐도 무방하리라.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천공혈륜겁의 빈 부분을 다른 이들의 것으로 채운다면 대성은 꿈이 아니야!’

“지금 웃고 계실 때가 아니에요.”

한껏 치솟았던 기분이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이훤은 다급한 기색이 역력한 악설을 보며 한 숨을 내쉬었다.

“또 뭔데?”

“황보세가가 지금쯤 정상에서 역으로 우리를 찾기 위해 하산하고 있을 거예요. 또한 악가 주변에는 무림맹과 황보세가가 진을 치고 있다면서요.”

가문의 안위가 위태로우니 다급한 것도 이해는 됐다.

한데 오히려 악재가 시큰둥한 어조로 읊조렸다.

“흥! 그런 놈들에게 당할 리가 있나.”

“자부심이 대단한 걸?”

이훤의 탄성에 악재는 인상을 썼다.

“어차피 무림맹은 지금 당장 나서지 않을 게야. 놈들은 명분과 체면을 따지느라 기회를 놓치기 일쑤지. 게다가 오춘이가 생각이 있다면 후기지수들을 통해 승기를 잡았을 터, 싸움을 악가와 황보가의 영역으로 한정지었을 게야. 무림맹 전체라면 모를까! 황보가 따위는 애초에 상대가 될 수 없어.”

“역시! 늙은 생강.”

돌이켜보면 악재는 어린 시절부터 산동악가를 부흥시키기 위해 강호행을 나섰다고 했다. 그리고 무림맹이나 문파들과 수많은 은원을 맺었을 터였다. 그 와중에 체득한 경험은 어지간한 노고수들보다 훨씬 깊고, 넓으리라.

다만 망아취자나 팔황무극존과 다른 게 있다면 성공에 대한 욕망일 터였다.

“부탁이 있다.”

악재가 산동악가를 지척에 두고 멈춰 섰다.

“뭔데?”

“밖을 잠시 막아다오.”

이훤은 눈을 가늘게 뜨며 반문했다.

“혼자 해결하려고?”

“어찌됐든 본가의 일이다. 내가 만들었으니 내가 부숴야 녀석들도 원망이 덜하겠지.”

“너무 격정적이지 않아? 뿌린 씨앗을 거둔다는 순화된 표현도 있잖아.”

“뭐가 됐든 산동악가의 오늘은 내가 부수겠다.”

어려진 만큼 더욱 뜨거운 눈빛이다.

그리고 조건을 논하기에는 받은 것이 너무 많았다.

이훤은 고개를 끄덕인 후 한 마디를 건넸다.

“악가에서 제일 좋은 술.”

“기꺼이.”

거래가 이뤄졌다.

“나는 먼저 본가로 갈게.”

악재는 악설을 대동한 채 악가 방면으로 사라졌다.

이훤은 자신을 따라오는 탈마를 향해 손짓을 했다.

“너, 일 하나 해야겠다.”

“나는 형님이 그런 말 할 때 제일 좋더라.”

탈마는 이훤의 귀엣말을 들은 후 미소를 지웠다.

“진짜요?”

“그래, 최대한 많이!”

“돈만 있으면 안 될 게 있나요. 아! 전마에게 다 줬지. 돈이 없어요.”

이훤은 그렇게 쉬운 일이 있냐는 듯 말을 건넸다.

“만들어.”

*

황보세가의 가주는 불과 반 시진 사이 이십 년은 늙은 듯했다. 그는 퀭한 눈으로 전방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마지막 남은 수하들마저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웠기 때문이다.

“아.”

그는 가주의 체면도 잊은 채 탄식했다.

내단에서 비밀리에 양성한 흑영대의 마지막 무인이 어린 청년의 창에 찔린 채 허공에 매달렸다.

“악가의 소평이 여기 있다! 황보가의 가주는 언제까지 겁쟁이처럼 숨어있을 셈이더냐?”

스무 살을 갓 넘긴 청년의 외침에 황보세가의 무인들은 고개를 숙이고, 눈을 내리깔았다. 가주가 이끌고 온 무인만 해도 삼백 명이다.

한데 그들이 전멸하면서 만들어낸 성과는 비참했다.

중년인 한 명과 청년 여섯 명.

산동악가의 피해는 서른 명 중 일곱이 전부였다. 결국 황보세가는 삼백 명으로 서른 명을 넘지 못하고 전멸한 셈이다.

‘으으.’

황보태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 복수나 이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곳의 일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황보세가는 멸문이다.

수백 년을 이어온 세가가 하루아침에 강호에서 사라지는 게다. 그는 황급히 주변을 살피며 도와줄 사람을 찾으려 했다. 하나 형제처럼 달라붙어 있던 신공부주는 이미 자취를 감췄고, 무림맹의 수뇌부는 침중한 표정을 지을 뿐 누구 한 명 나서는 이가 없다.

“도, 도군.”

황보태는 결국 무림맹의 대표인 극양도군에게 굴복했다.

“허어! 사정은 딱하지만, 문파끼리의 일에 무작정 끼어드는 것도 문제인지라······.”

“황보세가의 현판만 유지하게 해주시오. 그럼 내 맹에서 해달라는 모든 것을 하리다.”

아직 장자와 외단주를 비롯한 수하들의 행적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니 오늘의 위난만 넘길 수 있다면 황보세가의 명맥을 이어갈 수 있으리라.

하나 극양도군은 안타까운 표정과 달리 엉덩이조차 들썩이지 않았다. 한데 그랬던 그가 갑작스레 미간을 좁히더니 하늘의 계시라도 받은 사람처럼 헛기침을 했다.

“크흠! 크흠! 나와서 보고하여라!”

무림맹 비선각의 복장을 한 무인이 나타나 무릎을 꿇었다.

“산동악가가 사마외도의 무공을 익혔고, 가솔 중에는 이미 광증이 골수에 미쳐서 양민을 학살했다는 증거가 나왔습니다.”

극양도군은 입꼬리를 올렸다.

어차피 미리 입을 맞춰놓고 하는 연극에 불과했다.

증거 또한 악가를 짓밟은 후 대충 짜깁기를 하면 문제될 것이 없을 터였다. 그렇기에 상부의 허가가 떨어진 극양도군은 망설이지 않았다.

“맹에서 산동악가를 무림공적으로 선포했으니! 맹도들은 사마외도를 남김없이 척살하라!”

청성파의 천풍삼군은 마치 극양도군의 입이라도 되는 양 내공을 담아 외쳤다.

“사마외도를 척살하라!”

근 천여 명에 달하는 무인들이 일제히 봉기했다.

산동악가의 입구를 지키던 청년들도 상황이 바뀌었음을 인지하고 내부로 명적을 날렸다. 산동악가에서도 가솔들이 담을 넘어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악가는 조잡한 모략질에 굴복하지 않는다!”

가주의 일갈이 터져 나오는 순간 악가의 기세가 하늘을 찔렀다. 두 무리가 당장이라도 부딪칠 듯한 일촉즉발의 상황이다.

그 때 누군가 숲에서 걸어 나오더니 널찍한 바위에 앉았다. 무림맹과 산동악가는 안중에도 없는 듯 술과 안주를 꺼내 놓고 눈을 끔뻑이는 것이 아닌가.

“이 놈! 어디서 뭐하는 놈이냐?”

극양도군은 천둥벌거숭이처럼 툭 튀어나와 분위기를 깨는 청년에게 외쳤다. 하나 청년은 극양도군의 기세를 가볍게 흘려보냈다. 그리고는 술병을 기울이더니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한 마디를 내뱉었다.

“심판이다.”

< 49, 내 손으로 부수겠다. (3)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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